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에서 설계를 배우며 얻은 덤이 있다면, 결과물에 투입된 애씀을 가늠하는 버릇이다. 언제부턴가 설계나 디자인 작품을 보면 영리한 아이디어와 촘촘한 구성 그 이면에 있는 누군가의 고민과 번뇌를 떠올린다. 졸업 작품 전시를 구경할 때였다. 잘 짜인 패널을 앞에 두고 평가보다는 안쓰러움과 존경이 동시에 일었다. 이 벽에 패널이 걸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아이디어와 지난한 여정이 있었을까, 손바닥 반의반만한 다이어 그램에는 최소 네다섯 시간 이상의 노동이 담겨 있겠지, 수없이 컨트롤+에스 ctrl+s(저장하기) 를 눌렀을 테고, ‘최종.psd’, ‘이게 최종.psd’, ‘진짜 끝.psd’, ‘진짜 최종 마지막.psd’를 지나 완성된 이 파일은 몇 번째 최종본이었을까, 시답잖은 생각을 속으로 삼켰다.
독자에서 기자로, 출판계의 외부자에서 내부자로 위치 변동을 겪고 있는 요즈음, 책을 보는 내 시선도 사뭇 달라졌다. 책 표지를 보다가 표지 이미지와 제목의 위치를 두고 옥신각신했을 편집자, 저자, 디자이너를 떠올리고, 색다른 판형이나 서체를 쓴 책을 보며 누군가의 과감한 결단이 있었을 거라 짐작한다. 다른 잡지를 보다 한 권에 든 노동 시간을 재본다. 한 명의 에디터가 담당한 꼭지의 개수를 세며, 얼굴도 모르는 에디터의 체력과 능력 (그럼에도 불구하고 탄탄한 문장력과 빈틈없는 구성) 에 놀라고, 이번 달도 무사히 마감을 넘긴 그에게 심심한 위로와 응원을 보내는 것이다.
『출판하는 마음』은 책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한 작가의 출판 과정 취재기 이자 출판계 종사자들에 대한 르포르타주로, 한 권의 책에 꾹꾹 담긴 출판인들의 수고를 헤아린다. “책의 주인공으로 주목받는 작가의 책 뒤 판권 면에서 잠자는 얼굴들, 즉 편집자, 마케터, 제작자 등 출판계 종사자들”을 만나 묻고 듣는 인터뷰 형식이다. 저자 은유는 이미 몇 권의 책을 낸 전문 작가지만 스스로 출판 과정에 무지했다고 말한다. 출판 단계를 10으로 볼 때 “작가는 원고를 출판사에 넘김으로써 1, 2단계에 개입했다가 빠지고, 독자일 때는 마지막 10단계에서 구매함 으로써 참여한다”며, “책의 0부터 10까지 하나하나 짚어보기 위해”, “레드카펫 위주인공보다는 그 레드카펫을 준비하고 깔고 치우는 사람들을 보이게 하는 작가적 소임”을 다하기 위해, 함께 일하는 이들과 더 원활히 소통하고자 책의 작업 의뢰를 받아들였다.
날것의 원고가 책이 되어 독자의 눈에 띄고 손에 쥐어지기까지, 저자뿐만 아니라 편집자, 번역자, 북 디자이너, 출판 제작자, 출판 마케터, 온라인 서점 MD, 서점인등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책의 생장 과정에 ‘깊고 치밀하게’ 관여한다. 책은 글의 종합이 아니다. 숨은 노동이 책을 펴내고 시장에서 살아남게 한다. 더 좋은 만듦 새를 위한 디자이너의 욕심이 독자의 구매욕을 끌어올린다. 원고 파일을 ‘적정 가격에 맞춰’ 종이 냄새나는 책으로 만들기 위해 출판 제작자는 인쇄소, 제본소, 지업사를 돌고 돌고 돈다. 절판된 책을 수시로 확인하는 일도 그의 몫이다. 잘 만든 책은 특별한 조치 없이도 팔리고, 알아서 제짝 (독자) 을 찾아갈 거라는 생각은 시장 상황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1년에 새로 나오는 책만 해도 4만 종, 하루 약 100권 의 책이 쏟아진다. 책은 너무 많고 책을 대신하는 재밋거리도 넘친다. 명망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의 것이 아니라면 스스로 날개 돋친 듯 팔리는 책은 없다. ‘눈에 띄어야 한다, 기어코 팔아내야 한다’는 마케터의 고민과 은밀한 전략이 판매 부수를 높인다. 대형 서점과 인터넷 서점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책 처방’이라는 독특한 판매 전략을 펼치는 독립 서점의 대표는 책을 구매하고 읽는 행위를 새로운 문화로 향유하게 만든다.
『출판하는 마음』이 책의 고귀함, 출판 노동의 가치를 과장되게 설파하는 책일까 걱정했지만 오히려 ‘책에 대한 엄숙주의’ 를 내려놓고 책을 순전히 시장의 상품, 노동의 산물로 보게 한다. 그리고 그 속에 출판인 각자의 처지에서 비롯한 “한 움큼의 서운함, 서러움, 아쉬움”을 허심탄회하게 토로한다. 결국이 책은 ‘상품’과 ‘타인의 노동’에 대한 소소한 기록일 뿐임을 저자는 일찍이 머리말에서 짚고 넘어간다. “책만 그런 게 아니 다. 자본주의 사회의 세포 격인 상품을 우린 거의 모르고 사용한다. 농사짓는 과정을 경험하지 못하고 쌀을 얻어 밥을 먹고, 옷 만드는 사람의 처지와 얼굴을 모르고 옷을 사서 입는다. 결과물만 쏙쏙 취하니까 슬쩍 버리 기도 쉽다. 그렇게 편리를 누릴수록 능력은 잃어간다. 물건을 귀히 여기는 능력, 타인의 노동을 존중하는 능력, 관계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능력.” 누구나 직접 겪은 일에 한해서는 그렇지 않은 사람과 다른 시선, 공감의 폭을 가진다. 하지만내 분야가 아닌 일에 대해서는 크게 알고 싶지도 않고 굳이 알 필요나 그럴 여유도 없다. 뭐가 어렵고 고된지 모르니 그 가치도 잘 알지 못한다. 지금 보는 이 책, 며칠 전 마냥 재밌게 봤던 영화, 어제 마셨던 커피가 새삼스럽다.
조경 공간이라고 다를까. 전체적인 실루엣을 결정하는 건 설계가지만 도면이 저절로 실제 공간이 되진 않는다. 누군가 머리를 싸매고 계산해 맞춘 비용으로, 누군가 힘써 만든 자재를 가져와, 누군가 잘 키운 식물을 심어 완성되면, 누군가 이 공간을 알리고, 누군가 이 공간에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누군가 이 공간이 계속 아름다울 수 있도록 관리한다. 이번 달에도 여러 작품이 실렸다. 목차에 작품 이름과 설계가의 이름을 나열하면서 작품 사진 밖 사람들을 생각했다. 언젠가는 이들에 대한 특집을 꾸릴 욕심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