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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의 정원 생활] 다산 정약용, 정원에서 길러 낸 맑고 고상한 삶
  • 환경과조경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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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과 깊이 교류했던 초의선사가 1812년 초당을 방문하고 나서 그린 다산초당도(개인 소장). 초당과 연못 주변에 초화류와 화목이 화사한 꽃을 피웠고 파초와 괴석까지도 갖췄다.

 

다산, 조선 최고의 실학자이자 개혁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조선 역사상 최고의 실학자이자 개혁가로 칭송받는 인물이다. 과학, 의학, 공학에서부터 철학, 경제, 사회, 문학, 그리고 시와 그림까지 넘나들며 500여 권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다산이 ‘조선사 최고의 학자이자 개혁적 경세가’가 된 배경에는 걸출한 인물 두 사람과의 인연과 만남이 있다. 다름 아닌 성호 이익과 정조대왕이다. 성호가 다산에게 경세치용과 사회 개혁의 꿈을 꾸게 한 이라면, 정조는 그것을 실현할 수 있게 해 준 장본인이라 할 수 있다. 16세부터 성호의 책을 읽은 다산은 그를 평생 마음의 선생으로 삼고 공부하며 실학 사상을 계승하려 애썼다. 20대의 젊은 다산이 지닌 재능을 간파한 정조는 규장각으로 불러 여러 학자와 교유하며 공부에 매진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초계문신抄啓文臣’, 일종의 ‘정조 스쿨’에 선발되어 여러 차례 정조와 대면하며 학문을 논한 것은 다산의 성장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후 다산은 실학을 바탕으로 한 경세치용의 정책 제시와 함께 거중기와 한강 배다리 등의 실용 기술로 정조의 기대를 충족시켰다. 결과적으로 다산의 일생은 정조의 통치 시기 전후로 급격한 변화를 맞게 된다.

 

다산의 대표 정원들

일생을 통해 다산이 만들고 즐긴 정원은 여럿이다. 어릴 적부터 고향 능내 인근의 한강변과 수종사 등의 명소를 찾아 자유롭게 노닐며 감수성을 키웠던 다산은 장성하기 전까지 부친을 따라 다니며 전국 각지의 이름난 경승을 즐겼다. 17세에는 아버지가 화순현감으로 근무하던 관아 주변의 정자 차군정此君亭에서 지역 선비들과 함께 섬돌과 잔디로 정돈된 단 위의 노송과 대숲의 바람 소리를 즐기기도 했다. 부친이 임지를 예천으로 옮긴 19세에는 지역의 누각과 정자를 조사하고는 관아 동측에 폐허로 남아있던 정자 반학정伴鶴亭을 발견하여 수리한 후 수목과 초화 가득한 그곳을 자신의 공부방으로 삼았다. 22세에는 남산 회현동 재산루로 이사했는데, 당시 그곳은 남산 북사면의 승지로서 경치가 아름다웠던 곳이었다. ...(중략)...

 

성종상은 서울대학교에서 조경을 공부한 이래 줄곧 조경가의 길을 걷고 있으며, 지금은 대학에서 조경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선유도공원 계획 및 설계, 용산공원 기본구상, 2013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장 마스터플랜, 천리포수목원 입구정원 설계 등이 있다. 최근에는 한국 풍토 속 장소와 풍경의 의미를 읽어내고 그것을 토대로 풍요롭고 건강한 삶을 위한 조건으로서 조경 공간이 지닌 가능성과 효용을 실현하려 애쓰고 있다.

 

환경과조경 352(2017년 8월호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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