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좋지 않은 예감은 늘 맞는다면서
서울역 고가의 설계는 우리에게 좋은 경험이었을까. 아직도 간혹 나 자신에게 그 질문을 하곤 한다. 작년 초 ‘서울역 고가 기본계획 국제지명 현상설계’의 최종 엔트리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작년 1월부터 설계를 시작해서 4월 말에 제출을 하고 심사위원들을 앞에 두고 작품 발표도 했다. 처음 초청 작가 선정위원회에서 몇 차례의 선정 심의를 거쳐 초청 작가의 한 사람으로 결정되었으니 참가하겠냐고 의향을 물어왔을 때, 바로 그러겠다고 답을 했다. 나 개인으로서도 영광이었고, 우리 설계사무소의 참여 경력이나 경험을 보아서라도 참여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정작 설계공모 지침을 받아 들었을 때 뭔가 느낌이 썩 좋지는 않았다. 초청 작가의 구성을 외국 설계사 넷, 한국 설계사 셋으로 균형을 맞춘 건 괜찮았는데, 초청 작가의 분야별 분배가 이상했다. 건축 분야 다섯 팀, 조경 분야 두 팀이었다. 원래 건축 네 팀, 조경 세 팀으로 추진했지만 건축의 반대로 지금처럼 구성되었다는 얘기를 나중에 전해 들었다. 초청된 조경 설계사가 두 팀밖에 안되고 그나마 두 팀 중 한 팀은 외국 설계사였다. 간단히 말해서 한국의 조경설계사로서는 우리만 초청된 거였다. 그래서 좋다기보다 뭔가 이거 고군분투해야 하는 상황 아니야 하는 찜찜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건 심사위원의 구성을 알았을 때였다. 총 5인의 심사위원 중 조경 한 명, 도시 한 명 그리고 나머지 세 명이 건축 분야였다. 짐작이 되는 바가 있었다.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어떤 결과든 건축의 의지로 결정되는 상황이었다. 그동안 터득한 감으로 볼 때, 안 될 확률이 90%가 넘을 것 같은데 해야 하나 하지 말아야 하나. 게다가 서울시의 디자인 분야를 총괄하는 부 시장 급 고위 공무원 한 사람이 초청 작가 중 한 사람과 매우 친하다는 루머도 있었다. 어쨌든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장밋빛 결과를 그리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도 하기로 했다. 참여 비용도 준다는데, 그리고 참여 팀의 하나라는 자체가 이미 설계사무실로는 자랑할 만한 커리어가 되는 건데, 안할 이유가 없었다. 결과가 뻔할지라도 좋은 안을 한번 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비록 불리하기는 하지만 한번 안을 내서 비교해 보고 싶다는 경쟁심도 불끈 솟기 시작했다. 그래도 건축보다는 조경 쪽에서 푸는 안이 맞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혹 또 누가 알랴. 넓디넓은 하해와 같은 마음이 갑자기 물밀듯이 서울시와 건축계를 강타해, 분야에 상관없이 가장 좋은 안으로 우리 안을 뽑아줄지, 우리의 손을 들어줄지 모르는 일이었다.
10 뭐 고백하자면
우리의 서울역 고가 안은 지금 보아도 마음에 든다. 우리가 해서겠지만 이걸 뽑았으면 서울시민을 위해서 정말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아직도 한다. 하지만 하나 고백하자면, 서울역 고가 설계공모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나는 서울역 고가의 보행 활용 반대론자였다. 특히 나는 서울역 고가를 뉴욕의 하이라인과 같은 선상에서 접근하는 게 그리 적합하지 않다고 보았다. 뉴욕의 하이라인을 좀 아는 사람이라면 서울역 고가가 하이라인과 얼마나 다른 지를 금방 알 것이다. 하이라인에 비해 서울역 고가는 보행 접근성이 좋지 않고, 차도 한가운데에 놓여 있어 공간적 여건도 전혀 다르다. 높이도 두 배 가까이 차이가 난다. 다른 이유에서라면 몰라도 하이라인처럼 만들겠다는 것이 서울역 고가 보행화의 의도라면 성공할 수 없다고 봤다. 그런데 그런 얘기를 공식적으로 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초청 작가로 지명을 받고 나서 바로 견해를 바꿨다. 찬성으로. 서울역 고가 보행화가 꼭 필요한 사업이라고 말이다. 꼼꼼히 들여다보니 제법 필요한 사업이기도 했다. 소신과 지조, 우리 시대에 정말 필요한 덕목이겠지만, 내 경우에는 그걸 지키기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나에게는 소신보다 우리 설계사무소를 지키고 사무소 직원들의 월급을 밀리지 않게 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이제 집 아이들이 다 컸고, 그런대로 사무실도 굴러가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이 지면이 ‘설계하는 법’에 대해 작가로서의 철학과 소신을 내세우는 자리라면, 내가 하는 이런 얘기는 도통 걸맞지 않을 것이니 안타깝다. 그때그때 임기응변으로 설계를 하는 것이 때론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사랑이 변하듯 소신도 변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소신 없는 설계’라기보다 변화에 즉각 대응하는 ‘융통성 있는 설계’라고 이해해주면 고마울 일이다.
11 누군들 지고 싶겠어
나는 지는 것이 싫다. 이기면 기쁘고 지면 우울하다. 그렇다고 졌을 때의 좌절과 우울함을 오래 간직하는 건 아니다. 곧 털어 버리고 다시 일을 시작하거나 아예 잊기도 한다. 일을 하면서 그동안 셀 수도 없이 졌고 셀 수도 없이 이겼다. 괜찮은 건 그래도 그동안 진 것보다는 이긴 게 더 많았다는 것이다. 지지 않으려고 애쓴 덕분에, 경쟁이 삶인 곳에서 많이 이긴 탓에 지금의 설계사무실을 지탱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싸우지 않고 설계를 할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일할기회는 적고 할 사람은 많다. 단순한 논리다. 좋은 일일수록 하려는 사람은 더 많고 더 많이 싸워야 한다. 공식적인 공모전이 아니라 하더라도 일을 따기 위해서는 발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일을 수주하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경우도 많다. 우리도 상처를 준 사람들이 많고 우리도 상처를 받았다. 경쟁에서 이긴다는 건 누구에게든 상처를 주었다는 얘기다. 프로젝트의 소개를 받아 건축주를 만난 자리에서 한참 얘기를 하다가 원 설계사가 있다는 걸 알고 후퇴한 경우도 꽤 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을 해도 여건 때문에 본의 아니게 피해를 주는 경우가 없지 않다. 이 기회에 우리에게 상처를 받은 분들에게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한다.
오해가 원인이 되어 사무실 간에 감정이 쌓이는 경우도 있다. 청계천 복원 당시, 사업의 중책을 맡고 있는 분의 선거 캠프에 우리가 도움을 준 적이 있다. 그 일이 고마웠는지 일을 딸 수 있을지도 모르니 가보라고 추천한 건설사가 몇 군데 있었다. 그중 한 곳은 이미 원 설계사가 있어서 같이 작업 중이었다. 외국 사례 출장도 이미 함께 다녀왔고 일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다. 턴키 설계 방식 때문에 비밀리에 진행되어 누가 참여하는 지 알려지지 않는 탓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우리로 서는 ‘아, 그랬군요’하고 물러나야 하는 시점이었다. 해당 주관 엔지니어링 임원이 미안해서인지 우리를 붙잡고 시간을 가지고 생각해볼 테니 기다려보라고 했다. 어떤 얘기가 그 회사 임원을 통해 원 설계사에게 전달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바로 포기했고 다른 건설사의 팀에 참여했다. 설계사가 이미 정해진 줄 알았다. 면 이 작은 동네에서, 이 좁은 업계에서 누가 일을 달라고 조를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짜증이 날 정도로 여기저기서 소리를 듣고 구체적인 대응도 받았다. 아무리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지만 이쯤 되면 피곤해진다.
서울역 고가 설계공모의 결과는 당연히 예상대로였다. 당선작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직 의아하기는 하지만 나도 좋아하는 작가라 당선 작가에 대해서는 아무 불만이 없다. 하지만 심사 과정은 좀 이상했다. 본래 당선작가의 프레젠테이션 시간은 오후였지만, 발표 후 오후 비행기로 한국을 떠나야하기 때문에 오전에 발표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때까지는 그럴 수도 있겠다싶었다. 심사 결과를 그날 저녁에 발표하고 다음날 당선 작가의 기자 회견을 하기로 되어있었다. 작품 발표가 끝나고 아무리 기다려도 심사 결과가 공지되지 않았다. 저녁 9시가 넘어서 결과 발표가 며칠 미루어졌다는 연락이 왔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당선 작가가 오후에 출국을 하고 며칠 뒤에 돌아오기 때문에 그 사람이 기자 회견을 할 수 있는 시기에 맞추어 심사 결과를 발표하겠다는 거였다. 기다리고 있었던 우리는 뭐지 그때서야 ‘들러리도 이런 들러리가 없네’하고 허허 웃음이 났다. 그런 훌륭한 작가가 참여해 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라서 그랬는지, 지침을 바꾸어 가면서까지 그 사람의 일정에 맞추는 서울시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우울함이 다른 프로젝트보다 좀 더 오래간 이유가 그랬다.
12 건축, 애증의 관계
떨어진 작가로서 당선작에 대한 얘기를 하는 건 조심스럽다. 아무리 좋은 얘기를 해도 왜 그러나 싶을 것이고, 그렇다고 비판을 하기에는 감정이 섞여 있다고 오해받기 십상이다. 나는 당선 작가인 비니 마스의 작품을 몇 개 접한 적 있고 작품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고 있다. 비니 마스는 한마디로 멋진 현대 건축가 중 한 명이다. 델프트 공과대학교에서 그 사람이 주관한다는 더 와이 팩토리(The Why Factory)는 ‘질문 공장’이라는 의미답게 건축에 관련된 모든 질문을 던지고 토론하는 강의의 장으로 유명하다. 주황색 아니면 노란색이라고 기억되는데, 로비 중앙의 스탠드 겸 계단 구조물은 정말 멋지다! 하지만 나는 그가 던지는 화두, ‘More with More’ 같은 말장난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고 싶지 않다. 렘 콜하스의 ‘More is More?’ 아이고, 무엇을 어떻게 주장하든 모두 미스 반 데어 로에의 ‘Less is More’의 값싼 아류들이다. 어찌되었던 비니 마스는 실험적인 건축을 추구하며, 네덜란드 건축의 위상을 세계에 알리고 있는 대단한 건축가임에 틀림없다.
고가도로는 일종의 외부 공간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고가도로는 바닥만을 갖고 있으며 벽과 천장이 없는 열린 공간이다. 열린 외부 공간을 누가 설계하는 것이 가장 옳을까. ‘외부 공간이니까 조경이 해야해’라는 말은 그리 논리적이지 않다. 잘하는 사람이 하는 게 옳다. 그럼 누가 더 잘할 수 있느냐다. 물론 건축하는 사람들도 천차만별이고 조경하는 사람 중에는 뛰어난 건축적인 감각과 실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아서 어느 분야가 해야 한다고 꼬집어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벽과 천장이 없는 열린 공간이라는 공간의 속성상 서울역 고가는 조경하는 사람들이 더 잘할 수 있다는 게 내 견해다. 서울역 고가는 독특한 여건 하에 있지만 어찌됐든 외부 공간의 한 부류다. 건축 분야가 건축 공간 없이 외부 공간 만을 주 대상으로 다루게 되면 자신의 전문성을 잃기 쉽다. 베르나르 츄미의 라빌레트는 독특한 경우다. 건축적인 매스를 해체시켜 공원에 뿌려놓았다. 건축적인 해법으로 외부 공간을 다룬 셈이다. 만약, 외부 공간을 건축가가 건축적인 방법으로 풀지 않고 더 나아가서 조경에서 사용하는 방법이나 소재—예를 들면, 수목 자체나 수목의 배치—로 설계를 풀려한다면 재앙이 시작된다. 이 견해의 타당성은 역설적으로 당선작의 내용에서 드러난다. 차라리 조성룡의 설계안이 건축가에 의한, 건축가의 안답다.
비니 마스에게 서울역 고가는 맞지 않을 수도 있다. 매스를 다루는 천재적인 창의성 그리고 다른 사람이 따라오기 어려운 미적 균형, 상상을 초월하는 실험성 등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멋진 소양은 서울역 고가에서 발휘되기 쉽지 않다. 새로운 교량을 설치하는 것이 아니고 있는 교량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보행이란 다소 단순한 옥외 공간의 기능을 담아내야 하는 게 서울역 고가에 주어진 과제이다. 쉽게 말해, 서울역 고가는 탁월한 건축적 감각을 선보이기엔 걸맞지 않은 대상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비니 마스는 참여를 했고 또 서울시는 비니 마스의 작품을 뽑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의 이름을 걸고 싶었던 게지’하고 이해할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다.
그래도 건축가 중에는 일부러 전화를 해서 우리 안의 장점을 언급해주고, 당선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한 사람도 있었다. 우리 안의 장점을 읽을 수 있는 건축가가 있다는 건 그나마 고맙고 꽤 위안이 되는 일이다.
13 서울애벌레
누구는 전체 서울역 고가의 형태를 나무로 보았지만, 나는 서울역 고가를 한 마리의 애벌레로 보고 싶었다. 서울역 고가를 차도에서 보도로 바꾼다는 의미는 단지 보행 환경의 강조라기보다 달리기만 했던 서울이 ‘느림’과 ‘느림의 도시’를 지향하는 선언이라고 보았다. 작품의 슬로건도 원래는 서울라바(Seoul Larva)라고 하려 했었다. ‘라바’라는 우리나라의 인기 있는 애니메이션도 있어서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제목이라고 보았다. ‘애벌레’라는 어휘가 지칭하는 대상이 표현하는 건 느림, 새롭게 다시 태어난다, 생태적이며 자연적이다 등으로, 애벌레는 그 모든 의미를 잘 함축하는 메타포고 멋진 알레고리라고 봤다.
우리 팀원들은 그 제목을 좋아했는지 모르지만, 건축 파트너들로부터는 격한 비판을 받았다. 너무 장난스럽다는 것이다. 결국 ‘느림, 영혼, 서울(Slow, Soul, Seoul)’이라는 애매하고 평범한 제목이 달리게 됐다. 나중에 서울수목원 같은 제목을 보게 되면서 그냥 강하게 밀어 붙일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노란색—차도 중앙선의 노란색은 차도를 다른 공간과 구별하는 가장 강한 지표다. 또한 보행을 유도하는 점자 블록의 노란색은 차도와 보도의 분리 또는 보행 유도선으로 쓰이므로 여러모로 우리의 설계와 잘 맞는 듯 보였다—은 우리가 통상 애벌레라는 대상에서 쉽게 유추할 수 있는 색이기도 했다. 우리가 만든 개념 다이어그램 중에 노란선들이 서울역 고가 밖으로부터 서울역 고가로 밝게 모여드는 다이어그램이 있다. 우리가 노란색을 얼마나 중요시 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느림, 애벌레, 노란색, 걷기, 쉬기, 머무르기, 3.5m, 살아있는 유기체, 17m, 13톤, 거더(girder), 슬래브, 아스콘, 복층 패스(path) 또는 복층 데크, 멋지게 보이기, 바람, 초지, 모듈, 우물 마루, 그늘 등이 우리가 염두에 두었던 설계 어휘였다.
14 좁아서 어떡할 건데
서울역 고가의 슬래브는 두께가 25cm밖에 되지 않고 난간과 거더 높이를 더해도 120cm에 불과하다. 폭원 100m에 달하는 한강로에서 볼 때 그리 인상적인 시각 대상물이 될 수 없다. 아마 얇은 종이판 같은 것으로 읽힐 것이다. 고가 상부 슬래브 위에 키 큰 나무를 심는 것도 우스울 것으로 판단했다. 비례가 안 맞을 게 뻔했다. 그럼 나무는 안 심는다 치고 저 얇아 빠진 구조물은 어떻게 하지. 빈약한 슬래브와 더불어 서울역 고가의 폭도 걱정이 됐다. 옛날 서울역 광장으로 내려가던 램프 도로가 있던 부위처럼 넓은 곳도 있긴 하지만, 10m의 폭이 대부분의 구간이다. 800m의 길을 걷기만 할 수는 없는 것이고, 또 걷기만 하려고 17m를 오를 사람은 없을 테니 걷고 쉬고 머무르는 모든 공간 수요를 다 담으려면 충분한 폭원이 필요했다. 걷기엔 폭원 10m에 녹지를 일부 두어도 나쁘지 않다. 잠시 쉬는 공간으로도 아주 좁지는 않다. 하이라인이나 파리의 프롬나드 플랑테도 폭이 10m 내외인 구간이 꽤 있다. 하지만 머무르는 공간까지 포함하려면 폭 10m로는 어림도 없어 보였다. 최소 현재 폭의 두 배 정도는 필요하다고 보았다.
접근 동선과 보행 밀도를 시뮬레이션 해보면 서울역 고가는 대체적으로 모든 구간이 좁다. 특히 한강로 구간에서 보행 적체가 극심할 것으로 예상됐다. 한강로 구간은 숭례문을 바라보기에 최고의 장소일 뿐만 아니라 한강 쪽의 한강로가 꽤 그럴듯한 개방감을 준다. 때문에 조망을 하거나 사진을 찍기 위해 필히 머무르고 쉬는 장소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문제는 그 구간이 10m의 여유밖에 없는 한정된 고가 상부라는 점이다.
하이라인과 프롬나드 플랑테를 잠시 되돌아보자. 하이라인이나 프롬나드 플랑테의 폭은 평균 12~15m가 넘는 구간이 많다. 운이 좋은 경우다. 10m 내외의 구간도 인접한 진출입 동선이 많아서 보행 적체 없이 무난히 보행의 흐름을 소화한다. 폭원에 여유가 있으니까 충분한 녹지와 쉬는 공간을 만들어주고도 오가는 보행자를 위한 보행로는 넉넉한 폭원을 유지한다. 우리의 서울역 고가가 하이라인과 다른 맥락에 있다는 것을 간명히 보여주는 내용이다.
15 복층의 라바 데크(Larva Deck)
우리는 복층의 보행로인 더블 데크가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더블 데크의 설치 여부는 의외로 초기 개념 회의 때부터 등장했다. 건축 파트너들도 전폭적으로 찬성했다. 좁은 폭원의 문제를 더블 데크가 해결할 수 있는데다가, 빈약한 서울역 고가의 몸체를 키울 수 있는 방안이라 보았다. 우리가 취하려는 라바의 개념과 형태적 유사성도 잘 맞았다. 복층의 보행 패스는 두툼한 노란색 피부를 두르고 시각적 랜드마크가 되어, 한강로에서 바라보면 마치 느린 애벌레 한 마리가 꿈틀꿈틀 기어가는 모습으로 읽힐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더블 데크의 구조 문제는 지게 모양의 보강 기둥으로 해결했다. 복층 데크의 또 하나의 장점은 그늘을 줄 수 있는 장소가 제공된다는 것이다. 키 큰 나무를 심지 못한다고 보았을 때 서울역 고가의 상부는 뙤약볕에 노출되게 된다. 건물이 바로 인접해있는 프롬나드 플랑테나 하이라인은 주변 건물이 그늘을 드리우기 때문에 상부에 키 큰 나무를 많이 심지 않아도 좋다. 키 큰 나무를 심은 곳도 있지만 그런 경우 고가 철도 하부의 아치 두께가 충분해 키 큰 나무를 심더라도 비례가 생뚱맞지는 않다. 우리가 제안한 더블 데크는 아래층 데크에 그늘과 비를 피할 수 있는 멋진 공간을 마련해준다.
우리의 의욕에 비해 더블 데크의 의도와 의미는 심사위원들에게 잘 전달되지 않았다. CG 상의 실수였을수도 있는데, 더블 데크가 건물처럼 읽히는 느낌이 강했다. 특히 전체 조감도가 실수였다. 서울역 고가가 전체적으로 읽히고 더블 데크가 복층 보행 패스로서 부분적으로 강조되는 방식이어야 했다. 그런데 우리의 조감도는 고가에 건축물을 얹어 놓은 것처럼 읽히는데다가 더블 데크가 너무 강조된 느낌이었다. 문제를 알았을 때는 이미 조감도가 마무리되는 시점이었다. 형태를 꼼꼼히 뜯어보면 알겠지만, 더블 데크는 복층의 멋진 보행로일 뿐 아니라 숭례문을 바라보는 최고의 조망 스탠드 겸 소규모 문화 공연이 가능한 행잉 스튜디오다. 이렇듯 우리에게 더블 데크는 꼭 필요한 수단이기도 했지만, 이번처럼 의도가 잘 읽히지 않았을 때는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도 있는 양날의 칼 같은 것이기도 했다. 더블 데크의 유려한 매스와 디테일은 같은 팀원이었던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의 서예례 교수가 완성했다.
16 하이라인과 비슷하다고?
심사위원들 앞에서 작품 발표를 할 때 하이라인에 대한 얘기를 듣거나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발표 순서가 오후로 바뀐 탓에 한참을 기다렸다 발표를 시작했다. 발표장에는 발표자인 나와 서예례 교수가 함께 들어갔다. 열심히 발표를 했다. 연습도 많이 했고 발표문을 몇 번이나 고쳐 썼는지 모른다. 동시통역을 한다기에 미리 한글 원고도 준비해 통역사에게 전달했다. 발표가 끝나고 질문이 시작됐다. 도시 분야의 한국 심사위원의 질문이 있었고 답변을 했다. 두 번째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공공 건축가라는 심사위원이었는데 그 양반 질문이 묘했다. 질문을 의역하지 않고 직역해보면, ‘하이라인과 유사하게 보이는데 왜 하이라인처럼 디자인했느냐’는 것이었다. 하이라인과 유사하게 본 것도 의아한데 왜 그렇게 했느냐 하니 참 황당했다. 같잖은 질문이었지만 그래도 성의껏 답변을 했다. 내 답변은 대충 이랬다. “하이라인과 유사하게 보인다는 건 우리에게 그리 나쁘게 들리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하이라인의 성공으로 볼 때 칭찬으로 들을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어쨌든 우리 안은 하이라인과 많이 다릅니다. 같을 수가 없지요. 주변 공간의 맥락이 다르고 바탕이 되는 구조체의 제원도 많이 다릅니다. 아마도 우리가 고가 상부에서 표현한 초지로만 구성된 CG의 뷰들이 다소 하이라인의 이미지들과 유사한 까닭에 그리 볼 수도 있겠지만 우리 안은 다릅니다.”
스페인 심사위원의 질문은 질문이라기보다 지적 같았다. 성의껏 답변하면 예의상이라도 고개를 끄덕인다든지 알았다는 표정을 지어야 하는데 반응이 썩 마뜩찮았다. 그때 하이라인에 대한 건축계의 부정적 인식이 서울역 고가에서 다시 제기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하이라인 공모전 때 자하 하디드 같은 건축가의 안이 아닌, 조경가 제임스 코너의 안이 선정된 것에 대한 건축계의 불만이 대단하다는 얘기가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그게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와 십 년 가까이 지난 이 시점에 아직도 살아 꿈틀거리면 안 되는 건데, 그 얘기를 내가 듣고 있었다. 절대 다시 하이라인이어서는 안 돼, 조경가가 풀어서는 안 돼 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들은 느낌이랄까. 지나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때 분위기는 확실히 그랬다.
이유를 정말 이해할 수 없지만, 서울역 고가가 하이라인의 재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건축계에서 있었던 건 확실하다. 처음 서울역 고가의 보행화가 하이라인의 벤치마킹에서 시작된 일임에도 불구하고 일을 추진하고 마무리하는 건축계의 입장은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가 뭐래도 서울역 고가 설계에서 건축과 조경의 대결 구도는 피해야 했다. 누가 되었든 순리대로 잘하는 사람이 하는 게 좋았다. 나야 물론 조경쪽에서 하는 게 순리라고 보지만, 더 잘하는 사람이 건축가라면 상관없다. 미리 건축가가 해야 한다고 정해놓고 하는 것보다는 그게 훨씬 좋았다.
17 개념과 슬로건의 차이
서울역 고가 프로젝트는 우리에게 좋은 경험이었다고 위안을 해본다. 건축 파트너들과 함께 개념에 대해 토의했던 오랜 논의 과정이 기억에 남는다. 매끄럽기보다 싸우는 것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덕분에 개념과 설계에 대한 생각을 팀원들과 함께 리뷰하는 좋은 계기가 됐다. 설계 개념, 이리 많이 쓰면서도 정의되지 않은 어휘가 또 있을까 싶다. 개념이란 설계를 하기 위해선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것, 설계를 시작하고 발전시키며 완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아니면 그 자체가 설계 내용의 몸체를 이루는 어떤 것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설계 개념과 슬로건 또는 캐치프레이즈를 쉽게 혼동한다. 우리가 서울역 고가에 내세웠던 ‘Slow, Soul, Seoul’은 개념일까 아니면 슬로건일까. 슬로건이다. 슬로건은 그냥 작품 제목 같은 것이다.
개념이 슬로건과 다른 점은 개념은 설계를 직접적으로 관장하는 도구이고 수단이라는 것이다. 설계를 직접적으로 관장하거나 돕는다는 말은 설계의 선을 내고 형태를 잡는 데 개념이 활용된다는 것이다. 설계에 사용되는 선과 형태를 내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개념은 잘못 끌려왔거나 아예 처음부터 있지 않았던 것이다. 슬로건은 설계의 선을 내는데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가 없고 관심도 없다. 슬로건은 밖으로 내놓기 위한 것이고, 개념은 안에서 쓰는 것이다. 개념은 밖으로 나올때도 있고 그냥 사라질 때도 있다. 개념은 나타나는 게 목적이 아니고 쓰이기 위해 만들어진다. 슬로건은 나타나야 하고 개념은 쓰여야 한다. 서울역 고가에서 우리가 사용한 설계 개념은 ‘애벌레’다. 애벌레가 갖는 특성, 보드랍고 유연하며 느린 움직임들은 실제 서울역 고가의 선을 내는데 사용됐다. 더블 데크의 형상이 한강로에서 볼 때 두툼한 부드러움의 노란색 애벌레로 읽혔으면 했으니, 애벌레는 개념으로서 충분한 자격을 갖고 있다.
개념과 슬로건 중 무엇이 더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둘 다 필요하다. 비록 설계를 직접 도울 수는 없어도 슬로건은 사람들을 작품에 주목하게 하는 가장 효율적 수단이다. 슬로건은 홍보다. 우리는 ‘비창(Pathetique)’이란 제목을 통해서 베토벤의 작품을 접한다. 비창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을 지칭하는 제목이자 슬로건이다. 쉽게 얘기해 설계가 끝나고 모여서 작품을 무엇으로 부를까 생각하고 있다면 슬로건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개념은 나무, 달, 지렁이, 땅벌레 등과 같이 구체적이어야 하고 눈에 쉽게 그리거나 상상할 수 있는 대상이어야 한다. 꼭 살아있는 대상물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동산 또는 오름, 계곡, 폭포, 강, 바다 등과 같이 지형일 수도 있고 다리, 탑, 계단 같은 인공 구조물일수도 있다. 바다 보다 아틀란틱(Atlantic)이 좀 더 구체적이고 분명한 개념이 될 수 있다. 파리의 아틀랑티크 정원(Le Jardin Atlantique)은 ‘대서양으로 향하는 TGV 역의 지고지순한 소망’을 슬로건으로 하고, 개념으로 대서양의 파도와 해안의 바람을 담아냈다. 정원의 공간 곳곳에 대서양을 향한 꿈과 소망이 오롯이 담겨있다.
18 청심 홍심
우리 조경의 경우, 슬로건을 개념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 건 경계해야 할 일이다. 화합, 지속가능한 생태, 그린 코리더 등과 같은 건 아무래도 슬로건이지 개념이 되기 어렵다. 하지만 늘 슬로건과 개념의 구분이 명확한 것은 아니어서 프로젝트의 성격에 따라 구분이 어려울 때도 있다는 걸 덧붙여 둔다. 우리 설계 중에 독특한 사례가 하나 있는데, 2014년 여름에 한 조각 공원 설계다. ‘청심’이라는 재단에서 추진한 조각 공원 청심아트파크(Chung-Sim Art Park)다. 청심은 아마도 우리 회사의 프로젝트 중에 가장 화려한 그리고 가장 다양한 설계 개념과 슬로건으로 무장한 프로젝트였을 것이다. 이미 몇몇 유명 조각가의 작품이 선정된상태였기 때문에, 거꾸로 선정된 조각 작품들을 설명할 수 있는 세부적인 설계 개념과 그것들을 하나 또는 여럿으로 묶는 슬로건이 필요했다. 조각 공원을 한 바퀴 도는 약 1.2km의 순환 동선에서, 가는 길은 예술가의 삶과 죽음을 대상으로 예술가의 한정된 삶, 즉 사랑과 짧은 삶에 대한 아쉬움과 죽음을, 오는 길은 예술가가 죽고 난 이후 영원으로 승화된 예술의 세계, 즉 균형, 대칭, 조화 등을 다뤘다. ‘예술가는 죽지만 예술은 영원하다’는 게 청심아트파크가 지향하는 통通 슬로건이었다.
가는 길에는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는 것들, 뮤즈, 자연, 뱀 그리고 죽음을 의미하는 것들, 어둠, 갇힘, 또한 다시 태어남을 의미하는 거울, 빛, 비침 등이 개념으로 사용됐다. 오는 길에는 영원한 예술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들 즉, 예술의 요소, 균형, 대칭, 절제, 조화 등의 개념—물론 균형, 대칭 등은 아직 추상적인 어휘들이어서 개념이 될 수 있을까 싶지만, 이 프로젝트의 경우는 무조건 개념으로 사용해야만 했다—을 물, 돌, 나무들을 소재로 사용했다. 청심 프로젝트는 넘치는 슬로건과 무지막지한 개념을 무차별로 제한 없이 마음껏 전개해도 좋았다. 오히려 개념과 슬로건의 ‘지나침’이 요구되는 프로젝트였다. 우리 안이 채택이 되지 않아서 결국 청심은 홍심이 돼버렸지만, 결과 여부에 상관없이 설계 과정을 가장 즐겼던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개념은 평범한 설계에 번득임이 깃들게 하고, 슬로건은 이름 없는 설계에 족보를 만들어준다. 어떻게든 어깨를 견주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경쟁의 우리 설계 분야에서, 상처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 현실에서, 그나마 개념과 슬로건 만들기는 큰 위안이다.
진양교는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와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 미국 일리노이 대학교 조경학과 및 도시지역계획학과에서 공부했으며, 강원대학교와 서울시립대학교에서 10여 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2002년부터 CA조경기술사사무소를 열고 실무의 최전방을 절절하게 체험하고 있다. 2010년 봄부터 홍익대학교 건축도시대학원의 전임교수를 겸하고 있다. 주요 설계 작품으로 하늘공원, 한강 반포공원 등이 있으며, 저서로 『기억과 상징으로의 여행』, 『건축의 바깥』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