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2010년대에 때아닌 금서라도 나타난 것일까? 걸그룹 레드벨벳의 아이린, 소녀시대의 수영, 배우 서지혜는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는 이유로 개인 SNS 계정이 악성 댓글로 도배되며 갖은 모욕적 언사에 시달렸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에 출연한 배우 정유미도 비난을 면치 못했다. 이들의 ‘죄목’은 공인으로서 페미니즘 성향을 드러낸 것이지만, 같은 책에 대한 감상을 공식적으로 밝힌 남자 국회의원과 대통령, 보이그룹 멤버를 향해서는 이 같은 비난적 여론이 가시화되지 않았다. 책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공감’과 ‘혐오’ 양극단을 달리며 갈수록 합의점에서 멀어졌다. ‘내 이야기다’, ‘엄마 생각이 난다’는 의견이 속속들이 나오는 가운데 ‘여친이 ‘82년생 김지영’ 보자는데 헤어져야 할까요?’라는 질문이 웹 커뮤니티에 올라오고, 청와대 게시판에는 소설의 영화화를 반대하는 청원이 올라오기도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백만 명이 넘게 봤다고 해도 좀처럼 책을 읽을 의욕은 나지 않았다. 유행에 편승하고 싶지 않은 심보도 한몫 했지만, 극성 페미니스트라고 낙인찍히는 것도 골치 아프고, 피해주의에 매몰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미혼의 1992년생에게 경력 단절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책은 뻔한 불행을 예고하는 점괘나 다름없었다. 출간부터 계속된 논란이 영화 개봉으로 정점을 찍으며 누그러질 즈음, 안 봐도 본 것 같은 찜찜한 기분을 뒤로하고 뒤늦게 책을 펼쳤다. 책장을 넘기며 곳곳에 놓인 차별의 지점에 멈춰 비슷한 경험을 떠올리고 때론 의구심에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다. 복잡해진 마음으로 책을 덮었다. 논란이 이해되면서도 책에 대한 공감 자체가 공격당하는 점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소설 도입부의 시점은 2015년 가을, 두 살짜리 아이를 둔 서른 네 살의 김지영이 다른 영혼이 빙의된 듯한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할 때다. 이후의 이야기는 그 원인을 찾으려는 듯 지영이 태어난 시점으로 돌아가 시간순으로 전개된다. 지영의 문제는 비가시적이고 과소평가되기 쉬운 마음의 질병이다. 작가는 한 사람의 고통을 보여주는 방식이라기엔 효용성이 떨어지는 노선을 택한다. 중간중간 남아 선호 사상, 성희롱에 가까운 발언 등이 등장하나 지영에게 ‘결정적으로 위협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인물 설정도 극적이지 않다. 주인공은 크게 부족함 없는 가정에서 자라나 원하는 대학에 가고 (회사의 장기 프로젝트에서 여자라는 이유로 배제되기 전까지는) 직장에서도 인정받는다. 막장 드라마에 나올 법한 못된 시어머니도 없고, 남편은 자상하다. 여성이라 더 쉽게 노출될 수 있는 ‘치명적인 사건’을 배제한 채 일상의 흐릿한 위기를 다룬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이 소설이 더 많은 이에게 공감 혹은 외면 받는 원인이기도 하다. 조남주 작가는 10년 동안 방송 작가로 일하다 육아로 일을 그만둔 시기에 이 소설을 썼다. 그가 그린 미세한 차별과 폭력은 여성이라면 한 번쯤 겪어봤을 상황인데, 어떻게 보면 별거 아니라 여겨온 것들이다. 어린 지영을 괴롭히는 남자애를 두고 “널 좋아해서 그렇다”며 다독이는 선생님, “애 키우면서 다니기에 그만한 직장 없다”며 지영의 언니에게 교대 진학을 권하는 부모님, 집안일이든 육아든 “열심히 도와주겠다”며 지영의 퇴사를 자연스러운 일로 인식하는 남편의 모습이 그 예다. 특정 성별에 대한 비난이 담겼다는 지적은 소설의 본질을 흐릴 뿐이다. (본인 의사와는 관계없이) 지영이 임신이 잘 되도록 약 한 재 지어주라는 고모, 지하철에서 임신한 지영을 보고 불쾌한 기색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젊은 여자처럼 지영의 고충에 가담하는 인물은 남성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책 속 인물과 상황은 고착화된 관습이나 혐오적 시선, 근본적인 구조 문제를 인격화한 문학적 장치에 가깝다.
공공연히 알려졌다시피 소설의 결말은 무력하다. 마지막 장에 서는 앞선 이야기가 지영과 그의 남편이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한 내용임이 드러난다. 의사는 지영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안과 전문의였지만 일을 그만둔 채 육아에 전념하고 있는) 자신의 아내를 돌아보고, 지영을 이해하며 응원한다. 하지만 겪어보지 않은 삶에 대해 이야기하기는 쉽다. 곧바로 그는 “육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여직원은 여러 가지로 곤란한 법”이라며, “후임은 미혼으로 알아 봐야겠다”고 생각한다. 현실에 대한 작가의 자포자기한 심정일까? 그보다는 우회적 화법을 통해 ‘(무엇이 차별인지) 알지만 실은 모르고 있음’을 드러내려는 의도로 읽힌다. 작가는 어쩌면 이것을 말하기 위해 김지영의 삶을 지나 먼 길을 돌아왔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