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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과 이정표 및 가로수에 대한 고찰
  • 환경과조경 2002년 2월
장승과 가로수 도로에 거리 표시로 처음에는 흙이나 돌을 무더기로 쌓아서 일정한 거리마다 설치 하다가 점차 시대의 필요성에 따라 그 돈대( )위에 나무를 깎아세워 안내기록을 새겨넣는 표목(標木)이 세워 지다가 장승과 함께 병행하는 변화과정을 거치면서 수목을 심어서 거리의 위치표시로 삼다보니, 마침내는 그 이용효과는 거리표시는 물론 행인들의 쉬어가는 그늘로하여 쉼터로서의 다목적 효과를 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언제부터 로변의 장승이 가로수로 변하게 되었는지 그 시대적 과정을 보면, 도로변에 후( )라는 명칭으로 장승을 세우면서부터 나무를 심게 되었던 최초는 앞서 언급된 바 있는 고대 중국의 남북조 시대 위효관 이라는 지방 수령이 도로변에 거리 표시로 흙장승( )을 설치했던 것을 없애버리고 그 자리에 나무를 심어 그 돈대( )를 대신케하니 길가는 나그네들로 하여금 서늘한 그늘을 주는 덕을 베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본 임금(周文帝) 은 전국 각 주(州)에 명하여 이와같이 후( :장승)를 없애고 대신 나무를 심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때 심은 나무의 수종은 어떤 나무를 심었던가 하니, 북사(北史) 위효관전(韋孝寬傳)에 있기를 후( )대신 홰(槐)나무를 심었다.(當里處植槐以代理 也) 하였으니, 이 나무는 일명 회화나무로서 중국이 원산인 활엽교목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회화나무는 예부터 삼공지괴(三公之塊)라 하여, 공명심록(空名臣錄)에 자손이 삼공(三公)에 오르면 뜰 안에 이 나무를 심었다는 상서로운 나무로 귀애함을 받았던 나무였다. 그래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옛 한양의 도성 궁궐내 요소마다 홰나무가 지금도 거목으로 서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와 관련한 연유가 있었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조선 초기에 와서의 실상을 보면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나서는 건설사업에 주력하는 바 도성 및 한성부의 행정구역을 동서남북 중앙의 5부로 나누어 도로건설을 시행하였는데, 도성내의 도로망은 물론 전국의 역원(驛院)제와 봉수제를 한성부 중심으로 개편하므로 하여 이 사업은 태종, 세종, 세조, 성종조를 거쳐 경국대전의 완성으로 전국적인 도로망의 정비를 보게되었다. 이 기간동안에 도로변에 심은 나무의 기록이 있는바 「도로변에 거주하는 자는 전부 도로변에 나무를 심고 하천변에 거주하는 자는 축방 양측 제방에 나무를 심어야 한다.」(路傍各戶皆命栽植川邊各戶各於兩岸築坊栽木)하였는데 이는 중국의 남북조시대 위효관이 시행한 길가에 나무를 심어 행인들에게 덕한 길가에 나무를 심어 행인들에게 덕을 베풀었다는 것과 무관치 않은 일이며, 우리나라 가로수 역사의 효시가 아닌가 싶다. 또한 조선왕조의 통치 법전인 경국대전에 장승에는 리(里)수와 지명을 새긴다라는 규정이 있지만 후대로 내려오면서 새로운 제도의 창립시행도 있고, 시류에 따른 변화도 있어서인지 거리표시 방법도 기존 장승에만 의존하지 않고 융퉁성 있게 시행하였던 것 같다. 그러니까 태종때 까지는 후( )라 하여 토석의 단위에 거리표시를 해오다가 세종 20년(1438)때 와서는 장승의 위치에 이정표로 표목(標木)을 세우고는 나무를 심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세종 23년(1441) 8월에는 중국 사신이 들어오는 평안도 대로변에는 30리마다 로표(路標)를 하나씩 세우되 구간 내에는 단을 쌓아서 거리 표시를 하기도 하였다. 또 단종때에 와서는 본격적으로 나무만 심게 하였으니, 단종원년(1452) 5월에 는 한성과 지방의 대로변 좌우에 나무를 심도록 하고 철저히 관리하게 하는 반면 그 심는 수종은 각 지방에 알맞은 나무로 하되 소나무, 잦나무, 밤나무, 홰나무, 버드나무 등을 심고 가꾸게 하였는데, 이는 앞서의 나무로 거리표시를 하던 방법과는 크게 변화된 시행이며, 특히 도로변 좌우에 심으라는 것으로 보아 가로수 개념에 가까운 시행이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와같은 일이 단종 이후로는 기록에 보이지 않다가 현종때에 와서의 일로 반계수록에 보이는데. 「회화나무, 은행나무, 소나무, 잦나무, 버드나무는 성(城) 내·외에서 관도의 양쪽에 느려심고 근처에 사는 사람에게 관리하도록 했다.(槐木, 銀杏, 松柏, 楊柳則又於城內外官道兩傍列植分付傍道居人看手如有伐者治罪郞令準植)」 는 기록이 있다. 이는 그동안 장승과 함께 구간마다 나무를 심어본 대체 효과가 아예 나무를 많이 심어 얻는 다목적 효과를 가져온 결과의 시도가 아니었나도 생각된다. 장승의 처음은 거리표시로 장승만이 주체이던 것이 나무를 시어 대치되기에 이르렀는데, 이때의 처음 시작은 세종때부터 변화기라 하겠지만 후애로 오면서 일관성 있게 통일된 시행이 아니라 장승과 함께 나무를 식재로 병행설치 방법으로 후기에까지 이어온 것 같다. 정약용 선생도 이정표를 세우되 쉬어 갈 수 있는 나무를 심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그이 목민심서(1801∼1818)에, 나루터에 배 없는 일이 없드시 역정(驛)에 장승 없는 곳이 없음은 행인과 나그네들의 즐거워 하는 바 라고 하면서, 5리가서 표목 하나 세우고, 10리에 가서 장승을 세우되 거기에 중국의 위효관의 예를 들면서, 우리도 흙돈대를 없애고 홰나무(槐)를 심게하면 길가는 나그네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주어 덕을 베풀는 일이라 하고, 또 10리마다 작은 장승(小 )을 세우고, 30리마다 큰장승(大 )을 세운다면 거기에는 느릅나무(楡)와 버드나무를 심어야 한다.(--每十里立小 三十里立大 樹之以楡柳) 고 하였다. 이는 관의 지침이나 직접적인 지시가 아닌 선비가 관을 향한 학자적인 설문이므로 그대로의 시행 여부는 알 수 없으나 그러나 앞의 왕조간의 시행사례 몇 가지의 예로보아 도로변에 이정표로 장승을 세우기도 하고, 거기에 나무만 심어 장승을 대신 하기도 하고 장승과 함께 나무를 심어 길가는 행인들에게 그늘을 주고 신선함을 제공하게 되었던 것은 우리나라 도로 문화에 변화의 과정이었으며, 이는 외부의 견문이 없이도, 우리만의 사고에 의해서 발전하는 고유의 우리모습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다. 이와 관련하여 정조의 재위기간(1776∼1800) 동안에 도로변에 심은 노송의 숲이 있으니, 수원시 북부 옛 지지대 고개 소나무 숲이 그것이다. 이는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시호를 장헌세자로 추존하고 능(陵)을 수원으로 천봉하면서 이 능을 지키는 용주사를 짓고는 부모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부모은중경을 새겨 기복케 하는 지극한 효심으로, 한달이 멀다하고 능을 찾아 행차 하셨다 하는데, 지지대 고개는 국도의 대로이며 정조가 현륭원을 봉행할 때마다 지나는 능행어로(陵行御路)이기 때문에 장승도 격이 있는 큰 장승(大 )을 세웠던 위치일 뿐만 아니라 거기에 나무를 심은 것은 이미 세종때부터 큰 장승 주위에 나무를 심었던 것이 관행이 아니었나 함이며, 궂이 소나무를 심었던 것은, 단종때도 그 지방에 알맞은 수종을 심도록 했던 선례도 있을 뿐만 아니라, 소나무는 옛부터 충절을 기리는 의미도 있었거니와 수장지목(樹長之木)이라 하여 나무중에 으뜸이요 조한 묘역이나 관문 입구에 심는다는(以松樹考門) 뜻을 높이 감안하였던 것이 아닌가 하다. 그러면 능원으로 가는 입구의 대로에는 장승이 어떻게 세워 있었는지 기록의 한 예를보면, 영조 46년(1770)에 관련한 도로고(道路考)의 능원묘어로 조(陵園墓御路條)에, 「厚陵在豊德長 隅自薺陵五里豊德府十里陵下五十里共二百二十里」라고 표기된 장승의 이정표다. 여기서 후능이란 정종의 능을 말함인데, 이 릉은 개성의 풍덕에 있는 능이다. 장승이 서있는데서 거리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왕능 앞을 지나는 도로에는, 장승도 이정표도 격이 있고 품위가 있게 했으리라 여겨진다. 또 하나 임금이 다니는 온천길의 장승에는 어떤지 예를 보면, 같은 도로고(道路考)의 온천행궁로 조(溫泉行宮路條)에, 「---鳥山大川菁好驛前竝長 山見十里」 여기에서 보면 임금이 통행하는 어로나 관 대로에는 장승도 쌍장승으로 규모있게 세웠던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앞에서 보듯이 지지대 고개 또한 왕능이 있는 관대로 이므로 큰 장승이 품위있게 세워져 조선 말기까지 있었던가, 신채효 선생의 판소리중 변강쇠가의 가사 내용에도 지지대 유사님(有司) 지지대 공원(公員) 운운하는 대목이 있다. 장승을 가리켜 유사님 공원임 하는 말은 보부상의 직책으로 장승의 기능도 이에 유사함을 빗대어 음풍한 것일 것이다. 이렇듯 큰 장승이 서있는 지지대 고개에 소나무를 심어서, 관의 임무를 수행하는 관원은 물론 일반 행인들까지 쉬어가는 곳이었을 것이니 생각해 보면 그늘이 있고 쉬어가는 곳이라면, 우마차와 행인들의 봇짊등을 길가에 길게 늘받쳐 놓고 쉬게 되었을 것으로 짐작이 되는데, 그러자면 나무도 길을 따라 가로수 열식으로 길게 심게 되었을 것으로 상상이 되는바, 초기에는 장승주위에 어찌 심었던지 간에, 정조임금의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질서있게 가로수처럼 길게 열식하여 심게된 것이 아닌가는 알 수 없으나, 오늘날까지 지지대 고개 노변을 울창하게 지켜 서있는 소나무 길은 사실이 아닌가. 우리나라에 가로수가 의도적으로 심어지기는 개항기 이후인 고종 32년(1895) 3월 10일 내무아문(內務衙門)에서 각도와 각 읍에 시달하되, 「道路 左右에 樹木을 植養함을 勸하고 栽植할 事」하고, 가로수를 심도록 지시하므로 하여, 이로부터 전국에 설치되어 있는 역(驛)과 발참을 폐지하고 우체사를 신설하고 현대식 교통통신의 도입으로 하여 장승의 이정표 제도는 사라지게 되었고 관 주도로 획일적인 가로수를 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국가시책의 지침으로서 그 첫 시행의 시기와 장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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