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뒤를 돌아본다. 숨을 고를 수 있고, 오늘을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다. 내일을 꿈꾸는 덤을 얻을 수도 있다. 넓은 하늘과 살아 움직이는 구름이 가득한 어느 낯선 도시의 작은 도서관. 과월호 몇 권과 옛 신문으로 여름의 여백을 채운다.
딱 30년 전인 1987년 9월, 거리의 함성과 열망으로 신문 지면에 숨 쉴 틈이 없다. 1987, 지금도 가슴 뛰는 네 자리 숫자. 현대사의 분수령이 된 그해 6월의 민주화 항쟁은 군부 독재를 종식시키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일궈냈다. 9월의 지면은 현대중공업을 비롯한 전국 노동 현장의 파업과 12월의 직선제 대선을 향한 정치권 기사로 달아오른다.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와 김대중 고문이 후보 단일화에 실패한 것도 이 달이다. 강수연, 베니스 영화제에서 ‘씨받이’로 여우주연상을 수상, 국내 전화 1천만 회선 돌파 정도가 이 정치의 계절에서 궤도를 이탈한 이채로운 뉴스다.
그에 비하면 『환경과조경』의 1987년 9월은 참 고요하다. 1982년 7월 계간으로 창간한 지 5년이 막 넘은 시점, 통권 19호다. 정원과 공원은 물론 공동 주택, 분구원, 사찰, 하천에 이르기까지, 좋게 보자면 스펙트럼이 넓고 다르게 말하자면 중심이 없다. 프로젝트 꼭지에는 한국 현대 조경의 대표작 중 하나인 파리공원의 기본계획안이 소개되어 있다. 특집은 ‘국립공원 관리와 이용.’ 창간 발행인 오휘영 선생은 ‘오늘, 조경가는 무엇을 생각하는가’라는 제목의 권두 칼럼에서 조경가가 “관광단지의 개발, 공원 프로젝트, 주거환경의 조경설계, 도시경관 조성”뿐만 아니라 “자연자원의 관리와 보존, 자연환경의 복원”에도 주력해야 한다고 당부한다. 창간 초기에 비해 지면을 메우기 벅찬 편집진의 고민이 그대로 읽히지만, 광고면을 보면 올림픽을 앞두고 우리 조경 경기가 꽤 풍성했음이 한눈에 읽힌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영어식으로 표현하자면) 랜드스케이핑 또는 가드닝으로서의 조경과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로서의 조경, 이 두 조경 간의 갈등과 불안한 동거는 30년 전 잡지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10년이 흐른 1997년 9월도 대선을 세 달 앞둔 정치의 계절이다. 세 달 후 닥쳐올 IMF 구제 금융 사태의 전야, 기아자동차와 아시아자동차 법정 관리를 비롯해 경제 대란을 예감케 하는 기사들로 지면은 온통 먹구름이다. 김영삼 대통령의 레임덕은 끝을 모르고,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조순의 이름이 연일 1면 헤드라인을 장식한다. 병역 면제로 시끄러웠던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의 장남은 소록도에
서 봉사 활동을 시작하고, 정명훈은 KBS 교향악단의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로 계약한다.
통권 113호를 맞은 『환경과조경』 1997년 9월호는 길을 잃고 표류하는 느낌이다. 편집 디자인만 놓고 보면 10년 전과 별반 다르지 않다. 지면이 대폭 늘었고 꼭지는 다양하(거나 산만하)다. 무려 20쪽에 달하는 뉴스가 인상적인데, 뉴스와 조금 다른 성격의 ‘조경계 동서남북’도 있다. 조경계의 시사적 이슈를 다루는 만평, 불량 경관을 고발하는 ‘카메라 포커스’가 있는가 하면, ‘공원따라 발길따라’, ‘그리운 내고향’, ‘문화가 소식’ 같은 고정 코너도 있다. 해외 학회 참관기, 녹색 기업 탐방, 대학 동아리 소개뿐만 아니라 조경기술사 합격자들의 소감문도 이어진다. 인터넷 시대 초기인지라 ‘홈페이지 만들기: HTML의 기초’라는 연재물도 있다. ‘전통문화 속에 담긴 조경’이라는 제목을 단 특집의 취지는 “자연을 숭배하던 선조들의 얼과 정신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면서 잠자고 있는 우리의 전통적 감각을 … 일깨우고자 하는 데” 있다고 쓰여 있다. 1970년대나 2010년대나 크게 다르지 않은 이른바 ‘전통’론의 한계, 1997년 9월이라고 다를 바 없다.
불과 엊그제 같은 2007년 9월이 어느덧 10년 전이다. 또 한 번의 대선 정국. 한나라당에서는 이미 한달 전에 이명박이 박근혜를 누르고 대선 후보로 선출됐고, 대통합민주신당은 예비 경선을 통해 손학규, 한명숙, 이해찬, 정동영, 유시민으로 후보를 압축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신정아 스캔들의 여파로 변양균 정책실장의 사표를 수리하고, 이승엽은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해 통산 5백 안타를 달성한다.로스쿨 시행령이 확정되어 고시에 합격하지 않고도 변호사가 될 수 있는 시대가 열린다. 서울시는 모든 버스 정류소를 금연 구역으로 지정하고, 도봉구는 아기공룡 둘리의 호적등본 발급을 개시한다.
『환경과조경』의 2007년 9월은 표지만 봐도 풍요롭다. 광고의 양이 지금의 몇 곱절이다. 그해 1월 대대적인 디자인 리뉴얼을 통해 표지, 로고, 타이포그래피, 편집 디자인을 혁신했다. 글로벌리제이션 열풍에 동승해 본문의 절반 정도를 (물론 읽는 사람은 거의 없었겠지만) 영문으로 병기하고 있다. 수록된 국내 작품이 무려 여섯 개. 그중 반은 소위 ‘차별화’를 향해 돌진하는 아파트 조경이다. 인천 송도신도시 중앙공원과 경기바이오센터, 2년 후 서서울호수공원으로 완공되어 ASLA 디자인 어워드를 받는 신월정수장 부지 공원조성계획 설계공모 당선작도 이 달에 실려 있다. 자하 하디드의 DDP 설계공모 당선 소식도 뉴스란 한 구석을 차지한다.
이 통권 233호의 특집 주제는 ‘한미 FTA와 조경 산업’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여러 외고 필자들은 FTA가 한국 조경에 미칠 영향은 미미할 것이라는 전망을 하고 있다. 정작 조경계를 뒤흔든 것은 FTA가 아니라 다음 해의 글로벌 금융 위기였다. 2008년 세계 금융 시장에 몰아친 한파는 경제 불황, 건설 경기 침체, 조경의 위축으로 이어진다. 2007년 9월, 한국 조경은 곧 닥쳐올 위기를 감지하지 못한 채 ‘조경의 시대’라는 명명이 과장이 아닐 만큼 호황을 구가한다. 아파트 물량이 쏟아지고, 행정중심복합도시, 혁신도시, 기업도시, 신도시의 국제설계공모가 줄을 잇는다. 설계사무소 수가 급증한다. 『환경과조경』 233호가 그 자화상이다. 비만의 후유증처럼 다가온 다음 10년, 한국 조경은 경계를 지켜야 한다는 불안증, 영역을 넓혀야 한다는 강박증을 동시에 앓게 된다.
낯선 도시의 작은 도서관을 나선다. 마침 일몰의 장관이 펼쳐지고 있다. 하늘과 빛과 어둠이 빚어내는 화려한 풍경 속에서 뜬금없는 질문을 떠올린다. 30년 후의 한국 조경은? 『환경과조경』 2047년 9월호가 궁금하다. 이제 익숙한 나의 도시로 돌아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