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의 정의
설계의 목적은 그림을 그리는 데 있지 않다. 설계design는 “특정한 대상의 형태와 기능을 결정하는 행위다.” 이때 특정한 대상은 반드시 건물이나 정원 같은 공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옷도, 가구도, 일상용품도 설계의 대상이며, 요즈음에는 심지어 감정이나 행위도 설계의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설계를 할 때 우리는 대상의 형태와 기능을 결정하기 위해 다양한 요소들을 생각해야 한다. 크기, 색, 질감, 위치와 같은 물리적 성질들뿐만 아니라 대상의 목적, 의미, 만드는 과정, 심지어 변화까지도 디자이너가 고려해야 할 설계의 요소들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우리는 글이나 소리로 기술된 계획을 설계라고 하지 않는다. 설계 과정상의 모든 생각과 결정들은 그림을 통해서 구현된다. 설계의 매체는 결국 그림이다. 설계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설계 행위는 기능과 형태의 구체적인 그림을 만듦으로서 이루어진다는 전제가 붙어있다. 다시 온전한 정의를 내리자면 설계는 “특정한 대상을 만들기 전에 구체적인 그림을 통해 그 형태와 기능을 결정하는 행위다.”1 이렇게 본다면 설계의 목적은 특정한 대상의 형태와 기능을 구현하는 데 있지만, 모든 수식어와 관계사들을 제거하고 나면 설계는 본질적으로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된다.
두 가지 그림
그동안의 설계 경험을 떠올려보면 대부분의 시간을 그림만 그리는 데 쏟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실제의 공간을 직접 대면할 때라고는 고작 대상지 답사를 간다든가, 현장 실습 시간에 먼발치에서 콘크리트가 부어지는 모습을 바라본다든가, 모종삽으로 꽃포기들을 몇 번 심어본 기억밖에는 없을 것이다. 심지어 졸업을 하고 회사에 취직하더라도 설계의 경험은 그림이라는 매체 바깥으로 나가기가 힘들다. 정원을 전문적으로 다루거나 시공을 겸하는 회사가 아니라면, 업무상으로도, 계약상으로도 설계의 모든 최종 결과물은 공간이 아닌 그림이 된다.
누군가는 공간을 만들면서 그림만 그려야 하는 설계의 현실에 괴리감을 느낄지 몰라도 이는 전혀 비정상적인 일이아니다. 근대적인 의미의 디자이너라는 직업이 생기면서 공간을 창조하는 작업도 분업화된다.2 이제 설계가의 업무는 나무를 심고 석재 포장을 까는 일이 아니라, 어디에 나무를 심고 어떠한 모양으로 석재 포장을 깔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그림을 그리는 일이 되었다. 오늘날의 설계가는 구상에서부터 제작까지의 전 과정을 수행했던 중세의 대석공Master Mason이나 조선시대의 대목장과는 다르다. 설계가가 다루는 매체는 그림이다. 하지만 이 그림은 보통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그림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려진다.
예술가도 설계가도 모두 그림을 그린다. 하지만 이 중 설계가만이 전문적인 기술자로 인정받는 이유는 설계가의 그림이 작가의 개인적인 표현의 결과물이라기보다는 전문적인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기술적 매체이기 때문이다(그림1, 2).3 우리는 이를 도면이라고 부른다. 도면은 정확하게 따라야 할 규칙이 있다. 전문적인 기술자로서 설계가는 이 규칙들을 숙지하고 지켜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모든 건축학과와 조경학과 학생들은 저학년 때 도학과 제도라는 수업을 들어야 하고 평생 이때 배운 언어를 반복해서 구사한다. 그런데 공학도들 역시 제도 수업을 통해 동일한 도학의 원칙을 배우며 그들의 실습 과목 역시 설계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는 설계가가 따라야 할 그림의 규칙이 예술가들이 익히는 표현기법보다는 공학자들이 요구하는 정보의 체계에 가깝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공학자의 도면과는 달리 디자이너는 기술적 정보의 전달을 넘어 대상의 미적인 아름다움과 작가가 부여하고자 하는 의미까지도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 대부분의 학생들이 빠지는 함정이 있다. 바로 설계의 매체에 대한 잘못된 이해다. 설계의 그림은 기본적으로 정보로서의 가치를 지니면서 예술적인 표현을 반영해야 한다. 그런데 많은 학생들의 그림은 이도 저도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도면의 형식을 취하지만 전달하는 정보는 오류 투성이고 그렇다고 대상의 아름다움도, 본인의 생각도 드러내지 못하는 그림.
다시 말하지만 설계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다. 때문에 설계의 그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잘못된 설계를 하고 있다는 말과 같다. 앞으로 두 번에 걸쳐 할 이야기는 설계 매체에 대한 이야기다. 앞에서 나누었던, 그리고 이후 계속해서 하게 될 개념, 직관, 이론, 분석, 맥락, 의미와 같은 설계의 방법과 대상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잊어두자. 설계의 매체에 대한 이야기는 곧 설계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도면의 논리
가장 기본적인, 그러나 의외로 그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야기부터 시작해보자. 도면을 구성하는 그림들은 무엇인가? 조경학과 2학년 정도가 되면 누구나 이 질문에 쉽게 답을 한다. 평면도, 입면도, 단면도, 이 셋이 가장 기본적인 도면의 형식이다(그림3, 4, 5). 그런데 이 부분에서 한 가지 의문점이 하나 생긴다. 현실의 공간도, 설계가들이 구현하고자 하는 공간도 삼차원이다. 그런데 왜 도면의 기본은 삼차원적 형태를 보여주는 그림이 아니라 이차원적정보만을 보여주는 평면도, 입면도, 단면도일까? 물론 이차원적인 그림들이 더 그리기 쉽겠지만, 고도로 복잡한 공학적 지식을 요구하는 교량도, 마천루도, 심지어 우주선의 설계 역시 평면도, 입면도, 단면도로 그려진 이유가 단순히 설계가들이 그리기 쉬워서였다면 수긍하기가 힘들다.
고대 그리스어로 인위적인 것은 노모스Nomos라고 부른다. 노모스는 인간의 정신 문화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노모스의 반대말인 피지스Physis는 인간 문명과 대립되는 자연을 뜻한다. 문명이 발생한 이래로 인간은 자연 상태의 피지스를 노모스의 세계로 편입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설계는 단순한 자연의 변형을 넘어서 건축물과 같이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노모스의 공간을 창조하게 되면서 시작된다. 이를 위해 인간은 기하학이라는 사고 체계를 발명했다. 모든 문명을 막론하고 기하학은 건설, 치수, 천문, 경작 등 공간을 다루기 위한 모든 분야의 기반이 되는 지식이었다. 그래서 설계를 지배하는 사고의 체계, 그리고 설계 매체인 도면의 특수한 형식을 이해하려면 기하학의 사고를 이해해야 한다.
김영민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에서 조경과 건축을 함께 공부하였고 이후 하버드 GSD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SWA Group에서 6년간 다양한 조경 설계와 계획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USC 건축대학원의 교수진으로 강의를 하였다. 동시대 조경과 인접 분야의 흐름을 인문학적인 시각으로 읽어내는 데 관심이 있으며, 설계와 이론을 넘나드는 다양한 활동을 펴나가고 있다. 역서로 『랜드스케이프어바니즘』이 있으며, 『용산공원』 외에 다수의 공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