베끼기의 비극적 도식
기억하는 이가 많지는 않을 것 같다. 1999년, 아크포럼(www.archforum)을 통해 진행되었고 책으로도 출판되었던 온라인 토론 “우리 시대의 조경 속으로”는 ‘말하기’에 익숙하지 않던 조경계에 적지 않은 흥미와 반향을 불러 일으켰었다. 당시 “베끼기의 비극적 도식―우리가 정말 조경했을까”라는 제목으로 올렸던 고백문이 있었음을 간신히 기억해냈다. 삼덕공원 현상설계 당선작(인터조경기술사사무소)이 런던 쥬빌리 가든(Jubilee Gardens) 현상설계 당선작(West8)의 모작이라는 이번 논란을 비평가적 입장보다는 우선 설계자의 시각에서 해석해 보고 싶었기 때문인 것 같다. 일부를 다시 옮긴다.
……우리나라 조경가들과 조경 동네 사람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책은 뭘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가장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책은 이른바 ‘그림책’ 또는 ‘사진책’이 아닐까요? 그(녀)는 문자보다는 이미지가 압도적인 책을 좋아합니다. 왜? 점잖게 말하자면, 명망 있는 작가들의 작품 세계를 비행기 값 안 들이고 간접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죠. 까놓고 말하자면, 베낄만한 작품들을 힘 안 들이고 검색할 수 있기 때문이죠.
정말 최근에 홍수처럼 넘쳐나는 조경가들의 작품집이나 이런저런 작가들의 작품 선집들은 그(녀)에게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가끔 들어가 훔쳐보는 후배들 스튜디오의 한 풍경―침 안 묻히고도 잘 넘어가는 비싼 그림책들을 다리 꼬고 앉아 한 장 두 장 넘깁니다. 그러다 ‘으흠, 이거야’ 싶은 감이 들면 무지개색 포스트잍을 뜯어 척!하고 붙입니다. 포스트잍이 붙은 이미지들을 복습하며 잘 조합해 봅니다. 스스로 굿이라 자부하는 디자인이 나옵니다.
……대학원 첫 학기 때의 경험입니다. 다시 떠올려보니 정말 그 수치감이 생산해 내는 김이 새삼 무럭무럭 솟아나는군요. ○○○, △△△, 그리고 저, 이렇게 셋이서……설계 수업을 들었습니다.……교수님은 일주일에 100장의 스케치를 요구하셨습니다. 그러기를 몇 주일, 우리의 머리는 진공 상태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젠틀하시기로 이름난 교수님은 평소와는 다르게 별별 이유를 다 들어 No를 반복하십니다. ‘긴 하루 지나고 언덕 저편에 빨간 석양이 물들어갈’ 무렵, ‘놀던 아이들이 아무 걱정 없이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갈’ 무렵, 저는 책꽂이에 자랑스럽게 꼽아 놓았던 기 만원 짜리 일본 작품집으로 눈길을 줍니다. 왜 진작 책의 도움을 못 받았던가?
포스트잇이 귀하던 때라 파지를 잘라 끼워가며 책을 넘기다 다시 거꾸로 넘기기를 몇 차례, 최종 결승에서 낙점 받은 한 일본 작품을 제 스케치북에 그대로 옮겨 그립니다. 물론 다음 날의 수업을 무사히 넘기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는 정도의 마음가짐으로…….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던 다음 날 오후, 교수님은 제 스케치북에 드디어 만족하십니다. “진작 이렇게 했어야지……. 그런데 땅과 만나는 부분의 디테일과 물 나오는 관의 사이즈가 좀 어색하지? 다른 작품들 좀 참고해 보자” 하시고는, 그러나, 제가 베꼈던 문제의 그 그림책을 펴드십니다. 등골이 오싹하다는 느낌을 그때 처음 경험합니다.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하나님을 간절히 찾습니다. 그러나 교수님의 눈과 손은 문제의 그 쪽에 고정되고 맙니다. 오, 마이 갓! 젠틀하고 노블하신 교수님은 한 3분간 말을 잇지 않으시더니 “어, 이 친구 좀 보게”라는 말을 남기고 나가십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전 학교를 갈 수 없었습니다.……
베끼기의 조건과 토양은 진화를 거듭했다. 감당하기 힘들 만큼의 정보가 넘쳐나는 인터넷의 바다에서, 봇물을 이룬 상업적 ‘그림책’들의 향기 속에서, 어둠을 뚫고 프로젝트되는 교실의 파워포인트에서 우리는 베끼기의 유혹에 굴복하고 있다. 학교 스튜디오도, 설계사무소도, ‘갑’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일본 정원 흉내 내기를 겨우 극복하고 영국 풍경화식 정원과 옴스테디안 스타일을 추종하며 모사하던 한국 조경이 이제는 미국과 프랑스식 디자인을 넘어서 네덜란드의 스타 조경가와 스페인의 과격한 디자인까지도 기웃거린다. 벤치마킹!
모방@조경, 그 다양한 층과 결
‘베끼기’라는 단어가 다소 적대적으로, 공격적으로, 패배주의적으로 들릴 지도 모르겠다. 고상한 단어 ‘모방(imitation)’으로 바꿔보자. 모방도 물론 부정적인 뉘앙스를 강하게 지니고 있지만, 한 인간의 성장도 모방의 과정이며 특히 학습과 교육은 모방의 대표적 형태라는 차원에서 보자면 꼭 거부감을 가져야 할 개념은 아니다. 예술론(theory of art)의 양대 산맥 중 하나가 예술모방론(imitation theory of art)이라는 점은 미학의 기초 교과서만 들춰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오늘날의 재현(representation) 개념으로 이어진 미메시스(Mimesis)에 뿌리를 둔 예술모방론은 예술은 세계의, 객체의, 대상의 모방이라는 주장이라고 요약될 수 있다. 고전주의 미술이 종교적 이념이나 신화를 모방하고 재현한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먼저 ‘자연’의 모방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조경이 영원히 기댈 곳 자연―조경은 결국 자연의 모방이고 재현이라는 주장은 전문가와 일반인 모두의 지지를 쉽게 얻는다. 최근 유행하는 ‘자연형 하천’은 조경과 자연 사이의 모방 관계를 더욱 강조한 것에 다름 아니다.
다음 차례는 ‘역사’의 모방이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많은 조경 작품들은 역사로부터 모티브를 취하고 때로는 역사를―더 정확히 말하면 과거의 특정 작품의 형식이나 내용을― 직설적으로 옮겨오기도 한다. 외국에 조성된 한국 정원들의 대표 장면은 방지에 놓인 중도와 그 방지에 발을 담근 정자이다. 해외 일본 정원들 역시 료안지와 같은 모델 작품의 복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역사의 인용을 큰 강령으로 삼기도 했다. 그러나 대체로 우리는 이러한 역사의 모방에 대해서 후한 편이다. 전통의 계승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양식style’의 모방은 조경사의 큰 줄거리이다. 과거와 현재를 막론하고 서양 조경의 대부분은 이슬람 양식, 프랑스 정형식 양식, 영국 풍경화식 양식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말해도 지나친 과장은 아니다. 특히 영국 풍경화식 정원은 옴스테드에 의해 센트럴파크에 모방되면서 현대 공원의 대표적인 유니폼으로 무한 복제되어 왔다. 이러한 모방 양상은 흔히 영향-수용이라는 양상으로 역사에 기록되곤 한다.
‘타 예술’의 모방 또한 빼놓을 수 없다. 18세기 영국 풍경화식 정원이 17세기 이태리 이상주의 풍경화의 모방이라는 점은 그 영향과 파장 면에서 조경사의 하이라이트로 평가되고 있다. 스투어헤드 정원과 끌로드 로랭의 풍경화 사이의 관계를 다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특정한 문학 작품이나 회화를 모방한 조경 작품의 예를 일일이 확인하기 위해서는 두꺼운 조경사 책의 곳곳을 펼쳐야 한다.
반드시 환영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이런 네 가지 양상의 모방 유형이 논란과 시비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조경설계에서 전개되어 온 또 다른 모방, 즉 특정한 ‘다른 조경 작품’의 모방에 대해서까지 관대한 태도를 보이기 위해서는 인내력이나 자비심이 필요하다. 이 때의 모방은 표절(plagiarism)과 교집합을 갖는 경우도 적지 않다. 다른 작품을 모방하는 양상은 다시 다양한 갈래로 구분되는데, 우선 ‘아이디어나 개념’을 모방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최근 조경설계의 주요 경향인 과정(process), 흐름(flow), 비움(void), 진화(evolution) 등과 같은 개념이 원작의 맥락이나 이념과 무관하게 이식되거나 매우 추상적인 구호의 차원에서 모방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여러 학생 공모전은 물론이고 서울시청 앞 광장이나 서울숲 현상설계와 같은 전문적인 설계안에서도 이러한 예를 다수 발견할 수 있다.
‘설계 방법 또는 접근 방식’을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모방도 비평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라빌레뜨공원 설계에서 베르나르 츄미가 구사했던 점/선/면의 레이어 병치(layering juxtaposition), 렘 콜하스나 벤 반 베르켈 풍의 다이어그램 접근, 제임스 코너의 맵핑(mapping), 다운스뷰파크나 프레쉬킬스를 통해 유행된 단계별(phasing) 설계와 전략적(strategic) 다이어그램들은 이제 거의 모든 현상설계나 학생 공모전 패널에서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가 되었다. ‘표현/재현의 기법이나 매체’를 모방하는 양상―이 경우는 ‘설계 방법 또는 접근 방식’의 모방과 구별되기 힘든 경우도 있다―은 보다 직접적인 차원의 차용이나 도용인 때가 허다하다. 다운스뷰파크 당선작인 트리씨티의 원형 다이어그램은 원작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말 그대로 동시대 조경의 아이콘처럼 전 세계로 유통되고 있다. 문자 텍스트의 색과 크기를 달리하고 병치하여 설계 프로그램을 전달하는 표현 기법이나 단면도와 평면도를 다시점으로 결합시키는 재현 기법 또한 유행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 포토몽타주 역시 이 매체의 본래 개념과는 무관하게 하나의 패션 아이콘으로 전파되고 있으며, 특정 작품의 포토몽타주가 다른 작품 내에 그대로 복제되는 심각한 상황도 드물 지 않다. 마지막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형태의 장식적/단편적 모방’이다.
라빌레뜨공원의 붉은색 폴리는 원래의 취지나 의도와는 무관한 피상적 모방과 단편적 복사를 통해 1990년대 한국 조경설계를 풍미했다. 예컨대 여의도광장 현상설계의 출품작 다수는 라빌레뜨공원과 시트로엥공원의 꼴라주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조지 하그리브스의 대지 조형과 지형 조작도 형태적 모방의 대상으로 한국 조경설계에 그 흔적을 깊게 남겼다.
배정한
조경비평가, 단국대학교 환경조경학과 교수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