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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가 만든 도시] 도시의 비움
  • 환경과조경 2023년 09월

근대적 도시 제도는 태생적으로 밀집 포비아 성향을 가진다. 18세기 산업화와 도시 인구의 급격한 증가가 야기한 정주 환경의 악화는 밀집은 죄악이라는 생각을 낳았고, 이를 해소하는 것이 곧 도시계획과 제도의 소명이었다. 그 결과 현 도시 제도는 대체로 ‘채움’을 억제하고 ‘비움’을 강제하는 방향성을 가지며, 채움과 비움의 양과 크기에 대해 비율, 최대·최소의 기준을 제시한다.

 

우리의 도시 제도 또한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제도, 크기를 정하다’(2023년 5월호)에서 언급했듯, 신도시 계획은 수용 인구와 신도시 규모를 기준으로 공원·녹지의 비율을 설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주거 지역에서는 남쪽 대지의 건물이 북쪽 대지에 드는 햇빛을 가리지 않도록 건물 높이에 따라 이격거리를 만족시키는 계획이 필요하다. 크게는 도시 단위에서 작게는 필지 단위까지, 여러 도시 제도는 채움에 대해 최소한의 비움을 확보하도록 만든다.

 

그렇다면 도시 제도가 채움과 비움의 양에 관여하는 것만으로 충 분한 것일까? 채움과 비움의 총량적 비율은 도시의 모습을 좌우하는 중요한 지표지만, 채움에 대한 비움의 방식에 의해서도 도시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진다(그림 1). 우리의 도시 제도가 어떤 채움과 비움을 만들어 내는 지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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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utterstock/Markus Mai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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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뉴욕 센트럴 파크와 교외 단독주택지 사이에서 우리 도시에 적합한 비움의 방식은 무엇인가 ©shutterstock/shipfactory

 

 

모아서 크게 혹은 나눠서 여러 곳에, 비움의 배분

근대 도시 제도가 채움에 대해 최소한의 비움을 확보한다면, 그 비움은 도시 내에서 어떻게 배분되어야 할까? ‘그림 1’의 뉴욕과 교외 단독주택지는 밀도와 높이도 매우 다르지만, 비움의 배분 방식도 매우 다르다. 전자는 개별 대지에는 건축물을 거의 꽉 채워 지을 수 있도록 허용하는 대신 광장과 공원 등 도시에 공동의 비움을 마련하는 것이 우세한 도시를, 후자는 개별 대지 안에 일정 비율의 비움을 확보하는 것이 우세한 도시를 보여준다. 달리 말해, 비움의 배분 방식 매트릭스에서 꽤 극단적인 위치에 해당하는 예다.

 

채움과 비움의 균형을 실현하는 배분 방식으로 어떤 것이 좋다 혹은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도시의 기후는 물론 긴 시간 형성된 해당 사회의 공간 문화를 거스르는 비움의 특정한 배분 방식이 무작정 옳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한 도시 내에서도 중심업무·상업지구냐 외곽의 주거지냐에 따라서, 산이나 하천 등 자연 지형요소의 인접 분포에 따라서, 도시 조직의 특성에 따라서, 채움과 비움의 배분 양태는 달리 평가될 것이다.

 

우리의 도시에서 채움과 비움의 배분에 관여하는 대표 제도로는 공동의 비움을 확보하기 위한 공원·녹지 설치 기준과 개별 대지 내 비움을 확보하기 위한 건폐율을 들 수 있다. 물론 이 두 제도가 애초에 비움의 배분 방식을 설정하는 짝으로 도입된 것은 아니며 목적한 바가 서로 다르다. 광장 등 다양한 형태를 포괄하는 공원·녹지 설치 기준은 도시민이 도시공원이라는 어메니티를 공평하게 충분히 누리는가에 초점을 둔다. 따라서 도시 지역 거주 인구 1인당 6m2로1 어디에서나 동일하다. 이는 총량적 접근으로 대개 시 또는 구, 생활권 등의 공간 단위로 달성 여부를 따지게 된다. 건폐율은 대지 내 위치에 관계없이 최소한의 공지를 확보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수단으로 대지면적 대비 건축물이 차지하는 면적의 비율을 용도 지역에 따라 20~90% 이하로 제한한다.

 

두 제도의 조합이 비움의 배분 방식 매트릭스에서 어디쯤인지, 결과적으로 우리 도시의 비움에서 어떤 방식의 배분이 우세한지를 절대적으로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두 제도가 설정한 기준에서 드러나듯, 도시 공간의 여건에 대응해 공동으로 확보하는 비움과 개별로 확보하는 비움 사이 균형점을 달리 설정하고, 이를 위해 두 제도의 기준을 상호 조율하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거주 인구가 아닌 주간 상주 인구가 많고 건폐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도심지에 공동의 비움을 더 확보할 제도적 근거는 없다. 대지면적이 작은 저층 주거지와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이루어진 주거지는 실질적인 건폐율의 차이가 현격하지만 공원·녹지 설치 기준은 동일하게 적용된다(그림 2). 이처럼 현 제도는 도시와 개별 필지라는 양 극단의 단위에서 비움의 양을 정할뿐, 도시 내에 비움이 어떻게 배분되어야 하는가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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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대단지 고층 아파트와 저층 주거지. 어느 곳에 공동의 비움이 더 필요한가. 출처: 네이버 지도

 

 

제도가 만든 나쁜 비움

도시 제도가 채움을 억제해 얻는 비움은 모두 도시 공간에서 유의미한 역할을 하고 있는가? 여러 연구자는 어떤 광장과 공원, 블록의 중정과 건물의 전면 공간이 잘 쓰이는지 밝히기 위해 노력했다. 대표적으로 윌리엄 화이트(William H.Whyte)는 1970년대 뉴욕에서 여러 외부 공간을 관찰해 어떤 곳이 사람들을 모으고 사랑 받는지 분석했다. 적당한 크기와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 햇빛을 쬐며 앉을 수 있는 벤치, 아름다운 식생과 수공간 등 매력 요소, 핫도그와 아이스크림을 파는 노점상 등이 활력 있는 외부 공간을 만드는 인자로 제시된다.2

 

이런 특징들을 갖춘 ‘좋은 비움’을 만드는 데는 제도보다는 계획과 디자인의 몫이 크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제도가 현실의 다양한 상황에 맞는 좋은 비움의 조건을 개별적으로 제시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비효율적이며, 설령 몇몇 지침을 제시하더라도 그 지침을 따르지 않는 좋은 공간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반대로 ‘나쁜 비움’도 개별 계획가와 디자이너만의 몫일까? 우리 도시 공간에 존재하는, 작동하지 않고 오히려 주변에 악영향을 미치는 외부 공간에는 도시 제도의 몫이 분명히 있다.

 

토지 수요가 높은 도시에서 대규모 비움을 확보하는 것은 공공 재원과 사회적 합의를 필요로 하는 어려운 일이다. 그만큼 조성의 타당성과 목적과 활용을 제도 바깥에 둘 수 없다. 따라서 개별 대지의 비움에 비해 공동의 비움에는 상대적으로 더 구체적인 설치 기준들이 마련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 3’ 기사의 사례는 이를 설계한 디자이너의 역량 부족 탓일까? 동인천 광

장은 교통광장 중 역전광장에 해당하며, 관련 법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좋은 비움을 만들기에

충분한지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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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김미경, “600억 들였지만 ‘허허벌판’ 동인천역 북광장 활성화 방안 시급”, 「경기일보」 2013년 7월 23일.

 

 

환경과조경 425(2023년 9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도시공원 및 녹지 등에 관한 법률

2. William H. Whyte, The Social Life of Small Urban Spaces, Project for Public Spaces, 1980.

 

유영수는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이로재와 기오헌에서 건축 실무를 경험했다.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에서 도시디자인과 사회과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돌아와 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며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병행했다. 현재는 인천대학교 도시건축학부에서 법, 제도, 현대 도시설계 이론, 스튜디오를 가르치고 있다. 건축과 도시를 아우르는 스케일에서 개별적인 공간 현상과 법제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고, 계획과 디자인의 역할을 확장하기 위한 이론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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