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작업소 울,
조경사업소 울, 조경작업 소울, 조경작업소 을
가끔 우리 회사 이름 ‘조경작업소 울’(이하 울)을 다르게표기하는 경우를 발견한다. ‘조경사무소 울, 조경공작소 울, 조경설계 울, 조경회사 울’ 등등 아주 다양하다. 가장 기분 좋은 오기는 ‘조경작업 소울’이었고, 가장 신선한(?) 오기는 ‘조경작업소 을’이었다. 표기 오류의 가장 큰 원인은 ‘작업소’라는 단어일 것 같다. 회사 이름에 ‘작업소’라는 단어를 넣은 이유는 설계 프로젝트뿐만 아니라 연구 프로젝트나 컨설팅 프로젝트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단일 프로젝트에 있어서도 설계에만 강조점이 있지 않아서였다. 이전까지 시민단체와 함께 발전시켜 온 주민들과의 의사소통 과정과 방식을 설계 과정에 포함시키고 싶었고 조성 이후의 운영까지를 전체 프로젝트의 범위에 넣고 싶었다. 누군가는 그 전체 과정이 설계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인간의 조건』을 읽고는 회사 이름에 대한 설명을 몇 줄 더 달 수 있게 되었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이 살면서 하는 활동을 ‘노동’, ‘작업’, ‘행위’로 구분하였다. ‘노동’은 생존과 욕망 충족을 위한 육체의 동작이고, ‘작업’은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여 일의 재미와 일정한 명예를 바라며 수행하는 제작활동이며, ‘행위’는 개인의 욕망과 필요를 넘어 공동체 속에서 어떤 대의를 위해 하는 행동이다. 그런데 근대 이후 모든 활동은 생물학적 필요에 종속된 노동이 되었다. 시를 쓰거나 음악을 만들거나 예술 작품을 만드는 행위도 작업이 아니라 노동이 되었다. 행위도 자유와 개성이 거세되면서 노동이 되었다. 이러한 이유를 들어 “우리 회사 이름의 ‘작업’이라는 단어는 우리의 활동이 노동 이상의 것이 되길 바라는 소망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면 너무 오글거리려나 가끔은 농담으로 회사 이름을 ‘작업소’라고 해서인지 온갖 작업을 다 한다고 칭얼거릴 때도 있다. 워크숍 준비를 위해 가내 수공업 같은 작업도 하고, 우리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벽에 포스터를 붙이러 다니기도 한다. 요즘 지방 도시의 한 마을에 대한 계획을 수립하면서는 ‘찾아가는 파라솔’이라는 이름으로 동네 공원이나 길에 파라솔을 펴놓고 마을에 대한 주민들의 의견을 묻고 있다. 가끔은 공사 현장에서 호미를 들고 초화를 심기도 한다.
이렇게 장황하게 회사 이름을 설명한 이유는, 울에서의 설계에 대한 이해를 구하기 위해서다. 울에서의 설계는 도면에서 끝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클라이언트와 설계의 범위와 방향부터 논의를 시작하고 주민들과 지속적으로 소통하면서 설계를 한다. 설계가 끝난 이후에도 공사를 관리 감독하거나 주민들의 이용 실태 관찰과 프로그램 운영까지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 연재를 읽어주기 바란다.
‘어.설.자.’의 의심
이번호에 소개하는 작업은 이제 막 끝낸, 어린이공원 프로젝트다. 지나고 보니 이 프로젝트 진행의 콘셉트는 ‘의심하기’였다. 끊임없이 의심하면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클라이언트는 세이브더칠드런이라는 국제구호개발 NGO로, 이들에게 물리적 환경 개선은 생소한 작업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울에게 많은 것을 물었다. 당연히 여기던 것들도 질문을 받으니 생소하게 느껴졌고, 관성적으로 해오던 일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게 되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만난 놀이운동가들의 놀이와 놀이터에 대한 견해도 우리를 더욱더 의심에 빠져들도록 했다.
보다 근본적인 의심의 이유는 내가 ‘어쩌다 설계를 하게 된 자’, 즉 ‘어.설.자.’여서다. 어.설.자.가 되다보니, 설계 프로젝트를 할 때는 유난히 의심을 많이 한다. 한번도 좋은 설계가가 되겠다고 결심을 해본 적이 없다. 좋은 설계는커녕 설계는 내 적성에 맞지 않다고 생각해 왔다. 노란 트레이싱 페이퍼를 펴놓고 설계안을 잡고 있거나, 울의 구성원들과 구조물에 대해 논하고 있는 내가 문득 문득 낯설다. 조경이 품은 키워드들과 설계와 장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해 조경 설계 언저리를 떠나지 않다보니 이리되었다.
첫 번째 의심, ‘아이들 입장에서의 설계?’
클라이언트인 세이브더칠드런이 요구한 사항은 아이들의 입장에서 설계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제까지 설계했던 어린이공원에는 아이들의 입장이 어떻게 반영되었던가?’ 의심이 시작되었고 의심은 질문을 낳았다. ‘아이들의 입장에서 설계를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가장 쉬운 방식은 아이들에게 직접 묻는 것이다. ‘네 입장은 뭐니?’ 물론 아이들을 상대로 이렇게 질문할 수는 없으니 질문의 방식을 응용해야 한다.
울에서 해오던 질문의 방식은 설계안이나 시설물을 제안하고 아이들에게 선호를 묻거나, 원하는 놀이터에 대한 그림을 그리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리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아이들은 보통 그네나 회전무대 같이 자극적 놀이시설물을 선택했고, 놀이동산에서나 볼 수 있는 시설물로 그림을 채웠다. 또 세이브더칠드런은 아이들의 놀이를 관찰해서 그 결과를 설계에 담아 달라고 했다. 이 또한 어떻게 해야 할지 구체적으로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이들이 노는 것을 몇 번 관찰하고는 ‘아이들은 이렇게 노니 우리는 이렇게 디자인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유의미한 내용을, 일반화 할 수 있는 내용을 도출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울은 어린이 참여와 관련된 문헌을 찾아보고 토론을 하면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질문, 그림 그리기, 놀이 관찰에 대해 나름의 답을 도출했다. 먼저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질문에 대한 것. 많은 문헌이 어린이들은 자신이 노는 것과 말하는 것이 다르므로 아이들의 말을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문헌에서 드는 예는 우리의 경험과 비슷했는데, 어떤 장소에 데리고 가서 실컷 놀게 한 후 무엇이 제일 재미있었냐고 물어보면, 흙을 가지고 신나게 놀았음에도 불구
하고 시각적으로 눈에 들어왔던 시설물을 말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아이들의 그림에 대한 것. 아이들의 그림에 대한 우리의 의심은 정당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대신 아이들의 그림을 아이들과 대화를 시작하는 도구로, 아이들이 무엇을 아는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를 발견 하는 도구로 삼기로 했다.
세 번째, 아이들 놀이 관찰에 대한 것. 자료를 찾으니 의외로 놀이 관찰을 강조하는 이들이 많았다. 한국에 도 왔던 독일의 놀이터 디자이너 귄터 벨치히(Günter Beltzig)도, 어린이와 어린이 놀이에 대해 연구하는 영국의 팀 길(Tim Gill)도 놀이터를 설계하는 사람은 놀이 관찰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들에 따르면 관찰에서 얻은 통찰은 주관적이고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만 가능한 것일 수 있어 이 또한 오류가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관찰이 중요한 이유는 어떤 특정한 ‘사실’의 발견에 있기보다는, 아이들의 생활에 젖어드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울은 스스로 내린 답을 실천으로 옮겼다. 아이들과 그림을 그릴 때는 그림에 그치지 않고 왜 그렸는지 물어보았다. 또 50여 명의 어린이들을 서울숲의 여러 놀이터에서 놀게 하고는 어떻게 노는지도 관찰했다. 여러 활동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대상지 옆 어린이집 아이들과 보낸 시간이었다. “마음대로 놀아요!”라는 말과 함께 아이들은 작은 원을 그리며 뛰기 시작했다. 둥그런 원을 그리며 빙글 빙글. 무작정 10분을 뛰고 나서 주변으로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저 구석에 있는 운동기구에, 나무에, 바닥에. 그러다 또 뛰고. 그렇게 20여 분을 뛰고 나서 주변 사물을 이용한 놀이를 시작하거나, “같이 놀자!”하면서 친구를 불렀다.
이 프로그램 이후 내 눈에는 온통 아이들의 뛰는 모습만 보였다. 우리 동네 어린이집에 있는 놀이터에서도 아이들은 뛰었고, 지하철과 음식점에서 만난 아이들도 뛰었다. 아이들은 뛰는 존재였다. ‘저들의 뛰고자 하는 욕망을 받아주자’가 어린이놀이터 설계의 원칙이 되었다. 아이들의 놀이를 관찰하면서 다음의 내용을 발견했고 가능한 한 공간에 담으려고 했다.
-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의 노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잘 놀지 않는다. 가능한 한 시각적으로 소외된 공간이 없도록 해야 한다.
- 지장물이 있는 주변에서 논다. 모래 놀이를 하더라도 모래밭 중심보다는 경계 혹은 기둥 옆에서 논다.
- 아이들은 우리의 도시 공간을 ‘놀이’로 재구성한다. 특히 성격이 모호한 공간, 모퉁이 공간, 모서리 공간을 선호한다. 넓은 길을 놔두고 가로의 경계석 위를 위태롭게 걷고, 건물 아래의 자투리 공간은 그들의 훌륭한 아지트가 된다.
- 아이들은 스스로 미션과 규칙을 만들며 논다. 대상지에서 만난 한 꼬마는 공원 내 느티나무의 수피를 모두 떼어 내는 걸 그 날의 미션으로 정하고는 돌 조각을 집어 들고 열심히 나무의 수피를 긁어냈다. 또 서울숲에서 만난 꼬마들은 쉬지 않고 바닥의 모래를 퍼서 조합놀이대 위로 올렸다. 마치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두 번째 의심, 그네는 있어야 하는가?
이 작업을 진행하면서 ‘고무 포장을 깔 것인가? 그네를 둘 것인가? 조합놀이대를 놓을 것인가?’처럼 놀이터에서 흔히 보는 요소에 대해서도 의심하게 되었다. 놀이운동가들은 놀이 공간 포장재로 다양한 놀이를 유발하는 흙바닥과 모래를 추천하고, 고무 포장은 환경 상의 문제도 있다. 그러나 현장에서 아이들을 만나고 관찰한 결과 모래는 뛰놀기에는 적당하지 않았다. 이에 포장으로서의 모래와 모래 놀이 공간을 구분하자는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다음 그네. 가장 요구도가 높은 시설이지만,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주변의 모든 어린이공원에는 그네가 있으니까 과감히 뺐다. 그네를 여러 개 놓아달라는 어린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조합놀이대에 대한 답은 쉽지 않았다. 서울시의 창의놀이터를 자문하면서 만난 놀이운동가들의 조합놀이대에 대한 반감이 자기 검열 기제로 작동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들의 오르고 싶은 욕망, 하강하고 싶은 욕망을 좁은 공간에서 받아주기 위해서는 조합놀이대가 필요했다. 대신 아이들이 요구한 시시하지 않은 높은 미끄럼, 어른들이 놀이터 만들기 워크숍에서 제시한 숨을 수 있는 공간, 아이들의 뛰기를 방해하지 않기 등등을 고려해서 조합놀이대를 구상했다. 국내외에서 개발된 조합놀이대를 분석한 후, 우리 대상지에 맞는 조합놀이대를 구성해보는 작업을 거듭했다. 안전 규칙이나 기업마다 소유하고 있는 모듈의 문제로 최종 디자인은 시설물 회사에서 했지만 그 과정은 많은 도움이 되었다.
세 번째 의심, 삼각뿔은 정말 불편한가?
한 계절 몰두한 작업. 한다고 했지만 모든 사람이 100% 만족하지 못한다. 어린이들은 나와 허브 향을 맡고 식물에 물을 주면서 신나게 놀아놓고는, “오늘은 안녕!”하며 돌아서는 내 등에 “그런데 이 놀이터에는 왜 그네가 없어요?”라고 불만을 표한다. 그리고 하루의 대부분을 공원 내 퍼걸러에서 보내시는 할머니들은 모든 바닥에 고무 포장을 깔지 않았다고, 허리 돌리기를 놓지 않았다고 얼굴을 볼 때마다 한 말씀하신다. 그리고 어린이공원 옆 어린이집 원장님은 3살 미만 아이들을 위한 흔들말이 없는 게 불만이시다.
그리고 우리의 삼각뿔. 바닥에 변화를 주기 위해 놀이 공간 가장자리에 놓았던 삼각뿔. 이 삼각뿔을 이렇게도 사용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이들의 좋은 놀잇감이지만, 높이가 그리 높지 않고 포장색이 주변 바닥 포장과 유사하다 보니 걸려 넘어지는 분들이 개장 초기에 많았다. 이후 삼각뿔 주변으로 색을 칠하고 뾰족한 가장자리를 둥글렸지만, 그래도 여전히 불만이 있으시다.
울 구성원들은 주민들의 불만을 표하는 방식에 마음이 상하기도 했지만, 오기도 생겼다. “아이들은 좋아하잖아.” 진실을 알기 위해 현장에서 한 나절 동안 잠복 근무를 했다. 주민들이 어린이공원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삼각뿔에 대한 반응은 어떤지 듣고 관찰했다. 결론은 불편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러 사정으로 없앨 수는 없어, 주민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현장에서 만난 할머니들의 손을 잡고 사죄했다. “저희 생각이 짧았어요. 구분이 잘 되도록 좀 더 색을 진하게 칠하겠습니다. 앞으로 익숙해지시지 않을까요?” 문제의 근본이 해결된 것은 아니고, 우리의 부족함을 아프게 깨달았지만 의심은 해소되었다.
어.설.자의 일, 그냥 하기
사소하게 시작된 질문이 아주 근본적인 것으로 내려앉을 때가 있다. 직장 생활이 재미없어서 시작한 질문이, ‘나란 인간이란?’이라는 질문으로 연결되는 것처럼. 작업을 하면서 생기는 의심도 그렇다. 깊어지고 깊어지면 결국은 시스템에 대한 의심, 굳어진 인식 구조와 실천 방식에 대한 의심으로 귀납된다. 그리고 그래야만한다. 이 의심은 개인적이기도 하지만, 사회적이기도하다. 데카르트 같은 근대주의자들이 인간을 의심하는 주체로 세웠다면, 후기 근대주의자들은 인간이 만든
시스템을 의심해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초기에는 어린이공원을 짓는 게 목적이었다. 1968년 10월 2일 조선일보 기사에는, “오는 1969년부터 3개년 동안 시내 3백2개 동마다 1개소씩 3백 평 내지 1천 평 규모의 어린이공원을 만들겠다”는 김현옥 시장의 포부가 실려 있다. 그런데 기자는 시장의 포부 아래에 그게 가능할지 의구심이 든다는 내용을 덧붙였다. 그 기자의 의구심과는 달리 현재 양적으로는 많은 놀이터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질적인 측면에서 모든 놀이터가 너무 뻔하지 않냐고 이야기 한다. 개성 없이 비슷비슷한 놀이터가 만들어지는 데에는 여러 가지 시스템적 이유가 있다. 제도 및 정책의 문제, 조경 산업의 문제, 전문가들의 문제 등등. 그래서 ‘우리의 놀이터는 아이들의 입장을 반영한 것인가?’에 대한 의심은 제도 및 정책, 조경 산업, 전문가들의 설계 방식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어린이들을 위한 시스템인가? 시스템을 위한 시스템인가?
그러고 보면 전복적인 설계는 머릿속에서 나오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라기보다는 시스템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되지 않을까 싶다. 요가를 시작한 지 2년 정도가 되어간다. 모든 관절이 다른 이들보다 29° 덜 펴지고, 19° 덜 구부려진다고 농담할 정도로, 요가를 시작하면서 얼마나 근육이 굳어져 있는지 발견했다. 얼마나 해야 ‘아등바등 몸짓’을 넘어 ‘요가 동작’을 할 수 있냐는 질문에, 우리 선생님은 몸이 굳어져 온 세월만큼 걸린다고 아주 냉정하게 답하셨다. 요가라는 다른 맥락에 나를 놓지 않았다면, 나는 이렇게 실감나게 굳어진 나의 몸을 의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고 체계도, 실천의 방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맥락 자체를 의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세이브더칠드런이, 놀이운동가들이 던진 질문은 요가 동작과도 같았다. 의심을 풀기 위해 책을 보기도 하고 자문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궁극의 해답은 현장에 있다고 믿는다. 추상적으로 촘촘하게 얽혀진 시스템에서 나와, 그리고 선 지식은 가능한 한 괄호 속에 집어넣고 현장에서 날 것의 대답을 찾기. 그러면서 굳어진 근육이 유연해질 것이라 믿는다. 시민운동가가 아닌 설계자로서의 ‘주민참여’도 그런 차원에서 접근하려 한다.
모든 의심이 해결되는 건 아니다. 그런데 몰두하다 보면 의심, 질문 자체가 익숙해지고 시시해진다. 우리가 어릴 적 품었던 많은 질문들이 어른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별거 아니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소설가 김연수는 『소설가의 일』이란 책에서 “지금 뭔가를 쓰고 있다면 그는 소설가”라고 한다. 어쩌다 설계를 하고 있지만, 의심하며 매일 매일 한다. 별다른 결심 없이 시작한 것처럼, 별다른 결심 없이.
김연금은 조경작업소 울을 운영하고 있으며, 커뮤니티 디자인 센터의 일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커뮤니티 디자인, 마을만들기를 일과 활동의 중심으로 삼고 있다. 박사 학위 논문을 발전시킨 『소통으로 장소 만들기』(한국학술정보, 2009), 일상의 경관에서 이루어지는 거시적 구조와 미시적 요소와의 상호 관계를 관찰하고 기록한 『우연한 풍경은 없다』(나무도시, 2011)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