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스타크래프트가 선풍적 인기를 끌던 시절, 내 또래 친구들은 학원과 PC방을 오가며 교과서 속 이순신보다 프로게이머 임요환을 숭상했다. 나도 그 대열에 잠시 합류했으나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게임엔 소질이나 흥미가 없었고, 학원 수업도 재미없어서 꾸벅꾸벅 졸기 바빴다. 다만 틈날 때 산이나 들판, 개천을 누비며 꽃과 나무를 보는 건 좋아했다. 꽃과 나무에 흥미 이상의 꿈과 실행력을 가졌다면 아마 지금쯤 어떤 디자인 오피스 원고 한 귀퉁이를 쓰고 있는 조경가가 됐을지도.
꽃과 나무에 흥미를 갖게 된 건 주변 환경의 영향이 컸다. 새벽에 나가서, 저녁에 들어오는 고된 하루 속에서도 엄마는 틈날 때마다 집 앞 화단을 열심히 꾸려나갔다. 우리집 밥상에 늘 오르내리던 깻잎과 청양고추, 호박 등 식재료부터 봉선화, 라일락, 맨드라미, 코스모스 등까지 다양한 꽃과 식물이 화단을 채웠다. 특히 봄의 화단이 좋았다. 집 앞에 아름답게 흩날리는 아카시아 꽃비를 맞으며 들어온 적막한 집에 퍼지고 있는 라일락 향은 친절한 식당 종업원이 ‘어서 오세요’라고 활기차게 인사하는 것처럼 나를 반겼다. 라일락 덕분에 ‘환대’의 의미를 어렴풋이 배웠다.
꽃이 환대를 알려줬다면, 나무는 위로를 알려줬다. 당시 우리 학교에는 개교부터 함께해 온 약 백년 가까운 수령의 느티나무 몇 그루가 심긴 쉼터가 있었다. 그 쉼터는 학교와 도로 사이의 단차가 있는 공간에 놓인 일종의 완충 녹지였다. 삐그덕거리는 철문을 열고, 계단을 저벅저벅 내려가 회양목 울타리가 둘러싸인 쉼터에 가면 울창한 느티나무 숲이 그늘을 내주고 있었다. 바둑돌처럼 군데군데 놓인 돌 벤치에 누워서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가지와 초록으로 뒤덮인 온 세상을 더 청량하게 만드는 시원한 바람과 누구라도 한없이 품어줄 것 같은 큰 그늘 안에서 불안, 걱정, 시름은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사라졌다. 위로는 말로 전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느티나무를 통해 ‘말 없는 위로’가 무엇인지 알게 됐다.
나의 삶에 작은 영향을 미쳤던 꽃과 나무를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새로운 역사를 만든 사람도 있는데, 바로 조선시대 화가 강희안이다. 그는 시와 그림에 능하고 재상의 재목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명예와 부에는 관심이 없었고, 소박한 삶을 지향했다. 출근 시간이나 부모님의 안부를 묻는 때를 제외하면 꽃과 나무를 키우는 일로 시간을 대부분 보냈다. 그는 매화가 피면 그 옆에서 시를 짓고, 국화가 피면 술을 마시고, 가을엔 수레를 타고 단풍 구경을 다녔다.(각주 1) 이렇게 꽃과 나무를 돌보다가 탄생한 것이 바로 한국 최초의 원예서적 『양화소록』이다.
『양화소록』은 그가 꽃과 나무를 기르면서 알게 된 특성과 재배법, 품종 등을 자세히 담아낸 일종의 개론서인 동시에 그의 삶과 철학을 엿볼 수 있는 책이다. 식물의 천성과 본성을 다르게 하면 죽듯이, 인간도 자신의 본성과 천성에 맞게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또한 옮겨 심을 때 굵은 뿌리가 끊기면 쓰러지고 마는 노송에 빗대 옛법을 함부로 뜯어고치는 조변석개朝變夕改를 지적했다.(각주 2)
요새 그의 삶에서 영감을 얻어 분재를 키우고 있다. 곧게 뻗은 수형의 나무로 시작하려고 했는데 처음부터 관리가 어려운 걸 하면 쉽게 포기할 것 같아서, 아주 작은 풀 한 포기로 시작하고 있다. 물가에서 잘 자라는 석창포인데, 귀엽고 작아서 아주 매력적이다. 매일 아침 물을 주거나 노란 잎을 솎아내며, 그 작은 친구가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걸 지켜보며 나름의 보람과 재미를 느낀다. 특별히 무언가를 하려고 애쓰지 않은 채 그냥 좋아하는 걸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바라볼 수 있는 그 시간이 내게 참 소중하다. 유승종 소장의 표현(112쪽)을 빌리자면 무목적의 시간이라고 할까. 내 삶의 가까운 반경 안에 있는 분재를 다듬고 보살피듯 나의 일상과 마음을 살펴보면서 차곡차곡 무목적의 시간을 쌓아나가고 싶다. 그렇게 내게 환대와 위로를 전했던 꽃과 나무를 닮아가는 삶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각주 정리
1. 강희안, 이종무 역, 『양화소록』, 아키넷, 2012.
2. 조상인, “흐르는 물에 빠져든 선비...속세 벗고 삶의 순리 만끽하다”, 「서울경제」 2017년 9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