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십육년 가을 어느 저녁답
저녁 여섯 시, 지구가 서서히 기울고 있고, 멀리서 나는 자판 두닥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다. 새벽 세 시 반에 겨우 잠이 들었지만 악몽에 시달리다 몇 번씩 현실이 아님을 확인하고서야 다시 잠이 들었던 밤이었다. 미몽에 책상이 뿌레카 소리를 내며 떨었다. 전화기에 뜬 하얀 글자 ‘김정은 팀장’이 눈에 들어왔지만 머릿속은 희뿌옇게 몽롱했다. 그녀의 약간 무거우면서 꽉 찬 허스키한 목소리가 몇 개의 단어 속에 다른 운율을 포개는 순간에야 그녀와 관련된 기억을 소환할 수 있었다. 그녀는 먼저 지난 토요일 환경조경대전 심사의 부재를 확인했다. 아팠다고 간단하게 말했다. 금요일 저녁 어릿광대의 노래에 맞춰 무대 위의 기울어진 식탁에 매달린 배우들의 곡예가 속을 뒤집은 것은 아니지만, 1막이 끝나기도 전에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달려가야 했고, 이후 위 아래로 몸속의 모든 내용물이 용암 흐르드키 쏟아져 나왔다고 얘기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틀에 걸친 분출과 실신, 그 낡은 기계의 자각 증상 앞에 그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녀는 에두르지 않았다. 내년 일월에 실을 ‘그들이 설계하는 법’ 꼭지에 글을 부탁한다고. 얘기 중에 언젠가 전화가 올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냐고, 의문 부호가 아니라 마침표가 찍힌 말을 했다. 어떻게 거절을 해야 할지 생각해 보았지만 답이 될 만한 문장까지 생각이 나아가지 못했다. 사실 이유는 있었는데 그게 거절할 수 있는 답은 되지 못했다. 그래서 답이 되지 못하는 이유를 가진 까닭에 그는 ‘그들’이 바라보게 될 ‘그의 설계’에 대한 진술을 얼버무리듯 약속했다. 전화를 끊기 전 그녀는 십일월 초에 김모아 기자가 전화를 할 것이라고 뒤를 닫았다. 그리고 열아흐레 뒤에 김모아 기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소금 기둥이 되고 싶지 않으면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 그것도 아직 몸 안에 소금기가 남아있을 때 얘기겠지만.
연료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커피를 올린다. 모카주전자의 물그릇 안전밸브 중간까지 물을 붓고, 깔대기처럼 생긴 커피바구니에 곱게 간 커피가루를 채운 뒤 주전자 윗부분인 커피그릇을 연결해 불 위에 올려놓는다. 물이 끓는 사이 넋을 놓고 간밤 꿈에 나왔던 까마귀를 따라 날갯짓 두어 번 하고 들어오면 불에 탄 까마귀 날개 빛의 커피가 올라왔던 관을 타고 소리 없이 흘러내린다. 물그릇의 높아진 압력이 뜨거운 물을 밀어 올리면 중간의 커피바구니에 담겨 있던 커피가루를 통과해 커피가 만들어진다. 커피가 올라오는 그 짧은 시간에 검은 빛은 짙은 갈색으로 바뀌고 나중에는 옅은 갈색이 올라오면서 마지막 물을 뿜어내느라 소리가 요란해진다. 일순 조용해지면 불을 꺼야 한다. 가끔 물그릇의 압력이 높은 날에는 안전밸브로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기도 하고, 불 끄는 것을 잊어버려 커피그릇의 커피가 끓어 넘치기도 한다. 두어 해 전에는 플라스틱 손잡이가 모두 녹아내렸다.
커피가 준비됐다. 지극히 개인적인 기호이고 어떤 면에서 일반화된 것이지만, 카페인은 니코틴을 부른다. 똑같이 몸 안으로 들어온 니코틴은 늘 카페인에 굶주려있다. 언제부터인가 이 둘이 기계화된 몸을 태우는 연료가 아닐까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기계 속에서 신경계와 소화계를 유린하는 동안 북한산 자락의 먼 능선이 다가왔다 물러나고, 한양도성 성곽 위의 나무들은 단풍을 거둬 잎을 떨구기 시작한다. 날이 맑은 날에는 잔별들이 남아서 설렁이는 바람을 뚫고 마지막 미약한 빛을 떨구고 나면 동녘에 붉은 기운이 서린다. 송진 가루를 슬쩍 묻힌 바람이 부는가 싶으면, 북태평양 미드웨이 섬에서 보낸 습기를 머금기도 하고, 고비 사막의 모래가 박혀 있는 대기로 주변이 아득해진다. 담배 한 개피가 타는 동안의 자연은 늘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지만.
그렇다, 설계에 대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할 말을 굳이 찾자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딱히 있는 것도 아닌, 아홉 시 정각이면 움직이기 시작하는 컨베이어 벨트의 베어링이 된 지 오래인데. ...(중략)...
도구
책상 위에는 초벌그림을 그리기 위한 몇 개의 도구가 있다. 1,800×900mm 크 기의 책 상 위에 달려 있는 길이 900mm짜리 아이자, 두 개의 플라스틱 판을 붙이고, 자의 양쪽 끝에 두 개씩 네 개의 바퀴에 꼰 철사줄을 8자로 걸어 책상에 고정시켜 놓도록 되어 있어 좌우가 놀지 않고 평행으로 움직인다. 밑판에는 여섯 개의 구슬이 달려 있어 위아래로 움직임을 돕고, 위판의 왼쪽에 아이자를 고정시킬 수 있는 돌림 단추가 있다. 아이자를 이용하면 곧은 직선을 일정한 간격으로 그릴 수 있다. 그러나 설계를 하면서 쓰는 아이자는 단순히 직선을 그리는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의 접점을 확인시켜주는 먼 지평선을 내포한 도구다. 계획지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그은 긴 직선 하나, 중력의 무게를 드러낸 가로선은 하늘의 끝이거나 땅의 표면, 여기에 길을 내고, 나무를 심고, 데크를 깔고, 의자를 놓아 사람들을 부른다. 그도 아니면 지평선 속으로 뚜걱뚜걱 걸어 들어가 풍경이 되어버리거나.
이 수평선 위에 각도삼각자를 놓고 수직선을 세우면 중력을 거스른 인간의 의지가 곧추서게 된다. 사실 ‘곧추서다’는 조경의 어휘는 아닌 것 같다. 수직 길이 300mm에 45°각을 가진 자는 중심점에서 45°까지 눈금과 치수가 있고 다시 반대로 90°까지 치수가 매겨있다. 다 벌리면 ㅂ자 모양이 되고, 삼각자의 밑면을 어디로 잡는가에 따라 이 치수들이 유용해진다. 각도삼각자는 삼각자에 분도기의 기능을 합친 진화된 도구다. 어떠한 선을 긋든 선에는 시작점이 있고, 각을 내포한 방향을 가지게 된다. 그것이 계속 달려가면 방향성이 생기고 자꾸 내달리려는 운동성으로 바뀐다. 그러나 이 운동은 광활한 대지를 달려가는, 무질서한 욕망을 다스리는 더 없는 고삐인 각도삼각자에 의해 규정되고, 도면 밖을 벗어나지 못한다. 허면 도면은 그것들을 통제하는 억압 기제인가, 규범으로 세운 아름다운 정원인가
모형자(templates) 혹은 ‘빵빵이’라 부르는 도구는 두 말 할 것도 없이 나무를 상징한다. ‘빵빵이를 돌리다’는 ‘나무를 심다, 식재 계획을 하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물론 거기에 무의식적인 자기 비하와 냉소의 뉘앙스를 내포한다 해도. 그런데 이 모형자는 도형의 형태에 따라 타원형, 삼각형, 사각형 그리고 각종 도면용 기호에서 새와 사람이 있는 것까지 다양하다. 그래도 역시 모형자의 꽃은 둥근 빵빵이다. 빵빵이로 그려진 원은 광장이 되고, 둥근 긴 의자가 되고, 못이 되고, 가로등이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조경에서 쓰는 그 수많은 나무를 품고 있다. 하나의 원을 그리고 거기에 ‘계수나무_R15, H7.0’ 이라고 하는 순간 그것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빛깔과 형태를 갖고 공간을 만든다. 그리고 이 나무들이 자라면서 시간성을 갖는다. 무아지경에서 빵빵이를 돌리다보면 어느새 거대한 숲을 마주하게 된다. 아니 숲을 꿈꾸게 한다. 비록 우리가 그린 원이 우주의 섭리와 형태적 완결성에 다다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모형자의 원을 따라 한 바퀴 원을 그리고 나면 거기서 한 세상은 조용히 문을 닫고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컴퍼스는 우리말로는 걸음쇠, 양각규(兩脚規) 또는 양각기(兩脚器)라 불리는데, 두 개의 다리가 톱니로 맞물려 있거나, 철판의 탄성을 이용해 두 개의 다리에 축쇠를 연결해서 돌림쇠를 걸어 놓은 것이 있고, 간단하게 나사로 조인 세 종류가 있다. 멀리 고구려 환문총 벽화나 파르테논 신전에서도 쓰임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오래된 도구로, 기하학과 건축, 미학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지적 여정과 함께 해 왔다. 너무 거창하게 얘기했지만 컴퍼스는 도면이 갖고 있는 축척의 의미를 가장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도구다. 하나의 중심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지만 중심은 사라지고 거대한 원의 일부인 호만을 우리는 식별하거나 빌려 쓴다. 그러니까 도면이라는 한정된 영역 안에서 늘 그 존재의 일부만을 드러냄으로써, 우리가 하고 있는 작업의 제한된 범위를 인지시키면서 동시에 그것이 가지고 있는 온전한 모습에 대한 상상 속에 우리를 놓아둔다. 또한 치수 없는 순수한 작도를 통해서 드러나는 황금비나 루트 비례는 컴퍼스가 만든 궤적을 따라가야만 그 전모를 알 수 있다.그래서 컴퍼스는, 세상은 보이지 않는 것과 두 다리가 걸어갔던 궤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비례척(比例尺) 또는 비례자, 영어로 스케일(scale)은 미터법에 따른 거리를 일정한 비율로 줄여서 눈금 매겨 놓은 자다. 설계에서 주로 쓰는 삼각비례자, 일반적으로 삼각스케일이라 부르는데, 세 개의 면에 모두 여섯 개의 서로 다른 축척이 표시되어 있다. 이 여섯 조합은 1/25, 1/50, 1/75, 1/100, 1/125, 1/150, 1/200, 1/250, 1/300, 1/400, 1/500, 1/600 중에서 만든 회사와 나라 또는 전문 분야에 맞게 선별 조합된다. 삼각비례자가 보여주는 축척은 실제 거리와 도상의 거리 간 비율을 나타낸 것으로, 1인용 의자에서 10헥타르가 넘는 공원까지 A1 도면에 구겨 넣을 수 있는 노동력이 집약된 마술을 펼칠 수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땅에 대한 공감각적 인식을 도상에서 직조하고 도상에서 했던 구축적 사고를 땅에서 풀어내는데, 이 눈금과 눈금 사이에 보이지 않는 틈이 있다. 만약 그녀 또는 그가 운이 좋아 이 신비한 축척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면 이이명의 요계관방지도(遼薊關防地圖)1가 만들어낸 광대한 공간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트레이싱지가 잉크를 먹어 우굴해지는 선을 따라 주변으로 낙서를 하는 것은 마치 길을 걸으면서 주변의 간판을 쳐다보고 가게를 기웃거리는 것과 같다. 비 온 뒤 웅덩이에 물이 고이듯 생각이 고여 만년필의 촉이 한 곳에 오래 머물거나 자주 지나가면 구멍이 난다. 촉 굵기 1.1의 만년필은 굵은 각인을 남긴다. 뭉둥그려지고 모호한 생각들이 지나간 흔적 그대로다. 여기서 조금 더 생각이 정제되면 그 반 굵기의 족적을 남기는 만년필이 따라간다. 만년필은 자(尺)하고 상극이다. 만년필은 오구(烏口)가 아니다. 로트링펜은 더더욱 아니다.
볼펜은 빠른 생각에 반응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생각을 무화시키고 저 혼자 형태를 잡아 길을 간다. 한참을 달리다 보면 차바퀴 구르는 소리와 바람 소리 그리고 엔진 소리 이외에 아무 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 풍경도 보이지 않는다. 볼펜에는 구슬이 달려 있다. 껄끄러운 트레이싱지 위를 빠르게 질주하기를 반복하다 보면 유화의 미티에르(la matière) 기법과 같은 양감을 가지면서 잉크가 덧칠된 곳이 반들반들하게 빛이 난다. 이때 조심해야 한다. 볼펜의 잉크가 마르는 데 일정한 시간이 필요한데, 잘못하면 손도장을 찍어 놓은 것처럼 온 계획지에 발자국이 남는다.
홀더(leadholder)는 심(心)을 갈아 끼워서 사용할 수 있는 기계식(器械式) 필기도구(mechanical pencil)의 하나다. 우리말로 하면 심잡이연필 쯤 되려나. 유럽에서 정확히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6세기 중반에 홀더의 원형이 되는 기구들이 있었다고 한다. 홀더는 샤프와 달리 아주 간단하고 원초적인 구조로 되어 있다. 몸체가 있고 그 안에 심을 넣는 대롱과 대롱에 감싸인 스프링, 그 끝에 심을 잡아주는 심잡이(clutch), 선단(tip) 그리고 반대쪽 끝에 누름단추(knob)로 구성되어 있다. 상세도를 그릴 때 굳기 에이치H의 심을 심갈이로 끝이 뾰족하게 갈아서 쓰면 볼펜으로 그릴 때와 다른 세밀한 부분까지 다가갈 수 있다.
설계충設計蟲 2
책상을 깨끗이 비운 뒤, 플로터로 출력한 밑도면을 깔고 종이테이프로 고정한다. 그 위에 계획지를 얹어 똑같이 위아래의 가운데에 종이테이프를 붙인다. 계획지 위로 밑도면의 검은 선이 스며 나오면서 노오란 반투명의 계획지에 벌써 누군가 휘갈겨 놓고 간 느낌을 받는다. 자세히 보고 있으면 선과 선 사이에 공극이 커지면서 어떤 물컹거리는 유체(流體)를 대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보이지 않는 유체는 머릿속이 만들어낸 환영일지 모른다. 멀리 환영의 뒤로 지난 주에 보고 온 대상지의 모습이 보인다. 길, 만들어지지 않은 길, 나무, 칡넝쿨이 타고 올라간 참나무숲, 흙더미, 철근이 삐져나와 있는 옹벽, 쌓다 멈춘 석축, 햇빛, 무차별로 쏟아지는 햇살. 말 소리도 들린다. 대상지를 오르락내리락 하며 사진을 찍는 모습도 보인다. 첫 문장을 쓰기 위해 휘적휘적 낙서 하드키 생각의 실타래를 찾기 위해 한참을 더 공극을 들여다 본다. 소리 없이 오전이 간다.
점심은 면을 먹기로 한다. 우선 중국집인지 국수집인지 정해야 한다. 국수라고 정했다면 칼국수인지, 잔치국수인지, 제주국수인지 묻는다. 칼국수는 사골의 농도에 따라 정해야 하고, 잔치국수는 멸치국물 맛에 따라 다르고, 제주국수는 돼지고기 육수에 편육이 올라온다. 잔치국수는 부산 구포에서 만든 소면, 제주국수는 중면을 쓴다. 수제비집에도 국수가 있다. 이 겨울에 막국수는 이인분을 주문해야 한다. 혜화칼국수, 국시집, 우리밀국시, 엄마손국수, 구포국수, 올레국수, 소문난국수집, 성북동수제비집, 명문막국수, 설계는 매 순간 선택을 해야 하고, 선택의 기준은 상황에 따라 늘 다르다. Bon Appétit.
둘러앉아 이야기를 한다. 이야기를 듣는다. 대상지와 주변의 관계, 지층의 역사, 지침 사항 혹은 의뢰인 주문 사항, 물리적 상황, 거기다 인상 비평까지. 자리를 빠져나와 다시 공극을 마주하고 앉는다. 몇 개의 선과 낙서, 이미지, 낱말이 파편처럼 흩어졌다 쌓이기를 반복하고, 생각이 대지 경계 안에서 둥실 떠다니며 부유한다. 이 모호한 유체 속을 얼마나 떠다녀야 할지 정해진 것은 없지만 늘 시간의 압박을 받는다. 그러다 낱말이 이미지를 만나거나 이미지가 물리적 형태를 붙잡으면서 자그마한 개념 평면이 하나 그려진다. 이 개념이 계획안으로 발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다시 생각의 수레바퀴를 굴려야 한다. 이쯤 되면 도면 작업할 축척에 맞는 평면을 한 번 더 출력하고 그 위에 계획지를 덮는다. 이번에는 가야 할 길이 어렴풋하지만 정해져 있으니까 망설임은 덜하다. 그래도 ‘어렴풋’이 계속 발목을 잡아 손놀림이 둔하다.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닐 때는 만년필이 제격이다. 정확히 말하면 잉크가 만들어내는 뭉개지는 듯한 선이 생각의 모습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전체로 보면 여러 과정의 하나이겠지만, 한 번 계획지를 펼쳐 그리면 그것은 그것 자체로 완결되어야 한다.
자 없이 그린 초벌이 한판 완성되면 첫 번째 계획지 위에 다시 계획지를 얹고 그린다. 첫 번째 계획지를 빼내고 두 번째 계획지 위에 새 계획지를 얹어 필기도구를 바꾸어서 개략적인 치수를 따져가며 그린다. 볼펜은 의외로 까다로운 필기구다. 힘 조절을 잘 해야 원하는 선을 그릴 수 있다. 이 개략적인 치수 속에서 조금씩 형태의 미묘한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하지만 여전히 모호한 평면 속에 머물 때는 방법이 없다. 더 묻고 더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더 그려야 한다. 두 번째 계획지를빼내고 새 계획지를 얹어 그린다. 세 번째 계획지를 빼 내고 다시 계획지를 얹어 그린 뒤 보라색 색연필로 녹지를 칠한다. 네 번째 계획지를 빼내고 새 계획지를 얹어 나무를 심는다. 이 나무는 그냥 덩어리로서 나무다.
한 판의 초벌그림이 완성되면, 스캔을 받고, 캐드 프로그램에서 불러들여 캐드로 그리는 도면 작업이 진행된다. 이렇게 나온 기본 평면을 가지고 부분별 계획에 들어간다. 혹 소장이 의기 충만해지면 모형을 만들어 보자는 얼척 없는 주문이 들어오고, 한켠에서는 우드락을 사온다, 칼질을 한다, 칙칙이풀을 뿌린다 요란해지면서 사무실은 도떼기시장으로 바뀐다.
그 사이 기본 평면 위에 덩어리로만 잡아 두었던 나무가 이름과 형상을 갖게 된다. 바닥의 마감 재료가 정해지고, 돌이라면 문양과 크기를 디자인한다. 시설물은 부분 부분 더 확대된 평면을 바탕으로 하나씩 디자인 해나간다. 점점 확대된 축척의 그림들이 그려지고, 한 쪽에서 나무와 여러해살이풀에 대한 상세 설계가 진행된다. 시설물 상세 계획과 디자인까지 나오면 모두들 바빠진다. 긴 캐드 작업 속에 한 벌의 도면이 꾸려지면 검토하고 수정하고 다시 검토하는 사이에 내역 작업으로 넘어가고, 소장은 다시 수정하려 들고, 실장은 수정은 없다고 못을 박는다. 납품 날짜가 임박한 것이다. 검토본을 보내고서 확인을 받으면, 최종본 제본을 한다. 그러나 이건 아주 행복한 일정으로 진행된 프로젝트일 때 그러하고, 대개는 이런저런 이유로 연장되고 검토와 수정이 반복되면서 기약 없이 납품을 한다.
설계 기계
도면은 환하게 빛나지만 선은 보이지 않는, 도구를 내려놓은 채 비로소 먼 산을 보며 담배 한 대 피울 수 있는, 산 그림자가 마을에 길게 드리우고 파란 빛깔의 하늘과 선명한 경계를 이루는 시간을 그림책 작가 안 에르보(Anne Herbauts)는 ‘파란 시간’3이라 이름했다. 지금은 파란 시간이다. 가끔, 사실은 자주 설계가 힘들다는 말을 내뱉지만 엄밀히 말하면 설계 자체가 힘든 것인지, 설계를 하고 있는 이 상황이 힘든 것인지 모호해질 때가 많다. 이 모호함은 규명되지 않은 채 삶이 ‘원래 힘든 걸로’ 귀결되기 일쑤여서 더 이상 들여다보지 않게 되곤 하지만 그래도 파란 시간인 까닭에 무언가 생각이라는 것을 아니면 꿈이라도 꾸어야 하지 않나 싶어진다.
“사람이 진정 사랑하면서 섹스를 할 때에는 언제나 자기 혼자서, 그리고 한 명의 타인 또는 타인들과 함께 기관 없는 몸체를 이루게 된다. 기관 없는 몸체는 기관들이 제거된 텅 빈 몸체가 아니다. … 따라서 기관 없는 몸체는 기관들에 대립한다기보다는 유기체를 이루는 기관들의 조직화에 대립한다. 기관 없는 몸체는 죽은 몸체가 아니라 살아 있는 몸체이며, 유기체와 조직화를 제거했다는 점에서 더욱더 생동하고 북적댄다.”4
중간중간 건너뛰면서 읽다가 말기를 십여 년 째 하는 책, 그 책의 중간에 가면 ‘유목론 또는 전쟁 기계’라는 항목이 나온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생각을 쫓아 설계에 대한 생각을 이어가는 것이 가능할까. 못 할 것도 없겠다. 날 어두워 이미 도구는 내려놓았고, 밤은 길고, 술은 넉넉하니 말이다.
‘한 명의 타인 또는 타인들과 함께 기관 없는 몸체’를 이룬 설계 기계. 사무소라는 장소를 바탕으로 한 것도, 회사라는 경제 활동 조직의 단위도 아닌, 설계라는 행위만을 중심으로 규정할 수 있는 움직이는 몸체.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으면서, 그 모든 것에 속한 채 설계라는 행위 속에서만 존재하는 불운의 현재성과 찰나(刹那)의 현존성을 가진 유체(流體). 비록 그들이 엔지니어링사업자 또는 기술사사무소, 법인 또는 개인사업자라는 국가 체제體制에 속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의 유일하고 완전한 현존은 계약 속에서만 가능하고 유지되는 객체. 그러나 이 계약이 설계 기계를 작동시키는 동력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만으로 온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 설계 기계의 처음 작동과 멈춤이 계약의 한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설계 기계를 지속적으로 작동시키는 동력은 설계라는 일 자체가 가지고 있는 내재적 속성에 기인한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얘기한 ‘창조적 도주선’이란 속성은 기계 스스로 경계를 허물어 새로운 지평으로 나아가려는 욕망을 동력 삼아 움직인다. 그래서 계약은 설계 기계와 체제가 맺고 있는 최소한의 관계이지 절대적인 관계일 수는 없다. 이것은 설계 기계의 현존성에 배치되는데, 설계 기계가 체제와 관계 속에 모습을 가질 때 그러한 이름으로 불릴 따름이다. 이것이 체제를 벗어나 그 고유한 속성을 유지한 채 나아간다면 우리는 그것을 다른 이름으로 명명해야 할지 모른다. 언젠가 설계 기계는 국가/체제와 계약에 의하지 않고도 스스로의 동력으로 움직일 수 있는 불가능을 욕망한다.
‘창조적 도주선’은 체제가 가져보지 못한 새로운 해법/계획안을 뜻한다. 그렇게 읽는다. 그래서 창조적 계획안은 낯설고 전복적이다. 설계 기계의 존재 이유이기도 한 이 창조적 계획안은 설계 기계가 체제 안에서 그 작업을 수행함에도 그 체제의 바깥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르게 말하면 설계 기계는 체제에 편입되는 대신에 체제를 가로질러 간다. 설계 기계는 조직을 수직으로 관통하며 의견을 내고, 대안을 제시하며, 새로운 해결책을 통해 조직의 기반을 흔든다. 그러나 설계 기계의 목적은 체제의 해체나 전복이 아니다. 그 많은 창조적 계획안을 체제가 선별적으로 받아들인 이유는 하나다. 체제를 존속하기 위한, 체제 속으로 편입이다. 그래서 그것들은 체제의 입장에서 늘 예외적이고 설계 기계는 예외를 일반화하려 하지만 체제는 단지 예외적으로만 창조적 계획안을 받아들인다. 설계 기계가 수행한 작업은 그 체제를 더욱 굳건히 만드는 역할을 수행할 뿐이고, 체제에 수렴된 일부 설계 기계는 익숙하고 동일한 설계안을 만들어 낸다.
설계를 할 때, 조경은 늘 이중의 탈주를 시도한다. 하나는 평면으로 치환된 대지에 대해 또 하나는 시간에 대해. 동구 밖에서시작된 길은 대문을 지나 마당을 가로질러 현관을 거쳐 뒷뜰을 지나 뒷산까지 올라가고, 마당의 감나무는 옆집의 배나무와 어깨동무를 하고, 뒷산의 참나무숲과 어우러져 앞 강까지 내닫는다. 모든 작업은 대지 경계 안에서 이루어지지만 의식의 지평은 대지 밖으로 뻗어나가고 지평선은 대지 안으로 들어온다. 이것이 첫 번째 질주다. 두 번째 질주는, 하나의 계획안이 만들어지는 순간, 그 계획안은 이미 과거의 것이 되어 버린다. 그러니 계획안이라고 불리는 평면은 어느 시간의 한 순간일 뿐이다. 잎이나고, 나무가 자라고, 어디선가 풀씨들이 날아와 싹을 틔운다.
오늘의 바람은 어제의 바람과 달라 어제 흔들리던 잎이 오늘은 꽃잎 뒤로 숨고, 개미들은 저만치 흙더미를 쌓아 놓는다. 장식담은 담쟁이가 타고 오르고, 경계면은 흐트러진다. 내일 떨어지는 햇볕의 모습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래서 과거의 평면을 그리는 현재의 조경가는 현재에 미래를 가져다 놓기 위해 시간 속으로 광란의 질주를 한다.
그래서 설계 기계의 작업은 도면 안에 머물지만 시선은 늘 도면 밖, 경계선 밖, 시간의 너머를 주시하는 까닭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대지 안의 정원은 만들어지면서 동시에 사라진다. 이것은 구축하면서 동시에 허무는 작업이다. 늘 주변의 경관과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가 되기를 원하고, 원하지 않을 때조차 그것은 하나의 관계 방식의 차이일 뿐이고, 차이 자체가 전체 경관의 맥락 속에서 그 존재성을 인정받을 뿐이다. 이러한 조경의 이중 탈주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조경은 보이는 시선 너머로 질주한다. 정원은 상상의 공간이 되고, 공원은 고원이나 사막을 꿈꾸고, 광장은 큰개자리은하를 품는다. 조경이 언제고 ‘여기’, ‘지금’을 꿈꾼 적은 없다. 조경은 언제나 ‘저기’, ‘어느 날’을 응시한다. 그래서 이 조경 작업을 수행하는 기계는 결국 유기체를 이룬 기관들, 체제, 국가와 대립한다.
“전쟁 기계가 국가에게 정복당해 이미 실존하지 않는 바로 그 순간에 국가로 환원되지 않는 이 기계가 최고도의 환원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승승장구하는 국가에 도전할 수 있는 활력 또는 혁명력을 갖춘 사유 기계, 사랑 기계, 죽음 기계, 창조 기계 속으로 흩어져 들어가는 것이 과연가능할까?”
* 각주
1.
“1706년 이이명이 제작한 10폭의 병풍에 실린 지도,
북경 서쪽의 구릉 지역부터 동해까지 중국과 만주의 국경 지역을 한 폭의 파노라마로 보여준다.”,
개리 레드야드(Gari Keith Ledyard), 『한국의 고지도의 역사』, 소나무, 2011, pp.332~333.
2.
그려벌레. 권윤덕이 쓰고 그린 다음 책들에서 따온 말이다.
『씹지 않고 꿀꺽벌레는 정말 안 씹어』, 2000, 『생각만 해도 깜짝벌레는 정말 잘 놀라』, 2001,
『혼자서도 신나벌레는 정말 신났어』, 2002(모두 ‘재미마주’에서 출간).
3.
안 에르보(Anne Herbauts) 글·그림, 이경혜 옮김, 『파란 시간을 아세요?』, 베틀·북, 2003.
4.
질 들뢰즈(Gilles Deleuze)와 팰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 김재인 옮김, 『천 개의 고원』, 새물결, 2001, p.67.
이수학은 성균관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이원조경에서 4년 동안 일했다. 프랑스 라빌레뜨 건축학교와 고등사회과학대학원이 공동 개설한 ‘정원·경관·지역’ 데으아(D.E.A.) 학위를 했고, 현재 아뜰리에나무를 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