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후원의 부용지(芙蓉地) 권역을 지나 불로문(不老門)을 향해 가다 보면 우측 담장 너머 창경궁 북측에 자리한 대온실이 보인다. 조선의 궁궐에서 하얗고 투명한 대형 유리 온실을 본다는 사실 자체가 낯선 일이라, 사람들은 이 느닷없는 대온실의 등장에 각양각색으로 반응한다. 조선의 궁궐에 근대 건축물이 있으니 신선하다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식민지 유산이니 철거가 마땅하다, 궁궐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는 은연중에 궁궐은 오직 조선다운 전근대 풍경이어야 한다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지만, 개항 이후 가장 급진적으로 변한 곳은 다름 아닌 궁궐이다. 잘 알려진 경운궁(덕수궁)의 석조전이나 정관헌, 경복궁 집옥재, 창덕궁 희정당 등 전각 내외부를 장식하고 있는 다채로운 재료와 문양, 조명, 가구들만 봐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창경궁의 대온실과 프랑스식 자수화단, 분수의 앙상블과 대칭적 마감은 경운궁 석조전 일대의 경관만큼이나 근대적이다.
1909년에 조성된 대온실은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 건립 계획이 결정된 이후 가장 먼저 만든 시설이다. 대온실의 설계자는 원예학자 후쿠바 하야토(福羽逸人, 1856~1921)인데, 대온실 정면의 자수화단과 분수는 누가 설계하고 조성했는지 아직 알려진 바 없다. 건축가가 아닌 원예학자가 대온실 설계를 했으니 주변 조경도 함께 다뤘을 수 있고, 아니면 온실 시공을 한 미상의 프랑스 회사가 조경을 담당했을 가능성도 있다.
후쿠바 하야토는 프랑스와 독일에서 수학한 후 본국으로 돌아와서는 신주쿠교엔(新宿御苑)의 식물원 책임자로 근무하면서 1896년 식물원에 최초로 서양식 온실을 건립하는 데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창경궁 대온실 설계는 신주쿠교엔의 대온실 건설의 경험이 토대가 되었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신주쿠교엔의 서양식 온실은 1945년 미국의 폭격으로 소실되어 지금은 옛 사진으로만 확인할 수 있는데, 창경궁 대온실은 이 온실의 1/4 규모로 작지만 외관은 매우 닮았다.
참고문헌
문화재청, 『일본 궁내청 소장 창덕궁 사진첩』, 2006.
문화재청, 『창경궁 대온실 기록화 조사 보고서』, 2007.
김정은, “일제강점기 창경원의 이미지와 유원지 문화”, 『한국조경학회지』 43(6), 2015, pp.1~15.
김정화, 『우리나라 식물원의 기원과 진화』,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7.
“昌慶苑植物園 培養室開放 西洋化를 公開”, 「중앙일보」 1932년 3월 6일.
서울역사박물관 홈페이지(museum.seoul.go.kr)
문화재청 홈페이지(www.heritage.go.kr)
* 환경과조경 416호(2022년 12월호) 수록본 일부
박희성은 대구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한중 문인정원과 자연미의 관계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에서 건축과 도시, 역사 연구자들과 학제간 연구를 수행하면서 근현대 조경으로 연구의 범위를 확장했다. 대표 저서로 『원림, 경계없는 자연』이 있으며, 최근에는 도시 공원과 근대 정원 아카이빙, 세계유산 제도와 운영에 관한 일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