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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성국(海東盛國)을 다녀와서(4)
  • 환경과조경 2001년 7월
해동성국(海東盛國)을 다녀와서(4) - 발해여 다시 한번 - 연변(延邊)지역의 발해 유적들 현재의 연변지역은 발해국(渤海國)이 건립되기 이전에는 고구려에 부속된 백산 말갈인(白山 靺鞨人)이 살던 곳으로 발해(渤海)초 한족(漢族)에 대항하기 위한 후방기지로서의 역할이 컸던 곳이다. 이 지역을 중심으로 국토를 확장하였으며 외국과 교류의 시발점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즉 구국이나 상경성(上京城) 또는 동경성(東京城)에서 외국으로 출입할 때에는 거란로(契丹道)만 제외하고는 모두 연변지방을 거쳐야 하는 중심적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특히 광대한 지역을 통치하기 위하여 5경(京), 15부(府), 62주(州), 100여 개의 현(縣)을 설치하였던 바, 그중 벼의 생산으로 유명한 로주(盧州)는 중경 현덕부(中京 顯德府) 즉, 화룡현 서고성(西古城) 동북방향 100여리 되는 곳이라 하였으니 현재 연길시 흥안향 북대고성(北大古城)으로 인정하고 있다. 연길시를 남북으로 흐르는 부르하통하에서 구도심을 동서로 나누고 있는 연집하(烟集河) 동안(東岸)의 강골평야에 자리잡고 있는데 유약기와의 출토로 보아 건축물이 많았음을 증명하고 있다. 모아산 봉화대와 같은 당시의 군사연락체계를 이루고 있었으며 하천변의 대지에서는 지금도 질 좋은 쌀이 생산되고 있다. 로주의 속현에는 백암(白岩)현이 있었던 바 현재 연집하 경내에 있는 대암고성(大岩古城)이 로주 백암현의 현 소재지일 것이라는 근거로 북대고성을 당시의 주일급이었던 로주로 추정하고 있는 것이다. 발해의 불교 역시 관할지역내에 많이 집중되어 있는데 정치, 경제, 문화와 함께 불교활동이 매우 성행하였음을 설명하고 북부지역에서는 그러하지 못하였음을 증명한다. 불탑도 적지 않았는데 소개하였던 정효공주묘탑, 마적달 무덤탑, 그리고 지금의 길림성 장백현(長白縣, 백두산 서쪽 밑 압록강 상류)에 있는 영광탑이다. 지금까지 원형이 남아 있는 것은 영광탑인데 아직 근처에 있을 사찰터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사원내에 세워진 탑, 탑터로 인정되는 곳은 훈춘시 팔련성 동남탑터 등 8곳이 있다. 발해 멸망후 재웅(栽雄)이란 스님을 필두로 60여명이 집단으로 고려에 귀화하였다는 사실로 보아 승려 역시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통치계급의 중요한 계층이 되었을 뿐아니라 외국사절단의 일원으로 정치에도 참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특히 발해 왕실귀족들은 명산(名山)의 에 무덤을 선택하였고 주로 탑을 중심으로 한 재래의 의 불교건축 규제에서 벗어남을 볼 수 있게된다. 이상과 같이 오늘의 연변지역은 발해당시의 도읍지를 중심으로 정치, 경제, 교통, 종교 등 모든 국가문화의 보고였음을 파악할 수 있었고 지난 영화(榮華)의 중심지였음을 재삼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발해는 없어졌다. 역사란 언제나 승자의 것이기에 패자에게는 역사마저 없다. 그러나 놀랍게도 천여 년이 지난 그 자리에 당시의 그 민족이 다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과연 이것이 우연이라 할 수 있을까‥‥‥. 조선족의 몸부림과 오늘의 고민 현재의 한반도로 우리민족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중국의 동북지역에 고조선, 고구려, 발해 등 고대국가를 세웠거나, 중원지방의 동쪽인 연해지방에도 신라방과 발해관이 세워졌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수많은 역사문헌 중에도 료(遼), 금(金), 명(明), 원(元) 등 어느 시기에나 적지 않은 우리민족은 지금의 동북삼성에 살고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명나라 때 요동지구에는 그곳 전체인구의 3/10까지 차지하였다 하는데 서(徐), 문(文), 박(朴), 백(白), 김(金), 최(崔)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한다. 그러나 오늘의 중국조선족들은 그들의 후손들이 아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기원4세기 평양으로 수도를 옮길 때 대부분이 남으로 이동했으며 발해 유민들도 세자(世子)이하 10여만 명이 투항하여 왔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요동으로 강제 이주 후 현지인 에 동화되어버렸다. 오늘날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된 가장 큰 이유는, 역사적 환경으로 자기의 언어와 문자를 후세들에게 물려주지 못한데 있었다. 중국의 55개 소수민족중 장족(藏族), 몽골족, 위글족(維吾爾族), 카자흐족(哈薩剋族)의 언어 문자와 함께 우리 한글은 5대관용 소수민족 문자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청나라의 근본을 이루었던 만주족은 한족에게 주도권을 넘긴지 100년이 못되었으나 말과 글을 잊고 한족으로 동화되어 가는 것만 보아도 민족의 정체성으로 말과 글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게된다. 물론 중국의 민족정책에는 고유의 민족성을 보존할 기회가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다하더라도 일정한 면적의 집중된 집거구와 스스로의 자발적 민족교육의 유지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민족과 생활하는 환경여건에서 민족교육을 견지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특히 시장경제가 발전하고 산아제한 정책이 강조되면서 일부 농촌지역에서는 조선족 부락이 없어지고 학생수가 급격히 감소되면서 부득이 민족학교들은 폐교되거나 합병되어야만 했다. 당연히 국가나 사회단체의 후원 없이는 학교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고 교재 역시 부족하여 학생들의 과외 독서범위가 좁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한족 학교에 다니는 학생보다 1000여 시간 중국어 학습의 부담을 안고 있는 이러한 현상은 대학교육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민족대학이라 자부하던 연변대학의 경우도 중국어로 강의를 하여야만 하고 총장 역시 대외 공식언어를 중국어로 하는 모습을 볼 때 과연 우리 민족의 미래가 어떻게 되어갈 지에 염려를 금할 수 없게 된다. 이처럼 민족어사용을 포기해 버린 학생의 비율은 동북삼성 대도시의 청소년 총수의 60%를 초과하고 있다는 통계를 보게된다. 다만 최근에 대학입학과 직책승급시험에 소수민족어로 응시할 수 있게 하였고, 특히 한국과의 경제, 문화교류가 빈번해지면서 한글의 사용범위가 넓어지고는 있다. 그리고 우리말 신문, 잡지, 방송국 등에서 , 같은 장려활동이 잦아지면서 다시금 민족기상이 나타나고 있음은 매우 다행스러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그들에게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또 다른 고통이 있다면 한반도에서의 정치적 상황들이다. 그들은 어찌되었건 중국의 소수민족이며 중국을 구성하고 있는 국민들이다. 그러나 한반도의 역사적, 혈연적 관계들로 영향을 받고 있으며 남·북한 못지 않게 고통과 슬픔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다. 오랜 냉전기간동안 그들은 한국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고 태극기가 한국의 국기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정치적 제한을 받고 살아왔다. 그래나 선조의 뼈가 묻힌 곳은 고국이고 고향이기에 부득이 북한과 한국의 눈치도 보아야 하고 중국의 눈치 역시 살펴야 하는 그런 난감한 처지의 입장일 때를 종종 보게 된다. 그래서 그들대로의 한반도 통일문제에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간섭하거나 참여하려 하지 않으려는 신중함을 보이고 있을 뿐이다. 다만 남북 모두와 접촉할 수 있는 조건을 이용하여 될수록 민족의 화해와 상호신임을 촉진하는데 관심을 갖고 있으나 그 역시 쉽지만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여건에서의 우리들은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무리한 기대는 가급적 피하는 것이 그들을 돕는 일이고 우리의 정력과 시간의 낭비를 막는 일이 될 것이다. 다만 그들이 중국의 조선족으로 남아 민족의 정체성만이 아니라 차지하고 있는 터전만이라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한반도의 통일뿐만 아니라 미래의 우리 문화 영역확대에 밑거름이 될 수 있음에 기대하여야 할 것이다.(최종회)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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