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자주 듣게 되는 신조어 중 하나인 ‘근자감’. ‘근거 없는 자신감’의 줄임말인 이 표현은 젊은 세대가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쓰는 듯하다. 하지만 한편으론 당찬 용기나 긍정적 허세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취준생 70만 시대의 대한민국에서 갈수록 조경 영역이 좁아져 간다는 기사와 이 위기에 대처하자는 기고문이 줄을 잇고 있는 조경계.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 전국의 조경학과 졸업생들에게 필요한 마음가짐이 바로 근자감 아닐까? 돌이켜보면 이런 마음가짐이 10년 전 이맘때도 필요했다.
졸업을 몇 개월 앞둔 2007년 초여름, 생명공학을 전공하던 동네 친구가 자기가 준비하는 의학 전문 대학원을 소개하면서 다시 고3 수험생의 삶으로 돌아가 자신의 모든 걸 걸기로 했다며 나에게 말한다. “너도 해 봐. 너, 수학 좋아했잖아! 이거 이제 시작이라 빨리할수록 좋아.” 독서실로 돌아가는 친구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다 며칠 전 공개된 조경설계2 수업의 B+ 학점이 떠오른다. 학교에서 살다시피 노력했음에도 생각보다 낮은 학점을 받고 좌절하던 차에 나도 의전으로의 환승 열차에 올라타야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남은 인생을 좌지우지할 것만 같은 졸업반의 여름 방학이 시작되었고, 가을에 마감하는 대한민국 환경조경대전에 제출할 졸업 작품이라는 거대한 과제가 눈앞에 주어졌다. 아직은 조경의 끈을 놓지 않았기에 그 친구처럼 혼신의 힘을 기울일 것을 다짐해 보지만, 세 달이나 되는 대학 생활의 마지막 방학을 하나의 일에만 집중하겠다는 결심을 하기 전에 여러 생각이 겹친다.
생각의 끝에는 나와 조경의 관계라는 결론이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세상에 내가 맞는지 안 맞는지 따져 봐야 하는 것이 순리라는 생각이었는데, 문제는 그 방법이었다. 조경과 나는 잘 맞는가? 나와 조경의 궁합이 B+인가? 나는 조경을 잘 하는가? 이 질문들에 답하기 어려운 이유의 본질은 아마도 “계획이나 설계에 정답은 없어”라는, 일종의 정설이 되어버린 긍정과 부정이 모두 가능한 이 명제에서 기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답 없는 좌뇌적 사고를 거부하는 데 익숙하고 절대 평가로 등수 매기는 데 길들여진 우리 한국인에겐 자신의 위치를 가늠하기 어려운 길은 곧 불확실한 길이다. 좌뇌와 우뇌의 용량이 비슷하고 한국에서 평생을 자랐기에 결론은 여전히 알쏭달쏭. 졸업은 해야 하니 조경대전이란 동전을 일단 던져보기로 한다. 앞뒷면을 정하지도 못한 채.
팀이 결성된다. 대상지도 없지만 맥주잔을 기울이며 화이팅을 다짐한다. 팀명은 있어야 한다는 취중 토크 끝에 우연히 꺼낸 이름, ‘우너쉽’—우릴 너무 쉽게 봤어. 예전 광고 카피의 한 토막인 이 구호는 (지금 생각해 보면) 팀원들의 고민과 희망이 동시에 담긴 근자감의 한 표현이었고 여름 방학을 불태울 근자감의 일발 장전이었다. 두 달여의 준비 기간 동안 말도 탈도 많았지만, 그때마다 이 구호를 외쳤다. ‘우너쉽’을 당찬 패기의 허세가 아니라 우리 도시 환경에 대한 오너십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대상지를 내집 안마당 보듯 애정을 담아 매만져 나갔다. 의뢰받은 프로젝트가 아니라 내 인생을 점쳐 보고 나 자신을 던져 보는 프로젝트라는 의미가 더해지자 이 프로젝트는 점점 내 것이 되어갔다.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고, 집중으로부터의 배움은 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조경대전은 입상의 기쁨과 함께 조경의 끈을 놓지 말라는 동전 앞면의 답을 주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당시의 결과가 동전의 뒷면이었길 바라는 순간이 온다. 그때마다 10년 전의 근자감, ‘우너쉽’의 마음을 되새기며 조경의 울타리 안에 있다. 물론 공모전의 결과나 순위권의 수상 여부가 동전을 긍정의 앞면으로 만들어 준 것은 아니다. 일상의 배경으로만 존재하던 주변 도시 환경을 비판적으로 보며 얻은 도시에 대한 통찰, 팀원들과의 협력과 그것을 통한 배움, 함께 이끌어낸 비전과 조경이 만들어갈 환경에 대한 가능성과 의미가 모두 모여 조경을 더 열심히 해 보자는 다짐의 근거가 되었다고 믿는다.
이 원고를 마무리하고 있는데 마침 10년 전 조경대전에서 같은 팀이었던 후배로부터 까톡, 메시지가 온다. “형, 우리 조경대전에서 했던 프로젝트의 아이디어를 제대로 적용할 만한 공모전이 떴어요. 오랜만에 한번 뭉쳐 볼까요?” 미국의 동부와 서부, 서울에 흩어진 세 명이 다시 10년 만에 ‘우너쉽’으로 뭉치기로 했다. 조경대전을 마친 여러분, 모두 애쓰셨고, 함께 도전을 이어갑시다.
최영준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설계 대학원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아키프리 인터내셔널(Archiprix International) 본상, 뉴욕 신진건축가공모 대상, 제4회 대한민국 환경조경대전 대상 등을 수상했다. 로스앤젤레스 기반의 설계사무소 Laboratory D+H의 공동 설립자로, 현재 미국, 중국, 한국을 오가며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