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인구의 1/5이 서울에 산다. 그만큼 한국의 도시 중 가장 번화하고 활성화되어 있다. 그런데 알고 보면 도시 곳곳에 과거의 흔적들이 스며있고, 일상에서 유구한 역사의 맥락과 닿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지형과 하나 된 한양도성 성곽 유적이 서울을 가로지르고 있기 때문인데, 일제강점기와 산업화를 거치며 파괴되었음에도 상당 부분 그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다. 대도시 속에서 원형을 잘 유지한 성곽 유적은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지난 몇 년간 한양도성 성곽의 멸실된 구간에 대해 복원 작업과 지속적인 연구가 이루어졌고, 최근 몇 년 사이 한양도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다양한 논의의 장이 마련되었다. 지난해 11월 14일에는 한양도성의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기도 했다. 그 후1년간 ‘진정성’과 ‘완전성’을 인정받으면 세계문화유산 등록이 확정된다. 여기서 짚어볼 부분이 있다. 바로 성곽마을이다.
확장되는 유산의 개념
그동안 한양도성의 가치는 성곽 자체에만 중점을 두어 문화재라는 단편적인 테두리 안에서 제한된 시각의 접근이 이루어졌다. 한양도성 성곽과 연접한 곳에는 20여개의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데, 대개 성곽마을은 노후화된 마을로 개발의 대상으로만 인식되어왔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 등재를 기점으로, 이제 그 시각이 달라지고 있다. 지난 3월 14일 서울연구원과 온공간연구소는 서울시청 3층 대회의실에서 한양도성 주변에 위치한 성곽마을에 대한 학술회의(서울시 후원)를 개최했다. 한양도성이 아닌, 성곽마을을 주제로 한 회의가 처음으로 열린 것이다. 박소현 교수(서울대학교 건축학과)에 따르면 유산의 개념과 대상은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왔고, 이제 장소와 경관까지도 유산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한양도성의 진정한 가치가 여기에 있다. 단일 건축물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서울의 장소성과 도시 경관으로서 가치를 더해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 박 교수는 “단일 건축물일 때의 보존 방식과 장소 및 경관일 때의 보존 방식은 다르다”면서, “살아있는 유산의 보존을 위해서 가장 근간이 되는 요인의 하나로 지역공동체의 지속성은 더욱 부각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양도성 성곽을 기반으로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는 성곽마을의 가치를 되새기게 한다.
재개발에 발목 잡힌 주거 환경 개선
성곽마을은 계획된 마을이 아니다. 전후 피난민들이 한양도성 주변으로 모이면서 자생적으로 형성되었다. 때문에 주거를 위한 편의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곳이 많은데, 박학룡 대표(동네목수)는 ‘장수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성곽마을의 실태를 전했다.
“장수마을을 처음 방문했을 때 오랫동안 방치된 빈집과 갈라진 콘크리트 벽, 깨진 골목길 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아파트 분양권이나 투자수익을 위해서는 동네가 더 낡고 위험해야 한다고 여기는 집주인들이 많았다. 집주인과 연락조차 되지 않는 경우도 많았고, 세입자들은 언제 헐릴지 모르는 남의 집을 굳이 돈을 들여 관리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재개발예정구역이 된 순간부터 전혀 관리되지 않는 동네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재개발 계획이 성곽마을 주민들의 환경 개선에 대한 의지를 꺾어놓고 있었다. 다른 마을도 이와 사정이 다르지 않다. 이혜경 교수(국민대학교 공연예술학부)가 프로젝트를 진행한 북정마을의 최대 화두도 재개발이었다. 토지를 소유한 주민들은 마을을 재테크의 수단으로 바라보고, 그렇지 않은 주민은 환경이 더욱 열악한 곳으로 밀려났다. 성곽의 보존 그리고 재개발. 환경적 제한과 개발 논리 사이에서 성곽마을 사람들은 소외되어 왔다. 열악한 주거 환경을 받아들이고 살아온 것이다.
장소와 사람의 내밀한 대화
아파트 재건축이나 대규모 공사를 통한 정비가 주거환경 개선의 최선으로 여겨지던 과거의 방식은 이제 시민에게 동의를 얻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자체 재정도 이러한 개발을 수용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도심부 관리계획 패러다임의 변화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이에 주민이 직접 참여하고 기존 장소가 가지고 있는 가치를 재조명해 환경을 개선하는 작업이 더욱 주목받고 있다.
박학룡 대표는 주민 간의 관계 회복과 일자리 창출이라는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접근해 장수마을 경관 개선 가능성을 일깨웠고, 이혜경 교수는 관官, 학學, 예藝, 민民 파트너십을 통해 북정마을을 예술의 무대로서 기능하게 하여 주민들에게 의지를 불어넣었다.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주거 환경 개선에 나서 성공적인 성곽마을 개선 사례로 꼽히며 장수마을과 북정마을이 주목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양도성에서 찾을 수 있는 또 하나의 가치는 사람이다. 학술회의에서 발표자와 토론자들 사이에 거듭 강조된 내용은 사람들과 장소가 가진 이야기다. 주거 환경 개선을 통한 경관 향상과 한양도성 성곽의 물리적 가치도 중요하지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살아있는 장소가 되어야 그 가치가 배가 된다는 것이다. 송경용 이사장(나눔과 미래)은 “과거의 도시 개발방식은 개발의 희생자에게 또 다시 희생을 강요해왔지만, 이제 그 패러다임이 변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지역 주민들과 그들이 사는 장소의 내밀한 대화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한양도성의 성곽이 살아있는 생물로서, 사람과 성이 대화하는 성곽마을로 살아 숨쉬기를 기대했다. 한양도성과 성곽마을 사람들의 진정성 있는 대화. 이는 성곽마을을 넘어 도시에 대규모 개발만이 주거 환경과 경관 개선의 정답은 아니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