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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서재] 쿠드랴프카의 차례
  • 환경과조경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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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네자와 호노부 | 권영주 옮김 | 엘릭시르 | 2014

 

변덕스러운 계절이었다. 몇 달간 에어컨 없이는 잠들 수 없는 폭염이 계속되더니, 몇 주 전부터는 장맛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불볕더위도 끝인가 싶어 숨을 돌리는 순간 이번엔 습하고 뜨듯한 바람과 언제 내릴지 알 수 없는 소낙비가 정신을 차릴 수 없게 한다. 어정쩡한 날씨 때문일까, 이맘때쯤이면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꼭 찾게 되는, 등골을 서늘하게 할 공포 영화나 소설이 생각나지 않았다. 납량 특집이라는 문구로 치장한 TV 프로그램에도 별 흥미가 생기지 않고, 악령에 씐 인형(악령이 들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로 괴기하게 생겼다) ‘애나벨’을 다룬 영화가 제법 재밌다는 이야기에도 극장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대신 이번 여름은 범죄 수사 드라마에 빠져 살았다. 검찰 조직 내부의 비밀에서 촉발된 것으로 보이는 살인 사건을 풀어 나가는 검사와 그 주변 인물을 다룬 드라마 ‘비밀의 숲’. 이야기의 큰 축을 이루는 사건과 긴밀한 연결고리를 갖는 작은

사건들이 정교하고 촘촘하게 배열되어 잠시도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매회 새로운 증거가 등장하고, 그에 따라 의심스러운 인물도 매번 바뀐다. 시시각각 변하는 등장인물들의 눈빛, 왠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은 작은 손짓이나 행동들이 주인공 황시목 검사의 시선과 별개로 나만의 추리를 펼치게 했다. 너무 집중한 탓에 한 회가 끝날 때마다 온몸의 힘이 쭉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마지막 회를 보고 난 뒤에는 ‘단짠단짠’의 법칙처럼 가볍게 즐기며 볼 수 있는 이야기가 그리워지기도 했다. 그래서 오랜만에 책장에서 꺼내든 『쿠드랴프카의 차례』, 요네자와 호노부 ‘고전부 시리즈’의 세 번째 책이다.

 

『빙과』, 『바보의 엔드 크레디트』, 『쿠드랴프카의 차례』, 『멀리 돌아가는 히나』, 『두 사람의 거리 추정』 으로 구성된 ‘고전부 시리즈’에는 흔히 추리 소설의 소재로 사용되는 살인 사건이 없다. 대신 ‘왜 금요일마다 2학년 학생들이 돌아가며 같은 책을 대출하는 걸까?’, ‘책상 위에 올려둔 발렌타인 초콜릿이 어디로 갔을까?’ 등 일상생활 속 작은 미스터리를 풀어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엄청난 비밀을 파헤치는 이야기는 아니기에 긴장감은 덜 하지만, 덕분에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짬짬이 시간을 내 읽을 수 있는 부담 없는 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람이 다치거나 죽는, 자극적인 소재 없이도 충분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 힘은 섬세한 심리 묘사에 있다. 일반적인 추리 소설이 범죄를 파헤치는 과정과 트릭에 집중한다면, ‘고전부 시리즈’는 범인이 사건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 그로 인해 초래된 씁쓸한 결말, 추리 과정에서 드러나는 등장인물의 내면과 변화에 집중한다. 첫 번째 이야기인 『빙과』에서 “안해도 되는 일은 안 한다. 해야 하는 일은 간략하게”(각주1)를 주장하던 주인공이 스스로 귀찮은 사건에 뛰어드는 모습은 다섯 권이나 되는 시리즈를 후루룩 읽고 싶게 만든다. “무미건조한 학창시절도 괜찮다고 생각하던 소년은 친구들을 만나면서 고교 시절이 좀 더 장밋빛이 되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하며 한층 성장한다. 지금 이 시절을 십 년 뒤에도 후회하지 않을 시간으로 만들려고 조금 더 노력하게 된다. 시간은 회색 토양에서 장미를 피우고, 추억을 아름답게 만든다. … 고전부원들이 『빙과』에서 찾아낸 진짜 진실은 그러한 깨달음이 아닐까.”(각주2)

 

『쿠드랴프카의 차례』는 ‘고전부 시리즈’ 중 치밀한 심리 묘사가 가장 돋보이는 편이다. 이야기는 카미야마 고등학교의 학원제를 배경으로 시작된다. 주인공 호타로를 비롯해 고전부원들은 실수로 문집을 200부나 찍게 되어 골머리를 앓는다. 그리고 그 와중 각 동아리의 핵심 물품이 ‘쿠드랴프카의 차례’에 따라 도난당하는 ‘십문자 사건’이 발생한다. 사건에 뛰어드는 등장인물의 모습들이 장마다 다른 시점으로 그려지는데, 이 과정에서 아무 관련 없을 것 같은 작은 에피소드들이 ‘열등감’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하나로 뭉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모든 면에서 자신을 앞서 나가는 무네요시에 대한 지로의 열등감이 ‘십문자 사건’을 벌이게 했고, 아이코가 고전부원인 미야카와 말다툼을 벌인 이유는 자신의 작품이 결코 하루나의 작품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사실에 괴로웠기 때문이다. 매번 추리 대결에서 호타로에서 패배해 온 사토시는 이번에도 호타로보다 먼저 ‘십문자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다. “자기한테 자신이 있을 땐 기대란 말을 쓰면 안돼. 기대란 건 체념에서 나오는 말이야”(각주3)라는 사토시의 대사는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열등감에 시달려왔는지를 한눈에 보여준다. 전 편인 『바보의 엔드 크레디트』에서 호타로에게 자신의 재능을 자각해야 한다고 말하던 이리스의 말을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기도 했다.

 

아쉽게도 ‘고전부 시리즈’는 2015년에 발간된 『두 사람의 거리 추정』을 끝으로 멈춰서 있다. 호타로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야기는 계속된다고 했던 작가의 말을 믿으며, 요네자와 호노부의 또 다른 작품인 『여름철 한정 트로피컬 파르페 사건』을 읽어보려 한다. 제목처럼 달콤하고 시원해 늦더위를 날려줄 신선한 이야기가 담겨 있기를 바라며. 

 

1. 요네자와 호노부, 권영주 옮김, 『빙과』, 엘릭시르, 2013, p.12.

2. 박현주, “해설, 장밋빛 추억은 시간의 조카”, 위의 책, p.254.

3. 요네자와 호노부, 권영주 옮김, 『쿠드랴프카의 차례』, 엘릭시르, 2014, p.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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