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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 글로벌 예술섬] 하나의 무대
한강 최초의 인도교인 한강대교를 떠받치는 노들섬은 일평균 18만명 시민이 마주하는 서울의 중심 공간이다. 노들섬 반경 2km 안에는 여의도 국제금융중심지와 용산국제업무지구, 한강공원 및 용산공원이 있지만,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접근하기 쉽지 않아 머물기보다는 통과해 가는 교통섬이 됐다. 노들섬은 지난 10여 년 간 도시농업공원, 복합문화공간 등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했다. 노들섬의 역사를 관통하는 세 가지 키워드를 꼽으면 생태, 음악, 그리고 시민 참여가 아닐까. 세 개의 키워드를 토대로 새로운 노들섬을 연결된 섬이자 언제나 무대가 되는 곳으로, 시민이 만들어가는 정원으로 둘러싸인 하나의 무대로 만들고자 한다.
루프의 둥지
새로운 노들섬을 서울을 360도 전망할 수 있고 개인 이동 수단을 타고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무대로 조성하고자 했다. 1km 길이의 보행로 스카이 루프와 생태 루프를 엮어 만든 이 무대는 마치 수많은 브리지를 엮어 만든 커다란 둥지와 닮았다. 그늘을 만들고 비바람을 막는 동시에 빗물을 모아서 다양한 식물을 길러내는 생태 루프는 스카이 루프 안쪽에 미기후를 형성해 새와 나무, 사람을 모으고 연결한다.
18개의 수직 이동 코어로 지지되는 30m와 40m 높이의 스카이 루프 사이에는 다양한 형태의 공연장으로 기능하는 옥외 공간을 마련했다. 기존 건물 옥상에는 계단형 테라스, 잔디마당, 생태예술정원 등이 위치한 소셜 가드닝 플랫폼을 만들고, 이곳을 중심으로 스카이 루프, 기존 건물, 중앙 광장을 유기적으로 연결했다. 중앙 광장 아래에는 수변으로 열린 커다란 아트리움 라운지와 선큰 마당을 두어, 어느 곳에서나 강과 도시를 배경으로 만남과 놀이가 펼쳐지는 열린 공간을 조성했다.
*환경과조경435호(2024년 7월호)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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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 글로벌 예술섬] 프롬나드 링
Promenade Ring
단절된 순환, 고립된 장소들, 조각난 섬
노들섬은 동쪽과 서쪽이 단절된 두 개의 섬이다. 서측 문화 시설과 동측 자연 요소는 무관하게 존재한다. 동측 맹꽁이 숲은 섬에서 소외되어, 방문자는 시설이 집중된 서측 노들마당에만 머문다. 이는 노들섬을 통해 만나게 되는 한강의 경험을 제한하고 섬의 가능성을 축소시킨다. 2km에 달하는 노들섬 둘레에 지상부와 기단부를 연결하는 요소는 4개소에 불과하다. 이로 인해 옹벽 안쪽과 외부가 나뉘고 섬의 많은 부분이 수변 공간과 단절된다. 인공섬인 노들섬은 자연화된 영역의 범위가 얼마 되지 않는다. 특히 동측의 옹벽과 콘크리트 호안은 강의 경험을 삭막하게 한다.
프롬나드 링
‘프롬나드 링(Promenade Ring)’은 노들섬에 이미 존재하는 자연 요소와 문화 시설을 이어주며, 조각난 섬을 하나의 섬으로 만드는 경관 경험의 루프다. 이 루프를 기반으로 하나의 노들섬을 만들기 위한 다섯 가지 전략을 세웠다.
하나의 섬을 위한 순환 고리, 프롬나드 링: 섬의 동서 양안을 강하게 묶어 통합하는 보행 체계인 프롬나드 링을 제안한다. 이 링은 섬의 모든 곳에 도달하며 고립을 해소하는 일종의 보행 고속도로다.
인공화된 섬의 재자연화, 자연의 후광: 낮은 제방을 기초로 삼아 섬 경계에 플랜터를 쌓는다. 이로써 선형 공원을 연장하고, 하안을 늘려 물을 담고, 수면 위 새로운 경계에 수생 비오톱을 품을 수 있다.
섬 안팎의 상호 전이되는 경험을 제공하는 프로그램 밴드: 섬의 경계를 보행로, 전망대, 전시장 등 다양한 건축 요소와 결합된 프로그램 밴드로 만든다. 밴드는 경험을 파편화하지 않으며 다양한 감각의 층위를 형성한다.
수변과 지상부의 수직적 연결, 링의 내외부를 수평 연결하는 총체적 매개 장치: 한강대교 남북단에서 건너 온 보행자가 섬 입구에서 바로 순환에 합류할 수 있게 한다. 4개소의 입체 교차로에서 노들섬 보행 체계에 바로 올라탈 수 있으며, 이곳에서 섬 곳곳으로 이어지는 다양한 경로를 선택할 수 있다. 링에서 지상부 및 옹벽 아래 자연형 순환 공원으로 이동할 수 있는 여러 수직 동선을 최소 100m마다 계획한다. 링과 기존 시설을 잇는 연결로를 계획하고, 체험형 가든(맹꽁이 숲)과 같은 레벨에서 언제든 숲으로 접근할 수 있는 확장된 판과 숲을 조망하며 머물 수 있는 좌석을 마련한다.
노들 프롬나드 링과 한강공원 노들지구: 노들섬의 위 아래를 연결하는 프롬나드 링은 한강을 새로운 방식으로 거닐게 한다. 한강 오픈스페이스의 선적 네트워크에서 노들 프롬나드는 잠수교, 한강연결공원과 함께 한강을 즐기는 입체적인 보행 명소가 된다. 노들섬 둘레를 따라 펼쳐지는 다채로운 소공원들의 집합은 한강공원 노들지구로서 한강공원의 새로운 목적지가 된다. 이는 노량~흑석 생활권에 한강변 공원을 제공하고 여의도와 반포를 잇는 구심 역할을 한다.
*환경과조경435호(2024년 7월호)수록본 일부
- 강예린(서울대학교)+SoA+최영준(서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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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 글로벌 예술섬] 더 리플즈
The Ripples
서울 중심에 위치한 노들섬은 문화와 정원이 함께 어우러진 대표 명소다. 백로가 노닐던 징검돌을 뜻하는 ‘노돌’에서 유래된 노들섬의 이름에서 엿볼 수 있듯, 노들섬은 새가 자주 찾는 섬이었으며 생태 서식지이기도 하다. 지리적 이점에도 노들섬이 서울의 대표 정원이자 문화적 명소가 되지 못한 이유는, 섬이라는 대상지의 특성으로 인해 도시와 물리적으로 단절되어 있고 도시의 문화와도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고자 노들섬의 인프라를 재구상하고 지역 여건을 개선하며 주변 맥락과 환경을 활용하는 해결책을 제안한다.
세 가지 제안
첫째, 노들섬을 통합한다. 노들섬을 횡단하는 도로 위에 도로를 가로지르는 대담한 구조물을 놓아 분리된 섬을 다시 하나로 연결한다. 새롭게 놓일 이 구조물은 대로의 소음과 오염이 섬에 미치는 영향을 줄일 뿐 아니라 장애 요소를 진입 관문으로 탈바꿈시키는 통합적 디자인 요소가 된다.
둘째, 공간 활성화를 도모한다. 노들섬 중심에 위치한 캐노피는 다목적 중앙 허브로써 노들섬의 모든 방향으로 뻗어 있다. 이 구조물은 노들섬의 독특한 환경 조건에 적응하면서 다양한 문화 활동을 제공한다. 그늘을 제공하고 비를 막아주는 등 다양한 상황으로부터 방문객을 보호하는 쉼터로써 기능하고, 기존 건물들을 연결하면서 숲 꼭대기까지 이어지는 산책로가 되어준다. 건물과 캐노피가 유연하게 엮인 모습은 섬의 역동적 정신을 상징하며 다양한 상호 작용과 참여를 이끌어낸다.
셋째, 다양한 발견의 경험을 제공한다. 고립되었던 노들섬의 공간들을 수변부에서부터 숲 꼭대기까지 이르는 길과 조화롭게 연결해 하나의 탐험 경로를 만든다. 이러한 동선은 방문객이 다양한 야외 활동을 하도록 유도하고, 자연적인 휴식처로 사람들의 발길을 이끈다. 이는 서울의 스카이라인을 배경으로 펼쳐진 수상 예술 무대로 이어져 노들섬에서의 경험을 극대화한다.
*환경과조경435호(2024년 7월호)수록본 일부
- Bjarke Ingels+BIG+ 정림건축종합건축사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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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 글로벌 예술섬] 셰어링 노들
Sharing Nodeul
다양한 예술 콘텐츠를 즐기기 위해 노들섬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꾸준히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노들섬의 제한된 가용 면적은 늘어난 방문자를 수용하기엔 역부족이며, 강과 단절된 섬의 형태는 기후 변화에 대응하기 불리하다. 이러한 노들섬의 표면을 입체적으로 확장해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데 편리한 공간을 만들고자 한다. 이는 대규모 공연을 즐기는 사람과 산책을 즐기는 이들에게 노들섬을 자연스럽게 나누어 쓸 수 있는 새로운 환경을 제공할 것이다. 또한 표면 확장을 통해 증가한 흙의 양은 생물 다양성의 기반이 되어 다음 세대에게 풍성한 숲의 노들섬을 물려줄 수 있을 것이다.
입체적 표면 확장
노들섬은 가로지르는 도로를 기준으로 오른쪽 공간은 맹꽁이 숲과 헬기장으로, 왼쪽 공간은 노을마당으로 활용되고 있다. 반으로 나뉜 노들섬을 완만한 경사를 지닌 마운드로 연결해 하나의 섬으로 만들고자 한다.
기존 건물과의 관계를 고려한 마운드를 형성하기 위해 새로운 컨트롤 라인을 제안한다. 노들섬은 여름의 뜨거운 남동풍과 겨울철 매서운 북서풍 영향을 받는다. 마운드를 넓게 절개해 여름철에는 맹꽁이 숲을 지나며 차가워진 남동풍이 왼쪽 내부로 스며들도록 유도해 지면의 열기를 식힌다. 겨울철에는 차가운 북서풍이 사면을 넘어가게 되어 오른쪽 내부의 안정적인 환경 유지를 꾀할 수 있다.
정밀한 절개는 노들섬과 기존 건물을 연결해 섬의 활용도를 높이는 데도 효과적이다. 더불어 건물 주변에 계단형 옹벽을 조성함으로써 수변부와의 연결성을 강화했다.
노들섬의 공간
기존 엘리베이터를 수직으로 연장해 마운드 상부와 연결시켜 내부와 외부 공간을 유연하게 연결하고 공간의 쓰임새를 풍성하게 한다. 기존 잔디 광장을 입체적으로 확장해 잔디마당과 야외 무대, 생태로, 루프탑 등 여러 공간을 조성한다.
노들섬의 북쪽과 남쪽에 한강의 깊이와 유속 차이를 고려한 수변 공간을 조성한다. 기존 노을마당을 이용자의 밀도를 조절하기 위해 확장한다. 기존 라이브하우스 옥상은 마운드로 덮인 실내 데크 공간으로 만들어 카페와 레스토랑으로 활용한다. 완만한 경사의 상단부에서는 피크닉을 즐기고, 노을을 바라보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다.
*환경과조경435호(2024년 7월호)수록본 일부
- 김찬중+더시스템랩건축사사무소+ 정욱주(서울대학교)+JW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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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 글로벌 예술섬] 숨
서울 한강의 중심에 위치한 노들섬은 단순한 섬이 아니다. 도심 속 섬이라는 특수성을 극복해야 하는 단점으로 여기기보다 장점으로 극대화해야 한다. 노들섬은 땅과 물, 자연과 도시, 일상과 비일상이 부딪히며 공존하는 살아 있는 지형 공간이다. 지형은 늘 변화한다. 살아 숨쉬는 한강 위의 플랫폼으로서 노들섬의 가능성을 바라본다.
도시의 허파
글로벌 예술섬 조성 전략으로 그리드 체계의 퓨처 인프라(future infra), 그물망 형태의 공중 보행로 지오웹(geo web), 작동하는 생태섬으로서 네이처 노드(nature node)를 제안한다. 퓨처 인프라는 노들섬과 미래 도시 서울을 상징하는 새로운 플랫폼으로서 유동하는 그리드 구조를 통해 랜드마크를 형성한다. 공중 보행로 지오웹은 낮은 언덕 같은 지형으로 도로로 인해 분절된 노들섬을 연결해 하나의 섬으로 인지하고 이동하게 한다.
공중 보행로 중간 중간에 놓은 징검돌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문화·예술섬으로서의 상징성을 드러낸다. 섬 전체를 하나의 통합적인 생태계로 만들기 위해 지형과 수환경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재구성하고 자연의 순환 체계를 적극적으로 도입해 지속가능한 장소를 만든다. 이를 통해 노들섬은 서울의 과거, 현재, 미래를 잇는 도시의 허파가 될 것이다.
한강의 자연을 감각하다
모두에게 열려 있고 접근이 용이한 수변 공간을 조성하기 위해 콘크리트 호안, 옹벽, 도로 등 인공 구조물로 분절된 영역들을 큰 지형의 흐름 속에 통합한다. 이를 통해 섬 전체를 통합 생태계로 만들어 지형과 수환경이 자연스럽게 연속되는 환경을 조성한다. 기존 잔디마당과 인공 호안은 생태 호안, 습지 등 수위 변화에 회복탄력성을 갖는 생태 공간으로 계획했다. 억새와 들풀을 심은 생태 호안은 사계절 변화하는 풍경을 선사하며, 호안부를 따라 섬을 둘러볼 수 있는 순환 산책로에서는 한강의 자연과 도시 경관을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다. 계단식으로 나뉜 기단부와 호안부를 하나의 둔덕으로 연결하고, 습지 정원을 통해 지상부로부터 집수된 물을 단계적으로 저류해 자연 정화 과정을 거쳐서 한강으로 흘려보낸다. 이외에도 부유식 수상 무대 등을 통해 한강을 배경으로 다양한 연출이 가능한 수상 예술 무대를 만들고자 했다.
*환경과조경435호(2024년 7월호)수록본 일부
- 나은중+유소래+ 네임리스건축사사무소+ 오픈니스 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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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 글로벌 예술섬] 비평: 인간과 자연, 유토피아의 의미를 묻는 노들 예술섬 공모
2005년 오페라하우스 건립을 위해 시작됐던 노들섬 프로젝트는 수차례의 공모와 건설을 거친 뒤 지금에 이르렀다. 이번 공모에서는 국내 건축가 네 팀은 안타까운 고배를 마셨고, 떠오르는 논쟁적인 영국 디자이너 토머스 헤더윅(헤더윅 스튜디오)의 ‘소리 풍경(Soundscape)’이 당선작으로 결정되었다. 소셜 미디어에서는 이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발주처의 공모 의도와 절차에 대한 의구심부터 당선작에 대한 호불호 논란까지, 그야말로 건축계의 여러 관점을 한꺼번에 엿볼 수 있는 요즘이다. 공교롭게도 나는 작년에 헤더윅의 신간 『더 인간적인 건축(Humanize)』을 번역하고 올해 출간을 기다리던 참에 이 공모 결과를 접했고, 궁금한 마음에 너덧 시간에 걸친 공개 심사 영상을 찾아서 봤다. 여러 모로 한국 건축의 현 상황을 잘 보여준 의미 있는 발표회였다. 도시의 아이콘을 만들려는 발주처의 공모 의도가 확실히 공표되었고, 초대된 국내외 건축가들이 취한 접근도 인상적으로 대비되었다. 당선작은 공모의 의도에 가장 부합한 것으로 보이며, 당선작 선정에 관해 심사위원들 간의 이견은 없었다고 언론은 전한다. 하지만 건축계의 온라인 공론장에서는 여전히 당선작에 대한 불호가 상당해 보이고, 국내 건축계의 불황 속에서 용산 일대의 개발주의에 랜드마크 건축을 동원하려는 시 당국의 움직임은 당선작에 대한 불호를 더 부채질하는 느낌이다.
헤더윅의 당선작은 서울시의 아이콘주의에 동원된다는 의심을 피해 갈 수 없지만, 작품 자체는 단순한 아이콘을 넘어 사회적 자연의 매력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단지 지나가는 길이 아니라 대중이 머무를 객석의 용도로 공중 공간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자연과의 조화를 꾀한 안이기 때문이다. 다만 헤더윅의 말대로 구조물을 떠받치는 기둥을 예술가와의 협업으로 얼마나 아름답게 장식할지, 그리고 얼마나 다채롭고 유기적인 조경이 이뤄질지가 관건일 것이다. 구조물과 유리된 채 모래알처럼 분산된 조경과 무표정한 고가도로 하부를 남긴 서울로7017을 재탕할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의 실험 정신이 한국에서 얼마나 예산 초과를 하지 않고 제대로 실현될지 지켜볼 일이다. 그에 비해 위르겐 마이어는 구름을 개념으로 하여 전반적으로 더 시적이면서도 무난한 현실감이 느껴지는 매력적인 안을 발표했지만, 헤더윅의 더 극적이고 음악적인 제안에 심사위원단의 맘이 기운 듯하다. 해외 건축가 세 팀 가운데 작년 1차 대시민 포럼에서 발표된 디자인을 비교적 일관되게 유지한 경우는 헤더윅과 비야케 잉겔스(BIG)로 보이는데, 잔물결을 주제로 한 비야케의 안은 상징성이나 시학, 기능, 심지어 발표 면에서도 모두 기대를 채워주지 못했다.
아울러 국내 건축가들의 발표를 보면서 인상적으로 느낀 점 하나는, 노들섬의 윤곽과 둘레길의 유행 때문인지 몰라도 참여한 모든 국내 건축가의 안에서 중정형 회로 개념이 가족유사성처럼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강예린+SoA는 타원형 둘레길 자체가 주된 콘셉트고, 나은중+유소래(네임리스건축사사무소)는 비정형적으로 흘린 산책로를 두었음에도 그 위에 직사각형 회로를 덮었으며, 김찬중(더시스템랩건축사사무소)은 타원형 회로를 복수로 증식시켜 중간 중간 자르고 가지를 친 느낌이다. 신승수(디자인그룹오즈건축사사무소)는 길보다 벽의 객석에 가까워 보이지만 역시 길이 회로처럼 공간을 두르고 있다. 작년 1차 포럼에서는 이런 가족유사성이 발견되지 않았었다. 1년간 무 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공개된 1차 경쟁작들을 보면서 모두 이렇게 유사한 기하학에 이끌리게 된 계기라도 있었던 것일까? 경쟁의 압박 속에서 작위적인 선을 그리지 않겠다는 합리성에 대한 강박이 작동한 것이었을까? 뭐가 됐든 간에 노들섬처럼 그야말로 자연 속에 펼쳐질 공간에서도 자유로운 선을 느끼기 어렵다면, 도시의 격자에 매여 사는 대중은 어디서 인간의 자유로운 선을 느껴야 할까?
물론 자유에 대한 생각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나은중+유소래는 강력한 직사각형 밑에 우연성에 입각한 듯 자유로운 곡선의 지오웹(geo web)을 대비시켰지만, 그 곡선 또한 마치 물감을 흘려 그린 듯한, 그러니까 역시 자연 법칙에 기대고서야 그릴 수 있었던 추상적 형상으로 보인다. 언뜻 나비의 날갯짓을 연상시키는 비야케의 안은 중심부에서 요동치는 휘황찬란한 곡선을 사용했지만, 사람들의 다채로운 경험을 반영하기에는 지나치게 자기만의 형태적 자유에 사로잡힌 모양새다. 반면에 헤더윅의 곡선은 사람들을 위요하고 떠받치는 사용성을 갖추면서도 인간의 손으로 그려낸 느낌을 준다. 숲 속에서 인간을 떠받쳐 주는 깔때기 식물 같은 곡선의 이미지는 초월적 자연의 무위성을 추상적으로 재현한게 아니라, 서울의 산세에 유기적으로 반응하는 인간적 공간을 구상적 으로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는 무위의 자연이나 개인적 표현의 자유보다 자연 속에서 여럿이 함께 경험하는 자유가 더 중시되고 있다.
헤더윅의 안은 인간적인 표현으로 자연을 유비하지만, 반대로 김찬중과 나은중+유소래의 안은 역시 인공적이면서도 외부의 패시브한 시스템보다 내부의 액티브한 시스템을 적극 활용하거나 미래 변화에 대비한 수직 격자 시스템을 덮어씌우는 식의 기계적 충동을 강력하게 드러낸다. ‘인공(人工)’이라는 한자말은 주로 부자연스럽고 작위적이라는 의미로 쓰여 기계적인 것과 혼동되곤 하지만, 사실 축자적 의미로는 그저 ‘인간이 만든’ 것을 뜻할 뿐이다. 기계적인 것은 인공의 일부일 뿐, 인공 자체가 기계적인 것은 아니다. 인공물의 부자연스러움을 극복하고자 더 ‘자연스러운’ 인공물을 원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적 본성에 따른 욕망이지만, 그것을 기계적 충동으로 대체하려는 것은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더 소외시키는 페티시즘이다. 이것은 분명 헤더윅의 안에 담긴 가우디적 영감과 반대되는 것이다. 물론 가우디의 구조는 매우 과학적이지만, 그의 조형은 자연을 유비하는 인간적인 손맛을 보여주기 때문에 대중의 사랑을 받고 오랫동안 기억되어 왔다. 헤더윅은 실제로 가우디 때문에 건축을 다시 공부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이기도 하다.
자연에 대한 접근은 이번 참가작들의 성격을 가르는 중요한 논점이다. 김찬중과 나은중+유소래의 기계적 충동이 인공을 페티시화한다면, 강예린+SoA는 인공을 최소화하며 자연을 회복하려는 욕망을 드러낸다. 기존 노들섬의 자연을 최대한 건드리지 않는 방향을 취하면서 강과 면하는 외측 콘크리트 경계를 없애는 안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경계의 해체는 헤더윅의 안에서도 다른 방식으로 제시되고 있다. 강예린+SoA의 안은 자연을 가급적 건드리지 않기 위해 인공을 최소화하려 하지만, 그렇게 최소한으로 두른 타원형 공중 도로는 인공적인 기하학의 전형을 보여준다. 반면에 헤더윅의 안은 자연과의 유비 속에 비교적 자유로운 인공을 녹여낸다. 전자는 여전히 인공과 자연의 이분법에 기초하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인공이 자연을 모방하는 충동으로 나타난다. 이번 공모의 결과는 인간-자연의 이분법에 기초한 자연 중심주의보다 자연 속에서 공생하려는 인간의 유토피아적 충동, 말하자면 인간적 자유와 자연의 적극적인 어울림에 손을 들어준 것이다.
김찬중과 나은중+유소래의 기계적 충동, 그리고 강예린+SoA의 자연 회귀 욕망은 모두 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나려 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한편 인간과 자연 모두를 기계적 합리화로 귀속시키려는 전자의 페티시즘은 인간-자연의 이분법에 사로잡힌 후자의 강박을 뒤집은 도착적인 충동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두는 헤더윅의 인간-자연 공생주의와 대비를 이룬다. 그렇게 한국 팀들은 자연 속에서 사람들이 함께 음악을 즐기는 공간보다 보행자를 개별화시키는 길에 치중했다. 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난 곳에서 대중이 누릴 자유를 맘껏 상상하지 못한 채 말이다. 그들의 자유로운 상상을 가로막은 것은 결국 이분법에 사로잡힌 윤리적 명령인 듯하다. 마치 ‘인간은 자연을 해치는 존재이니 가급적 자연을 멀리하고 자연에서는 자유를 자제해야 한다’는 식의 초자아적 명령 말이다. 하지만 그런 금지의 이분법에 빠질수록 인간은 자연과 접촉하지 못한 채 더 소외되고, 소외가 지나칠수록 더 기계화하기 마련이다. 산업 문명에 대한 비판적 사상가로 유명한 이반 일리치(Ivan Illich)는 ‘공생공락(共生共樂, conviviality)’의 윤리를 대안으로 제시했는데, 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환경 사이의 창의적이고 조화로운 관계 맺기를 주문한 것이었다. 즉 인간은 자연을 멀리할 게 아니라, 자연과의 조화로운 관계 속에서 함께 하는 기쁨과 즐거움을 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회와 자연은 하나의 ‘사회적 자연’으로 만난다. 어쩌면 우리는 그간 자연과 동떨어진 콘크리트 환경 속 각자도생에 길들여진 나머지, 자연 속 공생공락에 대한 상상을 억압해왔던 것이 아닐까?
물론 헤더윅의 소리 풍경이 그런 공생공락의 기능을 잘 해낼 수 있을지는 더 두고 볼 일이다. 이 작품은 애초에 상류층을 위한 오페라하우스로 시작됐던 노들섬 기획을 대중을 위한 음악섬으로 바꾸는 사회적 자연의 유토피아를 지향하지만, 문제는 그런 충동에 찬물을 끼얹는 계획이 인근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유토피아’라는 말에 오해가 없기 바란다.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 공상적 형태의 세계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현실을 바꾸려는 충동 자체를 말할 뿐이다. 서울시는 인근 용산 정비창 부지에 무려 100층 안팎에 이르는 용산국제업무지구 개발 계획을 진행하고 있다. 그런 초고층 건물군이 들어설수록, 헤더윅이 설계한 공중 구조물의 율동적인 곡선들과 불협화음이 생길 것이다. 서울시는 ‘예술섬’과 용산 초고층 단지를 모두 ‘랜드마크’ 개발로 묶어 진행하고 있는 듯하지만, 정작 그 예술섬 랜드마크의 주된 특징인 ‘대중을 위한 랜드스케이프’를 초고층 랜드마크가 해치며 탈취한다는 사실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우리는 이 모순적인 개발 이데올로기를 더 비판해야 하지 않을까? 경관을 사유화하는 기업 자본의 초고층 이데올
로기를 비판하고, 공공을 위한 유토피아적 충동은 방어해야 할 때가 아닌가.
* 이 글은 필자가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을 수정·확장해 쓴 글이다.
조순익은 건축과 도시, 디자인, 비평 분야를 전문으로 작업해온 번역가로, 다수의 단행본과 간행물을 번역했다. 주로 정신 분석과 문화 비평의 관점에서 건축 현상을 해석하는 데 관심이 있으며, 저서로 『보는 기계와 읽는 인간: 건축문화 텍스트 읽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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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가 만든 도시] 도시의 기능
도시라고 부를 만한 맹아가 나타난 수천 년 전이나, 전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각주 1)이 도시에 살고 있는 공히 도시의 시대인 현재나, 우리는 도시의 어떤 곳에서는 생산하고 거래하며, 어떤 곳에서는 교류와 유흥을 즐기고, 어떤 곳에서는 쉬면서 사적인 시간을 보낸다. 이렇게 구분되는 서로 다른 활동, 즉 도시의 기능이 도시 내 특정 위치를 점한 모습은 당연히 사회적 결과물이며 임의적이거나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도시 기능의 특정한 공간 배열은 여러 곳에서 유사하게 반복된다. 버스정류장이나 지하철역 앞에는 달달한 냄새를 풍기는 빵집과 사은품을 쌓아둔 핸드폰 가게가 있고, 골목길 어귀 편의점에 꼬맹이와 편맥족(편의점 맥주+족)이 모여드는 저층 주거지의 흔한 풍경이 그런 예다.
도시 스케일에서도 마찬가지다. 구분되는 서로 다른 도시 기능의 배열을 ‘도시 공간 구조’라고 하며, 특정한 패턴이 다수의 도시에서 발견된다.(각주 2) 예를 들어 모든 도시 기능이 옅어지고 있는 구도심, 그에 인접한 기차역·버스터미널 주변으로 병원·상가·재래시장이 모여 있는 상업 지역, 그 밖으로는 1980~1990년대 구도심에서 옮겨온 시청과 금융·세무·법무 사무실 등이 모인 (이제는 오래된) 신시가지의 중심과 그 주변을 둘러싼 아파트 단지, 시가지에서 벗어나 고속도로 나들목 근처에 위치한 산업 단지와 그곳의 젊은 근로자가 사는 원룸촌 등은 한국 많은 지방 중소 도시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전형적인 도시 기능의 배열이다.
도시에서 특정한 기능의 위치는 다수의 도시
구성원에 의해 긴 시간에 걸쳐 자연스레 결정되기도 하지만, 소수에 의해 매우 의도적으로 설정되기도 한다. 전자의 예로 세계의 오래된 많은 항구 도시는 항만을 바라보는 경사지에 형성된 주거지와 같은 전형적인 도시 경관을 공유한다(그림 2). 사람의 힘으로 바꾸기 어려운 지리·기후적 특성과 특정 도시 기능에 요구되는 사회·공간적 조건을 따르는 집합적 선택이라 할 수 있다. 후자는 비단 근대 이후 도시계획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세계의 여러 역사 도심에는 그 시대의 관념적 가치와 위정자의 정치적 의도가 투영되어 있고(그림 3), 왕조가 사라진 현대 도시 공간에서도 공간을 매개로 한 정치가여전히 시도된다.(각주 3)
현대 도시계획에서 도시 기능의 위치를 인위적으로 정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물론 공적 이익이다. 산업 단지나 위락 시설로부터 주거와 교육 시설의 환경을 보호하고, 접근성이 높은 지역은 고밀도의 상업 및 업무 시설을 짓도록 하는 등 토지의 ‘합리적 이용’이 그 공적 이익에 해당한다. 공적 이익을 위해 특정 도시 기능이 도시 내 적정 위치에 들어서도록 하기 위한 대표적 제도가 제2종 일반주거지역, 근린상업지역 같은 용도 지역, 즉 조닝(zoning)이다. 한국 국토의 모든 부분은 예외 없이 9개 용도 지역(각주 4) 중 하나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 종류에 따라 어떤 용도의 건물을 지을 수 있는지 혹은 지을 수 없는지, 어떤 규모로 지어야 하는지가 규정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실제 도시 공간의 기능 배열은 용도 지역의 배열과 일치할까?
그림 3. 청의 수도였던 북경(베이징)은 무려 우주의 중심으로서 땅은 네모나고 하늘은 둥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전통적 우주관을 따라 자금성을 중심에 두고 환이라 불리는 사각형의 위계 구조를 이룬다. 내부는 격자형 블록인 리방(里坊)과 일정한 간격의 내부 도로인 호동(胡同)으로 분할된다. 호동은 사회 통제의 공간 단위이며, 호동에 면한 획지의 너비는 곧 신분과 권력 혹은 부의 가늠자다. 전봉희, 『中國 北京 街家 風景: 2000년 북경 서구렴자호동 현장기록』, 서울:공간, 2003.
*환경과조경435호(2024년 7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2050년경에는 인류의 70%가 도시에서 살 것으로 예상된다. www.worldbank.org
2. 버제스(Burgess), 호이트(Hoyt)를 비롯한 여러 학자는 도시에서 나타나는 CBD와 사회경제적 계층에 따른 주거지 및 소비 공간, 산업 단지, 느슨한 교외 주거지 등이 이루는 특정한 배열을 유형화한 토지 이용 모델(land use model)을 제시했다.
3. 지금은 없어진 여의도광장, 서울 이곳저곳에 추진되고 있는 국가 상징공간이 그 예다.
4. 도시지역 4종(주거, 상업, 공업, 녹지)과 관리지역 3종(보전관리, 생산관리, 계획관리), 농림지역, 자연환경보전지역
유영수는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이로재와기오헌에서 건축 실무를 경험했다.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에서 도시 디자인과 사회과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돌아와 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며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병행했다. 현재는 인천대학교 도시건축학부에서 법, 제도, 현대 도시설계 이론, 스튜디오를 가르치고 있다. 건축과 도시를 아우르는 스케일에서 개별적인 공간 현상과 법제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고, 계획과 디자인의 역할을 확장하기 위한 이론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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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디자인 오피스] 랩디에이치
하늘을 공경하고 자연을 사랑하며 사람을 섬기는 탁월한 조경 작업
조경에 대한
진심과 믿음으로
그래도 나름 (조경에) 진심입니다
조경을 한다는 것. 어느 일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아직 조경의 불모지라 불리는 한국에서 조경 그리고 조경 설계를 계속해 나간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일생 전부를 걸 정도의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이 일에 임하는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조경을 향한 진심을 마음 한편에 품지 않으면 때로는 버티는 것조차 힘에 부칠 때가 있다.
랩디에이치 서울(Lab D+H Seoul)(이하 랩디에이치)은 조경에 진심을 품은 사람들이 모인 디자인 그룹이다. 물론 각자 마음에 품은 진심의 크기와 형태는 제각각일지 모른다. 하지만 일상 중에 그리고 프로젝트에 임할 때 틈틈이 같이 나누는 대화에서 우리가 각자 나름의 모양새로 진심으로 조경을 대하고 있음을 느끼곤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에 대한 존중과 신뢰를 바탕으로 구성원 전체의 민주적 협력 과정을 통해 조경설계라는 방법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가는 데 동참하고 있다.
진심은 믿음을 동반한다
조경에 진심인 우리는 함께 공유하는 몇 가지 믿음을 바탕으로 프로젝트에 임한다. 조경설계가 환경의 근간을 형성하고 도시의 작동을 돕는 적극적 역할을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또한 조경의 업역이 물리적 공간의 설계와 단순한 구현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조경의 사회적·환경적 책무와 문화적 중요성을 믿는다. 조경설계라는 창조적 행위가 우리의 삶을 풍부하게 하고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오길 바란다.
랩디에이치는 조경에 대한 믿음을 구체화하는 방법으로 대상지의 고유한 맥락을 고려해 정교하고 결정적인 맞춤형 설계 해결책을 제시하려 한다. 이러한 접근을 통해 각 프로젝트는 대체 불가한 독창적인 의미를 가지며, 이용자에게 새로운 공간 경험을 제공하리라 기대한다. 우리가 만든 공간을 이용하는 시민들에게 지역과 사회, 자연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더 나은 생활 환경과 지속가능한 향상된 도시 기능을 제공하기를 바라며 매일 작업에 임한다.
랩디에이치의
랜드그라피(각주 1)
한강에 만든 456개의 앉는 쉼터
2020년 한강변 보행네크워크 설계공모 당선을 시작으로 다양한 성격과 규모의 한강변 프로젝트를 연속으로 진행했다. 일종의 프랜차이즈 시리즈 성격의 ‘한강변 공공 쉼터 만들기’의 일환으로 진행된 이들 프로젝트는 미시적이고 구체적인 접근을 통해 연속된 소규모 대상지 꾸러미에 적절한 창의적 해결책을 제시했다. 한강공원을 이용하는 서울 시민에게 한강의 자연과 교감할 수 있는 수많은 접점을 제공해 일상 속 삶의 질을 높이고 나아가 지역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외부 공간 기획과 브랜딩으로서의 조경
개업 초창기 진행한 중국 대형 개발 사업은 한국과 달리 프로젝트의 색과 방향성을 정하는 기획 과정이 일반적으로 수반됐다. 그런데 최근 한국 시행사와 진행하는 개발 사업에서도 이러한 기획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외부 공간 브랜딩의 완성도와 개성에 따라 프로젝트의 생명력이 결정된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고, 성공 사례의 힘을 함께 목도한 결과로 보인다.
우리도 과업의 기획이 결정된 뒤에 참여하는 것이 아닌, 설계 전 선행 작업이라 여겨지던 기획 및 브랜딩 과정부터 참여한 적이 있다. 지금부터 소개하는 프로젝트들은 이러한 참여 방식을 통해 조경적 관점을 기반으로 방문객을 끌어들이는 매력적인 요소를 발굴하고 프로젝트의 성격을 규정하는 앞 단계와 준공 후 이용 행태 예측까지를 포괄하는 전체 단계를 조화롭게 아우르려 노력한 결과물들이다.
S사 복합상업시설은 새로 만들어질 대형 상업 공간 옥상 조경 프로젝트로 실내 리테일의 보조적 역할로만 규정된 기존 옥상 외부 공간을 하나의 매력적인 목적지로 재설정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고메 포레스트(Gourmet Forest)와 키즈 와일더니스(Kid’s Wilderness)라 명명하고 구성한 두 층의 옥상정원을 실내외와 두 층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고유한 장소성과 목적성을 가지는 입체적인 옥상 공간으로 기획 및 디자인했다.
평창 청옥산 지방정원은 만개한 샤스타데이지 군락이 매력적인 평창군 청옥산 정상부 고원 들녘에 새로운 지방정원을 기획·설계하는 프로젝트다. 현재의 고유한 경관의 조건과 매력을 면밀하게 존중하면서 다채로운 매력을 더하는 정원 브랜드와 공간 배치, 프로그램부터 제안했고 이를 바탕으로 현재 실시설계를 진행하고 있다.
공공 오픈스페이스의 질은 도시의 품격이다
낯선 도시를 여행할 때 그 도시의 품격을 빠르게 확인할 수 있는 팁은 가장 일상적 공간인 공공 오픈스페이스를 방문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실현의 완성도가 보장되지 않는 공공 공간을 다룰 때도 세심한 조경설계를 통해 완성도를 높이고 문화적으로 성숙한 장소를 만들고자 한다. 이를 위해 도시 속 공공 공간의 인접한 도시 맥락, 주변 경관과의 조화 등 거시적인 부분부터 손스침의 높이, 너비, 각도, 소재 및 마감의 부드러움 정도 등 디테일한 부분에 이르는 모든 사항을 고려하며 디자인한다. 제반 조건과 실익보다는 공공성에 의미를 두고 공공 프로젝트 설계공모 참여나 지자체의 요청 등에 호응해 왔고, 프로젝트에서 공개 공지의 완성도를 본 설계 영역에 못지 않게 신경써왔다.
석남완충녹지 도시바람길 숲 조성사업에서는 완충녹지의 기능에 충실하면서도 도시 바람길의 중심축을 형성하는 환경적 역할의 숲을 조성했다. 동시에 인접한 구도심의 고질적 문제였던 주차난을 해소하고 지역 주민의 일상 속 필요를 채우는 복합 커뮤니티 장소를 조성해 질 높은 도시 속 공공 공간으로서 기능하는 이용의 숲을 디자인했다.
성수동 오피스 타워 공개 공지 시리즈는 새로운 공개 공지에 성수동만의 고유한 특별함을 부여하는 프로젝트다. 성수동의 혼란한 변화 속에서 건물 외형의 독창성에만 매달리다 보면 자칫 공공 공간의 질은 뒷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지역 주민의 일상을 뒷받침하는 열린 공공 공간의 완성도를 높이는 일은 건축의 특별함을 배가하는 중요한 무기가 된다. 이러한 인식을 토대로 각각에 걸맞은 고유한 특별함을 찾아가며 성수동에 위치한 일련의 오피스 타워 공개 공지와 조경 공간의 디자인을 제안했다.
6개월에 한 번은 호미를 들자
현장 연출이 중요한 프로젝트를 진행할 경우, 우리는 가능한 시공 현장을 찾아 도면 위 선들이 현실에 구현되는 과정을 눈으로 지켜본다. 단순히 지켜보는 것에만 머물지 않고 직접 현장을 뛰어다니며 현장 상황에 맞게 설계를 조정하기도 하고, 적극적으로 식물을 나르고 배열한 뒤 호미를 들고 손에 흙을 잔뜩 묻히며 땅에 심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느끼는 생생한 현장감과 설계안에 대한 반추의 경험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다. 현장과 끊임없이 마주하는 경험. 이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최저선의 태도다.
포옥 정원은 포천에 위치한 대형 카페의 정원을 만드는 디자인빌드 프로젝트였다. 카페 건물은 간선도로에서 꽤나 내측으로 깊숙이 감춰진 위치에 있었지만, 그만큼 앞산과 지천을 정면으로 가까이에서 마주하는 좋은 배경이 있었다. 건물 1층의 80% 이상을 필로티 구조로 수평적으로 열어놓았고, 하천변으로는 계단식 테라스를 내렸으며, 중정은 2층 위 옥상층까지 수직적으로 열려 있어 입체적 성격을 띤 여러 정원이 공간에서 주연과 조연 역할을 했다. 공간시공 에이원과 시공에 함께 참여하고 현장 식재를 주관하면서 서로 다른 자연 설정의 정원을 연출하는 경험은 책상 위에서의 설계만큼이나 즐거운 과정이었다.
노태우 대통령 메모리얼 파크는 서쪽 지근거리로 북한 지역이 보이는 파주 동화경모공원 내 위치한 고 노태우 대통령의 묘역이다. 이곳에서는 수시로 현장을 방문하여, 현장 사진과 현황 측량도만 계속 들여다보다 자칫 대상지가 위치한 주변의 맥락을 놓치게 되는 경우를 방지하고자 했다. 직접 현장에 가보지 않았으면 몰랐을 추모공원의 전경은 아직 진행되지 않은 메모리얼 파크 2단계 설계안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
동빙고동 옥상정원은 고급 빌라 개인 정원의 디자인빌드 프로젝트였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때론 오래 고민한 도면 위의 배열보다 감각에 의존한 현장에서의 직관적 결정이 더 아름다울 때가 있음을 다시금 느꼈다. 특히 소규모 정원에서 식물을 식재할 경우 직관은 더 큰 힘을 발휘한다. 수급 불가로 대신 들여 온 식물과 발주서와 너무 다른 크기의 식물을 마주하면 막막함이 앞서지만, 직관이 이끄는 대로 이리저리 배열하고 심다 보면 이윽고 새로운 아름다움과 마주하게 된다.
불경기에 표류하는 프로젝트
자재비 인상과 금리 불안정으로 건설 경기가 악화된 지 오래다. 지난 몇 년간 설계한 몇몇 프로젝트도 변화한 건설 시장의 상황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재작년에 설계한 오피스 프로젝트는 투자사의 사정으로 착공에 들어가지 못하고 프로젝트 자체가 대폭 축소되었으며, 작년 말 설계를 마친 또 다른 업무 시설은 공동 투자사의 경영 악화로 착공이 계속 미뤄지고 있다. 공공 프로젝트의 사정도 그리 나은 것은 아니라서 겨우 착공은 들어갔으나 원자재비 급상승 등의 이유로 설계안과는 많이 다른 모습으로 시공되는 경우도 늘어났다.
남산스퀘어 오피스 대수선 프로젝트는 충무로역(CBD)에 위치한 48년 된 오피스 빌딩을 재구성하는 프로젝트다. 리모델링되는 기존 건물과 수평 증축 신축동 사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아트리움 공간에 두터운 녹색의 실내형 공개 공지를 설계했고, 기존 동 옥상에 명동과 남산을 직접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 정원을 제안했다. 착공 직전 프로젝트가 축소되면서 아쉽게도 우리의 제안은 페이퍼 워크로만 남게 됐다.
수송동 도화서길 업무시설 개방형 녹지는 열린송현녹지광장 바로 맞은편 율곡로와 도화서길 가로에 연접하여 서울 중심부 랜드마크로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다. 이곳에 지상층 공공 영역을 확장하는 넓은 폭의 생태적으로 건강한 시민 휴식 공간인 개방형 녹지를 제안했으며, 높은 공공성을 인정받아 작년 8월 서울시 도시건축 창의·혁신디자인 시범사업으로 선정됐다. 하지만 이후 답보 상태에 머물고 있다.
설계공모 폴더를
백업하며
우리에게 설계공모는 현실에서 꿈꿔오던 흐릿한 상상을 설계안으로 또렷하게 구체화하는 과정이다. 지난 한 공모의 과정을 거치며 또렷해진 설계안은 공모 마감에 맞춰 제출되고 심사를 거친다. 어떤 설계안은 당선되어 물리적 공간에 실체화될 기회를 얻게 된다. 하지만 대다수는 낙선의 아픔을 겪고, 잠시 세상의 빛을 본 것에 만족한 채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만다. 그럼에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설계 공모에 도전한다. 언젠가는 또다시 당선의 영예를 안고 우리의 디자인을 현실 공간에 구현하리란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설계공모에 도전을 멈추지 않는 다른 이유도 있다. 공모를 준비하며 벼려지는 디자인 고민의 시간은 사라지지 않고 축적되어 우리를 발전시킬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렇게 축적되어 잘 숙성된 고민은 다른 공간을 설계할 때 불쑥불쑥 튀어나올 새로운 아이디어의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대전아트파크 기획디자인 국제지명공모, 얼루비얼 아트 파크, 오픈 스레시홀드(Alluvial Art Park, Open Threshold)
삼면이 도로와 철도로 둘러싸인 한계를 가진 대지의 경계를 ‘다층적 통과’, ‘매개’, ‘중첩하는 면과 공간’으로 설정함으로써 새로운 아트파크와 공원의 외부가 다수의 관계를 맺게 하도록 제안했다. 다양한 연결 전략을 통해 고립된 부지의 조건을 도시에 기여하는 새로운 전이 공간으로 전환하는 계획을 제시했다.
노들 글로벌 예술섬 조성 국제지명 설계공모, 프롬나드 링(Promenade Ring)
노들섬이 한강공원의 새로운 지구로 작동할 수 있도록 노들섬의 단절된 순환과 고립된 장소, 조각난 섬을 하나의 섬으로 이어주는 프로그램의 순환 고리와 동선 전략을 설정했다. 인공화된 현재 노들섬 하단부의 재자연화를 제안했으며, 다양한 하천 전략과 이를 통한 섬 안팎의 상호 전이를 바탕으로 무수한 경험이 가능하도록 공간 프로그램들을 배치했다.
오목공원 맞춤형 리모델링 지명 설계공모, 둥그런 능선의 재탄생
오목공원의 둥그런 능선을 품은 나지막한 둔덕과 오목한 중앙부 광장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땅의 매무새와 분위기를 담는 공간이다. 이 원형의 능선을 평평하고 굴곡진 고리 형상의 광장으로 재탄생시켜 기존의 다단과 벽 중심 공간에서 무장애의 유려한 땅의 생김새로 조형했다. 말 안장 형상의 쌍곡포물면 광장의 높은 부분은 기존 지형의 높은 지대와 연결되고, 낮은 부분은 공원의 지면과 연결되어 입체적인 보행 경험과 개방감, 위요감을 제공하고 가로 경관에서 공원의 내부로 진출입을 자유롭게 하도록 제안했다.
당진종합체육관 및 반다비국민체육센터 건립사업 설계공모, 다섯 운동장과 여섯 공원
체육센터 외부 공간의 지형적 다양성을 야외 활동의 다채로움으로 승화시켜 하나의 체육공원이 아닌 여섯 개의 특징적 조경 영역인 ‘여섯 공원’으로 구분했다. 개별 공원은 이용 계층 간의 적절한 분리 및 교차를 유도하는 전략으로 두 가지 이상의 야외 활동 프로그램을 혼성시켰으며, 이를 통해 도시 중심에서 이격된 대상지를 방문하는 여러 계층 간의 통합 및 커뮤니티 형성을 촉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안양천 목동교 하부 MZ스포츠플라자 조성 설계공모, 커플링 멀티-셰드(Coupling Multi-Sheds)
목동에 거주하는 다양한 세대의 도시·문화적 잠재력과 안양천을 따라 형성되는 자연의 생태적 잠재력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엮고 연결하는 제안을 했다. 젊은 세대와 다른 세대가 함께 어울리고 동시에 사람과 자연이 어울리도록 다양한 수변 프로그램 공간을 제안했다. 활기와 생기가 넘치는 장소이자 젊은 세대의 새로운 외부 공간 문화를 창출하는 그릇으로 기능하도록 세심하게 매만진 공간 프레임워크를 제시했다.
아웃트로
그래서 이렇게 쭉 간다면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갑자기 20년이 늙는다면? 설계사무소를 못하게 된다면? 수많은 멀티버스의 가능성 중 하나를 살짝 들여다보자.
1,400만 605개의 가능성 중 하나. 아마도 그 안에는 조경문화재단 설립을 시작하고 부족한 기부금을 충당하기 위해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스케치를 그리고 광속 라이노 모델링 알바를 하는 파운더 YJ와 그 옆에서 일 좀 적당히 하라며 나무라는 BW, 자신이 모은 5만 권의 책을 돌보며 재단 도서관의 책을 또 주문하고 있는 84년생 사서 JH, 재단 건물 안팎에서 식물을 가꾸고 가든 클래스를 진행하고 있는 88년생 가드너 BG, 글로벌 답사 프로그램을 짜고 있는 99년생 해설가 JN이 있을 것이다. 긴 시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조경의 경계 안에서 느슨한 연대의 형태로 함께 하고 있을 우리의 모습을 상상하며 줄인다.
각주 1. 그간 『환경과조경』에 특집 등으로 이미 소개된 프로젝트를 제외한 최근 3~4년간의 근작 위주로 담았다.
랩디에이치(Lab D+H)는 2014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설립해 현재 서울과 상하이에 오피스를 두고 있다. 서울 오피스는 동시대 문화적 기반을 토대로 외부 공간 기획 및 리서치부터 실시설계 너머의 시공 및 완공 후 모니터링, 관리 및 운영에 이르기까지 외부 공간의 모든 영역을 아우르는 작업에 관심이 있다. 조경적 관점을 바탕으로 외부 공간의 지속적인 생명력을 책임지고 분명한 정체성으로 브랜딩하는 전문가 집단을 지향한다. 인스타그램 @labdh_seoul, 웹 포트폴리오 labdhseou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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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얼의 도시공원 이야기] 알아서 척척척, 신도시 어린이
에피소드 1. 깨진 무릎
올림픽공원 앞에서 배운 두발 자전거는 일산신도시에서 내 두 발이 되어주었다. 집에서 학원으로 가는 길, 넓게 그려진 그리드가 아닌 하나로 쭉 뻗어나가며 광장과 육교가 사슬처럼 엮여 주요 공간을 잇는 근린 녹지대는 힘차게 굴리는 바퀴 소리와 땅에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가 교차하는, 그리고 어른들이 범접하기 어려운 어린이들의 공간이었다.
아직은 자전거가 익숙하지 않았지만 상당한 경사의 육교 램프를 타고 내려오는 도전을 즐겼다. 아주 가끔은 미처 정비되지 않아 옛 주택과 노출 콘크리트 시설물이 밀접해 있어 왠지 모르게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던 일산역 일대도 슬그머니 가보곤 했다. 인터넷이 막 보급되고 있던 때, 바깥 공간이 집보다 즐거웠던 시절, 공원은 어른들의 묵인 아래 ‘위험한 놀이’를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실험장이었다. 공원에서 나는 총 세 번에 걸쳐 무릎이 깨졌다. 한 번은 조깅하다가, 두 번은 자전거를 타다가. 그 흔적은 희미하게나마 여전히 내 오른쪽 다리에 자리 잡고 있다.
일산의 대단지와 호수공원
1989년 4월 27일 「동아일보」 1면에 실린 ‘1기 신도시’ 두 군데에 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정부는 최근 폭등하고 있는 서울의 주택가격을 안정시키고 주택공급을 크게 확대하기 위해 경기 성남시 분당동 일대에 5백40만 평 규모, 고양군 일산읍 일대에 4백60만 평 규모의 주택도시 두 곳을 새로 건설, 총 18만 가구의 아파트 및 단독주택을 공급키로 했다. …… 일산 지구는 한수 이북 지역 개발이 그동안 지연돼온 점을 감안, 향후 수도권 개발의 우선순위를 강남에서 강북으로 전환해 수도권 인구를 재배치한다는 정부 의지를 보이기 위해 교육문화 교통시설을 고루 갖춘 한수 이북 지역의 중심도시로 건설키로 했다.”(각주 1)
같은 해 12월 13일 「조선일보」 기사는 “일산신도시 기본계획안을 보면 우선 서울 주변 어느 도시보다 면적에 비해 인구수가 단촐한 반면, 공원 호수 등 녹지 면적이 무척 넓다는 것이 눈에 띈다”며 일산을 “인구 28만 전원도시”로 설명하고 있다.(각주 2) 호수공원뿐 아니라 기타 녹지율에 대한 언급이 이곳저곳에서 발견되는데, 기존 도시 개발 방식에서 탈피해 산과 공원을 중심으로 한 높은 녹지율을 지닌 자급자족형 신도시라는 점이 일산의 마케팅 포인트가 되지 않았나 싶다.(각주 3)
앞의 기사처럼 일산신도시 개발 사업의 기본 계획은 기존 도시 개발 방식에 비해 매우 높은 녹지율뿐 아니라 녹지의 분산을 제시했다. 주요 생활권은 모두 고층 아파트로 개발됐지만 그 사이에는 공원과 광장이 거미줄처럼 엮어져 녹지 그리드가 형성되었다. 즉 자가용이 없는 사람이라도 비교적 안전하고 편안하게 도시 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계획되었다.
당시 서울의 빡빡한 주택난을 피해 일산신도시라는 새로운 주거지로 온 사람들의 결과 면면은 아마도 비슷했을 것이다. 넓은 녹지, 이제 막 새로 커지는 도시에 대한 낭만적 감상을 가진 3040 젊은 부부의 비율이 높지 않았을까. 간접적 증거도 있다. 1990년 24만 명이 조금 넘던 고양시 인구는 5년 후 50만 명을 넘어섰고, 2000년에는 80만 명으로 늘어났다. 10년 만에 3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이에 더해 1990년대 초중반에는 고양시 인구의 95% 이상이 유년과 청‧장년층이었던 것으로 확인된다.(각주 4)신도시 입주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던 시기였으니, 1990년대 인구 증가의 많은 부분이 일산의 개발과 유관할 것이다.
이곳에 터를 잡았던 ‘신도시 아파트 입주민’들은 새롭게 개발하는 도시가 가진 장단점을 함께 겪으며 어떤 공통된 정체성을 가지게 된 게 아닐까 싶다. 각주 3에 서술한 자급자족에 대한 불만도 있었지만, 일산신도시아파트입주민회가 1998년 창간한 잡지를 보면 의심이 확신으로 바뀐다.
1998년 3월 1일 첫 호를 발간하고 9월호까지 출간된 『월간 일산』에 수록된 글을 보면 ‘아파트 관리 기술’부터 ‘신도시의 소비 패턴’ 등 신도시 살이의 장단이 보이는데, 매 호 표지를 호수공원의 모습으로 꾸몄다는 점도 눈에 띈다. 짐작하건대 일산신도시에 대한 공통적인 어떤 이미지란 넓은 호수공원 뒤편으로 깨알처럼 펼쳐진 아파트 단지들이었음이 분명하다.
*환경과조경435호(2024년 7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분당 성남 일산 고양에 새 도시”, 「동아일보」 1989년 4월 27일, 1면.
2. “일산 인구 28만 전원도시로”, 「조선일보」 1989년 12월 13일, 7면.
3. 물론 그 이후 1990년대 중반에는 자급자족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이 불거지며 일산신도시 입주자대표협의회의 주도로 정부와 한국토지공사를 상대로 손해 배상 움직임이 있었던 적도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일산신도시의 이미지는 베드타운에 가까운데, 이 ‘자급자족 도시’가 계획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4. 윤신희, 김지훈, 이세훈, 『데이터로 본 고양 변천』, 고양시정연구원 데이터센터, 2022.
신명진은 뉴욕대학교에서 미술사를 공부한 뒤 서울대학교 대학원 생태조경학과와 협동과정 조경학전공에서 석사와 박사를 마친 문어발 도시 연구자다. 현재 예술, 경험, 진정성 등 손에 잡히지 않는 도시의 차원에 관심을 두고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의 선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도시경관 매거진 『ULC』의 편집진이기도 하며, 종종 갤러리와 미술관을 오가며 온갖 세상만사에 관심을 두고 있다. @jin.everyw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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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쓰는 농부사전
블루메미술관, 5월 18일부터 11월 17일까지
좋아하는 대상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탐구하다 보면, 그 대상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까지 관심이 확대되기 마련이다. 개관 이후 줄곧 정원을 좇던 블루메미술관의 눈길이 농부에 닿게 된 까닭도 같았다. 땅을 기반으로 한 노동을 펼친다는 점이 닮아서인지 많은 정원가가 농부의 일과 삶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정원사가 왜 그들을 관찰하는지 궁금했던 블루메미술관도 농부에게 주목하기 시작했고, 이는 ‘같이 쓰는 농부 사전’ 전시 기획에까지 이르게 했다.
5월 18일, 블루메미술관에서 개최된 ‘같이 쓰는 농부 사전’ 전시는 농부를 단순한 식량 생산자를 넘어 가치 생산자로서 바라보며, 농부의 일과 생각에 담긴 무형의 가치를 조명한다. 농업의 산업화를 위해 대량 생산에 몰두하는 대농 대신, 작은 농업을 실천하고 있는 소농 네 팀을 초대했다. 소농의 목소리를 듣는 데 그치지 않고, 이들이 추구하고 있는 가치를 작품으로 보여줄 네 명의 작가를 매칭해 컬래버레이션 작업을 선보였다. 이렇게 완성된 작품은 농사를 짓지 않아도 누구나 ‘농부적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다만, 그 삶의 방식이 아직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기에 함께 고민할 수 있도록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던진다. 이번 전시의 제목에 ‘같이 쓰는’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이기도 하다. 농부사 전을 관객과 함께 써가는 여정은 농업 안에만 갇혀 있던 여러 농부의 삶을 확장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다.
*환경과조경435호(2024년 7월호)수록본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