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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관주의, 새로운 경관 패러다임
최근 “경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향상됨에 따라 전문가 집단을 넘어 일반 대중에게도 “경관”은 그리 낯선 단어가 아니다. 이런 흐름 속에 조경, 건축, 도시, 공공디자인 등의 분야에서도 경관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날로 깊어지고 있는 추세다. 최근의 경관에 대한 조명은 과거 심미적 측면에 집중했던 양상과 달리 삶의 장소라는 측면에서 보다 통합적이고 확장된 개념으로 인식되고 있다.이런 시류에 따라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는 지난 5월 20일 “신경관주의 국제심포지엄”을 서울대 호암교수회관 컨벤션센터에서 개최했다. 이번 심포지엄은 조경, 도시, 건축, 경관, 공공디자인 등 다분야의 전문가가 모여 새로운 경관 패러다임에 대하여 발표하고 토론하는 시간으로서, 이를 통해 분야 간 이질적이었던 “경관”의 개념이나 정의를 통일하는데 한층 다가섰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 김대수 교수(혜천대)의 사회로 시작된 심포지엄은 “신경관주의의 대두”에 관한 기조연설, “신경관주의의 환경설계분야별 전개양상”에 관한 주제발표, 융합환경설계에 관한 종합토론 순으로 진행되었다.
한국·미국·중국·일본의 “신경관주의의 대두”경관을 키워드로 한 각 나라의 신경관주의의 행태를 발표한 1세션에서는 나라별 특색을 드러냈다.Niall Kirkwood 교수(미국 하버드 GSD)는 신경관주의는 생태, 어바니즘, 공공위생, 전통문화 등의 모든 것들과 관계지어야 한다고 말하며, 신경관주의가 생태적 잠재력을 얼마나 더 가치 있게 만들 수 있고 또 도시를 얼마나 더 경쟁력 있게 만들 수 있는지 사례를 들며 설명했다. 또한 거대한 신도시들이 현재 가진 장점에만 주목할 것이 아니라 진정한 도시의 환경과 문화를 점차 발전시킬 수 있는 “신경관주의”의 정신을 도시 발전의 토대로 삼을 것을 강조했다. 이어 임승빈 교수(서울대)는 2000년대 이후 경관에 대한 사회적 의식의 증대와 2007년 경관법 제정 그리고 환경에 대한 관심에 따라 경관 관련 사업이 증가하는 추세이며, 이제 경관은 인간의 환경을 구성하는 그린인프라로 인식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심미적 측면과 생태적측면을 포괄하는 “신경관주의”는 21세기에 다가오는 환경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신경관주의의 환경설계분야별 전개양상류중석 교수(중앙대)는 한국의 도시가 급속한 도시화로 인해 질서 없는 도시경관을 형성해온데 이어 신도시 건설과 도시재생사업으로 인해 도시경관이 변화해왔다고 설명했다. 이후 건설기술의 발전에 따라 초고층 건축물이 도시에 들어섰고 이제 공공디자인이 도입되며 건축물 파사드, 거리 등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도시가로경관이 달라지고 있음을 지적했다. 앞으로 각 도시들은 다양한 도시의 가이드라인을 통해서, 또 유비쿼터스 등의 첨단기술을 활용한 도시들이 탄생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도시경관을 위해 인접 학문간 어떻게 협조할 것이며, 첨단 기술이 도시에 가져올 가능성과 문제점을 되짚어볼 시기라고도 덧붙여 설명했다.배정한 교수(서울대)는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과 동시대 한국 조경의 신경관주의”의 발표를 통해 현 경관법이나 경관계획의 내용은 주로 시각적 효과에만 치중한 면이 적지 않다고 말하며, 현재 진정한 “경관”을 통합할 수 있는 관점이 보완되어야만 장식적 흐름을 막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배 교수는“신경관주의”의 조경은 화장술을 극복할 것, 환경·사회·공공성을 지향할 것, 경관의 프로세스는 도시의 작동과 미학적 국면을 함께 아우를 것, 다분야의 통섭을 이끌 것 등을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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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희의 식물이야기(4): 식용식물이야기-“Food First”
마늘과 쑥먹기에 좋은 것이 보기에도 좋다고 했던가. 정원을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아름다운 식물이 먹을 수도 있는 것이라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의외로 우리의 정원에는 먹을 수 있는 식물이 많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유실수일 것이다. 봄에 보았던 복사꽃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지금은 솜털이 뽀얀 복숭아가 자두만큼 컸다. 앵두나무 가득 앵두가 익어가고, 나물로 무쳐먹어도 좋은 원추리가 주황빛 날개를 도도하게 펼치기 시작한다. 이렇게 보기에도 좋고 먹기에도 좋은 식물이야기를 전개해 나가자면 끝도 없을 것이나 정원에 복숭아나무, 살구나무, 앵두나무를 심을 수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원추리 모르는 사람도 있는가. 지루해질 것 같다.
그런데 먹기에는 좋지만 썩 보기 좋지 않은 식물들도 적지 않다. 한국에서 가장 요긴하게 쓰이는 식물들인 파, 마늘의 경우는 어떠할까. 풀죽은 시퍼런 파나 마늘을 정원에 심을 수 있을까? 사실 마늘은 요긴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문화적으로도 의미가 깊은 식물이다. 건국신화와 얽혀 있으므로 먹기만 할 것이 아니라 아테네의 올리브나무처럼 영원히 기려야 하는 것은 아닐까. 마늘은 커녕 우리는 아직 신단수조차 어떤 나무였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박달나무라는 설도 있지만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웅녀가 먹고 여인으로 변했다는 마늘의 학명은 Allium sativum 혹은 Allium scorodorpasum var. viviparum Regel 이며, 파, 양파, 부추 등과 같이 백합과에 속하는 여러 해 살이 초본류이다.
마늘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매일 마늘을 먹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으나 정원에 심어 어여삐 바라보는 것은 또 어떨까. 엉뚱한 발상이 아니라 이미 알리움 계열의 식물들이 다양하게 개량되어 정원에 깊이 침투해 있다.
알리움은 아마도 최근에 가장 인기 있는 숙근초 중의 하나일 것이다. 플라워쇼나 정원박람회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알리움은 마늘의 일종이지만 물론 식용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일반 마늘과 똑같이 둥근 뿌리가 있으니 한 번 다져서 먹어볼 수도 있겠으나 그러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지. 게다가 정원에 심기 위해 마늘의 독특한 향을 제거하였으므로 마늘이되 마늘이 아닌 것이 되어 버렸다. 웅녀가 마늘과 함께 먹었다던 쑥 역시 우리의 배고픈 역사를 동반해 온충실한 식물이다. 이른 봄에 바로 뜯어주지 않고 내버려 두면 정신없이 번져서 문자 그대로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드는데 요즘은 정원에 심기 좋도록 개량된 은쑥이 재배되고 있다. 은쑥Artemisia schmidtiana ‘NaNa’의 특징은 자제력을 타고나서 야생 쑥처럼 정신없이 번지지 않으며 탄탄한 반구형을 이룬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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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따라 밟아본 삼국지 유적과 경관(4)
두 곳이 똑같이 삼고초려 장소라고 주장하는 와룡강과 융중삼고초려의 명장면을 중요한 부분만 간추렸지만, 소설 앞에 나오는 융중과 뒤의 와룡강은 한 장소를 지칭하는 것인데, 현지에서는 두 곳에서 각기 여기가 바로 제갈량이 은거한 곳이라고 주장하면서 무려 800년간 논쟁을 벌려 왔다. 그 근거는 제갈량이 몸소 밭을 갈았던 궁경지躬耕地가 어디인가이다. 호북성 양양 사람들은 정사인 진수의『삼국지』를 근거로 양번(양양과 번성이 합침)의 고융중이라고 하고 하남성 남양 사람들은 출사표에 나타난 남양이란 지명을 근거로 남양 와룡강이 맞다고 주장했다. 현재 남양의 옛 이름이 완현이기 때문에 양번의 고융중 쪽으로 기울기는 하나 현재 두 장소에 꼭 같이 궁경지와 초려 등 유적을 만들어 놓아 탐방객들의 흥미와 호기심을 자극한다. 청나라 고가형顧嘉衡이 남양지부가 되자 기지를 발휘하여“마음이 선주 후주를 논하지 않고 조정에 가 있어 천하에 명성이 높은데 양양이면 어떻고 남양이면 어떤가?心在朝廷原無論先主後主名高天下何必襄陽南陽”라고 결론을 지었다. 둘 다 맞는다는 괴변이지만 참으로 명답이다. 이 논쟁은 최근 명승고적을 관광지로 만들려는 과정에서 다시 부각이 되고 있다.
먼저 와룡강(臥龍崗: 강은‘언덕’이라는 뜻)을 방문했는데 바로 중국 4대 명옥의 으뜸인 독산옥으로 유명한 남양시 서쪽 4킬로미터 지점 시에 바로 인접한 완만하게 경사진 언덕에 위치한다. 입구에 세워놓은 석패방에는 ‘한소열황제삼고처’라고 쓰여 있고, 들어서면 ‘와룡담’이라는 농사지을 때 썼던 저수지가 나오고, 이어서 은거처인 초려가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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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암서원
Piram Seowon造營_ 필암서원은 조선시대 김인후1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선조 23년(1590), 변성운 등이 그가 살고 공부하며 제자를 가르쳤던 장성읍 기산리에 사우祠宇를 짓고 그의 위패를 모셨다. 이것이 1597년 정유왜란 때 소실되자 인조 2년(1624) 그가 태어난 황룡면 증산동에 다시 사우를 지었다. 이후 현종 3년(1662)에는 유생들의 요청에 따라‘필암’2 이라 는 액호를 하사받고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현종 13년(1672) 서원의 입지조건이 수해를 입을 우려가 있다고 하여 다시 지금의 추산秋山으로 옮겨 지어졌고, 1786년 그의 제자이자 사위인 고암 양자징鼓巖梁子徵(1523〜594)도 함께 모셔졌다. 그 후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패령 때에도 훼철되지 않았으며, 현재는 보물 제587호로 지정된 고문서3와 인종이 하서 선생에게 하사했다는 묵죽도, 하서유묵 등 60여 건의 자료가 남아있다. 매년 4월에 하서 김인후를 기리는 춘향제春享祭가, 9월에는 추향제秋享祭가 열린다.
立地_서원은 축령산을 조산으로 증산을 배경으로 평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원 내 우동사, 내삼문, 청절당, 확연루가 서원 앞 들판으로 이어져 자연과 합일하고 있으며, 한편 앞쪽으로는 장수호에서 연계된 아곡천이 흐르고 있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경관구조를 가진다. 주변 환경으로는 백양사, 홍길동 생가, 흥법사지 석탑, 가산서원, 두동사, 표의사, 진원현 이척산성, 삼성산성 등이 있다.1. 김인후(1510〜560)는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담재(澹齋)이며 장성 출생으로 1531년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그 후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으로 퇴계 이황과 교우가 매우 두터웠다. 1540년 권지승문원(權知承文院) 부정자(副正字)를 시작으로 홍문관박사(弘文館博士)·부수찬(副修撰)·현감 등을 지냈으나,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장성으로 낙향하여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그는 문집인《하서집(河西集)》과《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등을 남겼다. 정조 20년(1796)에 문묘(文廟)에 배향되었으며 필암서원 외에도 옥과 영귀서원(玉果詠歸書院), 노봉서원(露峰書院)에 배향되었다.참고로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된 우리나라 18현을 열거하면 신라의 설총(薛聰)과 최치원(崔致遠), 고려의 회헌 안향(晦軒 安珦. 후에‘裕’로 개명),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조선조의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 일두 정여창(一鄭 汝昌),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퇴계 이황(退溪 李滉), 율곡 이이(栗谷 李珥),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우계 성혼(牛溪 成渾),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신독재 김집(愼獨 齋金集), 중봉 조헌(重峯 趙憲),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俊吉), 현석 박세채(玄石 朴世采)이다.2. 연재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이 고종 9년(1872)에 쓴 필암서원 묘정비문에 의하면, 필암서원이 창건된 기산 동구(洞口)의 바위가 깎인 듯이 서 있는 것이 마치 붓처럼 예리한 형상을 했으므로 붓바위, 즉 필암으로 사액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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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우리는 왜 미술을 이야기 하는가
Why Do We Talk about Fine Arts?한 젊은 부인이 수주 동안이나 물을 마실 수 없는 기이한 증세를 보였다. 팔과 다리가 마비되기 시작했고, 시력감퇴 현상도 나타났다. 나중에는 말을 하지 못하는 실어증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내부 장기나 신체상의 문제점은 없었으며, 병의 원인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런 의학적인 원인이 없는 증상을 “히스테리”라고 불렀고, 아주 옛날 의사들은 이 병에 대한 치료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환자가 꾀병을 부리는 거라고 냉담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단다.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프로이트와 그의 친구 브로이어는 가끔 이 환자가 혼수상태에서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고 최면을 걸어 대화를 나눠 보기로 했다. 환자는 최면 속에서 과거에 상처받았던 일이나 불쾌했던 경험들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최면에서 깨어나면 신기하게도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 이러한 치료를 반복하면서 결국 그 부인은 물도 마시고, 마비 증세도 사라지는 등 정상적인 상태로 치료가 되었다. 더욱 신기한 것은 최면 속에서 그 부인이 떠올린 기억들은 이미 잊혀진지 오래된 경험들이었다는 점이다.프로이트는 이를 보고“무의식”의 영역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또한 이 무의식의 영역이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이라는 것과 오히려 의식보다 더 큰 영역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세상에 폭로하면서 현대 철학과 심리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당시 그가 정립한“정신분석학”은 수많은 추종자들을 거치면서 더욱 정교하고 다양한 이론으로 발달하게 되지만“, 비과학적”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아마도 자신이 일상에서 하는 행동의 대부분이 의식적인 사고보다는 무의식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쉽게 인정하긴 힘들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이것은“인간은 이성적인 존재”라고 하는 기존의 깊은 우물을 넘어서는 역사적인 사건이 되었다.그렇다고 무의식이 우월하다거나 혹은 의식이 우월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무의식의 영역을 이성 앞에 노출시킴으로써 무의식이 어떻게 작동하며 어떤 가치를 지니는가에 대해 인간이 알게 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철학이 예술을 보다 진지하게 다루기 시작한 것이 그 즈음이라고 한다. 이는 이성의 타자들, 즉 무의식, 감성, 욕망 등이 관심의 대상으로 부상한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반이성의 힘, 무의식의 영역무의식이 마음 깊은 곳에 숨겨져 있다가 가끔 충동적으로 발현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의 일상적인 행동이 모두 무의식적인 행동의 결과라고 믿는 사람도 있다. 특히 후자의 경우에는 대부분 무의식적인 행동하다가 무의식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났을 때만 의식적인 사고를 통해 무언가를 결정하고 선택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어쨌든 무의식과 의식이 어떤 방식으로든 상호 교류하고 있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적어도 무의식의 역할이 결코 적지 않으리라는 점을 현대인들은 인정하고 있다.
실제 무의식적 행동 영역이 매우 넓다는 것에 대한 신뢰는 다양한 곳에서 발견된다. 뉴로마케팅이라는 것이 있다. 뇌의 무의식적인 반응을 마케팅에 접목시킨 것으로 여기서는“소비자가 의식적으로, 합리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존재라는 것은 아주 낡은 고정관념”이라고 치부한다. 소비자는 왜 특정 브랜드에 끌리는지, 자신이 왜 특정 제품을 선택하는지 이유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예를 들어 백화점에 들어선 소비자의 70%가 무의식적으로 오른쪽 길을 선택하고, 한정판매, 한정수량이라는 특정 조건을 건 기법에 자신도 모르게 제품에 대한 욕구를 분출시키며, 다른 색보다 붉은 색의 SALE이라는 글씨를 보았을 때 더욱 흥분을 하게 된다. 인간의 무의식적이고 감성적인 작용이 과학의 범주에서 연구되어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물론 인간의 뇌라는 것이 매우 복잡하게 작용하므로 뉴로마케팅의 실과 허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이 적지 않다.
감성의 힘지난해 삼성경제연구소가 CEO 436명을 대상으로 예술과 경영의 연관성에 대해 조사한 적이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CEO들이 예술적 감성과 기업경영이 높은 연관이 있다고 답했는데, 조사결과“CEO가 보유한 예술적 감각이 경영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45.2%가 “매우 그렇다”고 답했고, 50.9%가 “그렇다”고 답했다. 경영에서 예술적 감각이 중요한 이유로“남들이 보지 못하는 감성적 섬세함”이 34.5%로 가장 높았고, “엉뚱하고 이질적인 것을 융합해내는 발상의 유연함”이 27.8%,“ 아름다움의 원천을 이해하고 만들어내는 심미적 역량”이 18.1%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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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특정적 예술, 명품공간으로 거듭나다
Site Specific Art, Turn Over Masterwork Space최근 계획되는 경관, 도시, 건축, 조형분야 프로젝트에서 디자인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예술분야, 특히 입체조형이라 할 수 있는 건축, 조경, 미술 등이 경계를 넘어 Cross-over되고 서로 상호 보완되면서 상생 발전하는 아이디어들이 많이 나오는듯하다. 이러한 협업과 상생은 마땅히 장려되고 독려되어 권장되어야 하는 좋은 본보기이다.
“Everybody is an Artist”는 말 그대로 미의식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예술가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내재되어 있는 아름다움이라는 미의식은 개개인의 일상 속에 항상 나타나고 있다. 옷을 고르거나 집안에 필요한 소품이나 인테리어 제품을 선택할 때 세련되고 예쁘고 실용적이거나, 혹은 독특하거나 평범하거나 등 자신들만의 미의식이 작동된다. 미술을 전공하거나 그 분야에 종사하지 않아도 누구나 미의식은 가지고 있다. 이러한 미의식을 가진 평범한 주민들이 전문가와 시공자, 장인들, 계획 입안자와 결정권자들이 협업을 통해 함께 주인이 되고 아티스트가 되어 우리 삶의 공간을 만들어간다면 도시는 각자 자기들만의 색깔을 가지고 그 장소만의 그 공간만의 독창적인 개성만점의 환경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요로천명반전지“하늘의 명이 뒤집어진 곳”이란 의미의 ‘천명반전지(天命反轉地)’는 예술가 슈사쿠 아라가와(Shusaku Arakawa, 나고야, 1936~ )와 소설가이자 시인인 매들린 긴즈(Madeline Gins, 뉴욕, 1941~ ) 부부가 예술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1960년대 초기부터 30년 이상 구상해 온 것으로 전 생애 동안 준비해온 대규모 예술작품이다. 아라카와와 긴즈가 요구하는 새로운 컨셉의 건축은 상식과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온통 굴곡으로 이루어진 바닥과 변화무쌍한 언덕과 경사도 문제지만, 그 위에 비스듬히 서 있는 건물을 짓는 것은 평평하게 닦은 도로와 수직벽면과 천정으로 지금까지의 건축에 대한 상식과 관례를 버리고, 새로운 공법을 찾아내기 위한 실험을 반복하며, 시행착오를 통하여 예술가의 생각을 끝내 실현하였다. 예술가와 지방자치단체 그리고 기술자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며 함께한 실험의 결과물이 바로 천명반전지이다.천명반전지는 “모든 것은 사라진다…누구나 언젠가는 사라진다. 죽음과 인간 존재의 사라짐”, 즉 인간은 누구나 죽게 되어있는 당연사실에 대한 부정으로부터 출발한다. 평평한 바닥, 수직 벽, 능률에 맞는 공간 구성 등 기본적인 건축적 상식을 깨뜨리는 파격적인 건축물과 조경을 체험하고 탐험함으로써 정신과 육체를 모두 사용하는 이성과 감성이 만나는 특별한 장소성, 창조세계에 유일무이한 철학공원으로서 현실화된 사례이다.
예술의 섬, 나오시마경제, 문화적으로 변방이었던 나오시마 섬은 ‘어린이를 위한 섬을 창조하고 싶다’는 테수히코 후쿠타게(Tetsuhiko Hukutake, 현 베네세 그룹 회장의 선친)의 작은 염원이 1987년부터 ‘나오시마 프로젝트’로 현실화된 곳이다. 물질만능의 현대 사회에서 자연과 인간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현장으로 전 세계인들로부터 주목받고 있으며, 대도시 미술관들과 달리 섬 전체가 미술전시장으로서 방문자들이 일상의 번거로움에서 벗어나 자연과 예술 공간에서 자신의 존재의미와 바람직한 삶을 탐색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한 베네세 그룹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곳이다.한 국가의 경제를 리드하는 대기업이 그들의 기업이윤을 사회에 환원하는 방식으로는 단발적이고 의례적인 선심성이 아닌 미래를 보고 꿈을 실현해 나가는, 그것도 지역 및 주민과 더불어 점진적으로 주민들의 의식이 변화되는 것을 기다리면서 지속적으로 실천해나가는 극히 드문 모범사례이다.
나오시마와 천명반전지의 성공은 기적도, 운도 아닌 온전히 지역을 사랑하고 예술의 본질을 이해하는 사람들의 가슴에서 우러나온 치열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모든 일에는 그 일에 임하는 사람들의 진정성과 본질에 대한 의미를 잃지 않으려는 의지에 따라 일의 가치나 성패가 좌우된다.
앞서 가볍게 서술한 요로천명반전지, 나오시마는 모두 자기들만의 독창적 개성을 가지고 그 장소, 그 지역에만 존재할 수 있는 Site Specific한 컨텐츠로 자신들의 입지를 견고히 하고 있다. Site Specific 아트의 해답은 그 지역의 역사, 그 장소의 환경, 지형, 그곳의 사람들에게 있다. 지역성, 장소성이라는 단어를 피상적인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들여다 볼 때 그 땅에서 그 땅이 원하는 답을 들을 수 있다. Site Specific한 구상을 통해서 계획을 하고 설계, 시공, 활용이 왕성하고 활발하게 이루어질 때 도시는 진정한 디자인 도시로서 경쟁력을 갖고, 차별화된 공간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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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 밖으로 나오다
Sculpture, Get Out of the Inside유럽인들에게 조각 작품은 집안의 가구 위의 장식품으로, 조상의 모습을 더 오래 기리기 위한 초상조각으로, 묘지의 장식으로, 건축물의 외관 혹은 내부 장식으로 생활 속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더욱이 작품이라 해서 만지지도 가까이 가지도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초상조각의 뺨 부위는 손때가 묻어 반지르르하고, 우리의 기준으로는 집안의 중심부에 소중히 모셔놓을 만한 예술성 높은 작품을 테이블 받침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목격하였다. 또한 유럽을 여행해 본 사람은 누구나 보았을 것이지만, 내게 특히 인상 깊은 것은 도시의 곳곳에 자리 잡은 각 시대의 출중한 인물을 기념하는 수많은 조각상들, 조각으로 매우 화려하게 장식된 생활용품, 역사를 자랑하는 건축물에 어김없이 빽빽하게 조각되어 있는 여러 양식의 장식물들을 너무나 흔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미 조각 작품이란 단지 감상만을 위해 모셔놓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 깊게 자리 잡은 더불어 사는 어떤 것이었다.
미술사에서는 건축의 장식품에서 독립하여 순수하게 감상만을 위해 조각이 존재하게 되는 순간을 진정한 예술로서의 조각의 탄생이라 일컫는다. 다른 사용의 목적을 가지지 않는 감상만을 위한 예술은 분명 순수예술이리라. 하지만 이로써 조각이 독립을 선언하여 독창적인 영역을 확보한 대신에 조 각이 자리 잡던 영역의 넓이는 매우 축소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이후 조 각은 건축에서 해방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미술관의 실내에 갇히게 되었고, 거리의 서민들이 오며가며 만지고 감상하던 손에 닿을 만큼 친근한 것에서 미술관이나 화랑에 가서 품위 있는 태도로 즐겨야하는, 쇼윈도 안의 고급스러운 보석처럼 아무나 손에 넣을 수 없는 무엇으로 그 영역을 스스로 제한하게 되었다. 이후 엘리트 미술이 사조를 이끌어가고 새로움의 추구가 커다란 이슈로 등장하며 상업주의와 손잡던 시절에 예술은 자연스러움을 상실하고 자신의 존재이유를 애써 역설하며 ‘추(醜)의 미’까지 들먹거리게 되었다. 필자의 견해로는 이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추의 미라니… 보는 사람을 감동시키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곧 미의 근본이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불쾌감을 주며 충격과 전율에 휩싸이게 하는 것도 아름다움이라고 주장하는 현란한 이론가의 변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조각이 다시 소장의 개념에서 벗어나 환경의 일부로서 인간을 감싸 안는 것은 예술이 주는 편안함에 몸을 맡기고 싶은 사람들 의 욕구의 반영인 것 같다.
현재 우리나라의 환경미술은 건축법안의 미술장식품에 관한 조례에 근거하여 공공주택이나 일정규모 이상의 건축물에 설치를 의무조항으로 만든 후부터 활발하게 발달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환경에 조각, 그림 등이 가깝게 접근하게 된 계기가 의무조항에 의해서라는 것이 다소 유감이긴 하지만 작품생활을 하는 나로서는 결과적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동안 양산되어온 환경미술은 외부환경에 놓인다는 특성상 주로 내구성이 강하고 쉽게 변질되지 않는 석재나 청동주물, 스테인리스스틸 등 고전적 재료로 만든 조각들이 주류를 이룬다. 필자도 이러한 환경조형물 제작을 의뢰받아 설치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데 번번이 만족스럽지 못한 느낌을 안겨 주었다. 그렇게 된 원인을 몇 가지 생각해 보았다.
첫째, 작품이 놓일 공간이 이미 설계되어 주어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작품이 놓일 건축물이나 환경의 전체적 조망을 고려했을 때 조각가의 머리에 떠오르는 작품이 구상이 되었다면 실제 작품이 놓일 공간은 이리저리 용도를 앞세운 공간설정에 밀려 터무니없이 협소하게 할애되어 최소한의 감상거리도 확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특히 상업지역에 지어진 건물 앞의 작품은 대접받지 못하고 마지못해 내어준 공간 한쪽에 불편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경우를 거리를 지나며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둘째, 작품이 놓일 환경의 전체적 설계 작업에서 조각가는 제외된다는 것이다. 건축물이든 공원이든 애초에 조각 작품의 설치가 계획되었다면 어떤 테마, 또는 분위기의 환경 또는 건축물을 만들 것인가를 구상할 시점부터 조각가가 참여하여 작품의 규모, 재료, 외관의 형태 등이 고려되어 설계된다면 정말 이상적일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다고 우리나라의 환경조각에 대해 비평이 그칠 날이 없는 사실에 대해 작가들에게도 책임이 없는 것이 아니다. 주어진 공간을 이용하여 거기에 어울리는 작품을 구상하고 제작하는 융통성이 발휘되지 않는 환경조형물도 많기 때문이다. 필자는 작품이 일단 공공장소에 나아가는 순간, 환경 여건, 감상자의 질적 수준, 건축물과의 조화를 고려하여 작품이 만들어져야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개인마다 취향과 보는 시각이 달라서 다소 환경을 지배하며 아방가르드적인 냄새를 풍기는 작품들도 선호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것도 주어진 환경이 그것을 수용할 만큼의 수준이 형성되었는지 확인하고 결정할 일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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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미술을 보는 자연의 눈
A Eye of ‘Nature’ to See Land Art대지미술은 Land Art, Earth Art, Earth Work, Natural Environmental Art 등으로 불린다. 대지, 지구, 자연, 환경과 같은 개념이 눈에 띄는 것은 대지미술이 바로 그 안에서 수렴되고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잔혹한 학살의 시대였던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도시 재건이 한창이던 1950년대 중반 예술가들은 문명 비판과 환경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들 스스로 서구문명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시작한 것이다. 동양철학과 문화가 하나의 대안으로 떠올랐고, 그 중에서도 선불교가 넓게 번지기도 했다. 예술 내부에선 모더니즘과 모더니티에 대한 반성으로 탈모더니즘 논의가 싹텄고 자연스럽게 탈현대, 탈도시, 탈제국주의, 탈중심주의 인식이 확산되었다. 또한, 전쟁 후에 등장했던 앵포르멜, 추상표현주의를 거쳐 1960년대를 휩쓴 미니멀리즘에 대한 거부감도 한 몫 했다. 대지미술은 미니멀리즘의 단조로움과 안일함을 비판했고, ‘물질’로서의 미술을 부정했다. 뿐만 아니라 전시장 미술이라는 한계와 상업성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결과적으로 대지미술가들은 전시장(혹은 미술관) 밖으로 나가 특정한 장소와 환경으로 개입하는 새로운 미술을 시도하게 된다. 전시장 내부의 좌대 위에 올려놓았던 기존의 조각들과 달리 대지미술은 야외의 실제 장소에 위치하는‘체험적 존재’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대지미술가이자 영국의 현대 조각가 칼 안드레Carl Andre는 20세기의 조각이 형태에서 구조로, 그리고 구조에서 장소로 개진되어 간다고 말한 바 있다. 그에게는 장소를 정하여 자리 잡는 일the setting도 작업의 일환이며, 그런 장소선정location 자체가 작품을 창출하는 것이기 때문에 장소선정과 작품을 구분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장소가 곧 조각이라고 선언했다. 1973년, 자신의 대지미술을 촬영하기 위해 저공비행하던 중 35살의 젊은 나이로 추락사한 로버트 스미슨Robert Smithson(1938~1973)은 1967년에 이미 비현장nonsites이라는 작업을 시도했었다. 그는 실제 장소the site에서 가져온 흙이나 돌, 현장 지도와 항공사진을 병치하여 전시한 것이다. 작품이 현장site에 존재하는 대신 비현장에는 그 작품과 관련된 자료 혹은 정보를 전시한 것이다. 현장과 비현장의 상보적이고 유기적인 개념은 대지미술의 핵심적인 개념이라 할 수 있는‘장소특정성site-specificity’으로 완성되었다. 그 의미는 “구체적인 장소의 지형적 또는 사회적 조건이 작품 의미의 근원이 된다(윤난지).”는 뜻이다. 그리고 1970년대 중반 대지미술이 본격적인 궤도에 진입할 즈음 이 개념은‘장소 특정적 미술Site-specific Art’로 전화되었다.“ 어떤 장소에 존재하는 창조된 작품!(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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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도시, 부유하는 공공미술
Flowing City, Floating Public Art
“나는 오브제가 아니라 공간을 만드는 작가다”영국의 조각가인 수잔나 헤론Susanna Heron은 유럽연합 이사회 빌딩의 공공미술 작품 <Slate Frize>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미술에 있어서, 아니 최소한 동시대 공공미술에 있어서는 그리 새삼스럽지 않은 언급이 되었다. 이 말은 미술이‘자기 지시적self-reference’인 것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모더니즘 미술에서 회화와 조각의 경계 너머의 공간은 일종의‘비장소non-site’처럼 존재해왔다. 관람자들이 주목한 곳은 작품 속에 재현된 장소다. 2차원적 캔버스의 프레임과 3차원적 조각의 경계 바깥의 장소는 단지 배경에 불과하거나, 아예 배경조차도 못되는 것이다. 그 장소는 사실 작품의 존재에 필수적인 조건임에도 작품 의미의 영역에서는 배제된다. 모더니즘 미술에서 극대화된 이 같은 인식은‘예술로서의 예술’‘, 작가주의’와‘오리지널리티’의 신화를 공고히 하게 된다. 초창기 공공미술이 장소, 공간을 대하는 태도 역시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물론 공공미술 자체가 미술관과 갤러리 등 전시장이라는 모더니즘의 폐쇄적인 회로를 극복하려는 시도로 받아들여졌지만 초기 공공미술은 대체로 건축물을 장식하거나, 지도자와 영웅, 역사적 사건을 재현하기 위한 수단에 머물렀다. 물론 이 같은 공공미술의 쓰임은 지금도 종종 목격하게 된다. ‘예술로서의 예술’이라는 신화는 마치 조경에서 픽쳐레스크 조경이나 옴스테드식의 공원처럼 오랜, 그리고 끈질긴 생명력을 갖는다.미술이 프레임을 벗어나 장소site1를 새롭게 문제 삼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관람자의 지각과 물리적 장소를 중시했던 미니멀리즘에서다. 모더니즘에 대한 반대 입장에서 미니멀리즘은 실제 장소를 작품으로 끌어들인다. 또한 장소 자체가 작품이 되는 대지미술이나 미술관과 상업적 시스템에 대한 제도비판미술, 그리고 설치미술이나 해프닝, 퍼포먼스와 같이 탈장르화하는 경향을 통해 장소특정성site-specificity이 주요한 개념으로 떠올랐다. 장소특정성은 공공미술에서도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된다.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관통하면서 공공미술에 대한 가장 큰 논의는 공공미술이 독립 된 작품free-standing Object이어야 하느냐, 물리적인 환경, 장소에 통합되어야 하느냐에 관한 것이다. 당시의 공공미술은 국제주의 건축양식의 사각박스 형태의 매스와 콘크리트가 지배하던 잿빛 도시에 일종의 장식을 더해주는 역할이었다. 특히 미술관 속 현대미술을 접하기 어려운 시민들에게 당대의 최고 작가(칼더나 헨리 무어, 피카소, 이사무 노구치 등)의 작품을 공공의 장소에서 감상할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1‘.site’는 아마 조경에서는‘부지’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겠지만, 미술에서는 물리적으로 실재하는 장소에는‘place’를 사용하고, 공간들이 맺고 있는 비가시적인 상호관계를 전제로 할 경우에는‘site’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1960년대 이후‘장소특정성site-specificity’은 현대미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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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과 조경이야기
A Story of Landscape Architecture and Fine Arts흙먼지 날리는 평원에서 그래도 웃고 있을 K에게
오랜만에 타국에서 보낸 엽서를 받고 적잖이 놀랐네.
더구나 페루의 나스카평원1을 보러 떠난 자네가 부러우이.
우리 평소에 이야기하던 조경, 미술의 관계, 나스카평원의 미스터리한 작품들도 오랜 유적이지만 따지고 보면 Land Art의 개념이지. 물론 미술가나 조경가가 존재해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러고 보면 대지에 경관 변화를 주어 경이로운 크기나 형태의 모뉴멘트나 흔적을 남기는 것들은, 그 시작이 주술이나 기원 또는 영생을 추구하기 위해 만들어지거나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기원전 아니 더 오래전부터 있지 않았는가.
가까이는 세계에서 제일 많은 고인돌의 나라인 우리나라 고창 일원의 고인돌 군상도 그렇고 지난번 자네가 다녀온 영국의 거대한 백말그림, 스톤헨지 등이 그렇지 않은가.
물론 그것들이 조경과 미술의 만남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미술사적으로 남겨져 있는 유적들을 대지예술의 측면으로 해석할 수 있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작은 규모의 미술이 아닌 대지와 융합한 경관적 처리방법으로 조경의 영역에서도 음미하고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네.
정원에 준거한 조경사의 흐름만이 아닌 자연을 바탕으로 경관적 조형을 한 것도 조경의 흐름으로 이해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하네.
푼돈을 모아모아 지난 여름에 갔었던 남태평양 이스터섬의 모아이 석상에 대해 다른 관광객들은 거석문화의 경외를 느끼며 감탄했지만, 우리들은 석양빛에 물든 하늘을 배경으로 서있는 그 모자 쓴 석상을 산언덕에서 내려다
보며 경관성을 논하고, 자연 속 인공적인 석상의 군상들을 바라보며 거창하진 않지만 미적인 이야기들을 나누지 않았던가.
또 그 다음날 석상 곁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술에 취한 듯 남들과 다른 경관 경험을 하며 웃었고.
그렇게 보면 조경이란 것은 이미 오래전 학문적인 체계를 이루기 전부터 존재해 왔고 지금도 발전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네.
하긴 따지고 보면 우주공학이나 천문학이 생기기 아주 오래전부터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돌고 있었고, 태양계는 은하계 속의 하나였으며, 우주는 수많은 은하계로 채워져 돌고 있었음을……
또 우리가 사는 이 지구가 최소한 2개 이상의 위성이 있는 행성이라는 것도 근래 들어서야 알게 되었지만.
근래에 들어 조경 디자인의 모티브를 다양한 것에서 접근하고 해석하면서 순수미술과 접목하는 시도도 많이 생겨나고 있고, 또 그런 디자인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이미 우리들 주변에는 미술과 조경의 융합이랄까 그런 것들이 많이 있지 않은가.
노르웨이의 비겔란 조각공원의 경우 조각가 비겔란의 역작들을 모아서 조각공원이 조성되었지. 인간의 일생을 다룬 조각들로 이루어진 그 공원은 지금도 수많은 관광객, 미술애호가, 시민들의 이용으로 늘 붐비지 않는가.
비겔란 조각공원은 조각물로 이루어진 야외 미술관 역할을 하는 공원이지만, 이러한 조경과 미술이 만나는 의도적인 시도 이외에도 조경가들이 계획하는 많은 프로젝트들이 다양한 재료들을 이용하여 선적이거나 면적인 기하학적 도형들을 디자인화하고 조성하는 작업으로서, 이러한 옥외공간의 모든 것들이 미적인 내용을 도외시하고 무의미하게 작업을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물론 미술가들 특히 설치미술가들이 경관을 화폭으로 삼고 대지예술을 전개하고 전시하는 것은 자주 시도되고, 미술사적으로 소개되고 평가되지만, 이슬람식 정형적 정원이나 잔디밭에 오브제가 놓여진 현대정원에 이르기까지 이미 조경과 미술은 만나고 있었고 융합되고 있지 않은가.
고대로부터 외부공간은 다양한 표현의 대상이었고, 이러한 표현의 대상으로서의 외부공간은 미술로부터 끊임없이 추구되어 온 것이지.
그 후 외부공간을 다루는 조경가가 외부공간을 해석하고, 식물을 주재로 공간을 조성하고, 점차 식물과 다른 재료의 융합을 시도하면서 미적인, 의도적인 디자인으로 조성되었다고 볼 수 있지.
미술가가 도로나 광장의 포장 패턴을 평소 그리던 그림 풍으로 장식한 남아메리카 해변의 거리나 옥상정원을 캔버스 삼아 그림을 그리듯 조성한 사례가 있지만, 이미 널리 이름이 알려진 미술가가 계획한 공간이라서 알려진 것이지 조경가들의 계획이 그보다 못해서 덜 알려진 것은 아니란 말이지.
지금은 조경가들이 미술가 아닌 미술가의 역할, 다양한 형태, 다양한 변모와 그에 대한 모색을 할 때라고 생각하네. 훌륭한 조경가, 디자이너임에도 불구하고 미술가가 아니라는 사회적인 편견으로 그 평가나 영향력이 매우 적은 편이지만 끊임없는 노력과 시도가 필요하다고 여겨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