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아름다운 것
추억은 아름다운 것, 놓쳐버린 것에 대한 갈망이나 마찬가지.
-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
추억은 아름답다. 그 대상이 상실되어 더는 되돌릴 수 없는 것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녹슨 탱크를 보며 우리는 덧없이 스러져간 것들을 떠올린다. 따라서 마포석유비축기지는 우리가 지켜낸 기억이기보다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의 표상으로서 자리매김하게 된다. 본 설계경기는 동시대 한국의 건축이 ‘도시의 기억’을 바라보는 관점과 그 갈망이 발현되는 방식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가을장마가 한창이던 9월의 어느 날, 탱크는 비에 흠뻑 젖어있었다. 매봉산 산책로에서 내려다본 녹슨 탱크는 불시착한 UFO처럼 서서히 산에 잠식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탱크의 상부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비를 피해 들어간 탱크는 몹시 어둡고 깊었다. 탱크는 산비탈 구덩이에 묻혀있었고, 높이 15m에 달하는 탱크는 세찬 빗줄기에 퉁! 퉁! 소리를 내며 몸을 떨었다. 비가 그친 뒤 탱크의 붉은색은 한층 도드라져 보였다.
실제로 목격한 탱크의 붉은 빛깔은 너무나 강렬해서 그것을 잠식하고 있는 산조차 자신의 배경으로 만들어 버린다. 도시 속 자연에 묻힌 산업 유산이라는 독특한 대상지의 조건은 그 자체가 이미 매력적인 공원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이다. 그래서인지 본 공모전의 설계 가이드라인은 매우 간결하다. 다섯 탱크의 내·외부를 활용하여 상설·기획전시 공간, 공연 공간, 도서관 및 강의실로 구성된 정보 교류 공간을 마련할 것, 적어도 하나 이상의 탱크는 원형 그대로 보존할 것, 그리고 비축기지 전면의 임시 주차장 부지를 공원의 진입부로 계획할 것 정도가 필수적으로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다.
설계지침의 초점은 매우 명확하다. “옛 것은 무조건 철거하고 새 것을 지어온 과거의 관습적 태도에서 벗어나, 오래된 구조물의 기억과 역사를 소중하게 살리고… 서울의 건축이 앞으로 나갈 방향을 전 세계에 보여주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는 본 공모전의 의의에서 방점은 ‘옛 것, 오래된 구조물’에 찍힌다. 지침은 “자연스러운 부식을 통해… 각 탱크는 그 자체가 하나의 시각적, 공간적 오브제로서 독특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고 강조하고, 반복적으로 땅과 구조물을 분리해서 언급한다. 따라서 공원의 구성보다는 구조의 활용이, 현재의 쓰임보다는 과거의 감상이 설계의 핵심이 된다.
실제로 공원의 쓰임, 즉 공원의 운영 주체와 구체적 프로그램이 설정되기 전에 이미 공원화 계획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본 공모의 성격은 일반적인 공원의 설계보다는 산업 유산을 추억하는 메모리얼에 가까워진다. 결과적으로 마포석유비축기지 공원화 사업은 ‘기억’에 대한 건축적 실험의 장이 되었고, 이와 더불어 건축가에게만 그 설계가 허락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공원 설계의 역사에서 독특한 위상을 획득하게 되었다.
기억의 발굴
무엇이든 오래도록 바라보면 흥미로운 것이 된다.
- 귀스타브 플로베르
설계지침은 최초의 설계다. 지침은 설계에 대한 최초의 관점으로써 다가올 설계들의 진폭을 결정한다. 대다수의 작품이 다섯 개의 탱크를 활용하여 다양한 공간을 연출하고자 했으며, 일부 작품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새로운 구조체를 도입해서 옛 것과 새것의 충돌을 꾀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작품은 서울시가 제공한 설계 예시도의 모습에서 크게 더 전진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아마도 사고의 진폭이 공간적으로는 탱크와 옹벽이라는 구조체를, 시간적으로는 30년간 부식된 표면 위를 맴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등작 ‘땅石으로부터 읽어낸 시간’은 지침과는 다른 공간적, 시간적 관점에서 출발한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어떻게 탱크를 활용할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할 때, ‘어떻게 탱크를 바라볼 것인가’를 먼저 고민했다. “찾아냄이 시작이며, 나타나게 함이 종결이다”라는 설계설명서의 구절처럼, 그들은 찬찬히 대상지의 기억을 들추어보고 이를 드러내기 위해 고민했다. 이들은 다음과 같이 비축기지가 조성된 과정을 유추해본다. 북측에서 날아오는 포탄을 피하기 위해 탱크는 남쪽으로 열린 경사면에 배치되어야 한다. 그리고 시설물의 안전을 위해 부지 전체가 암반 지형이어야 한다. 탱크를 매설하기 위해 암반은 원형으로 절개되었고, 절개면을 따라 옹벽이 들어섰다. 옹벽 내부에 탱크를 매설한 다음 이를 보호·차폐하기 위해 절개면의 입구는 토사로 메워졌다.
이경근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조경비평 ‘봄’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봄, 조경 사회 디자인』, 『공원을 읽다』, 『PennDesign Substance Journal』 등에 필자로 참여했다. 용산공원 조성 기본계획, 순천만 국제습지센터 기본계획 수립에 참여하였으며,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장 마스터플랜 설계공모, 상상어린이공원 조성 기본계획(안) 현상공모, ASLA Student Award, 환경조경대전 등 여러 설계공모전의 수상 경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