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의 내용은 이정연과 정태열의 논문 “대구 도시공원의 변천에 나타난 사회적 의미 해석”1에서 발췌했고, 2000년대 이후는 대구시 자료를 참조했다. 도시공원 계획‧개원 과정의 특징을 시대별로 분석하고, 이를 시대적 상황과 연관 지어 고찰함으로써 도시공원의 변천에 나타난 사회적 의미를 알아보고자 했다. 향후 대구 도시공원 르네상스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대구 도시공원 태동기
1960년대 이전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과 복구기 등을 거치면서 정치적, 사회적으로 혼란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체계적인 공원 계획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1960년대 이후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를 겪으면서 도시민의 건전한 휴식 공간 확보 및 자연 경관 보전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1967년 공원법이 제정되면서 공원‧녹지 관련 정책은 일대 전환기를 맞게 됐으나 대부분 공원 지정에만 그쳤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달성공원은 대구의 유일한 공원이었다.
달성공원은 고대 달구벌 부족국가의 성터로, 대구에 있는 도시공원 중 역사가 가장 오래된 곳이다. 1905년(고종 38년) 처음 공원으로 조성된 이래 일제강점기에는 신사가 건립되는 등 각종 성역화 사업이 추진됐고,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군사 시설 주둔지로 활용됐다. 1964년 국유 재산인 달성공원이 대구시에 무상으로 양여된 후 재정비가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먼저 대구시는 공원의 운영 및 시설에 대한 자문 기관으로 시민 대표와 권위자들로 구성된 공원조성위원회를 만들고, 막대한 예산 확보를 위해 시비와 국비를 최대한 할애하고, 시민과 대구 출신 재벌들의 후원을 얻는 등 공원 재정비 계획의 대략적 원칙을 세우고 조성 사업을 시작했다. 공원 설계는 당시 경북대학교에서 조원학을 강의하던 임순문 교수에게 의뢰했고, 1964년 7월 윤곽이 드러나게 된다. 하지만 소요 예산 부족 등의 이유로 실현되지 못했다. 1966년 8월 공원 내 신사 건물 철거를 계기로 공원 재정비를 계획했으나 자금난으로 3년 만인 1969년 8월에 개원했다. 당초 계획했던 어린이 놀이터, 도서관, 분수 시설, 연못 등은 예산 부족으로 손대지 못하고 시민의 여론에 쫓겨 미완성인 채로 문을 열었다. 당시 공원 입장료는 어른 20원, 어린이 10원이었다.
1960년대에 계획‧개원된 또 하나의 공원은 중앙공원(현 경상감영공원)이다. 중앙공원은 조선시대 감영監營이 있던 장소로, 해방 이후에는 경북도청, 공무원교육원 등으로 사용되기도 한 곳이다. 당시 대구에는 달성공원 외에 변변한 공원이 하나도 없었던 상황이었으므로 시민들은 이 부지가 공원이 되는 것을 열망했다. 이를 받아들여 대구시는 1965년 2월 건설부고시로 공원(당시 포정공원)으로 지정했다. 그러나 공원을 조성하겠다는 대구시의 결정과 달리 1966년 5월 경상북도는 이 부지에 관광호텔과 백화점을 건설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대구시와 경상북도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게 된다. 당시 건설부가 시민들의 여론과 결정‧고시 후 1년 밖에 지나지 않은 점 등을 들어 부지의 공원화가 당연하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사건은 일단락됐으나, 공원을 원하는 시민들의 여론에도 불구하고 예산 부족 등의 이유로 공원 조성은 실현되지 못하고 계속 방치됐다. 그러다 1970년 1월에 포정공원 조성계획을 확정하고 10월에 개원했다. 당시 입장료는 어른 30원, 어린이 10원이었다.
1960년대는 국가적으로 경제적 빈곤이 문제시 되던 시기로, 시민은 물론 일부 정책 결정자들조차도 도시공원에 대한 인식이 매우 미흡한 상태였으나, 시민들의 공원을 열망하는 여론이나 기부 문화는 싹트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당시 사회적 상황을 종합해보면 시 외곽이나 도심부의 새로운 장소에 도시공원을 조성한다는 것은 재정적 면에서 불가능했으므로 시민의 접근이 용이하고 공원 조성 비용도 절감할 수 있는 도심지 내 역사 유원지의 공원화가 우선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당연했다.
대구 도시공원 준비기
1970년대 들어서면서 백만 명을 넘어선 대구 시민이 이용하기에는 공원이 너무 부족한 상태였고, 계속되는 인구 증가와 도시화로 공원의 중요성은 부각됐다. 1965년 2월 공원으로 지정된 앞산공원은 별다른 계획 없이 방치되고 있었다. 대구시는 앞산공원을 자연공원 성격을 띤 대규모 공원으로 개발하고자 1970년부터 개발 사업에 착수했고 1971년 공원조성계획을 수립했다. 계획 당시, 앞산공원은 규모가 커 조성 비용이 많이 소요되어 전체 개발은 불가능했다. 계곡별로 성격이 다른 다섯개 지구로 분류해 1년에 한 지구씩 1975년까지 연차적으로 개발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앞산공원 역시 민간 자본 유치 저조와 대구시의 재정난 등의 이유로 개발이 늦어지게 된다. 1975년 12월 앞산순환도로가 준공되면서 다시 조성에 탄력을 받게 된다. 비록 준공 시기를 여러 번 넘기긴 했으나 제2지구는 각종 놀이공원을 갖춘 유기장으로 1979년 4월에 완공됐다.
대구 도심에서 서쪽으로 약 3km 떨어진 서구 내당동과 서당동 일원에 위치한 두류산이 두류공원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두류공원은 1965년 2월 공원(건설부고시 제1387호)으로 결정‧고시되면서 조성 계획이 마련됐다. 1966년 2월에 발표된 두류공원 종합계획을 보면, 박물관, 대도서관, 야외 음악당, 드라이브 인 극장, 실내체육관, 풀장, 종합경기장, 어린이 놀이터, 식물원, 동물원, 양어장 등과 함께 케이블카와 두류산 정상에 높이 300m의 대구 타워 설치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다. 재원 확보 방안을 고려하지 않은 계획이여서 두류공원은 종합대공원이란 이름으로 설계만 된 상태로 방치됐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공원 조성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고 1974년 두류공원 기본계획이 확정된다. 그러나 공원 전체 면적의 92%가 사유지로 부지 매립 문제와 앞산공원 개발과 병행으로 실시에 따른 대구시의 재정난으로 인해 공원 조성은 지지부진한 상태를 면치 못하다가 1977년 5월 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개원됐다.
1970년대에 수립된 도시공원 조성계획은 주로 자연 경관이 수려한 풍경지와 명승지에 구상됐고, 복합적인 성격을 지닌 대규모 공원으로 계획됐다는 점이 특징이다. 인구 증가와 도시화 등으로 도시가 거대화됨에 따라 도시의 기초 기반 시설이라고 할 수 있는 도시공원 또한 보다 발전적 방향으로 계획되는 점은 당연한 현상이다. 그러나 당시의 공원조성계획은 시대적 상황과 재정적 문제를 제대로 고려하지 않고 과도하게 수립되어 결국 재정적 문제 등으로 공원 조성은 계획 기간 내 완공하지 못하게 됐다.
* 환경과조경 426호(2023년 10월호) 수록본 일부
각주 1. 이정연, 정태열, “대구 도시공원의 변천에 나타난 사회적 의미 해석”, 『한국조경학회지』 41(3), 2013, pp.72~82.
정태열은 경북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도쿄랜드스케이프연구소(TLA)에서 11년간 다양한 일을 경험하면서 도쿄공업대학에서 공학박사(경관공학)를 취득했다. 이후 서울에서 소울랜드스케이프(SLA)를 창립해 일하다가 2012년부터 경북대학교 조경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공간을 역사적 공간에서 찾는 중이며, 풍경을 어떻게 하면 팔 수 있을지 자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