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 관우 장비가 도원결의를 맺은 탁주
탁현 누상촌에 사는 유비는 한실종친이지만 집이 가난하여 짚신을 팔고 돗자리를 짜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다. 유비가 홍건적을 토벌하는 의병을 모집하는 방문을 보고 세상 돌아가는 꼴에 저도 모르게 길게 한숨을 쉬는데 뒤에서 장비가 버럭 같이 소리를 질러 꾸짖는다. 통성명을 한 후 장비는 재산을 내어 대사를 도모하자고 제안을 한다. 조상 대대로 탁현에서 장원과 토지를 가지고 살면서 술을 팔고 도야지를 잡아 지내오던 터였다. 이 두 젊은이가 근처 주막을 찾아들어 술을 들 때 관우가 또한 의병지원하기 전 술 한잔 하려고 들어와 통성명하게 된다. 하동 해량이 고향인데 토호 한 놈이 권세를 믿고 하도 사람을 업신여겨 때려죽이고 5, 6년 동안 강호로 피해 다니는 중이었다.
세 사람은 장비의 장원으로 가서 한참 꽃이 만발한 복숭아동산에서 의형제를 맺기로 한다. 이튿날 도원에서 검정소와 흰 말 한 마리에 갖은 제물을 차려 놓고, ‘우리가 동년 동월 동일에 태어나지는 못했으나 동년 동월 동일에 함께 죽자’고 맹세하고 의를 맺어 형제가 된다.
- 황석영『삼국지』1권에서 요약
유적은 1800여 년 전의 사건과 관련되어 진본은 거의 없고 사실보다는 소설에 근거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허구와 실재가 혼재되어 있다. 유비를 옹호하고 조조에는 반대한다는(擁劉反曺) 후세의 춘추사관이 반영되어 촉한정통론이 우세했고, 중화주의를 내세우는 한족 중심주의가 나타난다. 일반 문화유적과 차이점은 유적의 대부분이 진짜가 아니라 소설로서의 삼국지와 신화, 전설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라는 점이다. 허풍과 과장 끼가 있는 중국인들은 후세의 평가와 가치관에 따라 유적을 끊임없이 재해석하고 확대재생산해 왔으며, 이런 경향은 현재에도 이어져 1990년대 이후에 만들어진 것도 많다. 유적이건 소설이건 삼국지의 저변에는 숙명적 결정론이라고 볼 수 있는 천명사상이 깔려 있다. 연재는 매회 한 장소씩, 사진과 함께 소개하며, 소설 내용의 일부분을 발췌하고 그와 관련된 유적과 경관을 소개한 다음 필자 나름의 해석을 포함시키고자 한다.
여기서 말하는 탁현은 현재 하북성 탁주琢州시로서 북경 서남쪽 64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소도시이다. 북경에서 두 시간 정도 달려 도착한 이곳에는 과연 도원결의의 현장답게 장비의 본거지에 관한 유적, 도원결의 현장, 그리고 유비의 고향 등 몇 군데로 나뉘어서 유적들이 분산되어 있었다. 먼저 찾은 곳은 장비의 거점이라고 꿈에 나타났다는 장소로서 장비의 사당인 충의점이 조성되어 있다(사진1). 그리고 조금 떨어져 장비가 고기를 매달아 냉장시켰던 우물을 중심으로 장비점이 있다. 우물은 꽤 오래 된 것으로(사진2) 우물 가장자리에 밧줄로 고기를 매달아 오르내렸던 패어진 자국까지 있으니(사진3) 거의 진짜처럼 보인다. 장비점 충의점 유적은 우물만 진짜이고 문화혁명 때 모두 파괴된 것을 1990년대에 새로 공원으로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장비점을 중심으로 한 일종의 역사주제공원에는 중심에 커다란 복숭아조각을 세웠고(사진4) 그 옆에 유비 관우 장비 세 젊은이가 결의형제를 맺어 술잔을 들고 있는 조소상을 좀 우스꽝스럽게 만들어 놓았다(사진5). 삼국지에 유비는 ‘두 귀가 어깨까지 늘어져 눈으로 자기 귀를 볼 수 있고, 팔이 남달리 길어서 두 손이 무릎을 지난다’고 했으니 중앙의 인물일 듯하고, 관우는 ‘수염의 길이는 두어 자는 되어 보이고 얼굴은 무르익은 대추 빛이라’ 했으니 우측에 있는 사람이고, 장비는 ‘두 눈은 부리부리한 고리눈, 제비턱에 범의 수염이 있다’고 했으니 좌측의 인물일 것이다. 조금 남쪽으로 삼의궁이라는 공원이 또 있는데 이곳이 옛날부터 진짜 도원결의 장소라고 알려져 있다. 삼의궁은 당나라 때 조성했는데 이미 그때 규모가 1만 제곱미터나 되었다고 한다. 여러 기념사당이 있고 그 모퉁이에 도원결의 장소를 나타내는 비석이 서 있어 모두들 이곳에서 기념 촬영을 한다(사진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