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가를 기술자 취급하는 현실
최근 어떤 지자체의 복합 문화 시설 조성 프로젝트에 조경 분야 자문위원으로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대지 면적이 300평에서 조금 모자라는 작은 프로젝트지만, 도심의 역사적 의미가 있는 건물을 리모델링해 활용하는 중요한 프로젝트였고 건축 설계공모를 통해 당선작을 선정해 진행하고 있었다. 당선된 건축가는 유수의 당선 경험과 수상 경력을 자랑하는 실력 있는 건축가였다. 필자는 자문회의에 참여하면 디자이너의 성향을 존중하고 최소한의 의견을 내려고 하는 편이다. 이번에도 공모 당선작 본래의 설계 의도가 그대로 구현될 수 있도록 얌전한 자문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발주처가 보내온 설계 자료를 받았을 때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별도의 조경 도면은 없었고, 단 한 장의 조경 도면이 건축 도면 사이에 끼여 있는데 그마저도 조경가가 아닌 비전문가가 작성한 것이 명확하게 드러날 정도로 수준 이하였다. 건축사사무소의 직원이 다른 조경 도면을 보면서 흉내 내듯 그린 것이 분명했다. 결국 평소와 다르게 장문의 의견서를 제출했고, 약 한 달 뒤 진행된 2차 자문회의에는 다행히도 실력 있는 조경가의 도면 한 꾸러미가 제출됐다. 보고 배워야겠다 싶을 정도로 수준이 높았고 그래서 검토하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문회의 중 건축가가 조경가를 소개하며 사용한 단어 때문에 또다시 심기가 불편해졌다. “이번에는 조경기술자 분을 모셔 도면을 작성했습니다.” 그는 조경가를 조경기술자라고 표현했다.
조경가 호칭과 조경사 제도의 필요성
한편으로는 이해되기도 했다. 조경가라는 호칭이 조경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명확히 정립되지 않은 듯하고, ‘한국조경가협회’라는 이름의 정식 단체도 아직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조경설계 관련 자격이 조경기술사 또는 조경 분야 특급기술자 등으로 되어 있으니, 조경설계 하는 사람을 기술자라고 부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스스로 별다른 저항 없이 그렇게 지내온 것이다. 그래서 최근의 여러 움직임은 아주 의미 있고 반갑다. 여러 선배의 의기투합을 통해 한국조경가협회의 설립과 법인화가 추진되고 있고, 올해 초에 고시된 제2차 조경진흥기본계획에 조경사 자격을 신설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강력한 추진 동력을 얻게 되었다. 한국조경가협회가 창립되면 조경계 내부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조경가라는 이름을 널리 알릴 수 있을 것이고, 그에 더해 조경사 자격까지 만들어진다면 조경의 위상이 한 단계 격상되는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이다. 건축설계는 건축사 자격을 가진 건축가가 하고, 조경설계는 조경사 자격을 가진 조경가가 하는 명확한 역할과 관계가 설정되는 것이다.
조경사 자격 신설을 위한 관련 법규의 제개정
조경사 자격을 새로 만들기 위한 본격적인 논의는 이제 시작됐다. 아마도 다양한 이해당사자 간의 수많은 의견 수렴 과정과 협의 절차가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조경사 제도를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관련 법규의 제정 또는 개정이 필요하다. 첫 번째 대안은 새로운 법령 제정을 통해 조경사 제도를 신설하는 것이다. 건축 분야의 관련법을 찾아보면 건축사 자격과 관련하여 별도의 법령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바로 ‘건축사법’이다. 조경사 자격과 관련해 건축사법과 유사한 성격의 ‘조경사법’을 제정함으로써 법률적 근거를 만드는 것이다. 두 번째 대안은 기존 법령을 개정해 조경사 제도를 신설하는 것이다. 조경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법은 2016년에 제정된 ‘조경진흥법’이 있으며 새로운 법령을 제정하는 것보다는 기존 법령을 활용해 개정하는 것이 용이할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건축사법과 같은 별도의 법령을 제정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대안이며, 이 글에서 제안하는 새로운 조경사 제도의 내용은 조경사법을 신규로 제정하는 것을 전제로 했다.
* 환경과조경 412호(2022년 8월호) 수록본 일부
이남진은 서울대학교 산림자원학과와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심원조경기술사사무소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다. 현재 조경기술사사무소 바이런(VIRON)을 이끌고 있다. 좋은 설계는 좋은 회사에서 나온다는 생각으로 설계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함께 성장하는 환경을 만들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