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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스케이프] 도시를 보살피는 위생 경관
통계청 기록에 따르면, 한국의 상수도 보급률은 2021년을 기준으로 97.7%다. 1960년대의 보급률이 22%였다고 하니, 반세기만에 실로 놀라운 발전이 아닐 수 없다. 상수도上水道(waterworks)는 하수도나 공업용 수도와 구별할 때 부르는 용어이며, 일반적으로는 ‘수도’라 칭한다. ‘수도법’에서는 수도를 ‘관로管路, 그 밖의 공작물을 사용하여 원수原水나 정수淨水를 공급하는 시설의 전부’라 정의한다. 보건 위생과 소화消火를 목적으로 한 급수 설비 체계를 97.7% 갖췄다고 함은, 한국 대부분 지역에 깨끗한 물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는 90%에 이르는 도시화율과도 비례한다.
도시의 상수도 시설이 제대로 기능하려면 양질의 식음수 공급이 우선되어야 하므로 정수장 설비 마련은 필수다. 열약한 환경에 놓인 근대기의 도시민에게 맑은 물을 생산, 공급하는 시설은 도시 공원보다 더 절실할 수 있는 중요 기반 시설이었다.
전통적으로는 우물을 파서 물을 끌어 올려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형편이 좋은 집에서는 개인 우물을 파기도 했지만, 대체로 마을마다 공동 우물을 파서 주민이 함께 이용하고 관리했다. 여름이면 충분한 비가 내렸고 계곡과 하천이 발달한 곳에 취락지가 있었기 때문에 식음수와 생활용수를 취하는 일이 비교적 손쉬웠다. 전국에 분포한 화강암반은 좋은 여과지가 되어 양질의 지하수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상하수도 분리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개항장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인구가 집중 증가하는 19세기에 이르자 식음수의 부족 문제와 수질 문제가 표면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한다.
근대식 상수도 시스템은 하천수를 끌어와 침전과 여과의 정수 과정을 거친 뒤 동력을 이용해 배수지로 송수하고 배수관을 통해 급수하는 것이다. 이보다 간단하게는 차집관로를 설치해 물을 자연 여과하여 집수정에 모았다가 배수지로 송수하고 배수관을 통해 급수하는 방식도 있다.
...(중략)...
2년 간의 ‘모던스케이프’ 연재는 근대 도시의 가장 큰 근간인 ‘교통’으로 시작해 ‘위생 경관’에서 끝을 맺게 됐다. 개인적으로는 단편적인 근대 경관의 소재를 동서와 고금으로 확장해 볼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소득이다. 독자들이 100여 년 전 이 땅의 모던스케이프를 상상하고 이해하는 데 이 지면이 조금이나마 도움 되었길 바란다. 더불어, 암흑기이자 단절기로만 단정해왔던 20세기 전후 시기가 사실은 지금을 자리할 수 있게 한 토대였음을 공감하는 기회가 되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환경과조경428호(2023년 12월호)수록본 일부
참고문헌
부산 중앙공원 홈페이지 www.bisco.or.kr/jungangpark
이연경, “도시위생의 수호자, 상수도”, 『도시를 보호하라』, 2021, pp.74~167.
김백영, “일제하 서울의 도시위생 문제와 공간정치: 상하수도 우물의 관계를 중심으로”, 『사총』 68, 2009, pp.191~226.
김재호, “식수문화의 변화과정: 우물에서 상수도까지” 『한국민속학』 47, 2008, pp.235~265.
통계청 www.kostat.go.kr/ansk/
그림 출처
그림 1. www.visitbus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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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망졸망 꿈의 숲
동북권 북서울꿈의숲 거점형 어린이놀이터 조성 설계공모
2021년부터 서울시는 거점형 어린이놀이터를 통해 도심 놀이 환경 개선을 꾀하고 있다. 권역별 거점형 어린이놀이터 조성사업을 통해 5개 권역별(동남권, 서남권, 동북권, 서북권, 도심권) 시민 이용이 많은 거점공원 등에 다양한 연령의 어린이를 위한 놀이 공간을 조성하고 있다. 지난해 1호 거점형 어린이놀이터를 광나루한강공원에 조성 및 개장했으며, 2호 거점형 어린이놀이터는 보라매공원에 조성 중이다. 3호 거점형 어린이놀이터는 북서울꿈의숲에 들어선다.
지난 10월 서울시는 ‘동북권 북서울꿈의숲 거점형 어린이놀이터 조성 설계공모’ 수상작을 발표했다. 당선작으로 씨토포스의 ‘올망졸망 꿈의 숲’이 선정됐다. 입선작은 엠엠엠 디자인 스튜디오+지엘에이디자인의 ‘놀이감각: 북서울꿈의 숲 경험놀이터’, 사이트닷의 ‘뭉게구릉놀이터_조이풀 클라우드(Joyful Cloud)’가 차지했다. 대상지는 북서울꿈의숲 동문 일대의 야생초화원, 계절수목원, 사슴사육장 및 주변 숲 일부 유휴 공간으로 약 8,000m2 규모에 달한다. 경사지와 숲 등 동문 일대 주변 환경과 연계한 놀이터를 조성해 다양한 연령의 어린이들이 기존 놀이 시설 중심의 놀이 행태에서 벗어나 모험 및 체험을 즐길 수 있게 하고, 보호자 등의 돌봄과 휴식을 제공할 수 있는 복합 여가 공간을 제안하는 것이 설계 목표다. 서울시는 기본 및 실시설계를 거쳐 2024년까지 동북권 북서울꿈의숲 거점형 어린이놀이터를 조성하고, 2026년까지 서북권 및 도심권에 거점형 어린이놀이터를 추가 조성해 5개 권역별 조성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당선작, 올망졸망 꿈의 숲
씨토포스
북서울꿈의숲은 과거 놀이공원 ‘드림랜드’가 있던 자리에 조성된 공원이다. 이곳은 벚꽃길과 단풍숲 등 생태적 조경 공간, 월영지와 월광폭포 등 전통 경관, 북한산과 도봉산, 수락산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와 문화예술 활동이 있는 꿈의숲아트센터 등 자연과 문화가 함께 공존하는 대형 공원이다. 대상지는 과거에 있던 골프 연습장을 철거해 만든 곳으로 띠, 갈대, 억새 등 그라스류를 식재한 ‘브라운 가든’, 사계절 초화류 및 빗물 수로를 활용한 ‘야생초화원’, 자작나무 숲이 있는 ‘계절수목원’이 조성됐다.
북서울꿈의숲 조성 후 축적된 기존의 경관을 존중해 연속적인 생태 환경이 유지되도록 하고, 기존의 지형 및 수종과 연계한 정서 놀이 공간을 계획했다. 놀이 시설물은 인위적인 형태를 배제하고 친환경 소재를 활용했다. 자연성이 투영될 수 있는 연령별 행태를 분석해 놀이 시설의 적정한 위치에 각각의 테마를 부여했다. 이를 통해 아이들에게 자연의 친숙함을 제공하고, 숲과 더 깊은 교감을 전달해 자연 감성을 키우도록 유도한다. 퍼걸러 등 휴게 공간을 곳곳에 배치해 어른들도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했다.
공간은 크게 상단부와 하단부 놀이터로 나뉜다. 진입 공간인 하단부 놀이터 공간에 조성한 올록볼록 놀이 숲은 기존 경사 지형을 활용했다. 주진입 광장에서 어린이의 흥미를 유발하는 미끄럼탑과 기존 나대지를 활용한 잔디 구릉, 언덕 등 동그란 형태의 경사면을 따라 놀이 시설을 조성해 흥미로운 공간을 구성했다. 오르고 내리며 놀 수 있는 미끄럼틀과 등반 놀이대, 잔디언덕, 지형의 단차를 이용한 그물다리, 오두막을 설치해 다채로운 놀이 경험을 유도했다.
전체적으로 부지의 중간부와 상단부 구간은 기존 지형 위에 역동적인 활동이 가능한 지형 놀이 시설물을 곳곳에 배치해 아이들의 흥미를 고조시켰다. 상단부와 하단부를 잇는 뽈뽈뽈 기는 숲은 평지와 구릉이 만나는 지형을 활용해 모래 놀이터, 모래 언덕 등을 조성했다. 어린이를 동반한 어른들을 위해서 장미정원을 감상할 수 있는 퍼걸러도 함께 계획했다. 상단부의 오르락내리락숲은 잔디와 고무칩 포장을 통해 지형적 변화를 연출했다. 혹부리언덕 등 다양한 언덕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즐길 수 있게 했다. 또한 실개천과 미스트를 배치해 시원하고 쾌적한 놀이 환경을 구축하고자 했다. 자작나무 놀이숲은 기존 자작나무숲을 가로지르는 네트놀이대 등을 배치하고, 유아용 놀이방을 따로 분리해 유아들이 안전하게 놀 수 있게 만들었다. 최상단에는 쉼의 숲을 새롭게 제안해 5~8세 어린이도 숲속에서 소꿉놀이를 즐길 수 있게 했다.
*환경과조경428호(2023년 12월호)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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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디에스디삼호 조경나눔공모전
지난 11월 9일, 환경조경나눔연구원이 ‘2023 디에스디 삼호 조경나눔공모전’ 심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공모는 환경조경나눔연구원이 주최·주관하고 디에스디 삼호, 환경과조경이 후원했다. 대상지는 경기도 용인시 신봉 2지구 공동주택 단지와 고가도로 사이의 좁고 긴 공원 예정지다. 공모를 통해 수도권의 전형적인 택지개발지구에 들어서는 평범한 공원이 일상의 삶과 거주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 모색하고자 했다.
박명권 발행인(환경과조경, 심사위원장), 김은희 부장(디에스디삼호), 배정한 교수(서울대학교), 강주형 대표(생각나무파트너스 건축사사무소), 박준서 소장(디자인엘), 주신하 교수(서울여자대학교)가 최종 제출된 27개 작품을 심사했다.
대상은 구륜아·김은빈·유지혜·이은송(한경국립대학교)의 ‘워킹 월(Walking Wall)’이 차지했다. 워킹 월은 일상의 공원을 합리적이고 체계적으로 구성해 주변 공간과 조화롭게 연결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고가도로와 고층 고밀 주거단지 사이에 위치한 대상지의 악조건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으며, 특히 식재 전략과 스카이워크를 도입한 점이 돋보였다. 간결한 계획 어휘로 전체 부지를 잘 풀어낸 점이 높이 평가됐다.
*환경과조경428호(2023년 12월호)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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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조경비평상 심사평
월간 환경과조경이 주최한 ‘2023 조경비평상’에는 세 편의 원고가 접수됐다. 지난 11월 17일 본지 세미나실에서 김모아 기자, 남기준 편집장, 배정한 편집주간이 토론하며 심사한 결과, 올해에는 수상작을 선정하지 않기로 했다.
비평은 일상의 글과 다르다. 논문과도 구별된다. 게다가 조경비평은 조경 행위의 결과물인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공간 또는 현상을 기술, 해석, 평가하는 작업이므로 쉽지 않은 글쓰기 장르다. 하나의 조경 작품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중성의 물체가 아니다. 작품을 생산한 설계자와 설계 작업의 과정, 작품이 구현되는 부지의 성격과 맥락, 장소를 둘러싼 사회·문화적 환경, 장소에 쌓인 시간과 역사, 공간을 쓰는 사람의 생각과 행동, 당대의 라이프스타일과 미감이 뒤엉켜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한 편의 글에서 이 모든 것을 포착해 소화하기란 쉽지 않다. 달리 말하자면, 구체적인 주제와 선명한 관점, 일관성 있는 논리 전개와 고유한 주장이 있어야 조경비평의 설득력을 확보할 수 있다. 이번 심사에서 읽은 원고 세 편은 모두 주장이 분명한 편이었지만, 주장하고자 하는 논점을 명료하게 끌고 나가는 구성력이 약했다는 점에 심사자들의 의견이 일치했다.
*환경과조경428호(2023년 12월호)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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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웃거리는 편집자] 메리 크리스마스
“동시 접속한 인원이 12,194명입니다.” 유명 아이돌 콘서트나 프로 스포츠 결승전 같이 인기가 많은 공연이나 경기의 티켓을 구매할 때 종종 보는 문구다. 그런데 이 문장을 콘서트, 경기 티켓팅(ticketing)이 아닌 어느 공간을 가기 위한 입장표 구매 사이트에서도 만나게 됐다. 바로 크리스마스를 기념해 더현대 서울에 꾸며진 해리의 꿈의 상점(La boutique d’Harry)이다. 더현대 5층 한가운데 있는 이곳은 매년 12월부터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공간으로 꾸며진다. 작년은 해리와 곡물창고라는 주제로 꾸려졌고, 올해는 유럽의 어느 상점 골목을 표현했다. 작년에는 현장에 가야 마을에 들어갈 수 있는 표를 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입장표를 뽑기 위한 대기 번호가 600번대라는 말을 듣고 가고 싶은 마음을 접었다. 올해는 온라인 티켓팅이 있다는 소식을 접해 티켓팅 오픈 시간에 맞춰 5분 전부터 대기했지만, 나보다 빨랐던 1만 명에 밀려 올해도 가긴 글렀다.
크리스마스에 진심이 된 지는 나름 오래됐다. 넘길 달력이 한 장 밖에 남지 않아 마음이 뒤숭숭해져서 그런지, 유난히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트리에 홀려 크리스마스를 좋아하는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11월부터 나의 플레이리스트는 캐럴로 채워진다. 서울에서 처음 크리스마스를 보낸 곳은 명동이었다. 인파에 밀려 무빙워크를 탄 듯 몸이 저절로 움직였던 기억이 강렬했지만, 스피커를 타고 흘러 나왔던 캐럴과 구세군 자선냄비 앞에서 울리던 종소리로 가득했던 그때의 그 분위기는 크리스마스의 매력을 느끼기 충분했다.
휴학 시절에 하고픈 목표 중 하나가 ‘사계절 담기’였다. 덕수궁 은행나무 길부터 석촌호수 벚꽃 길까지. 최대한 다양한 풍경을 담고자 했었다. 겨울을 담을 스폿으로 크리스마스 트리를 골랐다. 청계천, 종로 등 유명한 장소뿐 아니라 카페 안 등 서울 곳곳의 트리를 수집했다. 트리 사진을 한 장, 두 장 모으다 보니 특유의 크리스마스만의 따뜻한 분위기와 한 해를 잘 마무리했다고 자축하는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사진 프레임에 지나가는 사람, 사진 찍는 사람들이 걸려 크리스마스 트리를 온전히 담기 힘들었다. 그래서 사람이 얼마 없지만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발걸음을 옮겨 보기도 했다.
동네에 롯데‧신세계백화점, 스타필드처럼 유명하진 않지만 주민들이 많이 찾는 쇼핑몰이 있다. 나에겐 이 쇼핑몰은 봄에는 근처 하천변에 핀 벚꽃을 보러가는 명소이자 여름에는 에어컨이 빵빵한 더위 피난처이자 가을‧겨울에는 맛있는 음식이 가득한 곳이다. 나가고 싶은데 멀리 가기 싫으면 자연스럽게 이곳에 온다.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쇼핑몰을 다니다가 새로운 공간을 찾았다. 꼭대기 층에 영화관이 있는데,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을 발견했다. 건물과 건물을 잇는 브리지인 줄 알았는데 문을 열고 계단을 오르니 옥상정원이 있었다. 방문객들의 쉴 공간인데 아직 이곳의 정체를 잘 모르는 듯 사람이 많지 않았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 반짝이는 나무를 하나 발견했다. 바로 크리스마스 트리. 머리에 별을 단 큰 나무와 몇 그루의 작은 나무에 흰 불빛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유명 쇼핑몰처럼 크리스마스 소품 등을 활용해 화려하게 꾸며 놓진 않았지만 여기에서도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벤치에 앉아 주변을 찬찬히 둘러봤다. 트리 앞에서 사진 찍는 사람, 사랑하는 이와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사람, 아이와 신나게 뛰어다니는 사람 등 다양한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날의 그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크리스마스 트리를 온전히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어쩌면 따로 운동을 하지 않아도 체력이 좋았던 시절이여서 크리스마스 풍경을 담으려 열심히 돌아다녔을지도 모른다. 체력이 금방 떨어지는 요즘도 여전히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올해는 어디서, 어떻게 보낼까 고민한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콘셉트로 꾸며진 공간에 가야만 크리스마스를 느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이젠 안다.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맛있는 밥 한 끼 먹는 것, 좋아하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쉬는 것도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방법 중 하나다. 올해도 그 옥상정원 트리 옆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케이크 한 조각 먹어야겠다. (조금 이르지만)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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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행복하세요. 저도 행복할게요.
시침과 분침이 하나의 직선이 되는 순간, 저녁 여섯 시는 세상 모든 직장인을 설레게 한다. 특히 평일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금요일이면 더더욱. 주말의 정확한 정의는 토요일과 일요일이지만, 사실 마음속에서는 금요일 사무실 문밖을 나가는 찰나부터 휴일이 시작된다. 자판을 열심히 두드리고 있는 지금은 금요일 오후 다섯 시 반, 삼십 여 분 쯤 뒤면 집으로 달아날 수 있다. 그 발걸음이 둥둥 떠다니는 풍선처럼 가벼워야 하는데 조금 묵직한 까닭은, 내일 있을 연례행사 때문이다. 김장철이 돌아왔다. 집에 가면 갓과 쪽파를 다듬고 반으로 갈라 적당한 크기로 잘라야 한다. 벌써 어깨가 뻐근해지는 기분이지만, 일 년 내내 무사히 김치를 얻어먹기 위해, 또 모든 게 끝나면 식탁에 오를 따끈한 수육을 생각하며 조금만 참기로 한다.
생전 관심도 없던 김치 만드는 방법을 유심히 살펴보게 된 건, 내가 아무리 흉내 내려 해도 엄마가 만든 김치찌개를 따라 끓일 수 없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똑같은 재료를 사용해도, 엄마가 알려준 방법대로 해도 그 맛이 도무지 나지 않는다. 그나마 찌개는 두 스푼, 물 두 컵 같이 나름의 계량법이라도 있는데 김치처럼 그 양이 커지면 따라 할 엄두도 나지 않는다. 갓하고 쪽파는 대야에 이만큼 찰 정도로, 고춧가루는 이만치, 액젓은 대야 가장자리를 따라 서너 바퀴 돌려서, 새우젓은 숟가락에 봉긋하게 올려서 짭짤하겠다 싶을 만큼, 설탕은 탈탈탈……. 뭐 어쩌라는 거지. 온갖 모호한 표현들을 듣고 있으면 그냥 평생 엄마 옆에서 살아야지 그런 결심이나 든다. 과학자들은 대체 저런 감을 익히는 방법은 개발 안하고 뭐하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또 이런 막연한 표현을 계량화해주는 기술이 개발되면 반가울까? 편하기야 하겠지만, 입맛을 돋우는 효과는 좀 적을 것 같다. 나는 “김장 끝나면 김치 칼로 자르지 말고 길게 죽죽 찢어서 삶은 돼지고기 요만하게 잘라서 싸먹자”는, 친근한 단어들로 무장된 표현에 침을 꼴깍꼴깍 넘기는 사람이니까.
트위터리안(트위터에서 엑스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영 입에붙지 않는다) 중에 마포농수산쎈타(@mapo_nongsusan)를 참 좋아한다. 주로 올리는 건 해 먹은 음식의 사진. 날이 추울 때 순두부찌개, 비 오는 날에 파전 같이 딱 침샘을 자극하는 음식을 올려 날 미치게 만든다. 더불어 구수한 말투로 곁들이는 레시피가 일품이다. “미나리 돌돌돌 만두도 돌돌돌 버섯도 돌돌돌 맛 좋은 한돈 앞다리살루다가 뭐든 돌돌 말아 데굴데굴. 냄비에 숙주 듬뿍 깔구 액젓 쪼로록 다진 마늘 퐁 10분만 끓여주셔요. 요건 뭔가 싶다가도 스윽 갈라 보면은 짜란. 고기쌈도 사람도 속을 봐야 알지요. 밥 챙겨먹어요. 행복하세요. 저도 행복할게요.(각주 1)” “야채의 자연스러운 단맛은 마음을 살살살 풀어주고 그래요. 맑은 국물에 양배추 숭덩숭덩 돼지완자 동그르르 퐁당. 참깨드레싱에다진 마늘 요만치 땡초 대파 쫑쫑쫑 라조장 찔끔. 참깨 소스 퐁 찍어다가 덥석. 요게 아주 그냥 끝도 없이 들어가거든요. 밥 챙겨먹어요. 행복하세요. 저도 행복할게요.” 어떻게 따라 만들지 막막하지만 그래도 각종 숫자와 단위로 무장한 요리법보다 저런 표현들을 따르고 싶어진다. 조금은 다른 맛이 나더라도 심지어 실패하더라도, 레시피 말미에 붙은 말처럼 나름대로 행복할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긴다.
인기에 힘입어 레시피북(『밥 챙겨먹어요, 행복하세요』, 세미콜론)도 출간한다는 소식에 바로 들었던 생각은 혹시 내가 좋아하는 그 말맛이 평범한 요리책처럼 정제되는 과정에서 사라졌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었다. 다행히도 기우였지만 말이다. 조현진과의 인터뷰(94쪽)에서, 여리고 아름다운 식물의 예쁨에 대해 말하다보니 내 손길에 의해 사라져버린 문장들이 떠올랐다. 조경설계를 다루는 전문지 특성 때문에, 가끔 식물에 대한 여러 수식어는 문장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사라져버리곤 한다. 예를 들어, ‘하늘하늘 바람에 흔들리는 가녀리고 가느다란 초화류’는 ‘바람에 흔들리는 가녀린 초화류’와 같이 정돈된다. 완전히 뜻이 같진 않지만 비슷하다는 이유로 사라져버린 표현들이 어쩌면 누군가에게 지루함을 느끼게 하진 않을까. 조경의 주요 소재인 식물에 대한 관심을 꺼트리지는 않을까. 식물에 대한 낭만적 언어를 그대로 살릴 수 있는 꼭지를 하나 마련해도 좋을 것 같다. 조금 이르게 새해에 해야 할 일 목록의 한 줄을 채운다.
각주 1.이 지면과 딱 어울리는 문장은 아니지만, 2023년을 행복하게 마무리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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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PANY] HDC랩스
HDC랩스는 HDC그룹의 공간 AIoT(인공지능융합기술) 기업으로, HDC아이콘트롤스가 HDC아이서비스를 흡수·합병한 뒤 이름을 바꿔 새롭게 출발한 기업이다. 2021년 HDC랩스는 기업 슬로건인 리:디파인(re:define)(사람들의 모든 생활과 가치를 아우르는 공간 솔루션, 라이프스타일 플랫폼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공간, 미래, 삶을 재정의한다)을 실현하기 위해 조경 전문 브랜드 ‘디플로라(D'Flora)’를 론칭했다. 그간 쌓아온 디자인 빌드형 공간 경험을 바탕으로 자연과 스마트 기술의 결합을 시도하는 디플로라는 공간 트렌드를 이끌고 사람들에게 새로운 경험이 가능한 공간과 시설물을 선보인다. 디플로라는 데이터 기반의 스마트 기술을 통해 실내외 맞춤 식물상flora을 만드는 시스템이다. 외부 공간뿐 아니라 실내, 테라스 등 적용 공간에 한계를 두지 않고 스마트 바이오필릭 솔루션을 제시한다.
디플로라 테라피 갤러리, 공간에 기술을 더하다
지난 10월 28일, 신길 센트럴 아이파크에 디플로라 시스템을 적용한 ‘디플로라 테라피 갤러리’가 들어섰다. 디플로라 테라피 갤러리는 하이파크시티 일산 아이파크 1단지(2021년 11월 완공)에 선보인 바 있는 치유정원에 디플로라 시스템을 적용해 업그레이드한 온실형 티하우스다.
중앙 잔디마당에 위치한 디플로라 테라피 갤러리는 온실형 티하우스와 정원으로 구성된다. 잔디마당 앞에 흐르는 계류를 바라보도록 온실형 티하우스를 배치하고, 식물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기능을 통해 심신의 안정을 얻어 힐링을 꾀할 수 있는 정원을 조성했다. 정원에서 식물의 공기 정화, 꽃과 잎에서 나는 향기를 통한 아로마 테라피, 색채를 이용한 컬러 테라피, 식재 질감을 통한 센서리 테라피 효과를 볼 수 있다.
온실형 티하우스에 적용한 디플로라 시스템의 장점은 커스터마이징을 통해 사용자에게 편의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인력에 의존해 시설물을 관리하던 기존 방식에서 탈피해 자동 제어 시스템으로 식물에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과습 방지용 미관수 로직이 적용되어 있어 습도 값에 따라 자동 및 강제 관수가 이루어진다. 가스 센서는 각종 미세먼지와 공기 질을 측정한다. 이 기록을 한국환경공단 공식 측정소의 미세먼지 데이터, 바이오임피던스 센서에 의해 측정된 식물 건강 지수와 함께 표출해 사용자에게 내외부 환경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이로써 불필요하게 소모되는 인력과 에너지를 절감할 수 있으며, 조경 하자에도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그린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HDC랩스 관계자는 “스마트 바이오필릭 솔루션 제공을 위해 스마트 조경 관리 시스템과 사용자 모드 결합 등 단계적 기술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며, “디플로라를 통한 지속가능한 그린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G-DX)(Green Digital Transformation)을 위해 앞장서고 있으며, 향후 확장성과 혁신적 발전을 위해 HDC현대산업개발과도 협력해 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HDC랩스는 지난 7월 애프터레인과의 업무 협약를 통해 디플로라 시스템을 본격화하고, ‘식물 관리 환경이 자동 조절되는 스마트 가든 시스템’에 대한 특허 출원 및 우선 심사 신청을 지난 9월 완료한 바 있다. 글 김모아 사진 HDC랩스 TEL. 1899-1909 WEB. www.hdc-lab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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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DUCT] 자연과 교감하는 놀이터 ‘파브르 곤충기’
창의력과 상상력을 높이는 안전한 놀이터
어린이들이 도심에서 자연과 교감하며 놀 수 있다면 어떨까. 이제 놀이터는 더 이상 단순한 놀이와 탐구의 장소가 아니라, 또래 친구들과 소통하며 자연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아이들의 성장과 발전을 촉진하는 중요한 장소다. 예건의 복합놀이시설 브랜드 아이붐I-BOOM은 아이들을 위한 친환경 놀이터를 제작한다.
파브르 곤충기 놀이터는 아이들이 자유롭게 움직이고 탐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 다양한 놀이 기구를 이용해 신체 능력을 발달시키고 친구들과 협력하는 즐거움을 느끼게 만든다. 곤충 조형물은 아이들의 시선을 끄는 동시에 창의력과 상상력을 자극한다. 다양한 놀이 유닛을 조합해 대형 놀이터부터 소규모 공원까지 다양한 장소에서 활용이 가능하다. 놀이 기구 높이가 다양해 고학년부터 저학년까지 모든 어린이가 함께 즐길 수 있는 통합 놀이 공간을 만들 수 있다.
그간의 노하우를 적용해 아이들의 부상 등을 고려해 안전하게 즐길 수 있게 했다. 따뜻한 색감과 부드러운 촉감의 1~2등급 목재를 사용해 아이들의 정서를 함양시키고 오감을 키울 수 있게 한다.
TEL. 02-324-0070 WEB. www.iboo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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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조경 교육의 다음 50년을 위해
조경 교육의 다음 50년을 설계할 시점이다. 교육인증이 조경 교육의 전문성을 키우고 조경 실무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는 기반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커지고 있다. 2023년 8월호 에디토리얼에서 예고한 대로 이번 달 특집의 주제는 조경학 교육인증이다. 다면적 토론과 숙의를 초대하는 난제의 첫걸음을 떼기 위해, 이번 지면에서는 주로 인증의 필요성을 논의하고 주요 사례를 검토한다.
특집을 여는 글 “조경학 교육인증 논의를 시작하는 첫 질문”에서 김아연 교수(서울시립대)는 인증의 필요성을 다각도로 짚는다. 그의 진단처럼 “‘지금의 조경 교육 이대로 괜찮은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50년 역사를 축적해온 조경 교육이 “전적으로 교수 개인의 역량에 내맡겨져 있”는 당혹스러운 현실은 조경(학)의 전문성에 의구심을 갖게 한다. “조경 전문가(의) …… 기술과 지식이 무엇인지 규명하고 이를 검증하는 시스템의 부재로 해마다 …… 쏟아지는 졸업자들의 자질을 입증하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 자질의 일관성은 한 분야의 전문성을 증명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이러한 일관성은 전문가를 배출하는 일관성 있는 교육에 근거한다.”
김아연 교수는 조경학 교육인증 논의의 “지속성을 담보하고 실질적인 변화로 이어질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은 곧 “기성세대로서 우리는 어떤 미래를 물려줄 것인가”라는 질문에 성실히 응답하는 데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어지는 글 “설계 교육의 정도는 무엇인가”에서 최영준 교수(서울대)는 조경학 교육인증제의 “실현 여부에 대해 누구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 조경설계 교육에 대해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몽타주가 정해진 답 없이 흐릿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리고 설계 교육의 위상을 “교육인증제를 기회로 바로잡고 전국의 모든 학과‧전공들이 정도正道로 삼을 만한 설계 교육의 정도正度”를 논의한다. 그는 “교육인증제를 통해 조경학과 교과 과정에서 학습한 지식과 기술을 토대로 동시대의 문제를 스스로 정의하고 그 해결책을 자기 주도적으로 학습하는 통합적 틀을 제공하는 설계 과목의 쇄신이 이루어진다면, 조경학도 모두가 자기 브랜드를 갖는 조경 전문가로 성장해 나가는 큰 동력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김정화 교수(네바다주립대)는 글 제목처럼 “미국 조경학 교육인증제의 현황과 시사점”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에서 직접 경험한 재인증 과정을 공유한다. 그가 상세하고 깊이 있게 소개하는 바와 같이, 미국의 조경 교육인증 주체는 조경인증위원회LAAB이며, 인증제의 목적은 “조경 학위 프로그램의 교육 품질을 평가하고 지지하며 발전시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교육과 직능의 밀접한 연결이 핵심으로, 학생들이 조경 직능에서 요구되는 지식과 기술을 갖출 수 있도록 조경 분야의 고품질 교육을 보장하는 데 있다.” 그는 전공 및 학위명, 학위 과정 기간과 요건, 정보 공개 온라인 플랫폼, 교수진 규모와 임용 상태, 소속 대학의 인증 여부, 관리자, 인증 지속을 위한 의무 사항 등 미국 조경학 교육인증제의 인증 기준을 소개한다. 또한 인증 신청. 자체 평가, 방문 평가, 평가 검토와 의견 수렴 과정, 인증 결과 공표로 이어지는 인증 절차를 설명한다.
김정화 교수는 교육인증의 효과와 의미를 1)인증제를 통한 조경 교육의 핵심 가치 공유, 2)통합적 데이터 구축, 3)확장과 네트워크 등 세 가지로 제시하며, 인증제는 “매우 체계적이면서도 동시에 느슨한 구석도 지닐 필요가 있”으며 “인증 체계와 과정에서 인증을 받으려는 주체의 역할과 권한이 중요하다”는 시사점을 끌어낸다.
김영민 교수(서울시립대)의 글 “IFLA APR의 조경 교육 방향과 기준”은 지난 2018년 세계조경가협회 아시아태평양지회가 마련한 ‘교육 정책과 기준, 그리고 인증 과정’의 틀과 내용을 소개한다. 교육 프로그램의 목표와 목적, 행정과 운영, 전문 교과, 교육 성과(10가지 세부 분야), 전문 성과, 시설‧장비‧정보 자원, 대외 활동 등으로 구성된 조경 교육 기준은 한국 조경 교육의 기본적 틀을 재정비하는 데 적지 않은 시사점을 준다. 김영민 교수가 말하듯, 한국 조경 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같은 조경학과이지만 대학에서 서로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며 논의도 없다는 점”일 것이다. IFLA APR의 교육 지침이 우리가 당장“현실적으로 적용할 지침이 아니더라도 이 지침의 높은 기준과 정교한 조경 교육에 관한 규정은 우리의 교육을 뒤돌아보고 점검해 볼 ……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 그의 주장처럼, “교육의 효과는 현실적이어야 하지만 교육의 지향점과 목표는 이상적이어야 한다. …… 한국 조경계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출발점은 분명 교육에 있다.”
이번 특집 지면이 조경학 교육인증제 논의의 기초 자료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앞으로도 본지는 교육인증에 관한 다양한 목소리를 담고 더 심도 있는 조사와 연구, 토론을 공유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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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감각] 11월 저녁
수능을 며칠 앞둔 날을 기억한다. 3년간 공부에 매달렸지만 성적은 목표에 비해 한참 부족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그저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먹고 잠들며 수능 시간에 맞춰 모의고사를 풀었다. 점수를 더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평소의 점수라도 받기 위해서 이제껏 쌓아온 리듬을 이어가는 것뿐이었다.
그날도 그랬다. 수능 시간표에 맞춰 하루 종일 모의고사를 풀었고, 늘 틀리던 것을 틀렸고 늘 맞히던 걸 맞혔다. 채점한 시험지를 추슬러 가방에 넣고 저녁을 먹으러 급식실로 향했다. 급식실은 운동장 건너편에 있어서 조금 걸어야 했다. 항상 같은 시간에 똑같이 저녁을 먹으러 가는, 늘 같았던 익숙한 길. 11월이 되자 해가 무척 짧아져 이른 저녁인데도 한밤중처럼 새카맸다. 문득 그 어둠이 낯설게 느껴졌다. 마치 11월을 처음 겪는 것처럼.
올해도 11월이 돌아왔다. 멋지고 대단한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기엔 늦었다. 다만 앞선 계절에 벌여 놓은 일을 올해 안에 마무리하기 위해 그저 묵묵히 일을 이어가야 하는 시간이다. 해가 짧아졌고, 아직 하루를 마무리하지 못한 시간에 이른 밤이 찾아온다. 이제 이 어둠이 더 이상 낯설지는 않지만, 여전히 너무 빨리 찾아온다고 생각한다.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고 태양이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는 계절이 벌써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