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의 문예왕 정조
조선 제22대 왕 정조(이름 이산李., 1752~1800)는 조선 후기 문예 부흥과 개혁, 대통합을 이룬 군주로 알려져 있다. 열한 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격했고, 이후 할아버지 영조의 강력한 지지에도 불구하고 죄인의 아들로서 왕위에 오르기까지 험난한 과정을 겪었다. 하지만 25세에 왕이 된 후에는 타고난 영민함, 성실성, 바른 의지로 정치, 경제, 문예 등 국가 전반의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각별한 애민사상으로 민생을 안정시켰고 당파와 신분을 초월해 인재를 등용함으로써 학풍을 쇄신하고 학문을 크게 진작시켰다. 정약용을 비롯해 서유구,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이 정조가 발굴하고 육성한 신진 학자로 개혁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 중용된 이들이다.
정조는 신하는 물론 백성과도 적극적으로 소통함으로써 유교적 이상 사회인 ‘대동 사회’를 실현하고자 애썼다. 개인적 염원과 국가적 통치 차원에서 전격 추진한 화성 건설은 개혁의 완결판으로 평가된다. 화성은 군사용 성벽이면서도 빼어난 건축미를 자랑한다. “아름답게 지은 성은 적에게 두려움을 준다”고 한 정조의 말에서 그의 심미안을 넘어선 창의적 역발상, 시대를 앞선 참신한 예지를 엿볼 수 있다. 축성 과정에서 실사구시實事求是에 입각한 신기술을 구사한 점, 그리고 위민 사상에 직결된 노동력 활용 등에서 우리는 정조의 개혁적 사고를 독해할 수 있다. 국영 농장인 둔전屯田과 농업 용수 확보를 위한 저수지 설치, 백성의 소득 증대를 위한 뽕나무·잣나무·밤나무 식재, 그리고 하천 제방 및 가로의 버드나무·소나무·느티나무 식재 등은 자족성과 친환경성, 그리고 경관까지 고려한 그의 선구적 비전과 철학의 산물이기도 하다.
정조, 정원가로 읽기
정원가의 정의를 직접적 정원 조성 행위 여부로 규정한다면 정조를 정원가로 선뜻 간주하기는 어렵다. 그가 정원을 직접 조성했다는 증거를 찾기는 어렵다. 하지만 필자가 정조를 정원가로 읽고자 하는 것은 그가 남달리 정원의 효용을 발견하고 활용했다는 사실에 연유한다.
그가 즐긴 대표적 정원은 창덕궁 후원이다. 후원 조성에 공을 많이 들인 왕으로는 세조, 인조, 숙종 등을 들 수 있지만, 왕조의 대표 격 정원으로 후원을 가장 잘 활용한 이는 단연 정조라고 할 수 있다. 재위 24년 동안 주로 창덕궁에 머물렀던 정조는 완상, 유식, 성찰 등 개인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자신이 꿈꾼 개혁과 치세를 위한 방편으로 궁궐과 후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팽팽한 정치적 긴장감을 풀어내고 유유자적하면서 휴식과 명상을 취하기에 후원은 최적의 장소였다.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기성 당파와의 갈등에 시달릴 때마다 정조는 아름다운 후원을 찾아 마음을 달래고 개혁의 꿈을 다지곤 했을 것이다.
정조는 혼자만 정원을 잘 즐기는 데 머물지 않았다. 기회가 될 때마다 아끼는 신하들을 초대해 후원 곳곳을 직접 안내하며 함께 유람하기도 했다. 후원뿐만 아니라 세심대와 같은 한양의 명소를 찾아가 신하들과 시를 주고받기도 했을 만큼 정조는 정원과 풍치 즐기기를 좋아했다. 군신창화君臣唱和, 곧 임금과 신화가 노래를 주고받는 문학적 즐김을 통해 문예를 고취시키며 신하와의 정치적 유대감을 형성해 나갔다. 3월과 9월 두 차례 규장각 전원에게 휴가를 주어 정자에서 풍류놀이와 독서를 하도록 했다. 학문을 독려하되 정원이나 자연 속 유식遊息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여럿이 함께 나눔으로써 정원의 참맛을 제대로 즐긴, 진정한 정원가였던 셈이다. ...(중략)...
* 환경과조경 368호(2018년 12월호) 수록본 일부
성종상은 서울대학교에서 조경을 공부한 이래 줄곧 조경가의 길을 걷고 있으며, 지금은 대학에서 조경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선유도공원 계획 및 설계, 용산공원 기본구상, 2013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장 마스터플랜, 천리포수목원 입구정원 설계 등이 있다. 최근에는 한국 풍토 속 장소와 풍경의 의미를 읽어내고 그것을 토대로 풍요롭고 건강한 삶을 위한 조건으로서 조경 공간이 지닌 가능성과 효용을 실현하려 애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