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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과조경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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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새해를 걸으며
해피 뉴 이어. 이미 두 달 전에 정해 둔 새해 첫 호 이 지면의 제목은 ‘한국 조경 50주년, 『환경과조경』 40주년을 맞으며’였다. “한국 조경이 쉰 살을 맞는다. 2022년, 한국조경학회 설립 50주년과 『환경과조경』 창간 40주년이 겹치는 해다. 8월 말에는 ‘리:퍼블릭 랜드스케이프(Re:Public Landscape)’를 주제로 내걸고 광주에서 제58차 세계조경가대회(IFLA World Congress)가 열린다. 한국 조경의 지난 50년을 돌아보며 기록하는 일, 다음 50년을 예비하며 설계하는 일 모두가 중요한 2022년이다.” 이렇게 잔뜩 힘들여 한 문단 쓰고 나니 글이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 연말 강추위에 얼어붙은 거리를 걷다 돌아왔다. 걸으며 새해를 맞는다. 계속 붕 떠 있는 느낌, 토대가 무너진 허공에 서 있는 기분. 어디가 끝인지 모를 답답하고 막막한 코로나 시대의 긴 터널, 독자 여러분은 어떻게 통과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유도, 계기도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감염된 도시의 어수선한 풍경 속을 목적 없이 걷는 취미 아닌 취미를 가지게 됐다. 몸을 일으키면 저절로 걷게 되고 그냥 걷다 보면 긴 터널의 끝이 보이는 듯한 희망이 생긴다. 노을을 바라보며 무작정 걸으면 복잡하게 뒤엉킨 습한 생각들이 바람에 바싹 마른다. 두 발과 땅이 대화하는 느낌, 나 자신을 세상으로 여는 느낌. 이동이나 답사처럼 특별한 의도를 갖는 걷기와 달리 그냥 느릿느릿 걷다 어슬렁거리며 떠돌다 옆길로 새는, 우연에 내맡긴 걷기는 시간과 공간에 묶인 신체에 자유를 준다. 어쩌면 걷기보다 걷기에 관한 책에 더 재미를 붙인 건지도 모르겠다. 어쩔 수 없는 이론형 인간인지라 닥치는 대로 걷기 책을 모으고 빌리고 읽었다. 프레데리크 그로의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같은 책에서는 여러 철학자와 문인의 산책에 얽힌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고통의 순간에 걷고 또 걸은 니체, 바람구두를 신고 세상을 누빈 랭보, 몽상하는 고독한 산책자 루소, 자본주의의 아케이드를 소요한 베냐민. 그들의 이야기를 단숨에 읽어내려가다 보면 움츠린 몸을 일으키고 운동화 끈을 묶지 않을 수 없다. 걷기와 사유가 교차하는 아름다운 책들을 읽다 보면 도시를 느리게 걸으며 섬세한 풍경을 누리는 것 못지않은 즐거움이 생긴다.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예찬』이나 크리스토프 라무르의 『걷기의 철학』이 경쾌한 산책이라면, 리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과 『길 잃기 안내서』는 긴 도보 여행이다. 로런 엘킨의 『도시를 걷는 여자들』에서는 거리로 뛰쳐나온 전위적 발걸음을, 토르비에른 에켈룬의 『두 발의 고독: 시간과 자연을 걷는 일에 대하여』에서는 공간과 시간을 제 것으로 장악한 자신감을 만날 수 있다. 급기야 지난 가을학기 대학원 ‘환경미학’ 시간에는 교실을 버리고 거리로 나섰다. ‘걷기의 미학, 도시에서 길을 잃다.’ 강의계획서 첫 줄에 허세 가득한 문장을 적었다. 익숙한 도시를 낯선 시선으로 걸으면 일상의 환경에 대한 미학적 문해력을 기를 수 있을 것이라고 수강생들을 설득했다. 시흥갯골생태공원과 배곧생명공원, 하늘공원과 메타세쿼이아길, 경의선숲길, 청계천, 후암동과 해방촌 골목길, 그리고 지도 바깥의 이름 없는 길들을 정처 없이 걸으며 두 발로 지도를 그렸다. 학기말쯤 우리는 하늘과 날씨에 대한 글을 적고 잡초와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울과 파리를 걸으며 생각한 것들’이라는 부제에 끌려 정지돈의 산문집 『당신을 위한 것이나당신의 것은 아닌』을 집어 들었다. “산책은 거창한 의미 이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아름다운 자연과 세련된 숍과 산책로가 없어도 우리는 걸을 수 있다. 돈이 없고 친구가 없고 연인이 없을 때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일은 걷는 것이다. 막차가 끊긴 서울 시내를 걷고, 가끔은 한강 다리를 걸어서 건너기도 하고, 퇴근 후에 집에 가기 싫어 정처 없이 쏘다니기도 한다.……산책은 정체성을 잃고 헤매는 것이지만 멜랑콜리해지거나 심각해지지 않는다.……오로지 걸을 때만 진정으로 쾌활해진다.” 걷기의 가장 큰 매력은 막막하고 답답할 때도,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도 걸을 수는 있다는 점 아닐까. 걸으며 새해를 연다. 2022년을 여는 이번 호는 ‘제4회 젊은 조경가’의 수상자인 조용준(CA조경 소장) 특집호다. 에세이 ‘언플래트닝 랜드스케이프’에 담은 그의 설계 철학, ‘여섯 가지 이야기’로 편집한 그의 작업, 남기준 편집장의 인터뷰, 진양교와 제임스 코너의 추천 에세이로 구성한 특집 지면에서 조용준의 도전과 실험을 만날 수 있다. 이번 호부터 두 편의 흥미로운 시리즈를 새로 올린다. 박희성(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 연구교수)이 집필을 이어갈 ‘모던스케이프’는 근대기의 그림, 엽서, 지도, 책 등 다양한 매체에서 근대 도시의 풍경을 엿보는 기획물이다. ‘어떤 디자인 오피스’는 설계 작업과 설계사무소 경영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다채로운 이야기를 담는 지면인데, 첫 순서는 ‘조경하다 열음’ 편이다. 본지 창간 40주년(2022년 7월호)을 맞아 올해 ‘조경비평상’의 상금이 대폭 풍성해졌음을 꼭 확인하시기 바란다. 조경을 주어로 고민 중인 예비 조경비평가들의 많은 참여를 기다린다.
[풍경 감각] 그린란드 상어의 바다
그린란드 상어가 보는 풍경을 상상해본다. 수명이 수백 년이나 되는 그린란드 상어는 대부분 어렸을 때 시력을 잃는다. 기생충이 눈을 파먹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아도 뛰어난 청각과 후각이 있어 먹잇감을 문제없이 사냥하고 오랫동안 생존할 수 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차가운 바다를 유영하는 그린란드 상어에게 풍경은 없는 존재일까. 아니면 어렸을 적 보았던 바닷속을 몇 백 년 동안 곱씹으며 자신만의 풍경을 만들고 있을까. 길 한복판에서 끊어지거나 엉뚱한 곳으로 향하는 점자 블록을 본다. 밝은 색이 아니라 눈에 잘 띄지 않는 것, 올록볼록하지 않은 것도 있다. 안내견이나 동행인이 없으면 길을 잃기 쉬운 사람들을 생각하며 머나먼 북극해 깊은 곳의 그린란드 상어를 떠올린다. 경험해보지 않아 상상하지 못하는 풍경, 상상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마음을 생각한다. 검고 차가운 밤하늘이 북극해 같다.
조경가 조용준
언플래트닝 랜드스케이프 _ 조용준 여섯 가지 이야기 _ 조용준 관찰과 탐구에서 실제 세계의 확장으로 _ 남기준 쪽빛보다 푸르다 _ 진양교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세 가지 역량 _ 제임스 코너 언플래트닝 랜드스케이프(unflattening landscape)는 조용준 소장의 설계 철학을 보여주는 핵심 키워드다. 하지만 평평하지 않은 게 어디 땅뿐인가. 사람은 누구나 입체적 면모를 갖고 있고, 조용준 소장 역시 그렇다. 그는 계절과 날씨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산처럼 다중의 얼굴을 갖고 있고, 그를 닮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작품을 선보인다. 광장처럼 포용력이 있는가 하면, 활기차게 솟는 분수의 물줄기 같은 재치를 보여주기도 한다. 남기준의 인터뷰는 그 다채로운 작품이 꾸준한 관찰과 탐구를 토대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호기심 많은 그는 이리저리 손을 뻗어 관찰한다. 그에게 감동을 준 사람을 롤모델로 삼고, 그들의 설계 세계를 끈질기게 탐구해 자신의 것으로 소화한다. 서적, 다큐멘터리는 물론 일상의 사물까지 시선이 닿는 모든 것이 설계 세계를 확장하는 영감이 된다. 여섯 가지 이야기는 분절된 에피소드가 아니다. 플랫랜드에서 출발해 경계, 깊이, 표면에 이르기까지 그만의 설계 어휘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시간순으로 흐르는 소설처럼 읽을 수 있다. 특집을 닫는 두 편의 에세이에는 스승이자 동료로서 조용준의 작업을 목격해 온 이들이 발견한 그의 역량이 담겨 있다. 2021년 12월 초, 시상식에서 밝힌 수상 소감이 인상 깊었다. “사무소의 대표가 아닌 소장으로서 상을 받아 그 의미가 더 뜻깊다. 좋은 설계를 하고 그 공로를 인정받기 위해 꼭 회사를 차려야 할 필요는 없다”는 그의 말이 더 많은 젊은 조경가를 새로운 도전으로 이끌기를 기대한다. 진행 남기준, 김모아, 이수민 디자인 팽선민 자료제공 조용준
언플래트닝 랜드스케이프
나를 키운 사람들 진양교의 채우기와 비우기 설계 이론과 제임스 코너의 실천적 어바니즘 기반의 간단명료한 디자인에 영감을 받았다. 진양교 소장은 은사이기도 하다. 공원 설계 수업에서 그를 만나 채우고 비우는 설계 방식을 배웠다. 대상지를 빈 공간이 아닌 녹지로 채워진 자연으로 인식하고, 이를 바탕으로 길과 프로그램이 놓일 공간을 비워나가는 방식이다. 난지 하늘공원은 진양교의 설계 방식이 명확하게 드러난 예다. 나는 CA조경기술사사무소(이하 CA조경)의 창립 멤버로, 유학을 떠나기 전 7년간 그의 밑에서 일하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제임스 코너의 수업을 들을 기회는 없었지만 졸업 후 뉴욕 JCFO(James Corner Field Operations)에 입사했고 그곳에서 그의 설계 방식을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코너의 드로잉에는 수목이나 녹지와 포장을 구분하기 위해 칠한 색이나, 포장 패턴이 없다. 오로지 한 가지 색으로 그린 명확한 선만이 존재한다. 그 선들에는 군더더기 없는 개념과 논리가 장착되어 있다. 그 간단명료한 드로잉 과정을 보면서 불필요한 개념과 과도한 디자인을 벗어던질 수 있었다. 두 조경가로부터 설계의 기본을 배웠고 다양한 실무 프로젝트를 통해 성장해왔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상기 소장(조경설계사무소 온)으로부터 설계안을 쉽고 편안하게 그리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실무를 막 시작한 디자이너가 하나의 선에서 시작해 설계안을 마무리하기까지 느끼는 부담감은 엄청나다. 프로젝트의 홍수 속에서 계획안을 그리기 위한 시간은 생각보다 넉넉하지 않다. 어깨너머로 본 그의 자세에서 설계안을 그리며 힘을 빼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실무에서 가장 많은 것을 알려준 준 사람은 김재환 소장(CA조경)이다. 오랜 기간 함께 일했고 서로에 대한 신뢰를 쌓았다. 논리적 설계 전략, 효율적 업무 진행, 발주처와 건축가를 설득하고 협의하는 방식을 그를 통해 경험하고 익혔다. 김 소장은 나에게 설계안을 그릴 많은 기회를 주었고, 설계 개념과 계획안에 대해 열린 태도로 논쟁하는 것을 즐겼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나 역시 홀로 성장한 것이 아니다. 내가 존경하는 사람들의 설계 방식을 추구했고, 주변의 좋은 동료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지금도 주변에 훌륭한 이들이 많고, 특히 함께 생각을 공유하는 젊은 조경가들이 있다. 그들로 인해 나는 계속 성장할 것이다. 나를 키운 건 8할이 사람이다. *환경과조경405호(2022년 1월호)수록본 일부 조용준은 서울시립대학교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조경을 공부했다. CA조경기술사사무소 소장으로 ‘새로운 광화문광장 기본 및 실시설계’를 이끌고 있으며, ‘워커힐 더글라스 정원 기본 및 실시설계’, ‘이스탄불 하천 회복 프로젝트’, ‘종로구 통합청사 설계공모’ 등 국내 외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개인 자격으로 ‘서울시 72시간 프로젝트’ 공동 우수상, ‘서울형 저이용 도시 공간 혁신 아이디어 공모’ 대상을 수상한 그는 즉흥적인 기획, 전시하지 않는 그래픽 작업 등을 즐기기도 한다. 최근 ‘IFLA 2020 World Landscape Architects Summit’에 한국의 조경가로 초청되어 ‘새로운 기술로 변화되는 삶에 대한 조경의 역할’을 주제로 발제했다.
여섯 가지 이야기
1. 플랫랜드 2. 디자인과 툴, 그리고 생각의 확장 3. 조용준, 조제 그리고 제레미 4. 생성적 경계 5. 보이지 않는 깊이 6. 반응하는 표면 01 플랫랜드 우리는 마치 신이 된 것처럼 높은 곳에서 공간을 마주하고 디자인한다. 전지적 시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2차원적 평면에 불과하다. 하늘 위의 시점은 3차원적인 물리적 공간과 그 공간 이면의 보이지 않는 깊이에 대한 이해를 간과하게 만든다. 관습적으로 학습된 설계 방식은 사고를 고착화하고, 그렇게 만든 공간은 우리의 삶을 단편적으로 만든다. 새로운 시각과 접근이 필요하다. 새로운 디자인 방식을 탐구해야 한다. 나와 다른 생각을 열린 자세로 받아들이고, 나를 둘러싼 모든 경계를 허물어야 한다. 2000년대 초반 조경의 양적 팽창기 시대에 나는 플랫랜드(flatland) 속에서 한눈에 담기지도 않는 거대한 대상지를 수없이 그리며, 고정되어 가는 시각과 무뎌지는 감각을 느꼈다. 이카루스의 날개를 들고 그곳에서 탈출했다. 다행히 다이달로스의 충고는 기억하고 있다. 한국 조경의 양적 팽창기를 지나며 2004년에서 2011년까지 CA조경기술사사무소(이하 CA조경)를 다니며 한국 조경의 부흥기를 경험했다. 매년 두세 개의 턴키와 크고 작은 여러 설계공모를 진행했고, 덕분에 실무 및 판단 능력이 빠르게 향상됐다. 아파트 외부 공간부터 상가, 공원, 하천, 광장, 대규모 개발 사업, 리조트, 단지 계획 등 조경가가 설계할 수 있는 대부분의 프로젝트를 경험하며 도시 외부 공간의 다양성과 중요성을 체득했다. 하지만 촉박한 일정과 쉴새 없이 쏟아지는 프로젝트는 깊이 있는 사고를 할 틈을 주지 않았다. 유학 준비를 위해 포트폴리오를 만들 때는 반성의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즐거운 도전 의미 있는 깨달음 2013년 가을 JCFO에 입사했다. 한국의 실무 경험이 도움이 되어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2년쯤 지났을 무렵 ‘잠실운동장 일대 도시재생 구상 국제공모’가 공고됐다. 이곳에서 배운 경험과 지식을 시험해보고 싶었다. 주말을 이용해 몇 명의 지인과 작업하기로 했지만, 다들 바빴던 시기라 현실적으로 협업이 불가능했다. 결국 혼자 계획안을 그리고 내용을 정리했다. 간결하면서도 명확한 개념과 형태를 찾고자 모든 공간을 잇는 슈퍼 스케일의 원을 계획했다. 이 원은 삼성역 일대와 잠실, 한강변을 잇는 PM개인용 이동 수단과 트램을 포함한 순환 교통 시스템이다. 상업, 주거, 문화 및 체육 시설, 공원 등 다양한 기능의 토지와 건축물을 원을 따라 배열했다. 중심에는 탄천과 연계한 거대한 생태 공원을 계획했다. 짧은 시간 동안 홀로 정리하기에 벅찬 내용과 규모였지만, 도시계획은 또 다른 재미를 알려주었다. 하지만 뒤돌아보니 여전히 저 높은 하늘 위 시점에서 JCFO의 방식을 그럴 듯하게 따라하며 계획안을 그렸던 것 같다. 좀 더 깊이 있는 통찰력이 필요했던 프로젝트였다. 02 디자인과 툴, 그리고 생각의 확장 툴(tool)은 디자인을 위한 도구이자 생각의 방식이다. 디자인이 정체되어 있다고 느낀다면 툴을 바꿔보기를 추천한다.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손 그림을 그리던 시절, 왜 선을 떨리게 그려야 하는지 항상 궁금했다.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한 그 떨림이 과연 실제 공간에서는 어떻게 보일까. 수많은 공간을 펜과 색연필로 디자인하다가 깨달았다. 내가 가장 잘 그리는 곡선과 직선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많은 공간을 비슷하게 그리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파스텔을 써보기도 하고, 연필과 마커만을 이용해 그려보기도 했다. 때로는 모형을 만들었다. 손의 감각을 넘어 컴퓨터 툴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캐드, 포토샵, 마야(Maya), 라이노(Rhino), 스케치업을 손으로 만든 디자인을 재현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 디자인 수단으로 사용했다. *환경과조경405호(2022년 1월호)수록본 일부
관찰과 탐구에서 실제 세계의 확장으로
조경가가 갖춰야 할 소양, 재능과 노력 -인터뷰를 준비하다가 수상 소식을 전하며 나눈 이야기가 떠올랐어요. 2001년 즈음 『환경과조경』에 소개된 적이 있다는 말이요. 찾아보니 2001년 11월호에 ‘제11회 조경인 체육대회’ 남자 마라톤 부문 우승을 차지했다는 소식이 실려 있더군요. 인터뷰 포문을 여는 가벼운 질문으로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운동 좋아하세요? “대학교 3학년 때일 거예요. 서울시립대 캠퍼스를 달리는 코스였는데, 어디쯤에서 어떻게 달리고 언제 치고 나가야 1등을 할 수 있을지 머릿속으로 이미지 트레이닝을 반복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떻게든 우승을 할 생각으로 전략적으로 임했죠. 구기 종목은 다 좋아해요. 스트라이커로 뛰며 서울시립대 도시과학대학 축구대회에서 건축도시조경학부를 우승으로 이끌기도 했고요. 체격이 왜소하다 보니 빠르고 순발력은 좋은데 체력이나 몸싸움 부분에서 좀 떨어지는 거 같아요. 최근에는 골프를 즐겨 치고 있습니다.” -골프 코스 설계해본 적도 있나요? “2007년에 인천청라지구 PF설계를 했는데, 대상지 중 하나가 테마골프 장지구였어요. 그때 진양교 대표(CA조경기술사사무소)가 골프장을 설계하려면 골프를 칠 줄 알아야 한다고 했죠. 그때 골프를 배웠어요.” -진양교 대표와 인연이 깊으시죠. 지금은 대표와 직원의 관계지만, 처음 만난 건 학창 시절이라고 들었어요. 젊은 조경가상 지원서를 보니 2002년 대학에서 진양교 교수의 수업을 들었고, 그 영향을 받아 설계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고 쓰여 있더라고요. “공원 설계 스튜디오에서 처음 만났어요. 첫 수업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빈 종이를 나눠주고 색연필로 전부 칠하라고 하셨죠. 그다음에 지우개로 색을 지워나가며 입구를 만들고, 길을 그리고, 중앙의 마당을 만들게 했죠. 그게 설계의 전부라고 하면서요. 사실 빈 종이에 설계를 하라고 하면 부담이 생겨요. 길을 그리고, 녹지를 그리고, 패턴을 만들다 보면 디자인이 과해지는 경향이 있죠. 그런데 미리 녹지를 채워놓고 비워나가는 식으로 설계를 하니 불필요한 선이 생기지 않더라고요. 간결한 디자인을 만드는 ‘채우기와 비우기’ 이론에 감명을 받았어요.” -본래 설계에 관심은 있었나요? 사실 많은 학생이 전공에 대해 알지 못한 채 수능 성적에 맞춰 입학하기도 하잖아요. “고등학교 시절을 굉장한 압박감에 시달리며 보냈어요. 아침 7시에 학교에 가서 내내 공부를 하다 자정이 다 되어서야 집에 가는 식이었죠. 대학에 입학하니 너무 행복하더라고요. 모든 일을 자의로 결정할 수 있으니, 학교도 가고 싶을 때만 갔죠. 학점이 좋을 리 없었는데, 신기하게도 설계에는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않아도 좋은 평을 들었어요. 성적도 잘 나왔고요. 막연히 나와 설계가 잘 맞는다고 생각한 거죠. 2002년에 장종수 대표가 운영하는 기술사사무소 렛LET에서 인턴을 했어요. 월드컵으로 전국이 들썩거리던 때라 축구를 워낙 좋아하는 저 역시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고 휩쓸렸죠. 그때 크게 혼이 나서 설계는 내 길이 아닌가 고민하기도 했어요. 공무원이나 공사 쪽으로 나아가야 하나 고민하며 영어 공부를 시작할 때쯤, 당시 토문에서 일하고 있던 진양교 대표의 부름을 받았죠. 조경가가 되려면 재능과 노력이 필요한데, 재능은 있어 보이지만 노력을 할 생각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시더라고요. 노력을 한다면 분명히 좋은 조경가가 될 거라고 말해주셨죠. 자존감이 바닥을 치던 시기였는데 그 말에 용기를 얻었어요. 그때부터 다른 데 한눈팔지 않고 조경설계에 매진하겠다는 마음으로 작업하고 있습니다. 그 한 마디가 조경설계를 하게 된 계기인 셈이죠.” -그렇게 연을 맺어 CA조경기술사사무소(이하 CA조경)의 창립 멤버가 된거군요. 6~7년 정도 실무를 하다가 유학을 갔습니다. 일반적인 유학 시기보다는 살짝 늦은 감이 있어요. “처음에는 유학에 뜻이 전혀 없었어요. 입사 동기인 유지현(SWA)과 친했는데, 어느 날 유학을 간다고 하더라고요. 중학교 때부터 꿈꿨던 일이라면서요. 그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동했어요. 구체적인 계획도 세우지 않고 우선 주변 사람들에게 유학을 갈 거라고 말하고 다녔죠. 시간이 흘러도 유학을 가지 않으니 주변에서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서 떠밀리듯 준비를 시작했어요. 사실 유학을 가기에 토플 점수와 학점이 되게 낮아요. 학점은 3.0도 안 되죠. 하지만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유펜)에서 합격 통보를 받았죠. 학생을 대상으로 한 특강을 할 때 이 얘기를 꼭 해요. 용기를 가져라. 누구나 갈 수 있는 게 유학이다. 정보가 부족해서 못 갈 뿐이다.” *환경과조경405호(2022년 1월호)수록본 일부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세 가지 역량
나는 조용준을 그 누구보다 높게 평가한다. 그는 탁월한 조경가일 뿐만 아니라 조경 분야의 새로운 가능성을 선도하며 발전시킬 사람이다. 예술적 창의성, 열정, 재능을 두루 고려했을 때 ‘제4회 젊은 조경가’로 선정될 자격이 충분하다. 조용준을 처음 만난 것은 유펜(UPenn)에서 그가 유학 시절을 보내고 있을 때다. 그가 보여준 디자인 작업은 실로 놀라웠다. 그의 디자인은 강력하고 상징적이며 아름답게 발전했고, 수많은 드로잉과 모델, 내러티브를 통해 정교하게 표현됐다. 졸업 후 조용준에게 JCFO(James Corner Field Operations)에서 여러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는 끊임없는 노력으로 탁월한 결과물을 만들었다. 로스엔젤레스의 퍼싱 스퀘어(Pershing Square), 탕헤르(Tangiers)의 워터프런트 프로젝트, 두바이의 대규모 개발 프로젝트, 밀위키의 새로운 도시 공원을 비롯해 홍콩, 선전, 상하이의 프로젝트에서 JCFO의 핵심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조용준은 세 가지 영역에서 상당한 역량과 창의성을 보여줬다. 첫째, 그는 3차원 모델링과 형태를 다루는 데 재능이 있다. 경관은 종이처럼 평평하지 않다. 높낮이가 있고 울퉁불퉁하며 역동적이다. 그는 이러한 특성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대규모 경관을 세련되고 우아하게 구성하는 데 탁월한 역량을 갖고 있다. 작품을 연구하고 발표하는 데 필요한 그만의 시각화 기술 덕분에 디자인을 반복적으로 수정함으로써 설계안을 보다 깊이 있게 탐구하고 정제해 발전시킬 수 있었다. 특히 중요한 점은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경관 속을 어떻게 가로지르고 이동하는지 깊게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경관 경험은 시간적이면서 지속적이기 때문에 조형적으로 구성된 경관의 형태를 움직임, 연속적 경험, 전개되는 장면의 관점에서 연구해야 한다. 둘째, 조용준은 경관이 물리적 건축을 토대로 하는 작품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선과 평면, 표면, 다양한 요소를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지 이해하고 있으며, 설계안을 실제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현장 공정, 토양, 식재, 시설물을 세심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오늘날 과도한 야심으로 가득한 그래픽 형식주의와 단조롭고 정형화된 작업으로 분열되는 조경 분야의 현실을 생생하게 목격하고 있으므로, 이는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훌륭한 디자인과 혁신적 기술이 더해진 실현성이 결합할 때 나타나는 연관성과 상호작용이야말로 조경 프로젝트 성공의 핵심 요소라 할 수 있는데, 조용준은 이런 사실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다. *환경과조경405호(2022년 1월호)수록본 일부 제임스 코너는 JCFO의 설립자이며,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디자인스쿨 명예교수다. 전 세계의 복합적 도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강의 활동을 하며 조경과 어바니즘 분야 발전에 기여했다. 대표작으로는 뉴욕의 하이라인, 런던 퀸 엘리자베스 올림픽 파크, 산타모니카 통바 파크, 시애틀 워터프런트의 마스터플랜등이 있다.
쪽빛보다 더 푸르다
2000년 혹은 2001년 봄학기, 학부 커리큘럼 중 가장 중요한 설계 과목인 ‘공원 설계 스튜디오’의 첫 시간에 한 친구가 늦게 왔다. 그 친구가 눈에 띄었던 것은 첫 강의에 늦는 학생이 흔치 않은데다가 유독 머리색이 노란색이었기 때문이다. 첫 인상이 좋았을 리 없고 강의 내내 수업 태도도 인상적이지 않은 걸로 기억한다. 학기 말에 과제를 제출했을 때 내가 깜짝 놀랐던 걸 보면 말이다. 제출 결과물은 독보적이었다. 무릎을 칠 정도로 내용은 물론 표현도 탁월했다. 몇 년이 지나 학교를 그만두고 토문건축에 잠시 적을 두었을 때, 뽑아야 할 신입으로 제일 먼저 그 친구가 떠올랐고 수소문해서 찾았다. 이후 지금까지 조용준은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2003년 11월, CA조경을 개업할 때도 함께했고 유학을 가기 전까지 CA조경의 여러 설계에 톡톡히 기여했다. 특히 유학 가기 직전 당선된 ‘광주·전남 공동혁신도시 조경설계공모’에서의 맹활약이 기억 속에 생생하다. 좋은 평을 받은 빛가람 호수의 형태와 에지 처리, 여러 디테일은 대부분 조용준의 아이디어에 신세를 졌다. 아깝게 당선을 놓친 ‘파주운정지구 도시기반시설 조경설계공모’의 설계안에서 운정호수공원 에지에 사용한 강력하고 미려한 선형은 솔직히 말해 수원 광교호수공원의 복잡한 교량형 에지보다 멋졌다. 십 여 차례의 디자인 리뷰에서 당시로는 다소 낯선 ‘경계없는 도시와 공원’, ‘물과 공원의 유연한 에지’를 제안하고 고집한 사람이 조용준과 류지현(SWA)이었다. 그걸 내가 ‘용산공원 설계 국제공모’에서 슬쩍 ‘모호한 경계(blurred edge)’ 개념으로 가져왔다. 현재는 보편적인 생각이 되었지만 앞서 나간 젊은 정신으로부터 내가 한 수 배웠던 셈이다. 조용준은 유펜(UPenn) 졸업 후 JCFO(James Corner Field Operations)에서 3년간 일을 했다. 이때 활약상은 당시 일했던 팀의 소장인 정재윤(JCFO)이 지금도 좋은 프로젝트를 맡을 때면 종종 작은 부분이라도 참여해줄 수 있는지 조용준에게 문의하는 데서 짐작할 수 있다. 그는 JCFO에서 큰 프로젝트보다 디테일에 대한 안목을 키웠던 것 같다. JCFO를 퇴사하고 CA조경으로 돌아온 조용준은 현재 많은 일을 주도적으로 담당하고 있다. 특히 2020년에 완공한 워커힐 더글라스 하우스의 더글라스 정원은 아무도 간섭하지 않은 조용준만의 작품이다. 주변의 자연을 어떻게 정원의 일부로 만들지 뛰어난 판단을 내린 덕에 정원은 원래 있었던 듯 자연스러우면서도 보기 좋게 도드라졌다. 원래 갖고 있던 감각에 JCFO에서 훈련한 디테일에 대한 안목이 균형 있게 합쳐졌다. 게다가 이러한 밸런스와 앙상블을 이제 막 발휘하기 시작했다. *환경과조경405호(2022년 1월호)수록본 일부 진양교는 홍익대학교 건축도시대학원 교수와 CA조경기술사사무소 대표를 겸하고 있다. 주요 설계 작품으로 목천 독립기념관, 둔천 올림픽공원, 상암 월드컵공원 및 하늘공원, 청계천 총괄 복원, 한강 반포공원 등이 있으며, 『청량리의 공간과 일상』, 『기억과 상징으로의 여행』, 『건축의 바깥』을 펴냈다. 경관 알레고리의 재현이 조경가가 땅을 다루며 풀어야 할 최종의 숙제라는 견해를 여전히 가지고 있다.
블랙스톤 뮤직 플러스 공원
백 년에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블랙스톤(Blackstone) 아파트는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상하이 쉬후이(Xuhui) 구에 자리 잡고 있다. 프로젝트의 목표는 블랙스톤 아파트와 비좁은 골목길을 변화시키고 확장하여 음악을 주제로 한 공원을 만드는 것이다. 공원을 통해 아파트의 유서 깊은 구조와 맥락을 보존하면서 참신한 디자인을 더해 상하이의 과거와 현재를 통합하고자 했다. 아파트가 가진 독특한 개성을 바탕으로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을 하나로 이어주는 오케스트라’라는 콘셉트를 도출했다. 아파트 전면부, 맞은편의 M+ 호텔과 주동 사이의 공원에 다면적 경관을 연출하기 위해 자생 식물을 활용했다. 아파트가 가진 역사와 이에 따른 다채로운 문화가 공존하는 모습이 조경을 통해 표현되도록 했다. 단순한 개조의 수준을 넘어 아파트 전면부와 외벽, 소규모 공간을 재활용하고 새롭게 꾸며 다양한 디자인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전통과 현대적 콘셉트를 결합해 만든 공공 공간으로 지역민과 방문객의 편안한 공동체 생활을 지원하고자 했다. 100년 역사를 지닌 아파트 1924년에 건립된 블랙스톤 아파트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바로크 양식 아파트 건물로 상하이 중심부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웅장한 규모, 우아한 디자인, 역사적 배경은 상하이의 건축적 성격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아파트 내외부의 모습은 낡아갔고, 맞은편에 있던 상하이 교향악단의 기숙사처럼 쓰이고 있었다. 현재 1층은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면서 도심 문화 공간의 역할을 하고, 2층에서 6층까지는 주거와 사무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환경과조경405호(2022년 1월호)수록본 일부 Lead Designers Li Zhongwei, Lin Nan, Zhu Yijia, Wu Jingyu Design Team Wei Chun, Shen Yijun, Zhang Qiran Construction Drawing DesignersZhou Jian(Construction drawing project management), Wu Jingyu(Stone wall design and construction administration), Xu Xuhui Waterscape Team Sushui Architecture Team Playze Architects Location Shanghai, China Area 5,000m2 Completion 2020 Photography Lu Bing 랩디에이치(Lab D+H) 조경설계사무소는 설계를 통해 사회에 긍정적 영향력을 확산하고자 하는 조경 중심의 디자인 그룹이다. 한국, 미국, 중국 등의문화를 기반으로 정원부터 마스터플랜까지 다채로운 성격과 규모의 프로젝트를 다룬다. 2014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설립되어 현재는 한국의 서울, 중국의 상하이에 오피스를 두고 있다.
엘 테레노 커뮤니티 정원과 교육 센터
엘 테레노(El Terreno)는 건축물에 쓰인 소재를 재활용해 만든 커뮤니티 정원 겸 교육 센터다. 대상지는 토양과 광물, 돌이 풍부한 언덕이다. 이곳을 꽃과 향기 식물, 채소를 재배하는 도시 농원이자 환경 교육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코로나19로 학교가 폐쇄되던 시기에 시작된 프로젝트이기에 인근 유치원의 원생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 데 힘썼다. 아이들이 식량 생산의 전 과정을 지켜보게 함으로써 지속가능한 삶에 한 단계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랐다. 건축 자재를 재활용해 독특한 파빌리온을 제작했다. 무엇보다 새로운 프로세스를 통해 독특한 재료와 모듈로 공간을 완성하고자 했다. 사람들이 엘 테레노에 들어설 때 편견을 갖지 않도록 하는 데 힘썼는데, 다양성과 다원성을 추구하는 이 공간은 치유 환경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놓고 공유하려는 사람들이 머물 때 의미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다목적 파빌리온은 언덕 사이에 삽입되듯 설치되어 정원을 향해 나아가며 입구가 점진적으로 커지는 형태다. 바깥과의 경계에는 쇠막대를 구부려 만든 틀에 부지를 정지하는 과정에서 채굴한 돌을 채워 격납벽을 세웠다. 지붕은 오랜 시간 콘크리트 거푸집으로 쓰인 목재 트러스를 활용해 만들었다. 지역 봉사자들이 서로 다르게 생긴 네 개의 목재 트러스 모듈을 조립해 파빌리온 지붕을 완성했다. 엄격하게 규정된 공간은 금방 낡고 뒤처지기 마련이기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파빌리온을 만들고자 했다. 정체를 알 수 없고 모호한 공간, 그 의미와 목적이 사용자로 인해 결정되고 변화하는 공간을 시각화한 결과물이 이 파빌리온이다. *환경과조경405호(2022년 1월호)수록본 일부 Design and Construction Vertebral Sustainability Michelle Kalach Art Director Fortuna Kalach Structural Engineer Ricardo Gavira Location Mexico City, Mexico Completion 2020 Photographs Ricardo de la Concha 2016년 설립된 페르테브랄(Vertebral)은 복잡한 도시 한복판에 자리 잡은 건축 및 조경 스튜디오다. 자연이 깃든 장소와 개방된 야외 공간에 관심을 두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숲을 도시 내부로 가져오고자 하며, 멕시코시티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한다. 장인 정신을 중요히 여기며 소소한 부분까지 디자인 역량을 투영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송파 시그니처 롯데캐슬
송파구 거마로와 만나는 지점, 그 중심에 위치한 광장은 사람들의 발길을 송파 시그니처 롯데캐슬로 이끈다. 광장 안쪽에서 고개를 들면 입구가 올려다 보이는데, 계단을 따라 오르는 캐스케이드가 꼭대기의 말 조형물과 그 뒤를 병풍처럼 감싼 소나무와 어우러져 웅장한분위기를 형성해 단지의 시작을 알린다. 단지 내부의 큰 레벨 차는 캐스케이드와 같은 수직 동선으로 활용하거나 완만하게 이어지는 곡선 보행로를 두어 경직되지 않은 숲 경관을 연출했다. 계단을 오르면 고요한 분위기의 거울연못이 나타난다. 단지 내부로 몇 발짝 걸음을 옮겼을 뿐인데, 역동적인 광장과는 상반된 분위기의 공간이 사람들을 맞이한다. 잔잔한 수면 뒤편으로는 구름 모양의 조형석이 서있고, 거울연못 가장자리에서 바닥을 향해 빗방울처럼 떨어지는 물소리가 오히려 고즈넉한 분위기를 한층 강조한다. 계절을 품은 길 단지를 직선으로 크게 관통하는 대로 대신 모든 공간을 부드럽게 연결하는 순환 동선을 계획했다. 동선이 형성한 틀 안에 다양한 커뮤니티 공간을 조성해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을 잇는 공간으로 역할하도록 했다. 주요 동선을 따라서 송파구의 특성수이자 단지 대표 수종인 소나무를 심었다. 수고가 높고 수형이 아름다운 수목을 선별해 심어 울창한 숲이 연상되도록 했다. 소나무 아래에는 다양한 초화를 심어 계절정원을 조성했다. 계절마다 피고 지는 꽃의 다채로운 색과 모 양이 소나무길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자연을 느끼게 한다. 자연스럽게 굽은 소나무길을 따라가다 보면 단지에서 가장 높은 공간에 도달하게 된다. 단지 내부를 가로지르며 높고 낮은 대지를 잇는 이 길은 단지를 딱딱하게 구획된 공간이 아닌 하나의 공간으로 만들어준다. 단지 외곽을 따라서는 느긋한 산책을 즐길 수 있는 둘레길을 조성했다. 전 단지를 순환하는 형태로 계획하고, 주요 동선 및 공간과의 연결로를 두어 드나들기 쉽도록 했다. 숲길처럼 울창한 수목 아래 다층 구조의 녹지와 육생 비오톱 사이로 구불구불하게 뻗어나가는 산책로를 거닐며 다채로운 경관과 다양한 사람 그에 얽힌 이야기들을 마주할 수 있다. *환경과조경405호(2022년 1월호)수록본 일부 조경 설계 조경설계 서안+유일종합조경 건설 롯데건설 시공 유일종합조경(식재), 경원필드(시설물) 놀이 시설 원앤티에스, 청우펀스테이션 휴게 시설 데오스웍스 위치 서울시 송파구 거마로 56 규모 1,945세대 대지 면적 68,332.20m2 조경 면적 31,506.57m2 완공 2021. 12. 사진 롯데건설
긴자 소니 파크
1966년 긴자에 지은 지상 8층과 지하 5층의 소니 빌딩은 소니 제품을 전시하는 곳이자 판매하는 쇼룸이었다. 2013년 소니는 기존 건물을 허물고 새 빌딩을 세우기로 했다. ‘긴자 소니 파크(Ginza Sony Park, 이하 소니 파크) 프로젝트’의 출발이었다. 일반적으로는 헌건물을 해체하고 바로 새 건물을 세우지만, 소니는 건물을 허물고 빈 공간에 잠시 공원을 짓기로 한다. 2016년 건물을 해체하고 2018년 공원을 열었다. 건물이 사라진 긴자 스키야하시 교차로에는 면적 707m2의 지상 공원과 지하 4층 규모의 로우어 파크(Lower Park)가 생겼다. 지상에는 세계 각지의 특별한 식물이 모여 있다. 지하 1층에는 음식점이 들어섰고, 카페가 있는 지하 3층은 인근의 니시 긴자 주차장 지하 2층과 직접 연결된다. 지하 4층에는 크래프트 맥주 가게가 있고, 지하 2층은 이벤트나 전시가 열리는 공간으로 쓰인다. 2018년 인터넷에서 우연히 접한 소니 파크,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도심 속 사적 공간인 소니 빌딩을 올림픽 개최 시기에 맞추어 도쿄 시민을 위한 공공 공간으로 임시 활용한다는 아이디어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흥미로운 사례였다. 처음 소니 파크를 방문한 건 역사 속으로 사라진 소니 빌딩 일부를 소재로 한 한정판 기념품을 사기 위해서였다. 그 뒤에도 꾸준히 찾아가 소니 워크맨 40주년 기념행사 ‘워크맨 인 더 파크(Walkman In The Park)’를 소니 워크맨을 10년 넘게 애용한 세대로서 추억에 잠겨 둘러보고, 크리스마스에는 아이와 함께 ‘에르메스 징글 게임’을 관람하기도 했다. 소니 파크는 나와 가족에게 도심 속 놀이터 같은 공간이었다. 코로나 때문에 2020년 이후에는 직접 찾아가지 못했지만 다양한 채널을 통해 소니 파크에서 벌어지는 인터랙티브 전시와 이벤트를 확인했고 그 속에서 ‘소니다움’, 즉 예측 불가능한 혁신의 정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긴자라는 보수적이면서도 럭셔리한 콘텍스트 안에서 3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혁신적 허브로 발돋움해 다양한 커뮤니티 역할을 하는 소니 파크의 활기찬 모습이 큰 감명을 남겼다. 하지만 소니 파크는 기간 한정 공간이다. 2022년, 이곳은 새 빌딩을 들이기 위한 준비에 돌입한다. 본래 올림픽이 열리는 기간에 맞춰서 2020년까지 소니 파크를 개방할 계획이었지만 1년 연장해 2021년 9월까지 공원을 운영했다. 2024년 완성될 뉴 소니 빌딩은 어퍼 파크(Upper Park), 파크(지상 공원), 로우어 파크로 구성된다. 새로운 빌딩 역시 거리에 공공 공간을 제공하는 공원이라는 소니 파크의 콘셉트를 계승한다. 소니답고 독특하고 장난기 있는 공간을 표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프로젝트 1단계가 마무리된 시점에서 그간 소니 파크가 도시건축적 관점과 브랜드 커뮤니케이션 관점에서 시민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뉴 소니 빌딩은 어떤 모습으로 고객과 시민에게 다가갈지 궁금해졌다. 소니의 대표이사이자 소니 파크 프로젝트를 이끈 나가노 다이스케(Nagano Daisuke)와 이메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환경과조경405호(2022년 1월호)수록본 일부 나가노 다이스케(Nagano Daisuke)는 소니 기업의 대표이자 치프 브랜딩 오피서(CBO)다. HQ 브랜드전략부 브랜드인큐베이션그룹에서는 제네럴매니저를 담당하고 있다. 긴자 소니 파크 프로젝트 인솔자로서 2013년부터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2018년 8월부터 2021년 9월까지 긴자 소니 파크 시즌 1을 이끌었다. 2024년에 공개 예정인 다음 시즌을 준비하며 소니 그룹의 새로운 브랜딩 실험을 주도하고 있다. 이원제는 도심 속 다양한 공간과 상호 작용하는 데 관심이 많다. 공간을 구성하는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휴먼웨어를 라이프스타일 관점에서 읽고 해석해 ‘도심에서 풍요로운 삶의 질이란 무엇인가’를 찾는 여정을 계속하고 있다. 상명대학교 커뮤니케이션디자인학과 교수이며, SPC그룹과 UDS 코리아 자문교수를 역임했다. 중앙일보 폴인에서 ‘밀레니얼의 도시’(2018) 콘퍼런스를 총괄·기획했고, 저서 및 번역서로는 『인간을 위한 도시 만들기』(2014), 『도시를 바꾸는 공간기획』(2021) 등이 있다.
[어떤 디자인 오피스] 조경하다 열음
조경 ‘설계’를 기반으로 사회를 바꾸는 전문가 대학 입학 때부터 지금까지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조경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었다. 비슷한 시기에 조경 공부를 시작한 이들 중 조경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경을 떠난 사람도 적지 않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전공자로서 그동안 해온 고민의 공통분모는 조경일 것이다. 그 속에서 길을 찾은 사람 혹은 찾고 있는 사람은 아직 조경 제도권에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났다. 나 또한 수차례 고비가 있었지만 아직 조경이라는 궤도 위를 달리고 있다. 그렇다고 답을 찾은 것은 아니다. 다양한 인연과 기회를 통해 떠올리게 된 새로운 화두가 동력이 되어주고 있을 따름이다. 조경 설계 도면만 그리는 사람이 조경가일까, 이 질문은 내게 기연(機緣)과도 같다. 답을 찾기 위해 꽤 오랜 시간을 헤맨다 해도 좋을만큼. ‘조경하다 열음’(이하 열음)을 꾸린 지 5년째다. 대학에서는 설계 중심 커리큘럼으로 조경을 배웠다. 졸업 후엔 조경설계사무소를 다니며 10년간 경력을 쌓았지만, 교육 과정이 조경의 영역을 스스로 제한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실무를 하다 보니 사회에는 조경가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 많다는 걸 체감했다. 하지만 제도와 구조적 문제로 손을 뻗는 데 한계가 있었다. 물론 의견을 제시하거나 활동 참여가 제한되는 건 아니다. 어느 분야나 회사에 속하지 않은 한 명의 자연인으로서 접근한다면 말이다. 지역의 자원이나 문제를 발굴하더라도 조경업의 측면 그리고 회사에 소속된 직원으로서는 공모에 참여하거나 설계 도면을 납품하는 일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설계를 위해 대상지를 조사하면 할수록 갑갑했다. 도면을 완성하는 일 외에도 조경학과에서 배운 역량으로 솔루션을 내놓을 수 있는 일이 많은데 눈을 감아야 한다는 사실이 답답했다. 그래서 결심했다. 내가 판을 만들기로. 조경가의 역할은 주어진 대상지에 대한 디자인을 완성하는 게 전부가 아니다. 장소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포함된다. 그래서 디자인을 넘어 여기에 초점을 맞춰보기로 했다. 조경 ‘설계’를 기반으로 사회를 바꾸는 전문가, 열음이 지향하는 조경가의 모습이다. 생활밀착형 조경 코로나19로 환경 문제에 대한 관심과 사회적 인식이 높아지면서 공원 녹지의 가치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생활 공간 속으로 자연을 가져올 수 있도록 도시 구조를 개편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목소리도 꾸준히 나온다. 도시를 쾌적하게 하는 대형 공원과 녹지와 더불어 일상 속 생활밀착형 공간의 쾌적성을 높여주는 일 또한 중요하다. 이러한 공간에는 선과 숫자 중심의 기존 엔지니어 방식을 넘어 커뮤니티 디자인을 통한 솔루션 제시가 요구된다. 석수골 마을정원 조성(2018), 서울국제정원박람회 동네정원 코디네이터(2019, 2021)는 시민의 욕구를 듣고 때로는 디자이너, 때로는 전략가가 되어 현장을 바탕으로 해법을 찾아본 경험이다. 열음은 주민들을 만나 소통하고 공간 조사, 설계, 시공뿐만 아니라 교육과 컨설팅까지 아우르는 현장 중심의 ‘생활밀착형 조경’을 전문적으로 다룬다. 국가 정책의 변화와 시대적 수요를 조경가가 주도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다양한 정책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국가 과제의 핵심은 지역 주민과 함께 공간을 개선하고 운영하는 것이다. 조경가는 관계를 만들고 대응하며 변화에 적응하는 능력이 있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역량이 강하다. 이해관계가 복잡한 주민 참여 공간 조성 사업에는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조율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열음의 조경가들은 소셜 디자이너로서 전문적 식견과 경험을 가지고 지역을 변화시키는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북촌 도시 재생, 여수 농촌 재생, 강화도 어촌 재생이 그 사례다. 북촌은 개발이 아닌 보존을 선택한 주민들 덕분에 600년 역사적 자산을 지키며 역사와 문화를 기반으로 세계적 명소가 된 곳이다. 하지만 최근 무분별한 상업화로 인한 정체성 훼손, 과도한 관광객 방문으로 인한 생활 환경 침해 등의 문제가 대두됐다. 살고 싶은 마을과 머물고 싶은 동네를 위한 공존·상생의 길을 현장에 상주하며 찾고자 했다. 먼저 한옥 보존에 대한 규제로 인한 경직된 지역민의 마음을 달래고자 ‘북촌정원산책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부담 없이 접근하고 식물을 통해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정원을 만들어 도시재생의 포문을 열었고, 지금까지 지역 주민들의 삶의 질 개선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여수 새뜰마을에서는 개발제한구역과 여수 국가산업단지로 인해 열악해진 생활 환경을 개선하고 잠재된 마을 자원을 발굴해 새로운 변화를 꾀하고자 했다. 봉계동 일원의 ‘주삼지구 새뜰마을사업’을 통해 지역 내 빈집 및 노후 주택을 정비하고, 지역 어르신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 및 복지 지원을 목표로 다양한 활동을 진행했다. 강화도에서 진행한 ‘어촌뉴딜사업’은 주민이 주도해 해양 경관 개선 및 경제 활성화 기반을 마련하는 프로젝트다. 곳곳에 산재된 유휴 공간과 해양 경관을 개선하며 지역 사회 구성원과 방문객을 위한 공간 개선 활동을 전개했다. 우리의 역할을 찾고 비전을 제시하면서 조경가의 활동 무대를 바다로 확장하는 중이다. 조경은 가진 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고품질의 차별화된 조경 공간은 매체를 통해 소개되는 고급 주택의 정원 등 사적인 공간에서 주로 볼 수 있다. 오피스 빌딩이나 호텔, 상업 공간, 아파트 조경이 주로 완성도가 높은 조경 공간으로 꼽힌다. 따라서 디자인적 조형미, 고가의 자재와 식물 활용, 시공성, 식물 간의 균형과 조화로움 등은 차치하고 들어주기를 바란다. 동네에서 더 나은 조경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한 주민 인터뷰에서 나온 말이다. 조경은 워낙 다양한 역할을 하기에 그 의미도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지만, 근간에는 자연의 모습을 도시에 재연하는 편집자로서의 사명이 있다. 자연과 멀어진 사람의 일상으로 자연을 끌어와 관계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렇지만 도시의 누군가는 이러한혜택을 받지 못하고 소외되는 실정이다. 정원에 공공성이 더해지면서 조경이 태동했다. 그런데 다수의 공공을 위한 공간일수록 좋은 품질을 기대하기 어렵다. 사회적 약자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조경 공간의 품질은 더 떨어진다. 좋은 소재와 기술을 쓰고 인력을 많이 투입하면 품질이 좋아질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자본력을 가진 클라이언트만 좋은 조경 공간을 가질 수 있다면 과거 귀족에게만 허락된 정원(loyal garden)과 다를 게 없다. 다수의 공공을 위한 공간일수록 좋은 품질을 기대하기 어렵다. 사회적으로 경제 자본과 멀어지면 쾌적한 환경을 누릴 수 있는 권리도 제한되는 것인가. 예산 분배는 정책가의 역할이니 접어두고 조경가로서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했다. 조경가의 손길을 원하는 곳이 있다면 돈이 되지 않는 일이라도 일단 뛰어들어 솔루션을 제시하고 자격을 갖추어 판을 만들자는 전략을 세웠다. 많은 비용이 요구되는 디자인이나 재료를 사용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변화의 체감률을 높이는 방법을 찾는 데 주력했다. 지금까지 조경가는 주민들이 원하는 걸 듣고 설계하기보다는 현장에서 자체 진단과 직관에 의한 설계 결과물을 공청회를 통해 주민들에게 통보하는 방식으로 일을 진행했다. 조경가는 일을 마치고 떠나면 그만이지만, 남아서 공간을 누리는 사람들은 주민이란 점을 종종 잊어버린다. 꾸준하게 마을과 연을 맺고 관련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것은 이를 잊지 않기 위함이다. 누구나 집 앞에서 고급 정원을 향유할 수는 없겠지만, 보다 나은 공간에서 쾌적함을 누리는 일에는 공평하면서 보편적인 복지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돈이 되는 고급형 조경이 아닌 누구나 누릴 있는 녹색 복지로서 보급형 조경에도 관심을 갖고 힘을 쏟아야 한다. 이게 조경의 공공성이 아닐까. 자연의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으면 도시에 영양 결핍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결핍은 결국 사회 문제로 이어지니 손을 놓아서는 안된다. 열음이 주목하는 지점이다. 아이들의 일상에 자연을 놓아주다 공간적인 측면에서 소외되고 있는 학생들에게도 관심을 가졌다. 학교는 창의적인 인재 육성보다 효율적인 통제를 목적으로 설계됐다. 주인인 학생을 위한 공간이 어디에도 없는 모순적인 구조다. 교육부도 이를 인지하고 ‘그린스마트 미래학교’라는 학교 공간 혁신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외부 공간에 대한 접근은 크게 변한 게 없었다. 특히 운동장은 일상에서 자연을 접하고 숲의 효과를 누릴 수 있는 곳으로 전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공간인데도 대부분 방치되어 있다. ‘생태 숲 미래학교’는 경기미래교육 핵심 과제 5가지 중 하나다. 우리는 2개 학교(김포 고창초등학교, 부천 송내고등학교)를 대상으로 시범 사업을 진행했다. 학생들에게 생태적 가치와 감수성을 일깨워주고 기후 변화 전문가로 성장할 수 있는 진로 탐색 기회를 제공하는 외부 공간 조성이 목표였다. 그 과정을 통해 조경가로서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역할에 대해 고민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경기도 교육청은 학교 공간 혁신을 위한 공간 전문가를 촉진자로 위촉하고 건축·도시·조경 전문가가 참여할 길을 열어놨으나 조경 분야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사업적 측면에서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점과 기존과 접근 방식이 다른 생소한 프로젝트인 점이 이유인 것 같다. 촉진자 선정에 참여한 40여 명의 전문가 그룹 중 조경가 그룹은 열음이 유일했다. 학교는 미래 세대가 자라는 공간이고 전국의 학교 개수를 고려하면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잠재적 탄소 흡수원이자 환경 교육 거점으로서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참여 계기였다. 이후 조경 분야가 참여할 길을 열어두기 위한 교두보 역할만 해도 충분히 가치가 있어 보였다. 학생들은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학교에서 보낸다. 학교에선 교실 말고는 딱히 갈 곳이 없으니 쉬는 날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 산과 바다와 같이 먼 곳으로 바캉스를 떠난다. 완벽한 스트레스 해소는 어려울지라도 일상에서 잠깐이라도 자연을 마주하며 힐링하는 경험은 스트레스 총량을 줄이는 데 일조할 수 있다. 소생물 서식처 기능까지 고려한다면 사람과 야생 동물이 공존하는 지역의 생태적인 거점으로 거듭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3년의 시간, 12계절의 변화를 체감하면서 생활할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특히 부천 송내고등학교에서는 교내 환경 교과목 교사와 합을 맞추면서 소프트웨어와 어우러진 공간 조성을 통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었다. 기존 환경 교육은 학교 바깥의 녹지를 간헐적으로 모니터링하는 정도였는데, 보다 적극적으로 교육할 수 있도록 학교 구성원들과 심도 있는 상의를 통해 교육 과정과 연계한 AI 교육 등의 학습 공간을 계획했다. 음악회나 독서와 같은 공간 경험을 넘어 진로 탐색과 연계할 수 있는 모델로 서 숲을 제안했다. 교직원과 학생들 모두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진행 과정에도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처음에는 일부 위요된 공간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과업이었으나 또 하나의 위요 공간부터 필로티, 건물 틈새 중층, 옥상 등 내외부를 관통하는 하나의 녹지 네트워크를 아우르는 마스터플랜을 제시하여 추가로 예산을 받아 과업을 수행하게 됐다. 학생들과 함께 도출한 생각을 설계로 구현했지만 공사는 가격 입찰로 진행되기 때문에 우리의 손을 벗어나 의도가 온전하게 전해지지 않을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정식 공사 감리는 아니지만 디자인 감리 제도를 통해 시공사와 지속적으로 소통하며 소재 선택부터 디자인 디테일 조정 등 여러 부분에 관여했다. 프로젝트 성과에 100% 만족하는 건 아니지만 학생들이 빗물, 숲, 옥상, 실내 등 여러 가지 유형의 정원을 일상의 일부인 학교에서 체험할 수 있게 된 점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조경하다 열음’의 구성원 현재 열음은 경영 관리, 설계와 엔지니어링, 공동체 등 크게 세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조민영 소장이 경영 관리 총괄로 회사 살림을 도맡아 하고 있고, 윤호준 소장은 설계 및 엔지니어링, 김도훈 소장이 공동체 파트 총괄이다. 엔지니어링 파트 행동대장 이병우는 온갖 실무를 담당하고 있다. 가장 좋아하는 건 식재다. 설계부터 시공, 활착 후 모니터링까지 본인 머리에서 현장으로 이어지는 모든 과정을 아우르는 걸 좋아한다. 식재와 관련된 부분에선 회사 내 ‘원 톱’이다. 이외에도 각종 설계가 실제 현장에서 구현될 수 있게끔 관리한다. 신혜지는 기획과 구상을 실시설계로 구현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으며, 장하니는 내역을 담당하면서 다른 직원들이 의욕으로 채운 도면을 현실과 연결시키는 데 주력한다. 김윤은 사회초년생이지만 기복이 없고 뚝심이 강해 선배들을 든든하게 뒷받침해준다. 그래픽 기술을 특화해 역량을 키우고 있다. 공동체 파트는 현재 북촌 도시재생활성화 사업에 전념하고 있다. 임은경은 현장에서 주민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정리하는 소통 창구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김용진은 다양한 의견을 북촌에 맞게 체화시키는 능력이 뛰어나다. 어떤 문제가 들어와도 북촌화하여 주민과 협의해 적절한 프로그램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김범진은 사업의 시작부터 현재까지 오랜 시간 머물며 자리를 지켰다. 시대적 흐름이나 상황 속에서 북촌에 대한 이야기를 연결해준다. 박지영은 센터 내 유일하게 도시 공학을 전공한 도시재생 전문가로 하드웨어 중심의 계획 수립과 사업 실행을 전담해서 진행하고 있다. 조경가 매니지먼트를 꿈꾸며 회사와 대표는 동일체가 아니란 점을 강조하고 싶다. 법인은 또 하나의 인격체다. 회사와 대표가 등가 관계로 매칭되는 순간 동료들이 빛을 잃을 우려가 있다. 그래서 열음에는 직급이 없다. 창립 때부터 직급 체계를 두지 않았다(물론 나이 차에 따른 구분과 예를 갖춘다). 모든 동료의 명함에는 ‘조경가’란 타이틀만 있을 뿐이다. 각 파트장들만 소장이란 직함을 달고 있을 뿐, 다른 동료들은 수평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열음의 조경가들은 대외 업무 시 회사를 대표하며 자기 주도적으로 프로젝트를 책임질 권한을 갖는다. 그렇다고 경력자나 소장이 자기 업무만 하면서 방치하는 건 아니다. 권한을 주되 책임을 선배들이 분담하며 업무를 잘 이끌어나갈 수 있도록 뒤에서 지원한다. 직원들이 연봉만으로 설계업을 영위하는 건 회사나 개인 모두에게 어려운 일이다. 설계는 계량이 어려운 지식 서비스 산업이므로 야근, 주말 출근까지 해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보다 나은 방법을 고민하다 보면 시간을 정해놓고 일을 마무리하는 게 어려운 법이다. 그렇기에 직원 개개인의 역량 차이가 있더라도 최소한 일정 수준의 품질을 맞추기 위해 함께 스터디 하면서 해법을 마련하는 구조를 취하고 이를 보상하는 시스템을 갖추고자 노력하고 있다. 열음을 배경으로 한 조경가 개인의 커리어 축적, 수익 배분, 방학 제도 운영이다. 열음은 정원박람회 작가나 공모전 등 개인 커리어를 쌓는 것도 장려하고 있다. 연봉 외에 노력하는 만큼 수익을 배분하는 경영 기조를 유지하고 있는데, 회사 매출의 일정 수익금은 직원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춰 나가고 있다. 방학은 주로 연말에 주어지며 2~3주 동안 회사와 어떤 연락도 하지 않는 휴식기를 갖게 한다. 자기 프로젝트를 끝까지 완수할 정도로 성장한 조경가는 각자 독자적 조직을 구축하도록 만드는 게 궁극적인 목표다. 연예인의 방송 활동 외 경영 전반을 관리해주는 매니지먼트 회사 개념을 모티브로 한다. 회사가 소화하지 못하는 전문적인 역량은 다양한 전문가와 의 협업 관계를 통해 보완하며, 이를 연결하는 것 또한 열음의 역할이다. 조경을 잘 하고 싶은 사람이 조경에만 전념할 수 있게 도와주는 회사가 되려 한다. 자기만의 확고한 철학을 갖고 조경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온전하게 자기 일에 시간을 쏟을 수 있는 배경이 되어주는 회사로 성장하는 것이 열음의 꿈이다. 조경 설계에 국한해 우수한 사람들을 모아놓는 게 아니라 도시, 공동체, 스마트 시티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편하게 이야기 나누고 업무를 수행하는 조경 전문 소속사, 그게 바로 ‘열음’이다. [email protected] 조경하다 열음의 대표 조경가 윤호준은 조경 설계를 기반으로 사회를 바꾸고자 한다. 학부에서 조경을 전공하고 설계사무소에서 10년간 경력을 쌓은 뒤 제도권을 넘어 새로운 판을 만들자는 포부로 2017년 조민영과 함께 사무실을 열었다. 주민과 소통하고 공간의 조사, 설계, 시공뿐만 아니라 교육과 컨설팅까지 아우르는 생활밀착형 조경을 전문적으로 다룬다. 자연의 모습을 도시에 재현하는 편집자로서 사무실보다 현장에서 답을 찾고, 직관보다 경험, 발주처보다 주민의 이야기에 귀를 더 기울인다. 예비 조경가를 발굴·육성하는 매니지먼트 회사로 조경설계사무소를 키우고자 한다.
[모던스케이프] 도시 균열의 시작, 전차 노선이 만든 미완의 풍경
교통에 의한 도시 경관의 균열은 19세기 말 서울에 부설된 전차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제 전차는 사라진 지 오래지만, 수백 년을 이어온 도시 경관에 전차가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이 느낀 충격은 상상하기 어렵다.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가 된 고종은 경운궁을 중심으로 제국의 격에 맞는 근대 도시로 전환을 시도했다.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도성 한양에 궁궐과 단묘(壇廟), 성곽을 축성하여 새로운 국가의 출발을 알렸던 것처럼, 대한제국은 황제국으로의 표상을 도시 경관에 실천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대한제국은 혁명에 의한 체제 전복으로 탄생한 국가가 아니었고, 중국에 대한 사대를 극복하려 하면서도 그들로부터 전승 받은 제도를 따르는 모순을 안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대한제국은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한 근대 도시로의 변혁을 이루어야 했기에, 전통적인 지배 구조로서의 황도(皇都)와 무역 등 경제 활성화를 꾀하는 근대 도시의 이중적 구조가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을 기준으로 재편된다. 경운궁 동쪽에 건설된 환구단과 황궁우가 황제국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면, 전차는 근대 도시로의 실천을 보여주는 시설이다. 서대문정거장(지금의 서대문역 일대)에서 시작해 황토현(지금의 광화문사거리)~종로~흥인지문을 지나 홍릉(천장 전 명성황후의 묫자리, 현재 안암동 고려대학교 부근)까지 가는 홍릉선이 먼저 개통되었다. 선로를 부설하여 전선을 놓고 발전기를 돌려 전차가 다니도록 개통한 것이 1899년 5월 4일이다. 우리보다 근대화를 먼저 시작한 일본에 견주어도 결코 늦은 것이 아니었다.1 홍릉선 외에 종로에서 용산까지 이어지는 용산선(1899년 12월 20일), 서대문정거장과 남대문정거장을 연결한 의주로선(1900년 7월 6일), 그리고 마포까지 연결된 마포선(1907년)까지 네 개의 전차 노선이 개통되었다. 각주 1.교토에서는 1895년 1월 31일, 도쿄에서는 1903년 8월 22일에 개통했다. 참고문헌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의 전차』, 서울책방, 2019, pp.28~35. 신경진, “[뉴스 클립] 중국 도시 이야기<4> 황제의 도시 베이징 (하)”, 「중앙일보」 2011년 2월 9일. 그림 출처 그림 1. American Street Railway, “The Electric Railway in Corea”, Street Railway Review vol. IX, 1899, p.534. 그림 2. commons.wikimedia.org/wiki/File:Travelogues;_(1908)_(17).jpg 그림 3.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의 전차』, 서울책방, 2019, p.16. 그림 4. www.museum.go.kr/site/main/relic/search/view?relicId=39921 *환경과조경405호(2022년 1월호)수록본 일부 박희성은 대구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한중 문인정원과 자연미의 관계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에서 건축과 도시, 역사 연구자들과 학제 간 연구를 수행하면서 근현대 조경으로 연구의 범위를 확장했다. 대표 저서로 『원림, 경계없는 자연』이 있으며, 최근에는 도시 공원과 근대 정원 아카이빙, 세계유산제도와 운영에 관한 일들을 하고 있다.
ASLA Best Books 2021
장기화된 팬데믹으로 일상이 송두리째 바뀐 지 벌써 2년, 조경가들은 해결해야 할 수많은 문제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중이다. 과거를 점검하고 미래를 그리는데 연말연시만큼 좋은 시기가 또 있을까. 미국조경가협회(American Society of Landscape Architects, ASLA)는 매년 ‘올해의 책(ASLA Best Books)’을 선정한다. 앞으로 펼쳐질 조경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며 ‘2021 올해의 책’ 11권을 소개한다. 1. 조경가가 알아야 할 250가지 B. Cannon Ivers, ed., 250 Things a Landscape Architect Should Know , Birkhäuser, 2021 2. 해안 적응을 위한 청사진: 설계, 경제, 정책의 통합 Carolyn Kousky, Billy Fleming, Alan M. Berger, eds., A Blueprint for Coastal Adaptation: Uniting Design, Economics and Policy, Island Press, 2021 3. 역동하는 지형들 Barbara Wilks, Dynamic Geographies , ORO Editions, 2021 4. 생태지역적 옥상 녹화: 미국과 캐나다 서부에서 찾은 이론과 사례들 Bruce Dvorak, ed., Ecoregional Green Roofs: Theory and Application in the Western USA and Canada , Springer, 2021 5. 코펜하겐: 도시 건축과 공공 공간 Sandra Hofmeister, København: Urban Architecture and Public Spaces , DETAIL, 2021 6. 재구성: 미국의 건축과 흑인 정책 Museum of Modern Art, Reconstructions: Architecture and Blackness in America , Museum of Modern Art, 2021 7. 회복탄력적 도시: 기후변화를 위한 조경 Elke Mertens, Resilient City: Landscape Architecture for Climate Change , Birkhäuser, 2021 8. 우리를 구원하기: 분열된 세계에서 희망과 치유를 위한 기후학자의 변 Katharine Hayhoe, Saving Us: A Climate Scientist’s Case for Hope and Healing in a Divided World , Atria/One Signal Publishers, 2021 9. 치유하는 학교들: 정신 건강을 고려한 설계 Claire Latané, Schools That Heal: Design with Mental Health in Mind , Island Press, 2021 10. 진지하게 즐거운: 클로드 코미에의 경관 Marc Treib, Susan Herrington, Serious Fun: The Landscapes of Claude Cormier, ORO Editions, 2021 11. 사회적 어바니즘: 공간 설계의 재구성–라틴 아메리카의 담론들 Maria Bellalta, Social Urbanism: Reframing Spatial Design–Discourses from Latin America , Applied Research+Design, ORO Editions, 2021 *환경과조경405호(2022년 1월호)수록본 일부
[기웃거리는 편집자] 달러구트 꿈 백화점
여행을 떠나기 전날 예약한 비행기나 호텔이 취소되는 꿈, 낯선 외국인에게 사기당하는 꿈을 종종 꾼다. 이런 꿈을 꾸고 나면 기분이 영 찝찝하다. 괜히 불안해 애꿎은 예약 확인증을 몇 번이나 확인해본다. 대부분은 기우에 그친다. 불행하게도 한번 예외가 있었다. 몇 년 전 가족 여행으로 냐짱(Nha Trang)의 랜드마크인 빈펄랜드(Vinpearl Land)에 갔을 때다. 한국에서 미리 케이블카 표를 예매했다. 매표소에 도착해 표를 받으려고 했는데 예약이 되어 있지 않다는 답이 돌아왔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며 꿈에서 본 장면이 재생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난감한 상황이다. 예약 페이지 화면을 보여주었지만, 직원은 자신은 잘 모르겠다며 어딘가로 전화해보겠다는 모호한 대답만 웅얼거렸다. 결국 한참의 시간을 허비한 후 현지에서 다시 돈을 지불하고 표를 구했다. 여행 전날 꾼 꿈의 데자뷰인가, 꺼림칙한 기분을 떨쳐낼 수 없었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을 펼쳤을 때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다섯 개 층으로 이루어진 달러구트 꿈 백화점은 우리가 흔히 접하는 옷, 음식, 잡화 등을 파는 곳이 아닌 꿈을 파는 백화점이다. 사람은 하루 중 4분의 1 이상 잠을 자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 시간동안 현실에선 볼 수 없는 신비하고 아름다운 풍경, 자주 등장하는 어떤 한 사람, 다신 겪고 싶지 않은 기억을 마주하기도 한다. 마치 생생한 영화처럼 말이다. 이게 바로 꿈이다. 꿈은 어디에서 시작되는 것일까, 내가 만들어 낸 이야기인 걸까, 원하지 않는 꿈은 왜 꾸는 것인가. 늘 궁금했다. 자고 일어나면 잊어버리는 것이라고, 무의식이 만들어낸 몽상에 불과하다고 하기에는 어떤 꿈은 지나치게 선명하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은 꿈속에서만 갈 수 있는, 꾸고 싶은 꿈을 사고 그 꿈에 대한 감정을 돈 대신 지불하는 백화점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일들을 담은 책이다. 꿈 제작자, 꿈 백화점 같은 키워드만으로도 책을 펼치고 싶은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아침부터 재입대하는 꿈, 또다시 시험을 치는 꿈 등 악몽을 꾼 수십의 손님들이 어떻게 이런 꿈을 팔 수 있냐며 달러구트 꿈 백화점에 찾아왔다. “손님. 죄송하지만 그냥 악몽과는 다릅니다. … 정식 명칭은 ‘트라우마 극복을 위한 꿈’입니다.”1 주인장의 말에 꿈속에서 싫은 일을 다시 겪는 게 얼마나 불쾌한 일인지 아냐며 손님들은 불평불만을 가득 토로했다. “정말 싫은 기억이기만 할까요. 가장 힘들었던 시절은, 거꾸로 생각하면 온 힘을 다해 어려움을 헤쳐 나가던 때일지도 모르죠. 이미 지나온 이상,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랍니다. 그런 시간을 지나 이렇게 건재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손님들께서 강하다는 증거 아니겠습니까.”2 달러구트의 설명을 들은 손님 중 절반은 계약을 철회하고 절반은 비장하게 서로를 다독이며 잘 버텨보자며, 다신 이런 꿈을 꾸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잊지 마세요. 손님들께서는 스스로 생각한 것보다 많은 것들을 이겨내며 살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는 순간 이전보다 훨씬 나아질 수 있죠.”3 달러구트는 생각을 좋은 방향으로 정리할 수 있게 도와주는 향수를 뿌려주며 지상으로 올라가는 손님들을 배웅했다. 빈펄랜드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뒤 예약 사이트에 전화해서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 예약 내용이 사이트 오류로 전달되지 않았다는, 다소 맥 빠지는 답을 들었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 잊고 있던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 케이블카 예매 오류의 원인을 직원이 알아보는 동안, 발길 닿는 대로 둘러보았던 곳에서의 시간들. 예매 오류가 없었다면 가보지 못했을 장소, 그곳에서 먹은 기막히게 맛있었던 아이스크림. 코로나19로 인해 여행 캐리어를 꾸릴 일도 예약이 취소되는 꿈을 꿀 일도 없지만, 다시 한 번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좀 다르게 대처하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틀어진 계획 덕에 하게 될 새로운 경험을 은근히 기대할지도 모르겠다. 잡지 에디터 2개월 차인데, 원고가 펑크 나는 악몽은 아직 꾸지 않았다. 오늘 밤에는 원고가 뚝딱 써지는 꿈을 사러 달러구트를 찾아가볼까. 각주1.이미예, 『달러구트 꿈 백화점』,팩토리나인, 2020, p.141. 각주2.같은 책, p.144. 각주3.같은 책, p.146.
[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눈물 금지
아마도 1960년대 즈음, 잡지가 주요 미디어였던 시기의 이야기다. 아서 하위처 주니어(Arthur Howitzer, Jr.)는 미국의 여행 잡지 『피크닉』을 인수해 프랑스의 앙뉘 쉬르 블라제(가상 도시)로 떠난다. 최고의 저널리스트들을 모아 도시와 예술, 사회, 음식, 대중 문화를 깊게 들여다보는 지면을 구상하고 그에 걸맞게 제호를 바꾼다. 그렇게 『프렌치 디스패치』는 세계적 매거진으로 발돋움한다. 보통은 이 변혁의 과정을 조명할 테지만, ‘프렌치 디스패치’는 영화 시작 5분 만에 편집장의 부고를 알린다. 편집장의 유언은 직원과 기자들에게 후한 퇴직금을 주고, 『프렌치 디스패치』를 폐간하는 것. 동료의 죽음이, 일자리가 사라진다는 소식이 잔인하게 느껴질 법도 한데 누구도 화를 내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대신 편집장의 사무실에 모인 기자들은 종간호를 위한 마지막 편집 회의를 시작한다. 뒤편으로 벽에 새겨진 문장 하나가 보인다. No Crying눈물 금지. 동화적 색감, 강박적 대칭 구도, 숨 쉬는 박자마저 계획했을 것 같은 치밀한 연출, 웨스 앤더슨 특유의 탐미적 감각은 잡지 구성을 플롯으로 삼은 ‘프렌치 디스패치’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평면적 구도의 미장센은 화면을 더욱 지면답게 만들고, 이야기와 그 속의 인물들을 입체적으로 도드라지게 한다. 에디터의 입장에서 바라본 『프렌치 디스패치』의 마감 풍경은 너무나 이상적이라서 도리어 끔찍하다. 온몸으로 체험하느라 터무니없이 긴 시간을 취재에 매달려 마감을 지키는 기자가 없다. 그뿐인가, 기획 의도에서 벗어난 내용을 써오는가 하면 약속된 분량의 다섯 배나 되는 원고를 떡하니 내어놓기까지 한다. 그래도 아서는 우선 읽는다. 기사의 취지를 다시 묻고 쳐낼 곳은 없는지 혹은 중요한데 버려진 부분이 있는지 확인한다. 게시판에 붙은 수많은 교정지를 한참 들여다보던 그는 소리친다. “난 아무도, 그 어떤 기사도 안 잘라. 인쇄 종이를 더 확보하고 페이지를 늘려!” 겪어본 적 없는 저 풍경에 묘한 그리움을 그리는 까닭은, 시대가 저물며 사라지고 있는 가치가 그 안에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웨스 앤더슨은 여러 인터뷰를 통해 어린 시절 즐겨 읽은 『뉴요커(New Yorker)』에서 영감을 받아 이 영화를 기획했다고 고백했다. 그래서일까 107분에 달하는 긴 영상은 마치 숭고한 저널리즘과 그 속에 담긴 낭만을 향한 찬사 같다. 『프렌치 디스패치』의 기자들은 단순히 기삿거리를 쫓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사건에 몸을 던져 그 속에 얼마나 복잡한 진실이 엉켜 있는지, 사람들은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그 배경에 숨겨진 이야기는 무엇인지 파헤친다. 도시, 아트, 정치‧시사‧국제, 음식 생활, 꼭지의 이름은 다르지만 네 편의 기사의 종착지는 결국 보편적인 인간사다(에피소드는 실제 뉴요커에 실린 기사를 바탕으로 한다. 검색해보기를 추천한다). 이미지, 짧은 문 장, 영상으로 세상을 소비하는 시대, 잡지를 비롯한 여러 인쇄 매체는 올드 미디어가 되었다. 그러니 편집장의 방에 적힌 ‘눈물 금지’는 ‘네가 뭘 잘했다고 우냐’며 직원을 닦달하는 말이 아닌, 시대를 통과하며 변화를 맞이하는 매체를 향해 보내는 위로, 저물며 사라지는 모든 것들에 대한 애도의 인사일 것이다. 직업 때문일까, 에피소드 사이사이 취재 노트처럼 삽입된 장면들에 유독 마음이 갔다. 편집장과 기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에서 기자들은 제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는다. 어린 혁명가들과 엉켜 각양각색의 낯을 띄우던 기자는 타자기를 두드리는 뒷모습만을 보여주고, 요리사를 취재하러 갔다가 납치된 경찰청장의 아들을 추적하게 된 기자는 마감에 지쳐 누워 있는지 침대 위로 뻗은 다리만이 화면에 담길 뿐이다. 그게 꼭 이야기의 주역과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 사이의 거리처럼 느껴져 괜히 쓸쓸했다. 아서와 기자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2021년 내내 잘려나간 수많은 문장을 생각했다. 지면의 특성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자리를 잃은 글들이 머물 수 있는 곳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느냐 묻는다면 고개를 끄덕이기 어려웠다. 그래서 결국 사람 이야기를 담는 기획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경은 우리를 둘러싼 공간이자 환경이고, 이를 완성시키는 건 결국 사람일 테니 말이다. 2월호의 서두에는 공간뿐만 아니라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 새로운 꼭지가 등장한다. 슬쩍 흘린 이 예고가 독자 여러분의 흥미를 자극하기를 기대한다..
[COMPANY] 스페이스톡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은 개척자. 조경 시설 분야에서 스페이스톡을 일컫는 말이다. 2002년 설립된 스페이스톡은 사람과 환경을 위한 토털 디자인 솔루션을 제공하는 디자인 그룹으로 출발해 조경 시설, 놀이 시설, 환경 조형물, 야외 운동 시설을 만들어왔다. 개척자라는 별명에 걸맞게 늘 혁신을 꾀해왔는데, 업계 최초로 아이들이 넘어져도 다치지 않는 우레탄 바닥 놀이터를 제안하고 교통사고로부터 안전한 차 없는 아파트의 모습을 제안한 이력이 그 예다. 2017년 스페이스톡은 또 한 번의 도전에 나섰다. 사물인터넷IoT과 AR 및 VR 기술을 접목해 다음 세대를 위한 시설물을 개발하고자 한 것이다. 수년간의 기획과 개발을 통해 2021년 12월 공간 솔루션인 ‘넥스트톡Nexttalk’을 선보였다. 넥스트톡은 좀 더 다채로운 삶을 위해 우리가 누리는 환경을 휴게, 운동, 놀이 공간으로 정의한다. 각 공간을 스마트 기술과 융합해 라잇플Life+(휴게 공간), 핏플Fit+(운동 공간), 플레잇플Play+(놀이 공간)을 완성했다. 김필주 대표는 “디지털 기술 중심의 사회 변화를 감지해 신사업 발굴을 위한 경영 전략을 수립했다. 코로나19로 인해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이 예상보다 빨리 진행되어, 디지털 기술을 탑재한 시설물이 분야의 새로운 도약점이 될 것이라 예감했다”고 넥스트톡의 출시 배경을 밝혔다. 편안한 휴식 생활을 지원하는 라잇플은 스마트 티하우스, 스마트 퍼걸러, 스마트 버스 정거장, 스마트 키즈맘 스테이션으로 구성된다. 공기 청정 기능과 냉난방 시스템, 유해 화학물을 친환경적으로 제거하는 그린월이 있어 미세먼지와 대기 오염으로부터 안전한 공간을 제공한다. 전력 공급에 따라 투명도가 달라지는 스마트 글라스를 이용해 영상이나 음악 등 미디어 콘텐츠를 즐길 수도 있다. 핏플은 야외 피트니스를 위한 공간이다. 유산소 운동 기구, 스트레칭 기구, 근력 운동 기구로 이루어져 있는데, 자체 개발한 애플리케이션을 다운받으면 운동 기록 저장과 운동 기구별 목표 설정이 가능하다. 운동 기구와 연동할 수 있는 게임도 애플리케이션에 탑재해 재미를 더했다. 4차 산업혁명으로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고안된 플레잇플은 현실과 가상을 연결한 신개념 놀이 공간이다. 전용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하면 AR 놀이터에서 가상의 공룡 및 동물과 놀 수 있다. 버추얼 스포츠 리그Virtual Sports League는 학습과 운동, 놀이를 즐길 수 있는 가상 현실 플랫폼이다. 공이나 화살 등 물체의 움직임을 인식하는 3D 비전 센서를 이용해 VR 스포츠를 즐길 수 있으며, 초등학교 교과서와 연계된 콘텐츠를 설치하면 학습 프로그램으로 활용할 수 있다. 김필주 대표는 스마트 시설물의 핵심은 ‘스마트’라는 단어에 있다고 강조했다. “스마트하게 작동하는지, 스마트하게 관리할 수 있는지가 IoT 기반 시설물의 차별화 지점이다. 넥스트톡은 별도의 설정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주변 환경 정보를 수집해 그에 맞추어 작동한다.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모든 시설물을 원격으로 운영 및 제어할 수 있고, 고장이 나면 쉽게 대처할 수 있도록 AS 신청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물론 개발 과정이 녹록하지는 않았다. 시대가 요구하는 제품이 무엇인지, 또 시장의 반응이 어떨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앞섰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스마트 시설을 원하는 이들이 있는지 확신할 수 없어 불안했다. 하지만 2021년 ‘부산 에코텔타시티 스마트 공원시설물 공모’에 당선되며 우려가 해소되었고, 시장과 제품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넥스트톡은 더 나은 공간을 창조해가는 진행형 브랜드다. 한층 더 진화한 넥스트톡을 위해 스페이스톡은 AR 가든, AR 탐조대, AR 안내 지도 등 이제껏 다른 회사가 시도하지 않은 제품을 개발하는 데 매진할 계획이다. 시대의 흐름에 부응해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지만, 늘 사람과 공간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잊지 않고 더 나은 삶의 공간을 마련하고자 노력해온 스페이스톡의 철학을 담은 포부다. 마지막으로 김필주 대표는 “스페이스톡은 독보적 디자인 노하우와 IoT, AR, VR 기술을 융합한 넥스트톡을 통해 시설물 분야의 판을 바꾸는 게임 체인저(game changer)가 되고자 한다. 기술 기반의 시설물 분야를 이끄는 선구자로서 나아갈 것이니 많은 관심과 격려를 부탁한다”고 전했다. 글 김모아 사진 스페이스톡 TEL. 02-525-3274 WEB. spacetalk.co.kr
[PRODUCT] 리비오스톤
형태가 일정하지 않은 부정형 블록은 주변 환경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공간을 연출할 때 쓰기 좋다. 블록 사이의 틈새로 잔디와 작은 초화가 자라게 할 수도 있고, 별도의 경계석을 설치하지 않아도 주변 부지와 위화감 없이 연결된다. 하지만 블록 형태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배치 방법과 시공 숙련도에 따라 공간의 완성도가 좌우되기도 한다. 2021년 12월 출시된 리비오에코디자인의 ‘리비오스톤’은 부정형 판석을 모티브로 한 투수 콘크리트 블록이다. 모듈은 길이 290mm, 너비 390mm, 높이 60mm로 하나지만, 표면 디자인과 질감이 달라 다섯 가지 종류처럼 쓸 수 있다. 이를 조합하면 다양한 패턴을 만들 수 있을 뿐 아니라 크기가 각기 다른 블록을 사용한 듯한 효과를 낼 수 있다. 표면에 섬세한 요철을 만들고, 블록 가장자리를 자연스러운 곡선으로 처리해 천연 석재의 형태와 질감을 재현했다. 색상은 스톤그레이와 골드옐로우 두 가지인데, 한 가지 색상에 여러 안료를 혼합해 그러데이션 효과를 내는 블렌딩 기술을 사용해 이국적이고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냈다. 기층에 투수 기능이 가미되어 있어 보도, 광장, 공원 산책로에 적용하면 장마철에도 쾌적하고 안전한 보행 환경을 제공할 수 있다. TEL. 02-6928-5588 WEB. www.liviobloc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