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뭐하는 분이세요?” H가 물었다. “잡지사 다녀요.” 눈을 동그랗게 뜬 H가 다시 물었다. “그럼 인터뷰하고 글 쓰는 일 하세요?” 이런 식으로 대화가 흐르면 머리가 분주해진다. ‘내가 하는 일이라….’ 회사에 두고 온 일들이 마감 순서대로 머리에 떠오른다. “음… 네… 취재를 하지요.” 명료한 답을 원하는 게 분명할 H에게 전문지 기자의 정체성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포기하고 배에 힘을 주고 다리를 들어올렸다.
동그란 눈과 탄탄한 몸매가 인상적인 H는 가볍게 시범을 보인다. 나 역시 가볍게 따라하다가 “으악” 소리를 지르며 철퍼덕 다리를 떨어뜨렸다. 내가 물었다. “운동 계속하면 저도 몸이 유연해질까요?” “꾸준히 하면요.” H가 말했다. “글 쓰는 일은 어려운 것 같아요.” “계속 쓰면 늘어요.” 그렇게 대답해 놓고는 ‘과연 그런가’라고 생각한다. 곧 내가 몸치에서 벗어나는 데에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거란 당연한 결론을 내렸다. ‘쳇 세상에 쉬운 일이 없네.’ 얼마 전 시작한 필라테스 수업이 끝나고, 다시 회사로 돌아가는데 서영애 소장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이번 달 시네마 스케이프의 영화 ‘걸어도 걸어도’에 대한 이야기였다. 설에나 아들을 다시 볼 거라 아쉬워하는 아버지와 달리, 설에는 오지 않겠다고 말하는 아들 이야기에 공감하지 않는 자식들이 있을까. 서 소장의 원고는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으로 마무리된다. “자식들이란 늘 한발 늦게 깨닫죠. 그리고 지면이 부족해서 쓰진 못했는데,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도 보면 딱 우리 얘기에요. 아버지는 아들이 화가가 된 게 못마땅해서 그림 복원하는 작업을 ‘수리’라고 깎아내려요.” 처음 기자가 되었을 무렵, 내가 설계를 하길 바랐던 아버지는 친척들 앞에서 “취미로 할 일을 하고 있다”며 못마땅한 심기를 드러냈다. 당시 아버지의 눈에는 글이나 쓰는 일이 생산적인 일(혹은 밥벌이?)로 보이지 않았던 게 아니었나 싶다. 지금도 아버지는 내가 어떤 일을 하는지 잘 모르실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이번 달은 바쁘다는 핑계로 연락도 못하고 있는 아버지께 소식을 전한다는 구실로 홍보를 몇 가지 해볼까 한다.
파리의 공원들
전문지 기자가 하는 일이 인터뷰를 하고 기사를 쓰는 것이라고 한다면 반만 맞는 이야기다. 취재 기자와 편집 기자가 분리되어 있는 일반적인 일간지 기자들과 달리 조경이나 건축 분야의 전문지 기자들은 전천후가 되기 마련이다. 기획부터 취재, 편집까지 맡고 때로는 사진 촬영이나 제작에도 관여한다. 그래서 ‘잡지를 만든다’는 표현이 익숙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대개는 잡지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전문적인 내용이 담긴 단행본을 만드는 일도 한다.
지금 내가 편집하고 있는 단행본은 『파리의 공원들』이다. 파리는 대표적인 관광지기도 하고, 파리의 공원 역시 이런저런 소설이나 영화에서 많이 소개되어 가보지 않았어도 마치 잘 아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렇지만 직접 가본 공원을 꼽으라면 아마 다섯 손가락이면 충분한 이들이 대부분이 아닐까. 『파리의 공원들』은 파리에 있는 500여 개의 도시공원 중 규모나 성격 면에서 의미가 깊은 스물두 개 공원을 역사적으로 또 공간적으로 살펴보는 책이다. 파리의 도시공원을 통해 프랑스의 역사와 파리라는 도시의 변화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덤이다. 9월 발간 예정이다. 덕분에 줄기차게 야근 중이다.
정원에 차린 식탁
전문지는 특정 분야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그 분야의 다양한 행사와 관련되기 마련이다. 포럼이나 강연을 기획하기도 하고 공모전을 주최하는 매체도 있다. 이때 기자들은 기획자이자 코디네이터인 동시에 현장의 여러 잡일을 처리하는 스태프이기도 하다. 포럼이나 강연을 준비하면, 주제 기획부터 연사 섭외, 그리고 마지막 뒷풀이 동선까지 치밀하게 짜야 한다. 공모전을 기획한다면 심사위원 섭외부터 전시 장소 섭외까지 그 고민의 폭이 상당히 넓다. 환경과조경 역시 조경비평상을 운영하고 있고, 지난해부터는 대한민국 환경조경대전을 공동 주최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올해는 10월에 월드컵공원 내 평화의공원에서 열리는 서울정원박람회를 주관한다.
올해 처음 참여한 서울정원박람회 준비로 모두들 전에 없이 분주하다. 편집팀, 디자인팀, 마케팅팀 너나할 것 없이 각자 관심사(?)에 따라 프로그램을 맡았다. 나는 공원에서 먹는 일의 즐거움에 대해 줄기차게 떠들어왔던 만큼 ‘정원에 차린 식탁’이란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다. 셰프가 텃밭 작물을 이용한 레시피를 선보이고, 가족이나 연인이 함께 따라해 보며 시식하는 것이 기본 방향이다. 정원에서 채소와 과일, 허브 등을 키워 먹는 일의 역사야 유구하지만 축제에서 요리 프로그램이 기획된 것은 주요 방송 아이템으로 자리 잡은 먹방이나 요리 프로그램의 영향이 크다. 최근 셰프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도 한몫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 관련 방송 프로그램은 ‘삼시세끼’다. 섬마을이나 농촌에 던져진 남자들 너덧이 하루 세 끼 밥을 해먹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다인 이 프로그램에 대한 지인들의 공통된 반응은 ‘평화롭다’는 것이다. 복잡한 도시의 현실과 단절된 한적한 시골에서 출연자들은 갯벌에서 조개를 캐고, 밭의 잡초를 뽑고, 닭에게 모이를 주고 알 낳기를 고대하면서 하루를 보낸다. 그렇게 구한 재료로 한 끼 식사를 만들어 먹는다. 그 단순함이 우리에게 평온함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밥벌이에 바쁜 나머지 이러한 노동을 생략한 채 간편하게 조리한 음식을 늘어놓고 TV를 보면서 이러한 원초적 노동의 즐거움에 대한 그리움을 달랜다. 그들을 보면서 농사를 지어볼까, 아니면 뜻밖에 귀여운 오리를 키워볼까 하는 생각을 몇 초쯤 한다. 하지만 단순한 삶과 실제 우리 일상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러한 갈증을 달래주는 것이 텃밭 정원이다. 화분 하나만으로도 만들 수 있는 텃밭은 (갑자기 늘어나는 벌레나 귀찮음을 이겨낸다면) 꽤 현실적으로 도시인의 삶에 녹아든다.
‘정원에 차린 식탁’은 최근 높아진 요리에 대한 관심에도 기대고 있지만 단순한 노동의 즐거움, 손수 키워 먹는 재미를 다양하게 확장하려는 욕구에 부응하기 위해 준비한 기획이다. 10월, 정원에 차린 식탁에 여러분을 초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