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대 학창 시절, 운동권 선배들의 주변부를 기웃거리며 도대체 왜 이 사람들은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꿈꾸고 싸우는가를 궁금해하던 시절이 있었다. 세상을 변혁하고자 했던 그들의 열정과 치열함을 존경했지만 나약한 나는 결국 그들의 무리에 끼지 못하고 패배자의 죄책감을 가지고 도망쳤다. 한참의 방황기를 끝내고 복학하면서, 그래, 조경이야말로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실제로 만드는 일, 세상을 변화시키는 실천 학문이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비로소 조경이라는 본연의 공부에 몰입할 수 있었다.
삼십대에 나는 대학에 자리를 잡았다. 주변에서 축하와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다. 그 중에는 일종의 경고성 당부도 끼어 있었는데, 학생들의 눈높이가 너무 올라가지 않게 가르쳐 달라는 부탁이었다. 헛된 꿈이 커지면 겉멋이 들어 졸업 후 현실에 부딪치자마자 쉽게 포기하고 이직한다는 이유였다.
사십대인 나는 여전히 이십대와 삼십대의 에피소드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우리나라 조경의 최대 위기라는 지금, 이상향을 고민하며 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현실을 망각한 시대착오적 발상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발주처의 대책 없는 갑질, 터무니없는 설계비에 회사 운영을 위해서 짊어지는 박리다매형 운영 방식, 권위주의적 심의와 트집잡기 문화, 타 분야의 영역 침범, 사람을 뽑지 못해 안달하는 중소규모 회사들과 공무원 시험에 몰두하는 학생들, 주변적 위치를 벗어나지 못하는 징글징글한 조경의 현실은 매순간 모습을 바꿔가며 우리를 옥죈다. 교수라서 현실의 냉혹함을 모른 채 꿈 타령이나 하고 있다는 비판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꿈을 폄하하는 사람들은 지옥 같은 현실을 그들만의 전유물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조경의 본질이 새로운 세상, 변화된 세상을 꿈꾸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믿고 있다. 우리 일의 보람은 이러한 꿈과 이상을 현실로 바꾸는 힘과 과정에 있다. 이상향 혹은 유토피아. 이 가슴 설레는 단어를 조경의 본질과 연관 짓기에 부담을 느낀다면 조금 더 소박하게 표현해 보자. 좋은 공간, 아름다운 경관에 대한 상상은 새로운 공간을 만드는 조경 행위를 발생시키는 첫 단계다. 꿈은 비루한 현실을 변화시키는 첫 걸음이다.
유토피아는 땅 혹은 세계를 의미하는 ‘topos’에 ‘존재하지 않는’ 혹은 ‘좋은’ 이라는 이중적 의미의 접두사 ‘eu’를 붙인 합성어다. 16세기, 중세로부터 근대로 이행하는 시기에 목격한 사회의 극단적인 탐욕과 부조리와 폭력성과 불평등은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라는 대작을 탄생시켰다. 그 이후 수많은 학자들이 저마다의 유토피아를 정의하고 세부적인 작동 방식을 제시해 왔으며, 다양한 방식으로 유토피아를 실제로 구현하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루이스 멈퍼드는 유토피아를 도피적 유토피아와 재건적 유토피아로 분류했는데, 두 유토피아의 차이는 지옥 같은 현실 세계를 그대로 두는 것과 그 현실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와 실행력의 차이로 이해될 수 있다. 즉 현실에 대한 태도의 차이에서 그 방식이 달라질 뿐, 유토피아의 본질은 현실 그 자체에 대한 엄중한 성찰과 비판에 있다.
도시 공원의 양식적 진화에 여전히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픽처레스크 정원은 ‘이상향으로서의 자연’을 실제로 구현한 것이다. 근대의 도시 공원은 아르카디아Arcadia라는 도피적인 유토피아를 실제 도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재건적 유토피아로 변형시켰다는 데에서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최초의 시민 공원인 영국의 버컨헤드 공원, 여기에서 큰 영감을 받아 만든 미국의 센트럴 파크는 모두 열악한 도시 상황과 피폐한 현실을 벗어나 이상향으로서의 자연을 건설하고자 한 집단적 욕망이 실제 공간으로 만들어진 곳이다. 바꿔 말하면 근대 조경의 시작은 유토피아를 시민의 일상 영역에 만들어 그들에게 현실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순기능의 도시 장치라고 볼 수 있다. 공원의 질적 변화를 유도했던 라빌레트 공원, 다운스뷰 공원, 하이라인 공원 등 우리가 부지런히 ‘벤치마킹’해 왔던 공원들은 모두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문제 인식과 더불어 그 공간에 펼쳐질 새로운 세계에 대한 상상을 통해 새로운 생명력을 갖게 된 사례들이다. 급하게 베껴 비슷한 모양새로 만들어 봐도 감동을 주지 못하는 이유는, 원작 공원에 배어 있는 그들의 꿈과 비전까지는 벤치마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꿈과 비전을 실현하기까지의 구구절절한 과정을 벤치마킹하지 못한 탓이다. 우리가 그렇게 가벼이 여기는 꿈은 현실의 다른 모습이며 서로를 떼어놓을 수 없는 암수한몸이기 때문이다.
수업 시간에 나는 곧잘 학생들에게 자신이 꿈꾸는 이상향이나 유토피아를 그려보라고 한다. 어떠한 형태를 갖추든, 그들의 유토피아에서 현실은 악으로, 문제로, 고난으로, 디스토피아로 규정된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날카롭게 해석하듯이, 근대의 유토피아가 앞으로의 세상에 대한 희망을 전제로 세계의 진보를 낙관적으로 표상하는 것이라면, 현대의 유토피아는 지금 세상에 대한 혐오에서 비롯한다. 또한 현대의 유토피아적 상상은 집단적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이고 건설적이라기보다는 도피적이다. 무한 경쟁에 내몰리고 생존과 도태에 대한 두려움, 불확실성과 공포가 지배하는 이 시대에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세상에 대한 혐오, 나만이 누릴 수 있는 도피처,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는 무기력함, 이 모두가 학생들이 그린 유토피아 하나하나에 슬픈 모습으로 새겨져 있다.
최근 헤더윅 스튜디오의 전시와 이번 호의 특집인 아장스 테르의 작업을 보면서 나는 현대 유토피아에 대한 또 다른 버전을 발견한다. 다양한 프로젝트의 멋진 화보 이미지를 관통하는 강렬한 에너지는 더 나은 세계, 더 좋은 삶에 대한 집단적 상상과 실천 의지다. 아장스 테르의 작업을 들여다보면서, 치열한 현장에 대한 탐구, 더 좋은 삶에 대한 꿈과 비전, 전문가의 역할에 대한 확신, 세 명의 소장과 직원들의 집단 창작 과정에 대한 믿음이 이러한 작품들을 가능하게 만든 근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꿈과 가치를 공유하는 집단적 창작 방식은 우리에게 과연 사치일까? 해외의 멋진 작품을 접할 때마다 그들의 선진적인 발주 시스템, 전문가를 우대하는 사회적 풍토, 현실적인 설계비, 고용 안정성 등을 부러워하며 한숨짓는 무기력 대신, 오늘은 당당하게 우리의 꿈을 이야기하자. 꿈과 현실의 변증법, 그것이 조경의 본질이므로.
김아연은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이자 느슨한 설계 집단 스튜디오 테라의 대표로서, 조경 설계 실무와 설계 교육 사이를 넘나드는 중간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자연과 문화의 접합 방식과 자연과 커뮤니티의 변화가 가지는 시학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