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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웃거리는 편집자]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낭만
  • 환경과조경 2024년 5월

나의 고향은 은모래의 도시였다. 물론 일간지 자동차 지면 광고에 등장할 법한 사막 한가운데에 놓인 도시는 아니다. 다만 은은한 은빛이 감도는 모래사장과 저절로 눈을 감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빛이 나는 윤슬이 매력적인 강변이 있던 곳이었다. 동네 친구들과 수풀이 우거진 계곡 바위에 올라 다이빙하고, 잡으면 놓기 싫은 아기의 손바닥과 같이 부드러운 감촉의 모래사장을 누볐다. 특히 젖은 몸을 말리기 위해서 푹신한 은모래사장에 앉아 비 온 후 맑아진 강물과 저물어 가는 해가 만들어 내는 윤슬을 오랫동안 바라본 기억은 한여름 밤의 꿈처럼 생생한 여름의 낭만으로 남아있다.

 

불야성의 도시 서울로 오며 그런 낭만을 잠시 잊고 살았다. 여유를 느낄 새도 없이 또 다른 도시의 삶에 적응하느라 하루가 바쁘게 흘러갔다. 다만 운이 좋게도 서울에서 자리 잡은 터전이 한강과 그리 멀지 않아 한강을 자주 지나다녔다. 한강을 자주 지나다니며 수묵화처럼 아무도 밟지 않은 채로 고스란히 쌓여 있는 눈, 산속 깊은 고요한 암자를 둘러싼 대나무 숲처럼 한적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안개 등 날씨가 만들어내는 한강의 다양한 표정을 카메라에 담았다. 낯선 도시의 새로운 낭만을 찾았다는 기쁨과 함께.

 

한강의 낭만적 풍경을 채집한 수집가로서 한강의 낭만을 조용히 느낄 수 있는 장소를 추천한다면 광진교 8번가를 말하고 싶다. 이곳은 올림픽대로와 강변북로의 사이에 놓인 광진교의 8번째 기둥에 위치해 8번가라 불리는 교각 하부 전망대다. 광진교 중앙쯤에 위치한 나선형 계단을 따라 다리 아래로 내려가면 호그와트로 이어주는 킹스크로스 역 9와 4분의 3 승강장처럼 한강의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다. 전면이 유리 통창으로 된 둥근 형태의 전망대인데 빈백에 누워 전면의 통창을 통해 한강의 탁 트인 풍경을 감상할 수 있고, 발아래 유리창을 통해 한강의 일렁이는 물결을 보며 물멍을 즐길 수 있다. 특히 교각 하부라는 색다른 공간 안에서 조금 더 가까이 마주할 수 있는 윤슬은 유년 시절의 은모래가 생각날 만큼 곱고 아름다웠다.

 

만약 이러한 낭만적 풍경이 갑자기 사라진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영화 ‘수라’는 사라진 풍경 앞에 놓인 사람들을 주목하며 삶의 터전이자, 비단에 놓인 수라는 뜻을 가진 아름다웠던 수라 갯벌을 새만금간척사업으로 잃어버린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는 갯벌의 조개를 캐던 손으로 매립지의 잡초를 뽑는 어민, 공사를 조금이라도 늦추거나 막기 위해서 밤낮 가리지 않고 여전히 서식하고 있는 멸종위기종을 찾아다니며 갯벌의 가치를 증명하려고 하는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 등 사라진 갯벌이 새롭게 만들어 낸 풍경을 보여준다. 특히 20년 동안 새만금 갯벌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던 오동필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장은 새만금에서 잊지 못할 풍경으로 수만 마리의 도요새 군무를 설명하며 “너무나도 아름다운 걸 봤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책임감이 생긴 것 같아요. 말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너무 아름다운 걸 본죄”라고 말했다.

 

사실 그들이 수라 갯벌을 잃어버린 것처럼 나도 은모래를 잃어버렸다. 내 고향에서는 더 이상 은모래를 찾아볼 수 없다. 은모래는 이제 나의 기억에만 존재할 뿐. 사라진 은모래의 빈자리를 백년 주기로 찾아온다는 홍수를 막기 위해서 설치된 차가운 콘크리트 제방이 채웠다. 새로운 풍경은 상처의 현존을 가열시킨다고 했나.(각주 1) 삶이 탄생과 죽음 사이에 놓인 것처럼 풍경 역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호시절의 추억과 장면을 균열 내는 풍경은 아리기만 하다. 어느 노랫말처럼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옛사랑을 시청 앞 지하철역에서 만나는 것만큼 씁쓸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돌이킬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시 시작할 수도 없는 불가항력이 만드는 상처 앞에서 무력할 뿐이다.

 

그래서 내게 마지막으로 남은 낭만적 풍경인 한강만은 지금의 모습 그대로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아름다움을 본 죄인보다는 한강의 낭만을 사수한 명예 보안관(?)으로 남고 싶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처럼,(각주 2) 저 한강의 낭만과 아름다움을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싶다. 상처를 가열시키는 풍경보다 아름다움을 가열시키는 풍경 속에서 낭만을 품고 싶다.

 

*각주 정리

1. 김훈, 『풍경과 상처』, 문학동네, 2009.

2. 황인찬, “무화과 숲”, 『구관조 씻기기』, 민음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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