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서원
Sosu Seowon which is located in 158, Naejuk-ri, Sunheung-myeon, Yeongju-city, Gyeonsangbuk-do is 7,504㎡area. After constructing in order to enshrine An-Hyang, it was given the name “aekwoondong Sosu Seowon”in the 5th year of King Myeongjong’ reign(1550). It is the first Seowon in Korea, and An-Chuk and Ju-SeBung is enshrined. The aesthetics of adaption is connected spatially, topographically, and functionally with Myeongryundang, Ilsinjae, Jikbangjae, Yeongjunggak, Jirakjae, and Hakgujae. It was appointed as national historical relics no.55 in 21th of January, 1963.
소수서원은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158에 위치하며, 면적은 7,504㎡으로 중종 38년(1543) 회헌晦軒안향(安珦, 243~1306)을 배향하기 위해 서원을 완성한 후, 조선 명종 5년(1550)“백운동 소수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사액되었다. 이후, 안축安軸, 주세붕周世鵬등을 배향하고 있는 국내 최초의 서원으로, 명륜당, 일신재, 직방재, 영정각, 지락재, 학구재 등이 자연과 인공이 화합하는 순응의 미학을 공간적, 지형적으로 연계시키고 있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55호로 지정되었다.
造營_조선조 중종 36년(1541)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이 이 곳 출신 학자인 안향1을 배향하기 위해 사묘를 설립하였다가, 중종 38년(1543)에 유생교육을 겸비한 서원2을 설립한 것이 서원의 시초이다. 이후 중종 39년(1544)에 안축, 안보 형제를 추가 배향하였으며, 명종 1년(1546)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안향의 후손 안현安玹(1501~1560)의 노력으로 서원의 경제적 기반이 확충되고 운영방책이 보완되어 확고한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그후 명종 3년(1548) 군수로 부임한 이황이 서원을 공인화하기 위해 1549년 1월 경상도 관찰사 심통원沈通源(1499~?)에게 백운동서원에 조정의 사액을 바라는 글을 올리고 국가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명종은 대제학 신광한申光漢(1484~1555)에게 서원의 이름을 짓게 하여“이미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旣廢之學紹而修之”는 뜻을 담은 소수紹修로 결정하고“백운동소수서원”이라고 명명했다. 즉‘소수’는 순흥에서 폐지된 학교를 다시 세워 단절된 도학을 잇게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는 세조 2년(1456) 순흥으로 유배된 세종의 다섯째 아들 금성대군과 순흥 부사 이보흠의 단종복위 밀모사건으로 인해, 순흥부가 풍기군의한 면面으로 편입, 강등되고 순흥향교가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명종 5년(1550) 2월 21일“소수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아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이는 왕명에 의해 성리학의 정통성을 서원도 인정받게 된 것이다. 이후 인조 11년(1633)에 주세붕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서원의 남설濫設과 부패로 고종 5년(1868)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현재 서원 내에는 숙수사지 당간지주(보물 제59호), 회헌영정(국보 제111호),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보물 제485호), 주세붕 영정(보물 제717호) 등의 중요한 문화재가 소장되어 있으며, 경내 건물로는 문성공묘, 명륜당, 일신재, 직방재, 영정각, 전사청, 지락재, 학구재, 서장각, 경렴정 등이 있다.
立地_소수서원은 풍기 순흥면 동북쪽 영구봉靈龜峰아래 부석사로 가는 국도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 동, 남, 북쪽으로는 죽계수3가 위요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송림이 위치하고 있다. 서원건립 전에는 숙수사라는 절터로서 지금도 목탑지와 당간지주(보물 제59호)4, 석등 등이 남아있다. 주변 환경으로는 부석사, 병산서원, 화천서원, 하회마을 등이 있다.
1. 안향은 백이정(白正, 247~1323)과 함께 원나라에서 성리학을 받아들이고, 이를 표방하면서 고려문화를 혁신하고자 한 첫 세대이다. 그는 고려 충렬왕 때인 1249년 11월 원나라에서 주자서(朱子書)를 손수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그려 가지고 왔으며, 주자를 흠모하여 주자의 호인 회암(晦庵)을 모방하여 자신의 호를 회헌으로 하였다. 1297년 12월 후원에 정사를 짓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모셨으며, 1303년에는 김문정(金文鼎)을 중국 강남 지방에 보내어 공자와 칠십 제자의 화상,그리고 문묘에 사용할 제기, 악기 등을 구해오게 하였다. 1304년 국학의 대성전이 완성되자, 공자를 비롯한 선성(先聖)들의 화상을 모시고 문묘의 제도를 갖추게 하였다. 1304년 그는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해 적극적으로 주자학을 수용하고, 국내 보급을 위해 노력한 성리학자이다. 충숙왕 6년(1319)에는 고려의 수도인 개경의 문묘 동무(東) 종사(從祀)되었다.
2. 백운동서원은 중국의 주희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차용한 것으로, 주세붕은 그가 편찬한“죽계지(竹溪志)”서문에 사묘와 서원을 세우게 된 동기에 대하여, 교화는 시급한 것이고, 이는 존현(尊賢)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므로 안향을 모시는 사묘를 세웠고, 겸하여 유생들의 장수를 위하여 서원을 세웠다고 적고 있다.
3. 주세붕은“회헌선생실기(晦軒先生實記)”에서“왼쪽으로는 죽계수가 휘감아 흐르고 오른쪽에는 소백산이 높이 솟아 구름과 산과 언덕과 물줄기가 실로 여산(廬山)에 못지않다”, 구름이며, 산이며, 언덕이며, 강물 그리고 하얀 구름이 항상 골짜기에 가득하므로 이곳을‘백운동’이라 하였고, 감회에 젖어 배회하다가 사당건립의 뜻을 갖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4.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세워두는 것으로, 절에 행사가 있을 때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 두는데 이 깃발을 걸어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이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당간은 마주보는 면의 바깥면 중앙에 세로띠를 새기고, 꼭대기에서 1.17m 밑에서 부터 2.34m 까지 사이가 면이 쑥 들어가 있어서 마치 넓은 홈을 마련한 것처럼 보인다. 네모난 기둥 끝으로 올라가면 약간 가늘어지고, 맨 끝은 둥글게 경사지도록 하였다. 꼭대기 끝 안쪽 면에는 홈을 파서 당간을 고정시키도록 하였다. 현재는 지주 양쪽으로 길고 큰 돌 1장씩이 놓여있으며, 전체적으로 소박하며 돌을 다듬은 솜씨가 세련되어 보인다. 현 소수서원입구 소나무 숲에 위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