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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트루드 지킬, 위대한 정원 예술가
영국 정원 역사상 가장 중요한 디자이너로 지금도 그 영향력이 시들지 않고 있는 거트루드 지킬Gertrude Jekyll(1843~1932)은 엄격한 쪽머리에 빅토리아풍의 검은 원피스를 입고 지팡이에 의지하여 정원을 돌아보는 노년의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다. 지킬이 디자인한 아름다운 색채 정원과 얼핏 매치시키기 어려운 모습이다. 어쩌면 검은 옷과 지팡이는 위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면 지킬 선녀로 변하여 마술봉을 휘둘렀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거트루드 지킬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지루한 정원에 마술처럼 빛과 색을 가져다줌으로써 새로운 장르를 완성시킨 장본인이었다. 건축과 정원의 화합을 이루어낸 것 외에도 식물, 그중에서도 다루기 힘든 야생화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였으며 그가 연출했던 장면들은 지금도 귀감이 되고 있다. 비록 야생화를 자유롭게 풀어놓기는 했지만 완강하고 경직된 사고방식으로 인해 작품으로 완성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했던 윌리엄 로빈슨1과 비교해 볼 때, 첫 정원 작품으로 단번에 마에스트로의 평판을 얻은 지킬의 비결은 우선 자유로운 사고 체계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 짐작하게 한다. 물론 타고난 감각과 오랜 세월 화가로 활동하며 얻었던 체험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시력이 급속히 나빠져서 화가의 길을 접고 정원 예술가로 전향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가 있다.2 그러나 그보다는 그의 삶의 여정이 자연스럽게 정원 예술가의 길로 접어들게 했다고 보는 편이 더 설득력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정원공부를 시작한 것이 아니라 모든 영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정원 유전자’ 덕으로 지킬에게 정원은 어린 시절부터 일상에 속했었다. 유난히 색에 민감했으므로 꽃의 다양한 색조에 매료되었던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영국 남부의 서리 지방이 고향이었던 지킬은 만 열여덟 살이 되던 1861년에 런던의 사우스켄싱턴 예술학교에서 회화를 공부하기 위해 집을 떠났다가 1876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홀로 남은 어머니와 함께 살기 위해 십여 년 만에 귀향했다. 딸이 돌아오자 어머니는 먼스테드히스Munstead Heath에 집을 새로 지었는데 이곳에 ‘실험적’으로 만들어 본 정원이 지킬의 공식적인 첫 작품이 된다. 그것이 불과 3~4년 만에 소문날 정도로 좋은 반응을 얻음으로써 정원 예술가로서의 운명이 결정되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영국인들은 소문난 정원을 방문하는 전통이 있었으므로 지킬 모녀의 먼스테드히스 정원에도 방문객이 찾아들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당시에 『정원The Garden』이란 제호의 잡지를 발행하던 윌리엄 로빈슨과 영국장미협회 회장의 방문을 받게 된다. 이렇게 얻은 성취감으로 인해 지킬은 정원이 대안이나 차선책이 아니라 그동안 쌓아왔던 예술적 체험을 집약시킬 수 있는 기회임을 이해했다.
이즈음 로빈슨의 권고로 『정원』 잡지에 기고를 시작했는데 1932년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기까지 천여 편의 에세이를 쓰고 모두 열세 권의 책을 냈으며 크고 작은 정원 400여 개를 디자인했다. 이런 엄청난 작업량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지킬에게 정원이 전부였음을 시사한다.
지킬이 미술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미술공예운동Art & Craft Movement의 창시자 중 한 명이었던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1834~1896)가 학교 인근에 디자인 회사를 설립했다. 본업이 화가였던 윌리엄 모리스는 공장에서 생산되는 생활용품들을 몹시 역겨워했다. 손으로 직접 만든 것만이 가치 있다는 철학 하에 벽지부터 가구까지 직접 만들어 저렴하게 판매하는 것을 목적으로 회사를 설립한 것이다. 손재주가 많았던 지킬이 “마음과 손과 눈”이 삼위일체가 되어야 한다는 모리스의 철학에 영향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지킬은 회화 외에도 자수, 조각, 판화, 직조, 사진 등 다방면에서 꾸준히 활동하며 분야를 넘나드는 포괄적인 작품 세계를 추구했다. 이런 성향은 후에 정원 예술가로 완전히 방향을 굳힌 후에도 양식에 구애받지 않은 ‘편견 없는 정원’을 만들게 했다.
그러나 정작 지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1775~1851)3의 그림 세계였다. 미술관에서 터너의 그림을 연구하며 보낸 수많은 시간은 터너의 화폭을 환하게 밝히는 지중해의 빛과 색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1874년 지킬은 터너의 빛을 찾아 여러 달에 걸쳐 북아프리카, 그리스, 이탈리아를 여행하게 되며 여기서 만난 파스텔 색조의 식물에 매료되어 돌아왔다. 이런 영향들이 축적되어 후에 지킬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는 ‘경계 화단’4이 탄생했다. 경계 화단은 본래 프랑스 정형식 정원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경계를 이루던 회양목 생단이 진화하여 꽃피는 식물로 대체되기 시작한 것을 말한다. 지킬은 이 경계형 화단이 독립적 정원 요소로 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본 것 같다. 화폭 속에서 더욱 빛나는 터너의 밝은 색조를 응시하던 수많은 나날 중 야생화들도 저렇게 ‘액자’에 담되 윤곽 없이 서로 스며드는 기법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것이다. 소로를 따라 화단을 길게 배치하는 것이 경계 화단의 기본 형태였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여러 방법으로 응용했다. 특히 옹벽, 계단, 테라스 등 시설물을 오히려 화단처럼 이용하여 식물과 어우러지게 함으로써 최대의 상승 효과를 내는 기법 역시 지킬의 아이디어였다. 경계 화단에서 보여준 지킬의 탁월한 감각은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원 전체의 구성에 여실히 반영되고 있다.
지킬의 정원들은 손수건 크기의 화단으로부터 몇 헥타르에 이르는 숲 정원까지 때로는 정형으로, 때로는 자연형으로 장르를 넘나들었으며, 전원의 정다움, 도시적인 세련됨, 이국적인 매력 등 상황에 따라 적절한 식물들로 ‘팀’을 짜서 배치함으로써 수많은 변주곡을 연주한다. 각 식물의 성격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무대를 만들어 줌으로써 최상의 효과를 얻어 낸 지킬의 방법론은 건축과 정원의 화합뿐 아니라 사람과 식물 사이에도 균형 잡힌 관계가 가능함을 말하고 있다. 20세기 초까지 일정한 패턴을 벗어나지 못하고 쳇바퀴를 돌고 있던 정원계에 지킬이 보여준 자유로움과 균형감은 확실한 방향성을 보여주었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