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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문(石門) 안 넓게 펼쳐진 곳, 산을 낀 물가 요지에 초가 서너 채를 짓는다. 앞마당엔 가림벽을 치고 온갖 화분을 놓되 국화는 적어도 48종을 구비하도록 한다. 그 옆으로는 뒷산에서 대나무 홈통으로 끌어 온 물을 모아 작은 못을 파고서 연과 붕어를 기른다. 연못물은 인접한 남새밭으로 흐르게 하는데, 잘 구획된 그곳엔 여러 가지 채소 원예들이 물결치듯 무늬를 이룬 채 심겨져 있다. 텃밭 주위는 찔레꽃으로 둘러서 오뉴월 뜨거운 햇볕 아래 밭일하려는 이의 코를 즐겁게 해준다. 사립문 밖 산기슭 바위에 작은 초정을 두어 무성한 숲과 맑은 계류가 이루는 빼어난 경치를 즐긴다. 초정은 대나무로 난간을 둘러 소박한 운치를 더한다. 시내 옆에는 넓은 전답을 두어 굳이 세상에 나가지 않아도 먹고 살만한 터전을 확보한다. 그 너머로는 넓은 호수가 있어 연, 토란, 마름, 가시연 등이 가득한데, 달 밝은 밤이면 작은 배를 타면서 친구들과 시와 음악, 그리고 술로 흥취를 즐긴다. …”
다산 정약용 선생이 이상적인 집의 면모를 설명한 글이다. 선비로서 본분을 지키며 살아갈 거처가 어떠해야 하느냐는 제자의 질문에 답한 편지에 실린 내용이다. 이상적인 주거지의 면모를 상상으로 그려본 것이니 평소 마음속에 품고 있던 바가 잘 드러나 있다. 그런데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바람직한 집을 설명하면서 건물보다 정원과 주변 환경 설명에 훨씬 더 많이 할애하고 있다는 점이다. 건물은 초가 서너 채와 초정만 등장할 뿐이다. 산과 계류, 바위와 숲 등 자연 환경 요소가 더 중시되고 있다. 집안 가구로도 책장, 책상, 탁자 정도만 언급될 뿐이고 1,400여 권의 책과 향로가 오히려 더 강조된다. 너른 호수의 뱃놀이와 음악, 술을 함께할 친구, 참선과 설법, 시와 술로 가슴속 생각을 기꺼이 나눌 스님, 차와 누에를 함께 치며 미소를 주고받는 부인도 등장한다. 결국 다산이 그린 이상적인 주거는 크고 화려한 집이 아니라 산과 물이 잘 어울린 경승지에서 연못과 꽃이 있는 정원과 텃밭, 너른 호수 등을 잘 갖추고서 친구, 승려, 부인 등 마음 맞는 이들과 시와 음악, 술, 뱃놀이 등으로 운치 있는 삶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그러한 정경이 근사한 곳 중 하나가 ‘다산초당’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비록 귀양처이긴 했지만 자신이 그린 이상적 거처에 가까웠다 하니 다산초당에서의 삶이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중략)...
성종상은 서울대학교에서 조경을 공부한 이래 줄곧 조경가의 길을 걷고 있다. 연구소와 설계사무소에서 기획부터 설계, 감리에 이르는 실무를 두루 익힌 후 지금은 서울대학교에서 조경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93 대전세계엑스포 조경계획 및 설계, 인사동길 재설계, 용산국립중앙박물관 조경설계, 신라호텔 전정 설계 및 감리, 선유도공원 계획 및 설계, 용산공원 기본구상, 2013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장 마스터플랜, 천리포수목원 입구정원 설계 등이 있다. 최근에는 한국 풍토 속 장소와 풍경의 의미를 읽어내고 그것을 토대로 풍요롭고 건강한 삶을 위한 조건으로서 조경 공간이 지닌 가능성과 효용을 실현하려 애쓰고 있다.
* 환경과조경 346호(2017년 2월호) 수록본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