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FTA로 가까워지긴 했지만 콜롬비아는 여전히 우리에게 꽤나 생소한 나라다. 그러나 도시적 이노베이션에 있어 콜롬비아는 결코 변방의 소국이 아니다. 브라질의 꾸리찌바에 못지않은 21세기 도시형을 보여준 콜롬비아 보고타(Bogotá)의 리더십은 놀랍다. 그리고 그것을 이끈 주역은 탁월한 도시 행정이었다. 형은 시장으로, 동생은 공원 국장으로 재직하며 형제 콤비가 이끌어낸 혁명적 성취는 소득이 열 배, 스무 배인 선진국에 들불처럼 번져나갔고 수많은 서구 도시가 한때 마약과 폭력으로 얼룩졌던 보고타를 견학하며 그들의 도시 철학과, 노하우, 스토리를 배워 갔다. 부유한 도시만이 훌륭한 도시 공간을 만든다는 공식이 틀렸음을 증명한 계기였다. 뉴욕 시의 블룸버그 시장이 추진한 브로드웨이 보행몰 또한 보고타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엔리케 페날로사(Enrique Peñalosa)는 이렇게 말했다.
“시장으로서 내가 보고타의 경제를 뜯어고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마도 우리 모두가 미국인만큼 부유해진다는 것은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도시를 다시 설계함으로써 비록 가난하지만 누구 못지않게 품위 있는 삶을 살 수있다. 사람들이 부유하다고 ‘느끼게’ 할 수 있다. 도시는 사람들을 보다 행복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다.”1 엔리케 페날로사가 취임했을 때 콜롬비아는 언제나 그랬듯 미국식 풍요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부에 대한 갈망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러나 채워질 수 없는 욕구는 사람을 더욱 불행하게 만드는 조건일 뿐이다. 페날로사 형제는 GDP라는 잣대가 아니라 도시를 통해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엔리케가 시장으로 선출되기 전부터 보고타의 혁신은 사실 공원국의 방향타를 맡은 동생 길 페날로사(Gil Peñalosa)에 의해 본격적으로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시클로비아(ciclovía)(보고타에서 매주 일요일과 공휴일에 시행하는 자동차 없는 거리)’와 같이 차량 통행을 일시적으로 제한하고 자전거와 보행자에게 도로를 개방하는 발상은 페날로사 형제가 고안해 낸 발명품은 아니다. 1960년대에도 광범위하게 유행하던 전략이었다. 뉴욕의 진보적 시장이었던 린지(John Vliet Lindsay) 또한 5번가에서 보행자 전용 도로를 실험한 적이 있다. 보고타에서도 이미 몇몇 선구적 시민들에 의해 시클로비아가 시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길 페날로사 이후, 시클로비아는 그저 상징적인 움직임으로서가 아니라 실질적인 도시 혁신의 수단으로 자리매김할 만큼 그 규모가 과감히 확대되었고 각종 페스티벌, 단체 춤 교실(Recrovia) 및 야간 자전거 도로(ciclovía nocturna)와 같은 창의적인 요소들을 추가해 보고타 시민의 생활에서 뗄 수 없는 부분이 되었다. 현재 시클로비아의 길이는 121km에 이른다.
한편, 새 자전거 도로는 가장 소득이 낮고 천대받는 지역부터 건설되기 시작했다. 자전거 외에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없는 저소득층이야말로 이러한 인프라가 가장 필요한 사람이라는 관점에 바탕을 둔 정책이 었다. 포장조차 되어 있지 않던 진흙탕 길에 가로수를 심은 널찍한 길이 놓여졌다. 비록 값비싼 재료나 훌륭한 소재는 아니었지만, 네덜란드나 덴마크 등 유럽 선진국 못지않게 세심하게 설계된 자전거 도로는 빈민층 밀집 지역을 관통하며 곧 훌륭한 공원으로 변모했다. 보고타는 원래 높은 어린이 교통사고 사망률로 악명 높은 곳인데, 여기에서만큼은 아이들이 차에 대한 두려움 없이 안심하고 놀 수 있었다. 어른에게는 출퇴근길, 아이들에게는 통학로와 놀이터가 되면서, 주민들 사이에 생필품을 사고파는 시장이 서는가 하면 자전거 수리점, 인력거 등 새로운 경제 활동이 창출되었다.
또한 식료품 노점상이 늘어나 멀리 가지 않고도 먹거리를 살 수 있게 되었으며 생활비를 절약하고 시간을 아낄 수 있게 되었다. 그저 보기에 좋은 공원이 아니라 생계에 큰 도움을 주는 수단이 된 것이다. 교통 체증으로 유명한 보고타에서 자전거가 오히려 차보다 빠른 경우도 많았다. 과외 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한 어린이들을 위해 부모가 돌아올 때까지 노상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돌봐주는 방과 후 프로그램도 생겨났다.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변에서라면 불가능한 이야기다.
또한 자전거 도로는 보고타의 혁신적인 급행 버스 체계와 연결되어 효율성이 극대화되었다. 페날로사 형제는 총 300km가 넘는 자전거 도로를 구축했다. 길 페날로사가 이끄는 공원국의 과감한 정책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페날로사 형제는 단기간에 200여 개가 넘는 근린 공원을 조성해 도시 어느 구역에 살든지 걸어서 이용할 수 있도록 공원 체계를 구축했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휴식이나 여가를 위해 투자할 여건이 되는 반면, 저소득층 노동자의 경우 이에 투자할 시간적·금전적 여유가 없다는 간단하고 명확한 철학에서였다. 따라서 경제적으로 하층 계급일수록 빠르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공원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일환으로 빈민가를 통과하는 24km의 선형 공원인 엘 포르베니르(El Porvenir), 빈민가와 부유층 지역을 잇는 후안 아마리요 그린웨이(Juan Amarillo greenway) 등이 건설되었다. 그는 도시 한가운데 버티고 있던 특권층의 전유물인 골프장을 지금은 보고타에서 가장 유명한 대형 공원인 시몬 볼리바르(Parque Simón Bolívar)로 바꾸기도 했다.
길 페날로사는 대한민국의 수원시를 비롯해, 세계 180여 개국의 정부와 민간 단체를 상대로 자문을 수행해왔다.
이 꼭지를 연재하고 있는 인터뷰어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뉴욕 오피스를 이끌며 10여 차례의 해외 공모전에서 우승했고, 주요 작업을 뉴욕시립미술관 및 소호, 센트럴파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지의 갤러리에 전시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