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모퉁이를 돌았다. 지난 겨울 기세등등했던 추위는 긴 꼬리를 감추기 시작했다. 아직도 간간이 눈 소식이 들리지만, 시간은 어김없이 머지않아 대지와 우리들의 정원에 꽃망울을 터뜨릴 것이다. 다가오는 봄과 함께 귀촌을 준비하는 나에게 계절은 이미 기대와 설렘으로 화사하다. 마음속 정원에는 일찌감치 갖가지 꽃과 채소가 심어졌다.
위대한 작가이자 정원사였던 헤르만 헤세는 땅과 식물을 상대로 일하는 것은 명상과 마찬가지로 영혼을 자유롭게 놓아주고 쉬게 해 준다고 했다. 새봄과 함께 조경에 새로운 분위기가 감지된다. 몇 해 전부터 불기 시작한 정원에 대한 관심과 실천의 비약적 증가는 바야흐로 정원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린다. 정원을 직접 만들고 가꾸려는 관심은 실내 정원과 주말농장을 넘어 생활 속으로 확대되고 있다. 정원은 다방면에 걸쳐 새로운 문화 트렌드로 생산, 소비되고 있으며 도시 농업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진화해 나가고 있다. 정원과 관련된 책과 잡지도 쏟아져 나오고 있다. 손꼽힐 정도였던 이 분야의 책들이 이제는 이론과 역사, 설계와 시공, 소재와 기능 등 전 방위적으로 봇물 터지듯 출간되고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원 서적이 등장함은 그 시대에 정원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폭발하였음을 시사하는 바 이 시대도 예외는 아닌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작년에 성공적으로 마친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를 정점으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인구 28만 명의 작은 지방 도시가 주도 한 이 행사는 개장 기간 동안 440만 명의 방문객이 다녀가고 순수입으로만 164억 원의 흑자를 올린 것으로 보도되었다. 이와 함께 직접적인 고용창출 8천 명, 1조 원에 달하는 거대한 생산 유발효과를 함께 올린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는 소나타 같은 중형차 4만 대를 수출한 것과 맞먹는 것이라 한다. 정원과 생태를 주제로 이룩한 이러한 성적표는 그동안 지역에서 열린 박람회나 축제의 새로운 지평을 연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보다 한 해 전 개최되었던 여수엑스포가 행사 후 시설의 활용에 골머리를 싸매고 있는 것에 비해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는 효과적인 대안으로 뚜렷이 자리매김하면서 비슷한 행사를 모색하고 있는 여러 지자체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정원 열풍은 마흔 살 장년이 된 한국 조경이 한 단계 더 도약할 기회가 되고 있다. 그동안 양적 성장에 치중했던 우리의 지난날을 되돌아보게 하고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 중요한 모멘텀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만만해 보이지 않는 다. 정원 바람은 분명히 조경에게 기회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기회는 조경 분야를 위기의 상황으로 내몰고 있다.
그동안 도시의 공원을 도시숲이라 주장하며 불안 불안한 정책적 행보를 보이던 산림청이 이번에는 정원을 수목원과 한데 묶어 국가정원-지방정원 등의 포맷으로 자신들이 담당하겠다고 들고 나왔다. 지난번 도시숲 정책과 금번의 국가정원-지방정원 정책의 출발은 아마도 산림청의 예산이 풍부하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상대적으로 여유있는 예산을 가지고 있는 산림청이 남는 예산을 도시 공간으로 가지고 내려와 혼란스럽고도 당황스러운 상황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풍족한 예산을 정원의 발전에 사용하겠다는 데 굳이 이견을 달고 싶지는 않다. 정책의 이면에 부처 이기주의와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공직 사회의 고질적 병폐가 숨어 있음을 애써 외면할 수는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러한 정책이 조경의 근본을 왜곡하는 결과를 가지고 올 것이라는 점에서는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수천 년 조경의 역사를 관통하는 하나의 단어를 꼽으라면 누구나 주저 않고 정원이란 단어를 선택할 것이다. 이 자리에서 굳이 정원의 본질과 조경의 역사를 논의하고 싶지는 않지만, 정원이 조경의 근본이고 출발이라는 사실만은 재차 환기해 두어야 할 것 같다. 무리한 정책으로 조경을 산림의 영역으로 치환해 버리는, 정부의 예산으로 한 학문의 정체성을 흔드는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영역 이기주의를 넘어 합리적 상식이 통용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국민행복시대의 정책이라면, 이번 일은 시정되어야 한다.
정원을 통해 촉발된 기회이자 위기의 상황에 대한 효과적이고 합리적인 대응은 무엇인가. 이럴수록 원리원칙과 근본에 충실함이 정답일 것 같다. 답답한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정원을 통해 조경의 현주소를 다시 점검해 보는 것이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동시대 우리 조경은 과연 어디쯤 위치하고 있으며, 어디를 향해 가고 있으며, 어떤 가치와 방법을 구사하고 있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겠다.
정원은 전통적으로 개인의 의지와 욕망이 투영된 사적 공간이었지만 우리 시대의 정원은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는 공간적, 사회적, 실천적 매체로 그 역할과 기능이 확대되고 있다. 그리고 이런 흐름은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여 조경을 더욱 풍요롭게 할 것이다. 불붙은 정원 논의는 새봄과 함께 더욱 타오를 전망이다. 정원을 통해 참여와 노동, 가꿈과 나눔을 실천함으로써 흐려진 공동체 정신을 회복하고, 단절되었던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복원시키며, 부족했던 삶의 질을 채워주도록, 조경은 본연의 역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정원에서 비롯된 사회적 에너지를 일상 속의 조경 문화로 발전시키는 것, 올 한 해 조경에 부여된 큰 숙제다.
이유직은 현재 부산대학교 조경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부산의 미군기지인 하야리아의 부지를 공원화하는 작업의 코디네이터로, 거창군 창조 도시 총괄계획가로 활동하고 있다. 마을만들기와 농촌 조경에 관심을 두고 현장에서 지역재생과 커뮤니티 활성화를 위한 조경학적 실천을 모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