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팽한 줄다리기였다. 미국 정부와 부산 지역 시민단체 사이에서였다. 100여 년 동안 일본과 미군이 점령했던 하야리아 미군 기지의 국내 반환을 두고서였다. 결국 한국과 미국 정부의 협상 결과 하야리아 미군 기지 철수와 이에 따른 반환이 결정됐다. 땅을 다시 빼앗아 올 때는 시민의 여론이 뜨거웠다. 공원으로 조성하자는 취지도 좋았다. 하지만 과연 되찾은 땅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후대에 어떤 역사적 의미로 남겨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못했다.
하야리아 미군 기지 반환과 공원 조성 결정, 공원 조성계획의 변화와 개장에 이르는 20년 역사는 시민사회단체의 변천사이기도 하다. 몇 단계로 나눌 수 있다. 미군 기지 반환 및 공원 조성 운동, 지원 특별법 제정 및 무상 반환, 공원 조성 및 운영에의 전문가 참여와 거버넌스governance가 그것이다.
미군 기지 반환 운동: 1993~2004년
진보 진영을 중심으로 한 하야리아 땅 되찾기 운동이 시작이다. ‘부산 땅 하야리아 되찾기 시민 대책위’ 등이 그 주인공이다. 1993년 문민 정권 시대였지만, 여전히 미국과 주한 미군에 대한 반대라는 정치적 부담을 무릅쓴, 시대를 앞서간 판단이었다. 대책위는 하야리아 반환 원년 선포 대회, 주한 미군 항의 서한 전달 등 다양한 방식으로 반환 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시민사회단체 운동의 핵심은 일본과 미국에 빼앗겼던 우리 땅을 되찾자는 맥락이었다. 1997년 당시 범시민추진위원회 김희로 위원장은 기자회견에서 “미국이 무상으로 사용 중인 우리 땅을 쉽사리 내놓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며 “한국 정부가 대등한 위상에서 반환 협상을 벌여나갈 수 있도록 압력을 행사하겠다”고 천명했다.
1990년대 초반에 씨를 뿌린 하야리아 미군 기지 철수운동은 1993년 이후 본격적인 반환 및 공원 조성 운동으로 전환된다. 시대적 흐름의 변화에 따라 진보적 사회단체 중심으로 제기된 ‘미군 철수’라는 정치적 구호가 ‘우리 땅을 되찾자’는 대중적 구호로 바뀌기 시작했다. 한 걸음 나아가 외국 군 기지에 ‘생명과 평화의 터전으로서 공원을 조성하자’는 시민사회운동으로 바뀌었다. 그 주인공 중 한 명이 ‘하야리아 부지 시민공원추진 범시민 운동본부’ 허운영 공동운영위원장이다.
그는 1993년 민주주의민족통일 부산 연합 시절부터 미군 기지 반환 운동에 관여하기 시작해 1999년 통합 ‘미국 점유 부산 땅 되찾기 시민 대책위’를 거쳤다.
허운영은 2005년 “시민사회단체가 반환 운동에 급급해 하야리아가 가지는 상징성, 즉 상像의 정립을 적극적으로 제안하지 못했는데, 어떤 내용성을 담보할 것인지, 공원의 실질적인 내용을 둘러싼 논쟁이 앞으로 치열하게 벌어질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했다. 이어서 “하야리아 부대를 정치적인 시각에서만 바라볼 게 아니라 역사·환경·문화·생활 교육적인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밝혔다. 공원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표면 위로 고개를 내미는 순간이다.
특별법 제정과 무상 반환 운동: 2004~2006년
하야리아 기지의 폐쇄 결정 이후 부산시와 시민단체는 중앙 정부에 기지의 무상 반환과 특별법 제정 촉구를 요청했다. 2004년 시민사회단체들은 ‘하야리아 부대부지를 시민 공원화하기 위한 범시민 운동본부’를 발족했다. 당시 공원추진본부에는 ‘미군 점유 부산 땅 되찾기 범시민 추진위원회’ 등 부산 지역 76개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했다. 공원추진본부는 단기적으로는 국방부로부터 부지를 무상 양여받고 부지를 도시 환경과 녹지 등을 고려한 시민공원으로 조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후 오염 조사 및 복원을 촉구하는 지난한 싸움에 나섰다.
하야리아공원포럼과 공원 콘텐츠: 2009년 이후
문제는 기지의 반환 이후였다. 공원 조성이 결정되고 설계가 시작됐지만 관계자는 물론이고 시민과 부산시조차 미군 기지 안에 어떤 건물이 남겨져 있으며, 어떤 것을 보존해야 하는지 감조차 잡지 못했다. 부산시는 ‘세계적인 명품 공원을 만든다’는 구실 하나로 ‘국적 없는 공원 설계’, ‘토목 중심의 행정 편의주의’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부대 주변에는 ‘시민공원 주변 뉴타운’이라는 이름으로 대규모 초고층 주거단지가 계획됐다. 이대로라면 하야리아 시민공원은 좁은 지역의 근린공원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단절된 공원이 될 게 뻔했다. 부산시는 2010년 단체장 선거를 앞두고 착공을 서두르는 모습까지 보였다. 부산시는 공원 운용 방안과 프로그램은 공원을 조성한 뒤에 고민하겠다는 입장이었다. 누가, 왜, 어떻게 공원을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공원 설계와 조성 과정에 전혀 반영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이병철은 1967년생으로 부산 출신이다. 서강대학교에서 신문방송학을 공부하고 이후 미국 미주리 대학교 저널리즘스쿨과 미국탐사보도기자협회 연구원으로 활동한 바 있으며, 부산 동의대학교에서 저널리즘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2년부터 부산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 도시와 환경에 대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한국기자상과 봉생문화상, 일경언론상 등 다양한 언론상을 수상했고, 저서로는 『백산의 동지들』, 『황령산온천반대보도백서』, 『부산의 상권』, 『아빠는 생태박사』, 『CAR 데이터베이스로 취재하기』, 『세상을 깊게 보는 눈』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