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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과조경 2024년 1월

정보
출간일
이매거진 가격 10,000
잡지 가격 11,000

기사리스트

[에디토리얼] 열한 번째 1월호
제가 쓰는 121번째 에디토리얼입니다. 편집주간이라는 과분한 역할을 맡은 지 작년 연말 호로 10년을 넘어선 것이죠. 이번 『환경과조경』이 2014년 리뉴얼 이후 열한 번째 1월호인 셈입니다. 매년 1월호를 마감하는 시점이 되면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합니다. 새해의 편집 방향을 세우고 새 콘텐츠를 기획하며 새로운 각오를 다지기도 하지만, 안개 자욱한 풍경 속을 걷는 막막한 느낌에 휩싸이기도 하죠. 그럴 때면 늘 샛노란 표지의 309호(2014년 1월호)를 펼칩니다. 박명권 발행인 체제로 옷을 갈아입고 『환경과조경』의 새로운 시작을 선언한 309호. 2024년을 열며 혁신의 열망 가득한 10년 전 잡지를 다시 꺼내 읽습니다. 『환경과조경』은 “조경에대한 사회적 관심과 대중적 수요가 증가하고 일상 속의 조경 문화는 풍요로워졌는데도 정작 제도권 조경은 위기인 역설적 풍경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며, “조경 저널리즘의 지향과 좌표를 설정함으로써 부유하는 한국 조경을 교정해야 한다”는 10년 전 다짐을 다시 불러냅니다. 새 발행인과 편집진, 리뉴얼 T/F팀이 4개월간의 리뉴얼 프로젝트를 통해 세운 그때 그 지향과 좌표는 지금도 유효합니다. “『환경과조경』은 ‘조경 문화 발전소’를 꿈꾼다. ‘한국 조경의 문화적 성숙을 이끄는 공론장’, ‘조경 담론과 비평을 생산하고 나누는 사회적 소통장’, ‘동시대 세계 조경의 보편성과 지역성을 수용하고 발굴하는 전진기지’, 이 세 가지 비전을 지향한다.” “새로운 『환경과조경』은 ‘매달 첫날을 기다리게 하는 잡지, 받자마자 소중한 두 시간을 빼앗는 잡지, 한 달에 세 번은 다시 펼쳐보는 잡지, 과월호도 다시 뒤적이게 하는 잡지’가 되기 위해 매호, 늘, 새로운 출발점에 설 것이다.” 309호 에디토리얼의 마지막 문단입니다. 10년이 흘렀지만, 2024년의 모든 호 모두 그런 내용과 형식을 갖춘 잡지가 될 수 있도록 매달 힘써보겠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풍성한 피드백을 초대합니다. 2024년의 문을 여는 이번 호는 본지가 주최한 ‘제6회 젊은 조경가’ 수상자 김영민(서울시립대 조경학과 교수) 특집호입니다. 한국 조경계에서는 매우 드물게 교수와 실무 조경가를 겸업하고 있는 김영민은 설계와 이론을 병행해온 이채로운 이력의 소유자이기도 합니다. 이번 특집에는 그의 에세이 ‘모순지도’와 작품들, 김모아 기자의 인터뷰, 동료 김아연 교수와 이남진 소장의 글을 담았습니다. 여기저기 흩어진 김영민의 조경 작업과 조경에 대한 생각을 그러모아 한눈에 조감하는 기회가 되기를, 또 그의 작업을 더 조밀한 비평의 장으로 불러내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번 호부터 새 연재물 ‘밀레니얼의 도시공원 이야기’를 올립니다. 환경과조경 주최 ‘2016 조경비평상’ 수상자이자 본지 지면의 번역자로 활동해온 신명진 박사(서울대 환경계획연구소)가 매달 다채로운 공원 담론을 펼쳐갈 것입니다.
[풍경 감각] 새해 목표
새로운 해가 돌아왔다. 달력을 걸고 올해 목표를 꾸린다. 우선 반쯤 써 둔 신간 원고를 완성할 것이다. 생각해 둔 차기작도 투고해야지. 재미있는 프로젝트 의뢰가 들어오면 좋겠고, 늘 미뤄두었던 두껍고 어려운 책도 완독하고 싶다. 수영은 연수반으로 올라갈 정도로 실력이 늘었으면 하고, 멍하니 유튜브 쇼츠와 인스타그램 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지 않기로 다짐한다. 새로운 일 년이라는 시간이 두둑한 지갑처럼 든든해서, 정말 해낼 수 있는 목표와 실패할 게 뻔하지만 어쩐지 할 수 있다고 믿게 되는 희망사항의 경계가 흐려진다. 무엇이든 정말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얼었던 땅이 풀리고 젖은 흙냄새가 나기 시작하면 지갑을 채웠던 이 기분도 모두 써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올해도 또다시 같은 돌부리에 걸려 무릎이 깨지며 조금씩 낡아갈 것이다. 여태까지 보내온 수많은 새해들처럼. 희망에 부풀어 적었던 올해 목표들을 모두 지워버리고, 대신 한 줄을 적는다. 비슷하게 좋고 나빴던 여러 해 동안 곁에 있어 준 친구들을 닮아보자고. 지겹도록 같은 돌부리에 또다시 넘어진 친구를 울지 말라고 다그치거나 빨리 일어나라고 잡아서 끌지 않기로. 대신 그저 같은 자리에 털썩 앉아 같은 풍경을 바라볼 것. 친구들이 여러 번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 또한 신년 기분에 취해 적은 희망사항일지도 모르지만 올해는 다르길 바란다.
조경가 김영민
설계 철학을 이야기해보라고 하면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김영민은 조경설계에 앞서 설계를 하는 이유와 설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되물어왔다. 그 고민의 뿌리는 교수라는 직업에서 비롯되기도 했다. “사회는 교수에게 설계를 하라고 하면서, 동시에 설계를 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한국에서 겸직이 금지된 교수가 설계를 하려면 타인의 이름이 필요하다. 그것이 형식적이든, 실체적이든, 교수 조경가는 설계 과정의 부분이 될 수 있을 뿐이다. 학의 영역에서 교수가 설계를 한다면, 업에 있는 조경가들과는 달라야 하며, 그것이 무엇이냐는 답을 제시하기를 원한다.” 김영민은 그 답으로 “이론을 정초하는 설계”를 내놓고, “이는 당위라기보다 일종의 자발적 결단에 가까운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번 특집의 초점은 김영민의 이론을 정초하는 설계인 ‘모순지도’에 맞춰져 있다. 모순지도의 의미를 설명하는 에세이, 그가 설계하며 발견한 다섯 가지의 모순, 비슷한 길을 걷어온 동지와 함께 설계하고 있는 동료가 바라본 그의 모습과 인터뷰를 담았다. 김영민이 설계하는 법이 더 궁금하다면 『스튜디오 201, 다르게 디자인하기』(한숲, 2016) 탐독을 추천한다. 진행 김모아, 금민수, 이수민 디자인 팽선민 자료제공 김영민 -- 모순지도 _ 김영민 다섯 가지 모순 _ 김영민 이론이 죽은 시대의 설계 _ 김모아 젊은 그대에게 _ 김아연 뜨거운 심장을 가진 육각형 조경가 _ 이남진
[조경가 김영민] 모순지도(矛盾之道)
케 보이(Che vuoi), 무엇을 원하는가 몇 해 전 나의 설계 작업을 주제로 한 강연의 제목을 정해야 했다. 나의 설계를 관통하는 개념이 필요했는데, 사실 그때까지 나의 설계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당연하게도 나에게 주어진 모든 프로젝트의 조건은 모두 달랐으며, 설계는 대개 나의 순수한 의지를 구현한 작품이 아니라 수많은 내부와 외부의 욕망을 수용한 일종의 타협적 결과물이었다. 일종의 선언이 필요했던 나는 모순이라는 개념을 선택했다. 그 이유는 단순했는데, 모순은 강연을 준비했을 무렵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새로운 광화문광장과 춘천 시민공원 프로젝트의 핵심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관된 지향점을 갖고 이뤄지지 않았던 나의 설계를 하나의 자아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작업을 소급적으로 재구축해 나아가야 했다. 이는 현재 시점의 불완전한 설계적 주체를 상정하고 모순이라는 기호를 관통하는 과거의 누빔점들을 찾아가며 새로운 주체를 완성해나가는 과정이었다. 주체는 욕망의 목적지를 규정하는 과정에서 드러나기 마련이다. 나의 설계적 자아가 모순이라는 개념을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곳은 어디인가. i(a) 이상적 자아 결여된 주체가 소급적으로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대상은 이상적 자아다. 쉬운 말로 하면, 롤 모델이다. 별 볼 일 없던 시절 누구나 되고 싶은 동경의 대상이 존재한다. 미숙한 주체는 구체적 대상을 통해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적 상을 구축할 수밖에 없다. 내 설계적 주체의 이상적 자아는 아이젠만(Peter Eisenman)과 타푸리(Manfredo Tafuri)였다. 20대에 내가 이 둘에게 열광했던 건 사실이지만, 내가 그때부터 그들처럼 되기로 결심하고 설계해왔다는 뜻은 아니다. 마흔 살 넘어 내가 소급적으로 찾아낸 이상적 자아가 아이젠만과 타푸리인 것이고, 이들에게 투영된 나의 욕망은 시대에 대한 저항이었다. 저항은 너무 거창한 말 같고 삐딱한 시비 걸기라고 해두는 편이 나을 것 같다. 내가 시비를 걸고 싶은 대상은 ‘짓는 조경’이었다. 모두가 디테일의 완성도, 장소의 실체적 경험, 사람들이 잘 쓰는 공간, 아름다운 식재, 이런 것을 설계적 지향이라고 하는데, 나는 그것이 불만이었다. 이는 설계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 조건이지 설계의 지향이 될 수 없다. 짓는 조경은 쓸데없는 이론적 강박과 난해한 개념에서 벗어난 자유롭고 본질에 충실한 조경처럼 보인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런 조경은 자칫 어떠한 비판 의식도, 지향점도 상실한 채 도구적 가치만 남은 종속적인 조경이 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예쁘게 잘 지어지고 사람들이 좋아한다면, 조경은 자본에 예속되든, 정치적 선전으로 전락하든, 도시와 환경의 구조를 왜곡시키든, 아무래도 상관 없는가. 물론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 소몰(Robert Somol)과 와이팅(Sarah Whiting)이 ‘쿨’한 시대라고 정의한 오늘날 그런 질문 자체가 시대착오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뜨거웠던’ 시대의 영웅인 아이젠만과 타푸리를 내 설계의 상상적 자아로 소환한 것은 조경 신(scene)에서 한 명 정도는 시대 착오적으로 이론과 설계의 관계를 떠들고 다닐 필요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I(A) 자아이상 롤 모델은 어디까지나 어린 시절의 통과 지점일 뿐, 자신이 결국 롤 모델 과 동일시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안다. 그래서 주체가 욕망하는 궁극 적 목표는 상상적 대상에 투영되었던 상징적 자아가 된다. 지제크Slavoj Žižek는 정확히 우리가 타인을 모방할 수 없는, 유사성을 벗어나는 지점 의 동일시가 자아이상이라고 설명한다. 모순이라는 개념으로 정의된 설계적 자아는 단순히 그 누군가의 사유와 방식을 따라하거나 특정 현상 에 대한 비판에 머물 수 없다. 모방과 비판을 통해 도달하려는 지점은 보다 구조적인 것이다. 모순을 통해 나의 설계적 자아가 도달하려는 곳은 정확히 내가 짓는 조경을 비판하는 지점인데,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내가 짓는 조경에 시비를 걸었다고 해서 짓는 조경이 패배해 다른 형식의 조경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비판하는 지점은 둘 중 하나만 존재해야 한다는 고정 관념이다. 다시 말해, 내가 추구하는 조경은 ‘짓는 조경’과 함께 그와 반대되는 ‘개념의 조경’이나 ‘이론의 조경’도 공존할 수 있는 조경이다. 우리는 상반되는 지향이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때 양립 불가 능한 상황을 모순이라고 한다. 인간은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변증법이라는 보편적 원리를 발명했다. 헤겔에 의해 정교화되고 마르크스에 의해 교조화된 변증법은 현대 사회 체계를 구축한 가장 효과적이며 명증한 작동 기제가 됐다. 그러나 정과 반의 모순을 종합해 새로운 합으로 나아간다는 변증법은 모순을 해결한다는 명분으로 차이를 소거했다. 변증법에서 모순의 해결은 실상 모순을 없애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는 정과 반의 종합이 아닌 정과 반 하나의 선택이며, 결과적으로 선택되지 않은 다른 하나의 제거를 의미한다. 그래서 변증법의 시스템이 작동하면 할수록 차이는 제거되고 지향은 균질해진다. 균질해진 지향은 사유를 정지시키고 이는 교조화된 폭력이 된다. 이론이 설계를 지배하던 시대에 대한 저항으로 짓는 설계를 지향했지만, 다시 이론을 죽인 시대에 짓는 설계는 또다른 구속이 된다. 그래서 나의 설계적 자아가 궁극적으로 저항하고자 하는 대상은 변증법적 설계이며, 반대로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은 차이의 설계다. 모순의 길 내가 지향하는 모순지도는 모순을 해결하지 않는 설계다. 서로 상충하는 두 개념, 혹은 두 요소의 차이를 존속시키는 방식의 설계다. 사실 모순은 설계에서 특별한 개념이 아니다. 모든 설계는 모순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문제와 모순은 다르다. 문제는 기능적 해결을 요구한다. 모순은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예를 들어 보자. 배수가 잘 안 되는 땅을 물이 잘 빠지도록 바꾸면 문제는 해결된다. 그런데 모순의 관점에서 보면 여기에는 마른 땅과 젖은 땅의 모순이 있다. 젖은 땅을 없애면 문제와 함께 마른 땅과 젖은 땅의 차이도 제거된다.하지만 물이 안 빠지는 땅에 연못과 정원을 만들면 차이를 없애지 않고도 모순을 공존시 킬 수 있다. 전자와 후자 모두 설계 행위다. 그러나 같은 설계는 아니다. 설계를 통해 전자는 가능성이 제거된 땅이 되고, 후자는 전에 존재하지 않았지만 이미 잠재하고 있었던 새로운 공간이 된다. 모순지도의 원칙이나 방법을 물어본다면, 아마도 그런 건 없을 것이다. 방식이 아니라 태도이며 지향이기 때문이다. 내가 변증법의 문제를 비판해온 여러 사상가에게서 얻은 한 가지 가르침이 있다면 새로운 사유의 길은 늘 과거의 사유에 선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새로움이란 없던 것에서 창조되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것에서 발견된다는 것이 이들이 알려준 진리였다. 그러나 명심할 것은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얻은 교훈이라는 점이다. 모든 땅의 문제와 일의 조건은 다르기 때문에 설계의 보편적 규칙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존재해서는 안된다. 모순을 공존시키는 설계는 결국 차이의 설계이며, 그 길의 반대편은 획일성과 동일성이기 때문이다. 김영민은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다.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이고, 설계를 하는 조경가이며, 글을 쓰는 사람이다. 서울대학교와 하버드대학교에서 조경과 건축을 함께 공부했다. 미국에서 도시설계와 조경설계 실무를 하고, 여러 나라의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이론적 담론을 생산할 수 있는 설계를 추구하며, 설계를 각성시킬 수 있는 이론과 비평 작업을 해나가고자 한다. 대표 프로젝트로 ‘행정중심복합도시 도시상징광장’, ‘새로운 광화문광장’, ‘파리공원 리노베이션’ 등이 있다. 『스튜디오 201, 다르게 디자인하기』 등 십여 권의 책을 썼고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을 번역했다. 현재 조경기술사사무소 바이런과 함께 설계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조경가 김영민] 다섯 가지 모순
조경가 김영민의 작품과 설계 철학을 살펴본다. 그가 지향하는 설계와 과정에서의 고민, 설계 개념의 중심축인 모순을 중심으로 다섯 가지 이야기를 구성했다. 언어의 모순, 광장의 모순, 건축의 모순, 공원의 모순, 정원의 모순 순으로 소개한다. 01. 언어의 모순 건축가 피터 아이젠만(Peter Eisenman)은 다음과 같이 건축을 정의했다. “진짜 건축은 오직 드로잉에서만 존재한다(The real architecture only exists in the drawings)”. 이처럼 설계는 무엇인가를 만들기 위한 계획과 방법을 도면에 명시하는 행위다. 조경설계가 단순히 기능적으로 작동하는 공간이나 대상을 만드는 행위에 그친다면 개념은 필요 없다. 그런데 조경설계의 대상이 기능적 공간 외의 속성, 즉 미, 예술성, 상징성, 장소성 등의 의미를 수반할 때 개념이 개입한다. 개념이 개입하는 순간 설계에서는 말과 사물의 모순이 생긴다. 페터춤토르(Peter Zumthor)에게 설계는 사물에 대한 것이다. 피터 아이젠만의 설계는 사유의 영역에 있다. 모든 조경가는 말과 사물 사이의 어떤 지점을 택해야 한다. 그런데 어떠한 지점을 선택하더라도 그것은 모순의 길이다. 정온(靜穩)과 역동(逆動) 설계할 기회가 많지는 않았다. 그래서 대학원을 갓 졸업한 제자와 함께 모란미술관이 주최하는 설계 공모 모란 폴리 2016에 참가했다. 모란미술관에 폴리를 설계하는 공모전으로, 일반적 공모와는 달리 피스풀 다이내믹스(peaceful dynamics)라는 모순적 주제가 주어졌다. 나는 생명이 막 탄생하는 순간, 태초의 감각을 폴리로 구현하고자 했다. 고요한 역동성, 이 상반되는 두 개념을 통해 끌어내고자 하는 건 공간적 대상이라기보다는 시간적 개념에 더 잘 부합한다. 시작은 균질한 평형이 깨지고 새로운 양태로 나아가려는 시간적 경계다. 생명의 발생은 모든 시작의 순간 중에서 가장 고요하면서 역동적인 사건의 기점이다. 그리고 수정체는 시작의 시간적 개념이 공간적으로 결정화된 대상이다. 생명체는 외부의 환경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반응을 해야 하고, 그 반응의 기작은 생명이 진화하며 감각이 된다. 그렇다면 원생의 감각은 어떠한 감각인가. 감각 기관이 분화되기 이전, 원생의 감각은 현실과 실재, 가능성과 잠재성의 경계에서 존재한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실재하는, 가능하지 않지만 잠재하는. 그렇기 때문에 원생의 감각은 고요하면서도 역동적이다. 이제 개념적으로 실재하나 현실의 직관으로는 부재하는 모순의 영역을 현실의 감각 세계로 소환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매개가 필요하다. 아무것도 아닌 바보 같은 건물. 현실에 있으면서 비현실적인. 모순적 폴리가 그 매개체다. 폴리의 8m 지름 원형 내부에 2m 지름의 작은 잔디 정원이 있다. 정원 위의 천장은 뚫려 있어 하늘이 보인다. 내부는 끈들의 밀도에 따라 공간이 형성된다. 끈의 배치에 따라 경험되는 감각의 유형과 강도가 달라진다. 배치의 밀도에 따라 시각이 차단되며 개방된다. 반대로 촉각이 개방되며 차단된다. 폴리는 원생의 감각을 담는 매개체다. 인간은 감각을 다섯 개로 분류해 편의상 인식의 체계에 맞추었다. 감각의 유와 종은 어떠한 측면에서는 무한하며, 어떠한 면에서는 단 하나다. 촉각. 모든 감각은 촉각의 일종이며 분화다. 원생의 감각은 분화되기 이전의 감각. 시각, 청각, 후각, 미각이 모두 촉각으로 융해되어 있는 상태다. 따라서 폴리의 내부는 촉각의 공간이다. 이때 촉각은 감각이 모두 분화되고 남은 찌꺼기로서의 촉각이 아니라 분화되기 이전의 촉각이다. 무수히 많은 끈이 만드는 공간을 경험하려면 끈의 장막으로 들어가야 한다. 끈은 밀도가 다르게 배치된다. 밀도에 따라 감각의 강도가 달라진다. 폴리 안에는 촉각만이 존재하는 영역이 있으며 다른 감각을 열어주는 영역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개념적 설정 자체가 모순이라는 점이다. 이미 인간의 감각은 분화되었기 때문에 원생의 감각은 실제로 허구의 감각이다. 인간은 진화의 궤도에서 시각에게 모든 감각의 지배권을 내어주었다. 시각의 지배성은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현대인이 경험의 주체인 이상 원생의 감각은 시각을 통해서 유도된다. 감각의 끈들은 강렬하다. 폴리의 형태는 시각적으로 기하학적이고 단순한 원형이다. 가장 찬란한 시각적 감각이 사라질 때, 원경이 아닌 극도의 근경이 솟아오를 때 순간순간 원생 감각의 실마리를 엿볼 수 있다. 바보의 건축 폴리에서. 폴리가 완공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술관을 찾았는데 단체로 견학 온 유치원생들이 까르르 대며 폴리에 들어가고 있었다. 매우 앳되어 보이는 선생님은 아이들의 사진을 찍다가 셀카도 찍었다. 그 모습을 보며 공모에 제출했던 현학적 수사와 개념 풀이는 과연 어떠한 역할을 하는 것인 지 자문해 보았다. 표상(表相)과 내재(內在) 실행을 전제로 하지 않는 아이디어 공모는 현실의 제약이 없어 모든 게 가능할 것만 같다. 하지만 현실의 대상지가 주어질 때 그 무게는 그렇게 가볍지 않다. 한국은행 앞 분수광장과 같은 대상지인 경우 더욱 그러하다. 이곳은 일제강점기부터 경성의 중심지였다. 경성의 최대 번화가였던 혼마치와 메이지마치의 입구였고, 은행 본점들과 함께 경성을 대표하는 미쓰코시 백화점이 있던 곳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신세계 백화점 본점이 자리 잡은 서울의 중심지 중 하나다. 1970년대 이후 이곳은 분수대로 기억되어 왔다. 그런데 이 광장의 문제도 바로 이 분수대에 있었다. 1930년대부터 광장에 원형 분수대를 설치했는데, 1978년에는 이일영의 조각 15점으로 이루어진 조각 분수상으로 바뀐다. 분수대 가운데 설치된 8층탑은 서울의 여덟 문과 여덟 산을 상징한다. 그리고 탑신 주변의 대형 군상은 가족, 예술, 건설을, 입상은 애국, 번영, 충효, 평화, 총화, 풍화를 상징한다. 1970년대 한국 사회의 지향을 보여주는 이 분수대는 산업화 시대 근대화 이념을 직설적으로 외치고 있다. 이 분수대 앞에서 노년층은 본인의 젊은 시설을 회상하며 향수에 잠길 수도 있겠지만, 이곳을 바쁘게 스쳐 가는 대부분 이들에게 이 분수대의 메시지는 시대착오적이거나 공허한 과거의 흔적이다. 대상지에서 한참 사람들을 관찰했다. 이 분수대를 바라보는 이는 거의 없었다. 무표정하게 지나가는 이들에게 이 분수대와 주변의 녹지는 길을 막는 거대한 장애물로만 느껴졌다. 대상지는 이 분수대 때문에 활용하기도 어려웠다. 중심부를 거대하게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광장에서 새로운 활동이 일어나기도 어려웠으며, 휴식을 취하려 해도 마땅히 앉을 장소가 없었다. 굳이 머물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시선은 분수대로 향하는데, 조각이 전하려는 이야기는 일방적이고 강압적이어서 한참 보기에는 불편했다. 사실 저 분수대는 사라지는 것이 맞았다. 육중하고 직설적인, 저 불편한 남근적 분수대가 사라지면 수많은 가능성이 열린다. 아마도 이 공모 주최 측의 의도는 분수의 제거일 것이며, 대부분의 공모 참가자는 저 분수를 없앨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한편으로 분수를 없애기로 하면 또 다른 모순적 지점에 부딪힌다. 이미 30년 가까이 저 분수는 이곳의 장소성을 규정해 왔다. 지금은 의미를 상실한 1970년대의 가치와 이념도 분명 우리의 일부다. 좋든 싫든 우리는 그 1970년대를 딛고 지금의 우리의 모습을 만들었다. 효용이 다했다고 사라져야 한다면 많은 것을 우리는 버려야 한다. 그래서 분수대를 존속시키면서 없애는 모순적인 설계를 제안했다. 분수대를 반전시켰다. 말 그대로 지면을 기준으로 분수대를 뒤집었다. 분수대의 형상은 주형을 떠 유리로 제작한다. 과거의 상징인 청동의 조각과 돌의 탑은 가장 가볍고 투명한 유리의 형태로 역전된다. 지하의 뒤집힌 조각은 과거가 여전히 우리의 일부로 남아 다른 방식으로 존재해 현재의 가치와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로써 지상을 차지하고 있는 남근적 분수대는 사람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분수대의 상징성은 자궁과도 같은 공간으로 내화된다. 숨겨진 역동적 지하의 세계에 마련된 신전은 과거를 새로운 상징으로 치환하고 지상은 살아 있는 잠재성을 위한 표면이 된다. 역전된 분수대는 물을 담는 수반이 된다. 수평의 수반은 사람들의 시선을 외부로 열어준다. 번잡한 도로와 광장을 막는 나무나 시설을 들여놓지 않으려 했다. 가장 많은 이야기를, 그리고 변화의 풍경을 담고 있는 도시적 경관을 바라볼 때 멈추어 바라보는 자리가 머무는 자리가 된다. 이미 가장 역동적인 무대가 있었음을 발견할 때 사람을 위한 객석이 마련된다. 수반의 주변에는 잔디광장을 만든다. 사람은 잔디를 밟을 수 있다. 맨발로 거닐 수 있고 누울 수 있다면 다른 일도 하게 된다. 이곳에는 사람이 모이게 된다. 사람이 거닐 수 있는 반경의 도심 일대에 유일하게 열린 녹색이기 때문이다. 물이 담긴 수반은 지하에서는 투명한 천창이자 조형물이다. 투명하기에 빛은 지하로 들어온다. 그러나 물이 있기에 빛은 강하지 않고 여과된 투영이 된다. 유리 수반의 아래에는 작은 정원을 만든다. 회현 지하상가와 신세계 백화점 지하의 결절점에 놓이는 이 지하의 공간은 비밀의 정원이다. 이곳은 도시의 분주함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는 시적 공간이 된다. 그 시는 가장 강렬했고 희망에 넘쳤고 동시에 가장 어두웠던 1970년대의 메시지가 역전된 오늘날을 위한 위로의 시다. 이 안은 1등 없는 공동 2등 안으로 뽑혔다. 몇 개월 뒤에 공모전을 주최한 구청에서 연락이 왔다. 이곳의 새로운 미디어 분수를 설치하는 프로젝트에 관한 자문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미국의 저명한 조경가가 설계를 진행한 안이었다. 새로운 안에는 지금의 분수대보다 세배는 높아 보이는 거대한 미디어 기둥이 솟아 있었다. 인공(人工)과 자연(自然) “어떻게 녹색으로 처리할 수 없을까요?” 조경가로서 가장 많이 듣는 모순적 요청 중 하나는 인공물을 어떻게든 녹색으로 처리해달라는 것이다. 그럼 도대체 왜 그런 인공물을 만들었단 말인가. 이런 요청은 대부분 다음과 같은 이유로 불가능한 요청으로 판명 난다. 첫째, 시기의 문제. 대부분 시기가 한여름인지 한겨울인지 상관없이 당장 녹색을 원해서 안 된다. 둘째, 장소의 문제. 식물이 자랄 수 있는 공간이 아닌데 녹색을 원해서 안 된다. 셋째, 관리의 문제. 식물을 심을 수 있다 하더라도 곧 죽어버리거나 엄청난 관리가 필요한 상황에서 녹색을 원해서 안 된다. 그런데 이 모든 문제는 하나의 무지 혹은 착각으로 귀결되는데, 자연의 식물이 인공물과 같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번 자문도 그랬다. 서울로7017과 서울역 북측에 폐쇄된 주차 램프를 연결하는 프로젝트 자문을 해야 했다. 이미 서울역 롯데마트 야외주차장에 옥상정원이 만들어지고 있었고, 서울시는 공공건축가에게 연결 공간에 구조물 설계를 의뢰했다. 이미 있는 낡은 건물 위에 구조물을 올리는 일이라 건축가는 경량의 비계 구조물을 제안했다. 예쁘고 아니고를 떠나서 이 구조물은 누가 보더라도 임시 공사장을 연상시켰고 빨리 철거하라는 민원이 빗발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래서 식재로 구조물을 가려 공사 시설 같은 느낌을 완화할 방법이 없는지 나에게 물어보는 것이었다. 대상지는 식물이 자라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극악한 조건을 갖고 있었다. 자연 지반이 전혀 없었고 구조물이 낡아 새로 토심을 확보할 수도 없었다. 주변 건물로 인해 항상 강풍이 불어 웬만한 식물은 이번 생은 빨리 마감하겠다고 결심할 것 같았다. 폐쇄 램프 아래 공간이 있었으나 정화조배관과 공조 설비가 잔뜩 있어 난감했다. 나는 녹색으로 무엇을 시도하든 망할 것이라는 저주 같은 자문 의견을 조목조목 설명하고 마음 편하게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담당 공무원에게 연락이 다시 왔다. 어떻게 방법이 없겠냐고, 그냥 내가 프로젝트를 맡아주면 안 되겠냐고. 어 라? 원래는 안 되는 것이지만 조경왕이 맡으면 달라질 수 있지. 덥석 미끼를 물어 버렸다. 일단 입체적 격자 형태의 구조물에 담쟁이 따위를 올려봤자 별 효과가 없어 보였다. 극적인 효과를 위해 기존의 격자 단위를 분절해 입방체 안에 더 작은 입방체가 들어있는 마트료시카 같은 구조를 제안했다. 그리고 그 구조를 녹색으로 덮어 떠있는 거대한 식물의 구름 같은 하늘 정원을 만들고자 했다. 문제는 추가된 구조체와 식물의 무게를 기존 건물이 견딜 수 있냐는 점이었다. 구조기술사는 절대 불가능하다고 했다. 나도 학부 때 건축을 전공했는데 내가 한번 풀어보기로 했다. 램프 가장 아래층에 자연 기반처럼 보이는 조그만 땅에 전체 구조를 지탱할 수 있는 트러스 기둥을 제안해 전체 하중을 받는 안을 그렸다. 그 안을 보고 구조기술사는 다른 사람을 알아보라고 했다. 그래서 알아봤는데 안을 보고 모두 자기들은 맡을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다가 OMA의 특수 입면을 풀었다는 회사를 소개받았고, 대표님은 안 되는 게 어디 있냐고 환하게 웃었다. 물론 실무자들의 표정은 일그러졌지만. 어쨌든 된다고 하니 서울시에도 해결될 것 같다고 보고를 했다. 팀장님은 내가 만든 거대한 신단수 같은 녹색의 인공 구조물을 무척 좋아했고 예산은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때 한 주무관이 물었다. “그런데 저 식물은 진짜 식물이죠?” 물론 가능하다고 말하려다가 뒷감당이 두려워 요새 가짜 식물도 진짜 같다고 대답했다. 가짜 식물이라는 이야기에 좋아하던 팀장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나는 겁을 주었다. 당장 가을에 완공해야 하고 겨울에 사람들이 볼 텐데 진짜 식물로는 다 죽어요. 관리도 절대 안 됩니다. 책임질 수 있겠어요? 마지못해 모두가 가짜 식물로 가는 데 동의했다. 일은 착착 진행되는 듯했다. 과장님도 오케이, 팀장님도 오케이, 부시장님이 문제였다. 그냥 한마디를 하셨다. 너무 과한데. 모든 것이 재검토에 들어갔다. 우선 30m 길이의 신단수 기둥이 날아갔다. 나는 예전의 구조기술사에게 읍소를 했다. 다시 어떻게 구조 해결이 안 될까요? 기술사는 마지못해 몇 개의 추가 입방체와 가짜 식물들을 허용해 주었다. 원안에 비하면 거의 탈모 수준의 엉성한 녹색 구름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더 이상 서울의 가장 큰 나무는 존재하지 않으니 프로젝트의 새로운 스토리를 짜야했다. 사람들이 진입하는 공간에는 진짜 식물이 심긴 정원을 만들었다. 가을에는 갈색이지만 봄에 다시 녹색으로 변하는 자연 그대로의 시간성을 담는 정원이다. 하늘에는 가짜 식물로 이루어진 인공의 정원이 있다. 추운 겨울에도 녹음이 우거진 하늘 정원은 초현실적 풍경을 만들어낸다. 램프 바닥에는 숨겨진 비밀의 정원이 있다. 간접광만으로 자랄 수 있는 음지 식물과 함께 흙 위에 자갈과 모래, 바크를 덮은 마른 정원으로 꾸몄다. 지하의 비밀 정원에는 자연스럽게 씨앗들이 날아와 잡초가 자라날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의도되지 않았던 식물들로 채워진 지하의 정원은 점차 색이 바래지는 하늘의 인공 정원과 대비를 이룬다. 가장 푸르렀던 인공의 자연과 가장 회색빛이 었던 야생의 자연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역전된다. 시공 팀의 피, 땀, 눈물로 프로젝트는 기간에 맞춰 완공됐고 원래 꿈꾸었던 그대로는 아니지만 꽤 멋진 인공과 자연이 공존하는 정원이 만들어졌다. 철이 바뀌고 이듬해 늦은 봄에 담당자에게 연락이 왔다. 공공 미술품을 폐쇄 램프에 설치해야 하는데 정원을 철거해도 되겠냐고. “어쩔 수 없죠”라고 대답했다. 사실 진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환경과조경429호(2024년 1월호)수록본 일부
[조경가 김영민] 인터뷰: 이론이 죽은 시대의 설계
삐딱한 시선이 조경에 닿기까지 -수상 축하드립니다. 시상식에서 이미 들었지만, 독자들에게도 간단한소감을 부탁드릴게요. “몇 차례 젊은 조경가에 지원하라는 말을 들었지만 고사했던 터라 조금 민망하기도 합니다. 이 공모의 취지가 말 그대로 젊은 조경가, 지금 막 사무소를 연, 설계를 잘하지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조경가를 조명하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교수가 지원하는 건 아니라고 봤죠. 지원했다가 떨어지면 머쓱할 것 같기도 했고요.” -마음을 바꾸게 된 이유는요. “추천을 받았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도 굳건했는데, 이번 해가 나이 제한 때문에 상을 받을 수 있는 마지막이라는 말을 들으니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다른 이유도 있었어요. 최근 들어 바이런과 함께 본격적으로 설계 활동을 한 뒤로 교수가 설계하는 것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들려오더라고요. 교수면 연구와 가르치는 일에 집중하라는 걸까. 하지만 설계를 가르치는 교수인데 설계를 하지 않을 수 있나. 의문이 들어 이야기를 나눠보니 포인트는 그거였어요. 교수라면 업과 경쟁하는 설계가 아닌 교수만이 할 수 있는 설계를 해야 한다는 것. 나름대로 그런 설계를 하고 글로서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스스로도 명료하게 정리하지 못한 상태였더라고요. 이번에 지원서를 작성하고 포트폴리오를 만들면서 교수가 할 수 있는 설계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어요.” -수상자분들이 공모 지원과 특집 준비를 하며 자신의 작품과 설계 철학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고 하더라고요. 인터뷰를 준비하며 그간 썼던 글을 봤는데, 퍼싱 스퀘어 개조 공모 평문에 유년 시절을 로스앤젤레스에서 보냈다는 얘기가 있어요.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LA라고 하는데 다들 농담인 줄 알아요. 아버지가 그쪽에서 공부를 해서 저도 한 살부터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 LA에서 보냈거든요. 1학년을 다 마치지 못하고 왔으니 교포 문화가 몸에 깊이 배었다거나 정체성에 혼란을 겪거나 하진 않았어요. 그런데 LA에 대한 막연한 향수가 있긴 하고요.” -대학에서는 건축과 조경을 공부했네요. 복수전공을 한 건가요? “네. 조경학과에 입학했는데, 사실 처음에는 건축에 관심이 있었어요. 과학고를 다녔는데, 학교 특성상 과학과 수학에 특화된 수업이 주였고 미술 같은 과목은 전혀 없었죠. 그런데 특이하게 소설을 읽는 데 시간을 제일 많이 썼어요. 제가 원래 좀 삐딱한 구석이 있거든요. 만화나 영화를 봐도 세상을 구하는 주인공보다는 악당들이 더 흥미로웠어요. 모두가 A라고 하면 괜히 B라고 답하고싶어 하고요. 주변 사람들이 모두 과학과 수학에 집중하고 있으니 나는 좀 다르고 싶은 거예요. 매일 고전소설과 역사책에 파묻혀 있으니 친구들이 문과 가야 하는데 학교 잘못 온거 아니냐고 말하곤 했죠. 순수 미술을 전공하고 미술학원을 운영한 어머니의 영향인지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기도 했어요. 아주 어렸을 때의 꿈은 만화가였는데, 슬쩍 그 뜻을 내비쳤다가 어머니가 만화책을 싹 다 내다버리는 통에 마음을 접었죠. 제 성향을 깨닫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인문적이면서 예술적인 학문이 건축밖에 안 떠올랐어요. 사실 조경은 잘 몰랐는데, 어머니 지인 중에 건축학을 공부하신 조경학과 교수님이 있었어요. 그 분이 건축과 조경을 같이 공부하는 건 어떻겠냐고 조언을 해주셨죠. 그래서 조경학과에 들어가면서 건축학과 수업도 일찌감치 함께 듣기 시작했어요.” -결국에는 조경을 선택하셨네요. “건축을 실제로 배워보니 설계 교육도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고 흥미로웠어요. 그런데 건축의 특성상 자유로운 창작보다는 퍼즐처럼 맞추는 식의 설계를 하는 면이 있어요. 예를 들어 화장실이라는 공간을 설계할 경우, 수도 위치에 따른 욕조와 변기의 위치, 변기와 벽 사이의 거리, 전기 배선 위치 등을 한 번에 고려해 조립하듯 공간을 만드는 거죠. 이런 면이 좀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조경은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느껴졌고요. 그러던 중 칼 스타이니츠(Carl Steinitz) 교수의 한 인터뷰를 봤는데 대답이 인상적이었어요. 가장 잘한 프로젝트가 뭐냐는 질문에, 계곡을 개발하는 사업에서 건축과 토목과 논의하고, 그곳을 왜 개발하면 안 되는지 피력해서 그대로 둔 프로젝트를 뽑았더라고요. 멋있었어요. 조경을 해야겠다 싶었죠. 건축은 기본적으로 구축에서 출발해요. 그에 상응하는 비움이라는 개념이 있지만 조경과는 완전히 다르죠. 그대로 두는 것만으로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조경이 특별하게 느껴졌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건축은 참 매력적인 학문이고, 그래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조경설계 시스템과 담론이 조금 만 들어졌지만, 대학에 다닐 당시에는 서점에 조경 서적 코너가 없었어요. 반면 건축은 풍부했죠. 그 담론들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면 조경에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학생들에게 늘 건축에 대해 공부 하라고 말해요. 많은 사람이 건축이 조경을 잘 모르고 오해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조경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건축을 더 몰라요.” -워낙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 대학 시절은 어떻게 보냈는지 궁금해요. “사실 대학 시절에 공부를 엄청 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어요. 교수님이 우스갯소리로 서울대에 학사 경고 시스템이 있었다면 너희 중 반은 경고를 받았을 거라며 반성하라고 할 정도였죠. 물론 최선을 다해 공부를 하긴 했지만, 그 목표가 올 A를 받는다는 식은 아니었어요. 여행도 많이 다녔고 책도 많이 읽었죠. 모든 건 제로섬이라고 생각해요.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은 건 맞지만, 하나에 깊게 파고드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싫증을 잘 내는 편이거든요. 어느 달은 책 한 권 읽지 않다가 어느 달은 주구장창 책 읽는 데만 몰두하기도 하고, 설계하다가 재미없어 글 쓸래 하고 글만 쓰기도 하고요. 이런 성정이 언어, 책, 운동 등 다양한 데 깊고 얕은 관심을 두게 만든 거 같아요.” -졸업 후 여러 가지 선택지 중 유학을 택했네요. “당시 보통 학교나 설계사무실에서 외국 조경가들의 작품을 참고하면서 설계를 했거든요. 그래서 기왕 설계를 시작할 거라면 막연하게 그들에게 한 번 배우고 그쪽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가서 다양한 사람을 만났을 텐데,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없나요. “학교 수업을 통해 배우기보다 동료들한테 많이 배웠어요. 이론이나 지식을 얻은 게 아니라 태도와 분위기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하버드GSD의 공간 구조가 특이해요. 건물 절반 이상이 스튜디오인데, 테라스식으로 되어 있고 벽이 없어 개방적입니다. 자연스럽게 건축이나 도시 등 다른 과의 스튜디오를 볼 수 있죠. 입학 동기 중 건축과에 전설적인 인물 두 명이 있었어요. 한 명은 양성구 건축가인데, 세계적 공모전을 휩쓸어서 건축가를 꿈꾸는 학생들의 영웅 같은 사람이었죠. 다른 한 명은 봉일범 교수(국민대학교)인데 대학생 시절에 마이클 헤이스(Michael Hays)의 『1968년 이후의 건축이론』(2010)을 번역한 사람이었습니다. 같은 유학생이지만 봉일범 교수는 이미 그때 10권 분량의 책을 집필하는 중이었어요. 마이클 헤이스 책이 어려운데 어떻게 이해했냐고 물었더니, 자기도 읽어보니 어려워서 그가 책에 인용한 모든 책을 다 읽었다고 답하더라고요. 대단하죠. 그 둘에게 큰 영향을 받았어요. 교수 중에는 칼 스타이니츠가 떠올라요. 광역적 맥락에서 계획적 조경설계를 하는 교수인데, GIS 컴퓨터 분석 시스템을 만들었고 ArcGIS 프로그램을 개발한 에스리Esri 사의 대표예요. 그에게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건축과 도시를 공부하고 도시 및 지역계획 박사학위까지 받은 뒤 29살의 젊은 나이에 하버드 교수가 됐는데, 왜 조경학과 교수가 됐는 지 물은 적이 있어요. 스타이니츠 교수가 이렇게 답하더라고요. 박사 과정에 들어가기 전 20대 시절 세계 일주를 해보고 싶어서 인도와 동남아쪽을 둘러봤대요. 1960년대 즈음일 텐데, 여행하면서 너무 열악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들의 환경을 바꿔줄 수 있을까. 건물을 바꾼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도시의 문제도 아니고, 고민하다 보니 더 나은 세계를 만들 수 있는 건 조경이라는 결론에 다다른 거죠. 그의 말투가 굉장히 단호해요. 학생들의 말을 끊고 자신의 의견을 펼치기도 하는데 너무 명료한 주장에 반박을 할 수가 없죠. 미국 경관생태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리처드 포먼(Richard Forman)의 수업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야외 수업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2박 3일 정도 텐트나 캐빈에서 묵으며 생태 조사를 해야 하거든요. 그날도 생태 조사를 나가 늦은 밤 둘러앉아 있었는데, 한 학생이 왜 본격적으로 생태 연구를 하는 곳이 아닌 하버드 GSD를 택했냐고 물었어요. 포먼은 자신의 연구 결과를 교수와 박사, 연구자만 읽는 것에 회의를 느꼈다고 하더라고요. 연구를 하는 이유는 생태적 설계를 통해 환경 파괴를 막는 것인데 이 원리를 현실에 적용하는 설계가와 계획가에게 알리려면 어떻게 할까 고민한 결과 하버드 GSD를 찾게 되었다고요. 그 흔들림 없는 대답이 마음에 깊이 남았어요. 멋진 꼰대랄까요. “넌 틀려, 난 알아”라고 말하는데 불쾌하기보다 내가 저 나이가 되면 저런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졸업 후에는 귀국하지 않고 SWA에서 일을 했어요. 입사 과정이 궁금해요. “아틀리에 성격의 사무소를 갈지, 더 큰 규모의 사무소를 갈지 고민하며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중에 잡 페어가 열렸어요. 분위기를 볼 겸 방문했다가 SWA 부스에 들렀습니다. 인터뷰 분위기가 좋았는데 회사 위치가 오렌지카운티더라고요. 학교를 다니며 오렌지카운티에 위치한 회사에서 인턴을 했는데, 평화로운 동네라 그런지 일상이 지루하게 느껴져서 그 지역 사무소는 피하고 싶었어요. 아쉬웠죠. 그런데 잠시 뒤 SWA 직원 두 명이 작업물을 보고 싶다며 저를 찾아왔어요. 포트폴리오도 없는 상태라 노트북으로 그래픽 몇 점을 보여줬고 자연스럽게 인터뷰로 이어졌죠. 망설이던 차에 두 분이 LA 오피스를 냈다는 말을 해서 관심이 갔어요. 연 지 2년 밖에 안 된 사무소고, 기존 SWA와 달리 공모전 참여 등을 하려고 본사에서 독립한 사무소라고 하더라고요. 근무 조건도 마음에 들어서 입사하게 됐습니다.” -SWA 생활이 지금의 설계에 영향을 끼친 점은 없나요. “SWA는 스튜디오의 연합체에요. 스튜디오마다 디자인 소장(principal)이 다르죠. 학교 설계 스튜디오와 비슷하다고 보면 돼요. 그래서 SWA의 색은 색이 없는 거예요. 만약 제 설계에 어떤 색이 느껴진다면 제가 있던 스튜디오를 이끌었던 디자인 소장의 영향이 아닐까 합니다.” 학의 영역에서의 설계 -6년 정도 SWA에서 일하다가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시립대에 교수로 부임했어요. 교수가 되면 겸직 문제로 설계를 자유롭게 할 수 없는데, 아쉽지는 않았나요. “마의 3의 배수라는 말 아세요? 3년, 6년, 9년처럼 3의 배수가 되는 해 마다 직장 생활에 위기가 찾아온다는 말이죠. SWA에 6년 정도 근무했 을 무렵, 저 역시 회사를 옮겨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어요. SWA 스튜디오에는 각각 디자인 소장과 매니지먼트 소장이 있어요. 3년차 만에 상급자들이 회사를 떠나면서 제가 스튜디오의 3인자가 됐죠. 디자인 소장이 저를 키워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는지 일찌감치 매니지먼트를 시켰어요. 문제는 제가 프로젝트 하나를 담당하는 위치에 서다보니, 흥미로워 보이는 프로젝트는 디자인 소장이 맡아버리게 되는 거예요. 지루하더라고요. 그러던 차에 서울시립대에서 설계교수를 뽑는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지원하게 됐어요. 사실 최종 발표에서 파워포인트 자료의 폰트 가 깨지는 바람에 당황했거든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자료를 보며 프레젠테이션을 해야 했죠. 그런데 오히려 그 상황을 의연하게 대처하는 모습이 좋은 평을 받았나 봐요. 운이 좋았습니다.“ -학교 선배가 ‘72시간 도시생생 프로젝트’를 김영민 교수의 지도를 받아 참여했던 게 기억나요. “막 교수가 됐을 무렵 제 설계교수 모델은 명확했어요. 정욱주 교수(서울 대학교)와 김아연 교수(서울시립대)처럼 활동하는 걸 상상했죠. 미국에 있을 당시 두 분이 큰 공모에 참여하는 걸 보며 재미있겠다고 생각했거든요. 당시가 2008년이었는데, 리먼 브라더스 사태가 터진 때였어요. 대부분 의 프로젝트가 중단된 터라 한국의 조경설계 여건이 더 좋아 보이기도 했습니다. 교수가 되면 일이 밀려 들어올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해외 유학파 교수의 조경설계가 신선하게 느껴지던 시기가 저물고 있었던 것 같아요. 6년이라는 설계 경력이 조금 짧기도 하고, 대형 공모전도 줄 어드는 추세였습니다. 교수가 된 지 얼마 안된 터라 수업 준비를 하느라 바쁘니, 72시간 도시생생 프로젝트 같은 기회가 조경설계를 해볼 수 있는 기회였죠. 그게 교수가 된 뒤 참여했던 첫 설계일 거에요. 지금도 많 은 조경설계 교수가 비슷한 프로젝트로 학생들과 설계를 해요. 한국의 경우, 공무원법과 사학법에 따라 교수는 겸직을 할 수 없으니까요. 처음 큰 건축 공모전에 참여하게 된 것도 우연이었어요. 본래 다른 교수에게 협업 요청을 했는데, 그분이 일정이 바빴고 대안으로 저를 추천해주었더라고요.” -자기소개서에 ‘학의 영역에서의 설계’, ‘학과 업의 공유지대’라는 표현 이 있어요. “교수만이 할 수 있는 설계”와 연결되는 지점일까요. “맞아요. 몇 해 전부터 교수만이 할 수 있는 설계가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어요. 어렴풋하게 답을 내리자면 이론적 담론을 만드는 설계가 아닐 까 해요. ‘조경비평 봄’을 하면서, 작가론이 뚜렷한 한국 조경가가 있는 지 고민해본 적이 있어요. 쉽게 떠오르지 않더라고요. 건축 역시 1990년대가 역사상 가장 실무가 이론에 근거를 두고 있었고, 담론이 풍부했 던 때에요. 2000년 이후부터 꺾이기 시작했죠. 그 결정탄을 날린 게 렘 콜하스였구요. 이론이 왜 필요하지 않은지를 이론적으로 설명한 희대의 천재죠. 그 결과 핫한 설계의 시대가 저물고 쿨한 설계의 시대가 도래했 어요. 핫한 설계는 쉽게 말하면 아방가르드로 볼 수 있어요. 건축, 조경, 도시가 부조리한 사회를 개혁해야 하며 공공성을 가져야 하죠. 쿨한 설 계는 말 그대로 쿨한 태도를 취하는 거에요. “돈을 추구하는 게 나빠? 건축에 꼭 어떤 의미가 있어야 해? 어려운 얘기하지 말자. 보기에 좋고 멋지네, 느낌 있으면 됐잖아” 하는 식으로요. 최근에는 짓는 조경이 중 요해졌죠. 그게 쿨한 설계를 닮았어요. 의미를 담지 않고 보기에 좋은 설계를 하면 되는 면죄부가 되어주기도 하거든요. 여기서 중요한 지점이 있어요. 건축은 핫이 쿨에게 패하는 과정에서 치열한 논쟁이 있었거든 요. 그런데 조경은 없었어요. 기존 세대의 조경에 대한 치열한 비판 의식 없이 건축의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인 경향이 없지 않아 있죠. 지금의 짓는 조경은 페터 춤토르Peter Zumthor의 짓는 건축과는 다르다고 봐요. 짓는 조경이 나쁘다라는 말이 아니에요. 하지만 짓는 조경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예술로서 조경을 주장한다면, 예술이 꼭 행복하고 좋은 것만은 뜻하지 않기에 더욱 다양한 조경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겠 죠. 어떤 조경이 필요한지 계속해서 질문을 던져야 하고, 그러한 설계를 나는 교수로서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설계 철학으로 모순지도를 이야기했죠. 『스튜디오 201, 다르게 디자인 하기』에 비슷한 문장이 있더라고요. “정을 활용하고 변형한 반의 디자 인까지 넉넉히 표용한다.” 모순지도를 이 문장의 확장판이라고 봐도 되나요. “그런 문장을 썼었군요. 지금 생각났어요. 그때부터 모순지도의 씨앗이 제 안에 있던 모양입니다. 모순지도의 방식으로 설계를 하겠다고 규정 했던 것은 아니지만요. 다양성을 포용하는 조경 -김영민 교수가 펜을 잡고 설계 도면을 그리는 모습을 상상한 적이 없어요. 주로 기본설계의 틀이나 개념을 세우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이남진 소장의 에세이를 보니 직접 도면을 그리기도 하나 봐요. “기본설계 틀이나 개념에 관심이 많긴 하지만, 당연히 도면도 그립니다. 협업하는 팀원의 성향에 따라 제 역할을 조절합니다. ‘용산공원 설계 국 제공모’에서는 모든 공간을 세세히 그릴 필요가 없었어요. 그 역할은 최신현 대표(씨토포스)가 하니까요. ‘새로운 광화문광장 조성 설계공모’의 경우에도 제가 공간을 디테일하게 설계하지 않았어요. 주로 큰 개념을 던졌죠. 하지만 이런 설계만 해서는 안 돼요. 이 부분이 교수의 설계가 비판을 받는 지점 중 하나이기도 하고요. ‘춘천 시민공원 마스터플랜 설 계공모’에서는 모든 다이어그램과 설계안을 직접 그렸어요. 그런데 사실 요즘은 프로젝트를 할 때 모든 설계를 혼자 컨트롤하는 설계는 지양하려 합니다. 다른 직원들이나 학생들이 설계를 통해 성장의 가능성을 못 느낄 수도 있어서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나 전부 컨트롤한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합니다.” -개념에서 출발하는 설계를 하는데, 혹시 형태적 시그니처는 없나요. “개념적 방향은 가닥이 잡혔지만, 형태의 방향은 없는 것 같아요. 모순 지도는 제 설계의 개념적 정체성이니까요.” -말할 수 있는 채널이 많아지고 있는데 자기 설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적어진 것 같아요. 그래서 몇몇 칼럼을 보면 반가운 마음이 들더라고요. “패배록”(라펜트, 2020년 6월 10일)은 용기가 있어야 쓸 수 있는 글이라 재미있게 읽었어요. “말하는 사람이 없다는 건 담론이 없다는 거예요. 저는 말할 수 있는 채 널이 적다고 생각하는 편이고요. 건축의 경우, 오래 지속되지 않더라도 서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획이 일어나거든요. 건축에서 기획 한 ‘종이와 콘크리트’ 전시의 토론에 가봤는데, 너무 놀라웠어요. 교수, 학생, 소장 등 여러 사람이 자유롭게 논쟁하더라고요. 교수의 말에 학 생도 편안하게 반박할 수 있는 분위기였어요. 조경에도 그런 토론의 장 이 만들어졌으면 좋겠어요. 그게 교수의 역할이기도 하죠. “패배록”에 이어 이해인 소장(HLD)이 “정신승리록”이라는 글을 써 응답했을 때 너무 기뻤어요. 아쉽게도 이야기가 더 이어지진 않았지만요.” -앞서 광화문광장 이야기가 나온 김에 개인적 궁금증인데, 광장과 공원은 어떻게 달라야 하나요. -앞서 광화문광장 이야기가 나온 김에 개인적 궁금증인데, 광장과 공원 은 어떻게 달라야 하나요.“광장은 공원이 되면 안 돼요. 우리가 광장에 대해 오해하는 점이 있어 요. 광장의 핵심이 비움은 맞지만, 우리 광장의 비움은 서양 광장의 비 움과 같을 수 없습니다. 서양 광장에서 비움이 의미를 갖는 건 주변이 낮고 빽빽하기 때문이에요. 광화문광장의 경우 주변을 도로가 두르고 있죠. 광장을 마당의 개념과 혼동하는 경우도 있는데, 마당은 한옥이라 는 건물이 있어야 의미를 갖습니다. 광장이 적절한 비움을 갖게 되면 그 주변의 존재가 드러나요. 광화문광장의 경우, 광장을 비워 북악산이나 경복궁의 존재를 드러나게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작정 비울 경우, 거대한 바닥과 광장 주변의 고층빌딩이 부딪치게 돼요. 그 충돌을 완화할 요소가 녹지였습니다. 광장의 비움을 유효하게 만드는 건 이 녹지의 비율이에요. 공원의 녹지와는 다르죠. 다 숲으로 만들어서도 안 되고요. 일정 부분은 숲으로 어떤 부분은 건물과 광장을 연결하는 매개 로 쓰며 다양한 녹색을 만들어내려 했어요.” -‘벽과 경계의 정원’ 설명에 눈이 가요. “정원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 없 이 유행되는 양상에 대해 정원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고 했죠. “꽃과 식물을 가꾸는 문화가 활성화되고 다양한 정원박람회가 열리고 있지만 정원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은 없는 상태에요. 조경이 탄 생할 때 정원과의 전투가 있었거든요. 랜드스케이프 가드닝landscape gardening이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landscape architecture로 바뀌며, 그 싸움에서 패배한 정원이 우리 사회에 어떤 의미로 남았는지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원은 공원이 사회적 인프라로 자리매김하면서 상실 한 예술적 가능성을 살릴 수 있는 매체라 봅니다. 슬픈 공원이나 외로 운 공원은 이상하지만, 슬픈 정원이나 외로운 정원은 존재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나요. 정원은 꼭 공공적이거나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공간으로 기능하지 않아도 되거든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줄 거라 봅니다. 아파트 조경 역시 정원에 가까워요. 정원의 한 가지 속성이 사적이라는 점이 니까요. 그런데 묘한 점이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사적 공간이라는 거죠. 이 독특한 형태의 정원을 상업적이라는 이유로 무시하고 제대로된 담론 을 만들어내지 않으려는 게 아쉬워요. 사실 아파트 조경이 조경 산업에 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잖아요. 국민의 반 이상이 아파트에 사는 시대에 사람들은 어쩌면 공원보다 아파트 내 정원에 자주 방문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 식물을 어떤 존재로 생각하는지도 궁금해요. “식물이 조경의 전부는 아니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에요. 저는 식물 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매체라고 봐요. 특히 식물은 ‘시간성’을 부여 하는 독특한 매체에요. 봄, 여름, 가을, 겨울 같은 계절은 물론이고 낮과 밤 시시각각 변하며 조경에 시간성을 만들어주죠. 조경에서 식물을 빼면 건축과 다를 바가 없어요.”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조경은 어떠해야 할까요. “조경은 자꾸 건축이나 토목이 되기를 욕망해요. 조경이 무엇인지에 대 해 고민하는 대신, 조경은 왜 건축처럼 할 수 없는지, 토목처럼 될 수 없 는지, 예술과 같을 순 없는지 이야기하려고 해요. 어쩌면 조경의 정체성 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무언가가 되기를 욕망하는지도 모릅니 다. 정체성이 없다는 걸 약점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저는 이 자유로움을 무기로 삼기 바랍니다. 건축에는 뚜렷한 본질이 있어요. 피라미드가 원형이고, 완벽한 영속불멸을 꿈꾸죠. 조경에는 이런 강박이 없어요. 조 경은 무엇이든 될 수 있죠. 다양성의 시대에 이보다 큰 장점이 있을까요. 다만 조경이 다 같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비주류가 주류를 정복하는 조경이 아니라 형태를 추구하는 조경, 개념을 추구하는 조경, 관계를 추구하는 조경, 짓는 것을 추구하는 조경 등 다양한 모양의 조경이 공존하기를 바랍니다.”
[조경가 김영민] 젊은 그대에게
꽃으로만 설계하는 것은 위험하다. 금방 저물기 때문이다. 젊음을 무기로 하는 것은 위험하다. 곧 사라지기 때문이다. 언젠가 사라질 젊음을 주목하고 상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젊은 작가상, 젊은 예술가상, 젊은 과학자상, 젊은 건축가상. 그 취지를 들여다보면 젊은 작가들을 ‘발굴’하고 ‘홍보’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한다. “한국 조경의 미래를 설계하는 젊은 조경가를 발굴하고 그들의 작품과 생각을 널리 알리고자 매년 선정” 한다는 ‘젊은 조경가’의 취지에 비춰 볼 때도 그의 수상은 수상하다. 발굴되어야 하는 존재도 아니고 널리 알릴 필요도 없는, 이미 한국 조경계의 큰 기둥이기 때문이다. ‘젊음’의 유효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그의 수상에 의심쩍은 눈빛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의외라고 생각했으니까. 오히려 그래서 더 걱정스러운 마음이다. 기성 조경가이자 교육자로서 그가 보여준 역량과 가치가 ‘그들만의 리그’를 우려하는 눈초리로 위축되지 않을까 여러 마음이 교차한다. 나는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동료이자 동지다. 나이로 치면 선배겠지만 그를 처음 만난 게 우리 대학에 임용되는 과정 중이었던 터라 그와의 첫 출발 자체가 동료다. 그래서 술자리에서도 쉽게 말을 놓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젊은’이라는 곧 사라질 형용사를 제거한 온전한 설계 교육자 김영민에 대해 짧게 얘기하려 한다. 설계 교육과 설계 실무의 중간 영역 설계를 가르치며 설계 프로젝트를 해온 나의 활동 영역을 이렇게 표현해 왔다. 설계 교육과 설계 실무의 중간 영역. 그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혹자는 왜 교수가 이 좁은 설계 실무 바닥까지 탐내냐고 질책하기도 한다. 교수의 타이틀로 모두가 어렵게 성취하는 일을 쉽게 가져간다면 당연히 들어도 될 비판이다. 우리는 그러한 비판과 비난의 대상이 되기 쉬운 존재들이다. 그러나 조경이라는 실용 학문에서 교수자의 실무적 감각은 미래의 전문가를 양성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량이다. 특히 설계 교과목을 가르치는 자들은 실무에서 부딪치는 시행착오에 대한 해법과 실무에서 결여된 새로운 비전을 교육적으로 번역해 학생들에게 전달할 의무를 가진다고 믿는다. 그는 그러한 점에서 실무와 교육, 이론과 현실 그 중간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실천하는 설계 교수다. 나는 그와 설계 교육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다른 화려함에 가려져 있던 교육자로서의 그의 참된 모습을 비로소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젊음을 대표하는 것이 전진과 성취라면, 그래서 기성세대를 비판하는 것이 젊음의 특권이라면, 이제 그는 그것을 바탕으로 공유와 분배를 고민할 시점에 곧 설 것이고, 그 비판의 정점에서 대안을 모색하는 무거운 책임의 시대로 들어설 것이다. 그렇게 그는 앞으로 설계 교육의 리더로 또 다른 모습을 당당히 증명하리라 믿는다. *환경과조경429호(2024년 1월호)수록본 일부 김아연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와 동대학원, 미국 버지니아대학교 건축대학원 조경학과를 졸업했다. 조경설계 실무와 설계 교육을 넘나드는 중간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제주 중문대포해안 주상절리대 경관 개선사업 설계팀의 디자인 감독을 맡았다. 자연과 문화의 접합 방식과 자연의 변화가 드러내는 시학을 표현하고 사회적으로 실천하는 일을 중요시 한다.
[조경가 김영민] 뜨거운 심장을 가진 육각형 조경가
김영민 교수를 처음 알게 된 것은 2007년이었다. 당시 국내 조경 분야 베스트셀러였던 노란색 표지의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조경, 2007)을 접하면서, 번역자인 그의 이름이 유난히도 강렬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그해는 내가 조경에 입문한 첫 해였고, 새로운 학문을 접한 나에겐 너무나도 어려운 책이었다. 이런 난해한 내용의 책을 직접 한 줄씩 풀어서 써내려간 사람도 있는데, 나는 그 글을 이해조차 못하고 있다는 현실이 큰 충격이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 개념이 한국에 소개되어 유행하던 시기였고, 지면이나 수업에서 자주 언급되던 핫한 키워드였기에 더욱 자괴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김영민은 나에게 벽과 같은 존재였다. 김영민 교수를 다시 만난 건 그가 서울시립대학교에 부임한 이후 몇년이 지난 2017년 겨울이었다. 그의 존재를 알게 된 지 10년 만에 처음 실제로 만나게 된 것이다. 젊은 조경가 몇 명의 사적 모임(그 이후 ‘조경이상’이라는 모임으로 발전하게 됐다)이었는데, 그 자리에서도 그는 동양과 서양을 넘나들며 조경과 건축, 그리고 철학의 대서사를 역설하고 있었다. 여전히 지적 소화력이 평균 이하였던 나에겐 그의 똑똑해 보이는 두상이 빛나보였다. 이후 몇 번의 모임을 더 가지고 두세 건의 프로젝트를 같이 할 기회가 생기면서 조금씩 친밀도를 높여갔지만 여전히 거리감을 느낀 건사실이었다. 나와는 차원이 다른 스펙과 범접할 수 없는 해박한 지식을 갖춘 그와 대화를 하게 되면 나의 무지함이 쉽게 드러날 것만 같았다. 2020년 3월, 강아람 대표, 김영찬 소장과 함께 조경기술사사무소 바이런(VIRON)을 창업했다. 소소한 시작을 응원하기 위해 몇몇 조경가가 새 사무실에 와 저녁 식사를 함께했는데, 그때 김영민 교수도 기꺼이 참석했다. 많은 격려를 받으며 앞으로의 험한 과정을 헤쳐 나갈 용기를 얻을 수 있었던 귀중한 시간이었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헤어졌는데, 당시 김영민 교수의 마지막 인사가 아직도 생생하다. “도움이 필요한 일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주세요.” 기억하기로 똑같은 말을 그날에만 세 번 정도 되풀이했다. 한두 번이었으면 예의상 파이팅하라는 뜻으로 알고 가볍게 넘겼을 텐데 그날의 인사는 진심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김영민 교수와 함께 작업할 기회를 계속 엿보게 되었던 것 같다. *환경과조경429호(2024년 1월호)수록본 일부 이남진은 서울대학교 산림자원학과와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심원조경기술사사무소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다. 현재 조경기술사사무소 바이런(VIRON)을 이끌고 있다. 좋은 설계는 좋은 회사에서 나온다는 생각으로 설계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함께 성장하는 환경을 만들고자 한다.
바우델로호프 공원
오랜 기간 동안 벨기에 겐트(Ghent) 시는 유서 깊은 도심 지역을 녹화하고 다시 설계하며 역사가 긴 수로와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해왔다. 바우델로호프 공원(Boudelohof park)은 리스(Lys)와 셸트(Scheldt) 하부와 상부, 해안 계곡을 연결하기 위해 개발될 녹지 축에 위치한 중요한 공공 공간이다. 또한 매년 열리는 겐트 축제(Gentse Feesten) 덕분에 일반적인 도시보다 더 나은 경관을 지니고 있다. 공원의 가치는 도시의 긍정적 이미지 제고에 기여한다. 특히 공원의 일부를 기능적으로 강화하는 동시에 전체로 통합하면 도시 생활환경의 질을 향상시키고 공원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 살아 있는 녹색 공원 바우델로호프 공원은 수도원 정원이었다가 겐트 식물원이 된 곳이다. 지금은 해변을 따라 거대한 나무 아래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어울려 놀고 운동하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살아 있는 녹색 공원으로 역할하고 있다. 2022년 공원은 전면 재설계됐다. 자동차 통행로를 일부 제거함으로써 기존 면적보다 44% 더 넓은 공원 면적을 확보할 수 있었다. 새로운 공원 기존 나무를 최대한 보존하면서 새로운 수목을 더한 재설계로 공원은 새로운 모습을 갖추게 됐다. 스포츠 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운동 시설, 어린이를 위한 놀이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벤치를 마련했다. 1916 년에 만든 운하를 연상시키는 초본식물로 채워진 넓은 띠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공원의 새로운 경계가 된다. 다양한 레벨차로 인해 여러 경사를 가진 산책로는 넓은 잔디밭을 둘러싸고 있고, 산책로와 리스 부두 사이에는 계단식 좌석 공간을 만들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바우델로(Baudelo) 부두 높이가 낮아져 공원 의 일부가 된 것이다. 덕분에 배가 지나가는 풍경을 바 라보고 푸른 녹지와 물의 고요함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 탄생했다. 글 OMGEVING Landscape Architect OMGEVING Project Leader Peter Swyngedauw Team Koen Moelants, Peter Swyngedauw Cooperation ARA, Ecorem, Geert Meysmans, Katrien Hebbelinck Client City of Ghent Location Ghent, Belgium Area 5ha Completion 2022 Photograph Lucid 옴헤빙(OMGEVING)은 벨기에 앤트워프에 있으며, 건축가, 조경가, 도시계획 및 환경 계획 전문가로 구성된 디자인 그룹이다. 주변을 뜻하는 플라망어 ‘omgeving’를 사명으로 삼아, 우리를 둘러싼 주변 공간의 중요성을 말하고자 힘쓰고 있다. 다양한 규모의 중첩을 모색하면서 문화·사회·환경적 차원에서 공간의 연결 고리를 탐구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한다.
글래스필즈 민와일 공원
글래스필즈(Glassfields)는 영국 브리스틀(Bristol) 템플지구(Temple Quarter)에 위치한 주요 재개발지다. 2020년 6월, 로열런던자산관리(Royal London Asset Management)(이하 RLAM)의 의뢰로 장기 경관 계획을 검토하고, 부지 중심에 위치하게 될 민와일(Meanwhile) 경관 개발을 맡게 되었다. RLAM은 네 개 부지에 대한 단계적 개발로 인해 이미 완성된 부지 2와 부지 4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고 예측했다. 부지 2는 약 8,300m2 규모의 업무 공간인 디스틸러리(Distillery)이며, 부지 4는 회의실, 카페, 체육관을 갖춘 호텔이다. 부드러운 녹색 경관과 잘 어우러진 질 좋고 매력적인 공공 공간을 창출함으로써 직장인과 방문객이 대상지를 잘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들고자 했다. RLAM도 사람들이 앉아서 쉬고 즐길 수 있는 분위기가 풍기는 조화로운 공간을 요구했다. 민와일 공원의 조성 위치를 정하는 데서 설계가 시작됐다. RLAM 및 지역 회사와 함께 대상지를 답사하고, 지하 인프라와 차량 통행 등의 제약 사항을 검토해 도로와 인근 호텔, 사무실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을 민와일 공원 부지로 확정했다. 이를 통해 산업용 부지는 큰 경관 영향력을 지닌 공원으로 거듭나게 됐다. 소규모 팝업 행사를 위한 유연한 공간을 마련하고, 부드럽기도 하고 단단하기도 한 조경 재료의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해 생동감 넘치는 중심지를 만들고자 했다. 이로써 부지 2와 부지 4에서도 녹색 경관을 즐길 수 있게 된다. *환경과조경429호(2024년 1월호)수록본 일부 Landscape Architect B|D landscape architects Main Contractor CW Duke Project Manager/QS Currie + Brown Street Furniture King & Webbon Metalwork/Corten Rank Engineering Client Royal London Asset Management Location Bristol, UK Area 2,285m2 Completion 2022 Photograph Jack Hobhouse+B|D landscape architects 비|디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츠(B|D landscape architects)는 2008년에 설립된 디자인 스튜디오로 영국 글로스터셔와 런던에 사무소를 두고 있다. 기후 위기에 대응해 지속가능한 디자인으로 회복탄력성을 갖춘 장소를 만들고자 한다. 대상지의 역사, 생태, 환경, 쓰임, 특성에서 영감을 얻어 설계하며, 기술 혁신과 지속가능한 소재로 디자인의 경계를 넓혀 나가며 다양한 분야와 협력하는 것을 선호한다. 지역 사회와 이해관계자의 의견을 수용하는 설계가, 모든 사람이 자부심을 느끼며 주인의식을 갖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믿는다.
[제도가 만든 도시] 도시 공간의 생로병사
건축물을 비롯한 도시를 구성하는 공간 요소들은 새로 만들어지면 역사 유적이 아니어도 내구재로서 일반적으로는 수십 년에서 백 여 년, 꽤나 긴 수명을 갖는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노후하든 사회적으로 노후하든, 이런 저런 한계에 다다라 종국에는 해체되고 새로운 것으로 대체된다. 우리 몸의 세포가 우리가 태어나 수명이 다할 때까지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 만들어지고 죽는 것과 같다. 도시 공간 요소가 새로 태어나고 쓰이다 낡고 죽는 생로병사, 혹은 신진대사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우며, 그 도시의 긴 역사에서 끊임없이 일어난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가 건강한 도시 공간의 생로병사 주기일까. 즉, 건물이 어느 정도 노후했을 때 다시 새로 지어야 할까. 한국의 도시 건조 환경 생로병사 주기가 짧은 것은 분명하다. 아파트는 10여 년만 지나도 ‘구축’이라는 오명이 붙고, 30년도 지나지 않아 재건축이 거론된다. 아파트보다 시공 수준이 낮고 당연히 시공비도 낮은 저층 주거지 주택들은 대사주기가 더 짧아 20년도 안 되어 밭을 갈아엎고 새 작물을 심듯 새로운 주택 유형으로 재건축되곤 한다(그림2). 연말 예산 낭비의 대표격으로 공격받는 보도블록은 수년마다 한 번씩 파헤쳐진다. 왜 이렇게 짧은 것일까. 지난 반세기 급격한 경제 성장과 사회 변화의 궤적에서 우리 사회의 공간 수요도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빠르게 바뀌었기 때문이며, 동시에 공간을 만드는 계획 수준과 시공 수준 모두 급격히 발전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미 만들어진 공간을 고쳐 쓰는 정도로는 한계가 많다. 또한 새로 만드는 비용, 즉 공사비가 상대적으로 낮게 유지된 점도 생로병사 주기를 줄이는 요인이다.(각주 2) 돈과 시간을 더 들여 길게 쓰도록 만들지, 적게 들이고 자주 교체할지는 우리 사회가 공유하는 건조 환경의 적정 수명이라는 기준에 영향을 미친다. 도시 공간의 삶과 죽음, 그 임계점 도시 공간을 이루는 수많은 물적 요소들이 태어나고 죽는 생로병사가 반복되는 가운데, 어떤 한개체가 오랫동안 존재하다 해체되고 다시 짓기로 결정되는 때는 언제일까. 여러 연구자가 이를 수학적으로 또는 통계적으로 설명하고 확인하는 노력을 기울여왔다. 아주 간략하고 거칠게 표현하자면, 도시 공간의 삶과 죽음의 임계점은 현재 상태의 공간에서 얻는 수익이 (재개발에 들어가는 비용을 고려하고도) 재개발 후 기대되는 수익과 같아 질 때다.(각주 3) 여기서 수익은 현재의 사용 가치에 기반을 둔 임대료라고 볼 수 있다. 물론 현실에선 부동산 가치 상승에서 오는 수익이 더 클 수 있다. 비용은 기존 공간을 해체하고 새로운 공간을 만드는 건설비가 기본이지만, 재개발을 결정하고 진행하는 모든 단계의 지연에서 비롯되는 ‘전환 비용’(각주 4)을 무시할 수 없으며 예측하기도 어렵다. 결국 현재의 사용 가치가 공간의 노후로 인해 얼마나 감소하는지, 재개발 과정에 들어가는 직간접 비용이 얼마나 높은지, 그리고 새로 만들어진 공간이 창출하는 사용 가치가 얼마나 높은지가 도시 공간의 생로병사 속도를 결정하게 된다. 이러한 도시 공간의 삶과 죽음의 구조 안에 우리의 제도가 어떻게 개입해 도시의 생로병사를 조절하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환경과조경429호(2024년 1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제인 제이콥스, 유강은 역,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 그린비, 2010. 2. 최근 공사비 상승은 우리 도시의 생로병사와 신진대사가 일어나는 전제 조건을 바꾸고 있다. 3.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자율을 고려한 공간 운영 이익의 순현재 가치와 재개발하여 얻게 되는 이익의 순현재 가치가 같아질 때다. 브뤼크너(Brueckner, 1980), 휘턴(Wheaton, 1982) 등 도시 성장 모형 연구 이론에 기초한다. 또 다른 재개발 결정 이론인 닐 스미스(Neil Smith, 1979)의 지대차 이론(Rent-gap theory)에서도 현 지대와 재개발 후 잠재적 지대 간의 격차가 커질 때 젠트리피케이션을 촉발하는 도시 공간의 물리적 재투자가 발생하는 조건이 된다고 설명한다. 4. 박성식, 『공간의 가치』, 유룩출판, 2015. 유영수는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이로재와 기오헌에서 건축 실무를 경험했다.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에서 도시 디자인과 사회과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돌아와 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며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병행했다. 현재는 인천대학교 도시건축학부에서 법, 제도, 현대 도시설계 이론, 스튜디오를 가르치고 있다. 건축과 도시를 아우르는 스케일에서 개별적인 공간 현상과 법제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고, 계획과 디자인의 역할을 확장하기 위한 이론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어떤 디자인 오피스] 기술사사무소 예당
이런 오피스 예당(藝堂), 그 이름 18년 전 사무실을 열 때, 다들 그렇듯 회사 이름을 고민했다. 예당이라는 다소 전통 음식점 같은 분위기의 이름은 조금 구태의연해 보였지만, 예술의 전당의 약자로 재주藝를 가진 사람들이 꿈을 펼칠 수 있는 장堂이란 뜻을 담았다. 프로젝트마다 장인의 손길이 스미기를 기대하며 작은 시작을 알렸다. 초창기에는 디자인보다는 작품의 완성도를 지향했는데, 언제부턴가 먹고 살기 위한 설계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자문을 하게 된다. 사무실을 운영하면서 욕심과 현실의 사이에서 매번 고민하지만, 결국 생존이 앞선다. 잘한다는 소리보다 못한다는 소리는 절대 듣지 말자고 스스로 되뇌며 살아왔다. 클라이언트에 대한 책임과 신뢰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확신할 수는 없겠지만 어느덧 중견이라는 말을 듣는 자리에 왔다. 나보다는 젊은 소장들이 자리를 이어주면서 조금 더 발전적인 모습으로 나아가리라 기대한다. 늘 그렇듯 초심을 잃지 않는 예당이기를 바라면서. (오두환 대표) 애증의 시간 조경설계를 시작한 지 벌써 20년이 다 되어간다. 그 시간 대부분을 예당에 머물렀다. 예당은 내게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준 곳이다. 조경설계를 처음 시작하고 컴퓨터 앞에서 열심히 도면 작업을 했던 나에게 종이와 펜을 주었다. 디자이너로 첫 발걸음을 뗄 수 있게 해줘서 고맙지만 때로는 너무 고통스럽고 힘든 시간이었다. 수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마다 디자인을 고민하느라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고, 때로는 무력감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하나둘 프로젝트를 완성할 때마다 느끼는 행복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런 시간을 이겨내며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건 모두 곁에 있었던 동료들 덕분이었다. 오래도록 함께 일할 수 있는 오피스를 꿈꿔왔다. 한때 매일 반복되는 야근과 철야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일상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오피스를 만들고 싶었다. 다행히 대표님의 이해와 직원들의 노력으로 과거와 다르게 많은 것들이 변했고 지금도 변화하고 있다. 이제는 모든 직원의 출퇴근길 발걸음이 가볍고 즐거운 행복한 오피스를 꿈꾼다. 함께하는 대표님, 직원들에게 감사하고 새롭게 맞이할 미래의 직원들과 더 나은 행복한 오피스를 만들어 나가고 싶다. (김종민 소장) 예술의 전당 “예당 뭔가 설계 회사 이름치고는 촌스러운데, 무슨 뜻이죠? 진짜로 ‘예술의 전당’ 뭐 그런 건 아니죠?” 대표님은 맞다고 했다. 그렇구나! 예술의 전당이구나. 2013년에 입사해 10년 넘게 매일 예술의 전당에 다니고 있다. 턴키, 기술제안, BTL, CMR, 현상설계, 제안설계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치열하게 하다 보니 예술을 지향하는 줄은 뒤늦게 알았다. 턴키 위주로 하던 시절엔 별명이 합사돌이었다. 분명 기능에 충실한 설계를 주로 해왔는데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예술적 감각이 필요한 디자인까지 총괄하는 위치에 왔다. 머릿속에 쌓아놓은 폐품들을 꺼내 좋은 디자인이라 말할 때 지지해 주는 동료가 없었으면 아마 안됐겠지. 편한 분위기, 약간 느슨한 출근, 긴 점심시간, 하루 종일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 조잘조잘 나누는 잡담 등 예당을 소개할 수 있는 것이 여러 개 있지만 하나를 꼽자면 서로에 대한 강한 믿음이다. 물론 예술을 기반으로 하는. (박태윤 이사) 즐거운 출근길 누군가 나에게 ‘당신의 출근길은 행복한가요?’라고 묻는다면 당연히 즐겁다고 답할 것이다. 출근길에 오늘은 동료들과 어떤 이야기를 나눌지 혹은 어떤 재미있는 대화를 나눌지 생각하면 지루하고 힘든 출근길은 즐거운 시간이 된다. 물론 출근 후 힘든 일이 주어질 때도 있지만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일하는 동료들과 함께라면 오늘도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을 할 수 있는 건 예당의 좋은 분위기와 좋은 팀워크가 있기 때문이다. (오재선 과장) 해피 해피 예당 신입 때부터 현재까지 모두가 즐겁게 일하는 곳이다. 예당은 내가 머무른 5년 동안 항상 웃음이 가득하고 서로 칭찬이 넘쳐나는 사무실이었다. 그래서 의견도 자유롭고 편하게 낼 수 있고 다양한 피드백이 돌아와 많이 배울 수 있었다. 매일 점심시간 다 같이 모여 보드게임도 하고 수다도 떨고 가끔은 각자 낮잠도 자고 그만큼 화기애애한 예당. 지금처럼 행복하고 재미있게 일하는 멋진 사람들이 되길 바라요. (유다성 과장) 시너지 무언가를 창조하는 직업 특성상 생각과 표현의 방식에 있어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 예당의 가장 큰 장점이다. 동료들과 함께 대화하며 나누던 고민은 성취를 함께 기념할 수 있는 긍지를 주기도 한다.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나누는 대화는 즐거움과 에너지를 만드는 동시에 일할 때 시너지를 발휘한다. 이러한 시너지가 모여 우리가 만든 공간 속에 있는 모두가 또 다른 시너지를 만들어 삶에 활력을 불어넣기를 바란다. 예당에 새로운 시너지를 부여하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다. (박채연 과장) 내가 좋아하는 우리의 바이브 사무실에 처음 들어서며 생각했던 건 ‘오 여기 분위기 좋은 걸’이었다. 회의실에 둘러앉아 웃고 있는 사람들과 면접 때 소장님의 재치 있고 진심 어린 상담(?)에 느낀 감정이랄까. 듣고 싶은 노래로 하루를 맞이하고, 편안한 분위기 속에 업무를 시작한다. 머리 식힐겸 산책이나 서점을 종종 가는데 서로의 일상과 사색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이다. 함께하는 영감의 답사, 국내외를 누비는 즐거운 워크숍은 자유로운 회사 분위기와 유연한 사고, 각자의 책임감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 편안함을 주는 분위기와 함께하는 어벤져스 동료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정예시 대리) 간식이 전부는 아니에요 예당으로 이직했을 때 첫인상은 ‘사람들 분위기가 참 밝다’였다. 어떤 일이든 반복되다 보면 지루해질 수 있지만 다양한 사람들과 밝은 분위기 속에서 일하다 보니 반복되는 일상에서도 틈틈이 재미를 찾아가고 있다. 느긋하게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면서 다 같이 게임을 하고 웃다 보면 밝은 에너지가 생기는데 ‘그럼 오후에도 잘해보자’라는 마음이 든다. 일하면서 먹는 맛있는 간식들도 좋은 복지 중 하나다. 앞으로도 다양한 걸 배우고 함께 웃으면서 즐거운 날을 만들어 가고 싶다. (조혜빈 대리) 첫 번째 스테이지 올해 2월 대학 졸업 후 3월부터 예당과 함께하게 됐다. 예당에서의 시간이 누적되면서 조경설계를 즐겁게 배우는 지금, 하나둘 나만의 루틴이 생기고 있다. 매일 아침 프로젝트를 마주하고 어제 내가 못 했던 프로세스를 해결했을 때 얻는 소소한 만족과 성취에서 출발해 점심에는 무엇을 먹을지 고민한다. 이 루틴의 안정감 속에서 쌓이는 새로운 프로젝트 경험은 조경 디자이너라는 목표를 향한 좋은 양분이 된다. 반복되는 하루 속에 성공도 실패도 있지만 좋은 선임들 덕분에 ‘예술의 전당’이라는 스테이지에서 업무와 생활 전반에 걸친 값진 경험을 배워가고 있다. (김인 사원) 예당의 봄 입사할 당시만 해도 따뜻한 봄이었는데, 어느덧 추운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 정신 차리고 보니 벌써 9개월을 보내고 한 해의 끝을 달려가고 있는 셈이다. 학부생활과 다른 새로운 실무 환경에서 모르는 것도 많았고 배워야 할 내용은 끝이 없기에 매일이 녹록치 않았지만, 다정하고 좋은 선임들 덕분에 차분히 적응해 나가고 있다. 점심시간에 같이 모여 즐겁게 보드게임을 하는 모습만 봐도 우리 회사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예당의 두 번째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하려고 한다. (윤병훈 사원) 이런 프로젝트 디에이치 아너힐즈 디에이치 아너힐즈는 예당에서 진행해온 공동주택 설계의 틀을 깬 프로젝트다. 이전까지 공동주택 프로젝트는 작품으로서의 디자인 가치보다는 각종 법규와 주민들의 보편적인 니즈를 충족시키는 정도로 계획했다. 이와 달리 아너힐즈는 공동주택의 상품성과 디자인 가치를 함께 구현하기 위해 노력한 프로젝트다. 현대건설이 기존 브랜드 ‘힐스테이트’의 프리미엄 브랜드 ‘디에이치’를 새로 만들며 강남권 최고급 공동주택을 구현하기 위해 처음 진행한 프로젝트라 오랜 기간 협업했다. 단지 전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생각한 ‘현대미술관’ 콘셉트를 통해 조경설계의 필수 요소인 수목, 시설, 공간을 명작으로 해석했으며, 대모산과 개포근린공원의 자연과 강남권 도시의 고급스러운 이미지의 조화를 꾀했다. 공동주택을 단순히 기능적, 이용적 측면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디자인의 미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콘셉트 정립부터 공간의 설계, 작은 디테일까지 설계사무소뿐만 아니라 시공사와 국내외 작가들의 도움과 노력으로 완성한 프로젝트라 더욱 기억에 남는다. 울산 남구 B-07 재개발정비사업 코로나19로 인한 변화를 겪던 2021년, 미 연준의 양적 완화를 계기로 세계적으로 유동성이 폭발하기 시작하고, 전국 각지의 재정비·재건축 사업이 활발히 이뤄졌다. 경남의 대표 부자 도시 중 하나인 울산의 남구도 예외일 수 없었고 우리도 재개발정비사업의 설계를 맡게 됐다. 도로로 분절된 두 개의 필지 중심에는 기부채납 예정인 공원이 위치해 있어, 크고 화려한 유선형 메인 동선으로 대단지를 하나로 통합해 기능적, 심미적 연출 효과를 강화하고자 했다. 태화강의 크게 굴곡진 물의 흐름을 디자인 모티브로 설정하고 다양하고 과감한 물의 사용과 공간의 비례를 강력하게 설계에 반영했다. 극단으로 치닫는 더운 여름에 설계해서 그랬을까. 물의 활용에 매우 집착했던 것 같다. 송도 마스터플랜 송도 프로젝트는 오랜 기간 전체 마스터플랜부터 단지별 설계, 완공(힐스테이트 레이크 송도 1~3차)까지 인연이 깊은 프로젝트 중 하나다. 기존 송도 신도시의 확장을 위한 송도 마스터플랜 프로젝트는 서해와 서해대교, 송도 워터프런트 호수와 이미 조성된 공동주택, 학교 등 주변의 다양한 경관 요소와 도시 인프라와 관계성 측면에서 건축 부문과 이견이 많았다. 결과적으로 서해 쪽 통경축 형성, 각 인프라와의 에지 프로그램 설정, 블록별 아이덴티티 등 보편적인 개념으로 정리됐다. 전체 마스터플랜을 완성하고 그 안에 단지를 설계하고 완공까지 하며 처음과 끝을 지켜본 프로젝트라 의미가 크다.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대규모가 아니라서 소개를 하는 것이 맞는지 고민한 프로젝트다. 기술제안으로 당선된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은 그동안 진행했던 기술제안 중 규모는 작지만 가슴이 뜨거워지는 프로젝트 중 하나다. 임시정부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한 임시정부기념관에는 대단한 조경 공간이나 자랑할 만한 디자인 요소가 있지는 않다. 다만 역사적인 임시정부기념관 건립에 동료들과 함께했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싶다. 옥상, 벽면, 건축물 기둥, 포장 패턴 등 디테일에 집중할 수 있었고 애국심 가득한 동료들의 다양한 디자인을 볼 수 있었다. 시간적, 공간적 여유가 매우 부족해 많은 것이 반영되진 않았지만 진행하면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국방대학교 이전 사업 국방대학교 이전 사업은 개교 60주년을 기념해 서울 은평구 수색동의 노후한 기존 학교를 논산으로 이전하는 턴키 프로젝트다. 국가적으로 의미 있는 사업이었기에 합동 사무실에서 계룡건설을 비롯해 모든 공종과 전 직원이 열심히 수행했다. 군 교육기관의 특성상 일반 학교와는 다르게 학교, 주거, 종교, 공원, 체육, 군사 시설 등 다양한 시설이 배치되기 때문에 각시설의 니즈를 충족시키고 시설 간 연계성을 찾기 위해 고민을 많이 했다. 다소 위압감이 느껴지는 장군들, 꼼꼼한 CM단, 동네 주민들의 텃세 등 여러 요구 사항을 수렴하느라 쉽지 않았다. 이전 부지의 개발로 인한 기존 자연의 훼손을 고려하고 기존 생태계 보존을 위해 낮에는 주변 숲, 기존 물길, 대상지 내 저류지 현장 조사를 수없이 하고, 밤에는 이러한 것들을 보존 및 활용하기 위한 친환경적 설계 기법을 공부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였다. 전 직원이 밤낮으로 열심히 한 결과로 다행히 당선돼 국가 사업에 작은 보탬이 될 수 있었던 의미 있는 프로젝트였다. 전남도립미술관 예당이 계획한 첫 미술관이자 현상설계부터 완공까지 참여한 프로젝트다. 전라남도 영산강과 섬진강 주변의 지문(地文)을 디자인 콘셉트로 남도의 예술과 문화를 담는 공방 개념을 적용했다. 독특한 형태의 건축물을 최대한 강조하고 이용자들의 다양한 행태를 수용하기 위해 중심 공간에 풍요로운 평야를 상징하는 뜰을 조성하고, 가로변으로 일반 시민들의 공공성 확보를 위한 가로공원을 계획했다. 흥미로웠던 점은 대상지 내에 철거 직전의 구 광양역과 연계한 창고를 재활용하는 것이었다. 항상 새로운 공간만 디자인하는 것에서 벗어나 다 쓰러져가는 건축물에 생기를 불어넣는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현재 광양예술창고라 불리는 이곳은 미술관의 특성을 고려해 공방 개념을 적용하여 리모델링했고 많은 사람이 이용하고 있다. 부산국제아트센터 땅의 에너지는 공원의 역사에서 비롯된다. 부산국제아트센터는 일제강점기 경마장에서 한국전쟁 이후 미군 부대가 점유하고 부산시민의 품으로 돌아오기까지 100년의 기다림 끝에 만들어진 프로젝트다. 기존에 해왔던 공간을 한정하는 디자인에서 벗어나 공간의 형태와 경계 없이 건축물과 하나 되는 디자인을 고민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부산시민공원에 오래도록 뿌리내릴 기억인 ‘어반 루트(Urban Root)’ 개념은 건축물이 한 그루의 나무처럼 도시와 공원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고 수많은 길은 주변의 자연과 시민들을 연결하고 흡수하며 다양한 크기의 프로그램 패치들은 새 로운 생장의 공간이 된다. 추상적 개념을 형태 디자인으로 변경하기 까다로운 프로젝트였지만 새로운 시도가 좋은 경험으로 자리 잡았다. 해비치호텔앤드리조트 제주 첫 번째 6성급 호텔을 지향하면서 지은 해비치호텔은 표선 해변 마을에 위치한다. 제주 중문과 달리 조용한 휴양과 힐링을 테마로 요란하지 않은 차분한 경관을 연출하고자 했다. 전체적으로 단순한 색상과 조형성을 기반으로 시각적 복잡성을 최소화하고 경계를 최소화해서 주변과의 경관적 연계를 도모했다. 호텔 전면 잔디마당과 표선의 바다를 시각적으로 연계하기 위해 전면부를 자동차 도로보다 1.5m 들어 올려 조성했다. 덕분에 도로에 의해서 경관이 단절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바다 풍경이 호텔 로비로 이어진다. 테니스 코트는 1.5m 낮게 조성해 펜스의 노출을 최소화했다. 국내 호텔 중 최대 규모인 아트리움은 규모에 걸맞게 제주 느낌을 살린 대형목을 심고자 했으나 생육 환경을 고려해 여우꼬리야자를 심었다. 다행히 풍부한 녹음을 연출할 수 있었다. 당초 하부에는 다양한 화목과 지피식물을 식재했으나 역시 단일 수종으로 교체해 단순한 경관으로 조성됐다. 내부의 시설은 조경과 인테리어의 협업으로 시설과 바닥 패턴까지 현장에서 도면 작성 및 샘플 시공을 통해 디테일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었다. 기술사사무소 예당(Yedang)은 조경설계를 통해 보다 나은 미래의 삶을 만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2006년 설립됐다. 설계 구성원 개개인의 생각을 존중하고 타 분야와의 유기적인 관계를 지향하며 주거, 공공, 호텔, 리조트 등 공간 설계부터 경관 설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한다. www.yedangla.com
[밀레니얼의 도시공원 이야기] 돌아보면 공원이 있었다
에피소드 1 조경학 전공자가 아니고서야 도시 인프라의 일종이라 할 수 있는 ‘공원’을 그 자체로 들여다보는일은 거의 없다. 일상의 한 조각, 매일 지나가는 하루의 어떤 배경. 그래서인지 조경학과로 넘어오기 전 내가 공원을 특정한 공간이자 장소로 인지한 날은 매우 뚜렷하게 남아 있다. 2013년 봄, 뉴욕 하이라인으로 석사학위 논문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뒤 계획서 초안을 들고 지도교수를 찾아간 어느 오후. 약 한 시간에 걸쳐 좀 더 재미있는 연구가 될 만한 주제로 다시 가져오라는 조언을 듣고 발걸음도 무겁게 학교 건물을 나왔다. 지난 두 달간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했건만, 한숨 가득 꿉꿉한 기분으로 집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일부러 센트럴파크로 돌렸다. 80번가 인근 게이트를 넘어 작은 소로를 따라 15분을 걷다 보면 터틀 연못(Turtle Pond)이 나온다. 허벅지까지 오는 낮은 펜스가 있는 명상 공간으로 그 용도가 명확히 정해져 있다. 센트럴파크에는 여덟 개 명상 공간이 있는데, 활동적인 프로그램으로 촘촘히 짜인 공원의 다른 지역과 달리 휴식을 취하며 주변 경관을 바라볼 수 있는, 공원 초창기 옴스테드의 의도가 남아 있는 지역이다. 펜스를 조심히 밀고 들어가 노트북으로 무거운 가방을 한쪽에 내려놓았다. 잔디밭에 주저앉아 무작정 연못을 한참 바라보다 잔잔한 수면이 지겨워 주변 사람들로 시선을 돌렸다. 사실 이곳은 명상의 공간이기보다는 ‘시끄러우면 안 되는’ 공간이다. 누군가는 책을 한 손에 쥐고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고, 그 옆에 드러누워 낮잠을 즐기는 사람도 있고, 조용히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다. 브라운 백에서 조심스레 음료를 꺼내 순식간에 마시고 다시 집어넣는 것을 보니 분명 술이다. 각자의 행동은 다르지만 공통점 한 가지가 있다. 집으로 가는 대신 공원의 이 조용한 공간에서 자신의 시간을 보내겠다고 결정했다는 점. 뒤편 낮은 둔덕 위 이리저리 겹치는 소로에는 사람들이 오가고, 그 사이사이에 깔린 잔디는 공원을 향유하겠다고 결정한 사람들의 임시 거처가 된다. 그 밑으로는 다리 아랫길이 있어 돌벽을 울림판 삼아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다. 오후 늦게 집에 돌아와 노트북을 펴 석사학위 논문 계획서 파일을 새로 열었다. 대단한 발견도, 의미심장한 마음가짐도 없이 무작정 센트럴파크를 주제로 잡았다. 그렇게 내 첫 석사논문을 썼다. 공원, 무엇이 떠오르는가? 이른 새벽 양팔을 열 맞춰 흔들며 공원을 거니는 어머니들, 점심시간 삼삼오오 회사 출입증을 목에 건 채 공원에서 커피를 마시는 회사원들, 자전거 타고 공원을 통해 학원으로 향하는 학생들, 주말이면 으레 손을 꼭 붙잡고 공원을 거니는 예쁘게 차려입은 연인들. 물론 종종 시끄럽고 환경에 저해되는 행동도 목격되지만, 그조차도 일상에서 벗어나 자유를 갈망하는 행위라고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목적이 무엇이든, 공원은 분명 바쁘고 정신없는 도시 일상에서 순간이나마 벗어날 수 있는 공간으로 우리 곁에 존재한다. 우리는 언제부터, 무슨 이유로 도시공원에서 여가를 보내는 것을 ‘자연스러운 행위’로 받아들이게 된 것일까? 그 전에, 도시공원이 대체 왜 우리에게 이렇게 의미 있는 곳이 되었을까? 일련의 질문 끝에 결국 답은 내 자신, 즉 나의 경험과 지금까지의 일상에 놓여 있다는 점을 깨닫는다. 그렇게 시작한 기획이 이 글, ‘밀레니얼의 도시공원 이야기’다. 아파트 공화국의 공원 1988년 9월 제24회 서울올림픽이 서울의 구석구석을 뒤집어 놓았다. 가장 중요한 사건을 꼽아보 자면, 올림픽대로가 뚫렸고, 한강 정비 사업이 진행됐으며, 잠실주경기장이 완공됐을 뿐 아니라 올 림픽공원이라는 대규모 기념 녹지가 문을 열었다. 대한민국에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별명이 따라 오기 시작했고, 아파트 숲에서 태어나 아파트로 은퇴하는 라이프 사이클이 만들어지지 않았던가. 나 자신을 포함, 이 시기에 태어난 대한민국의 밀레니얼은 그 전의 세대와 분명 다른 도시를 경 험했다. 아파트 중심의 도시 구조에서 태어나 그 확장을 지켜보며 자랐고, 여러 신도시의 흥망성 쇠를 지켜보며 도시에 대한 어떤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대중매체에서 말하는 대단지 아파 트의 부정적 측면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유년 시절을 다시금 생각해보면, 텔레비전 속 ‘아파트 112 perspective 공화국’과 내가 살았던 대단지 아파트 사이에는 분명한 구분이 있었다. 결국 이 아파트 공화국에 살아가던 내 어린 시절이 그렇게 나빴던 것만은 아니었다. ‘아파트 공화국’ 서울과 내가 설던 서울은 무엇이 달랐을까? 지금도 콘크리트 숲을 사랑하는 조경 이론 연구자로서 생각해 보건데, 그 간극에는 ‘조경’이 존재했다. 미디어에 노출되는 아파트 공화국은 직사각형 상자의 끝없는 연속으로만 존재하는 장면이었고, 내가 사는 아파트 도시는 공 원과 수공간, 광장이 연달아 이어지면서 그 사이를 채우는 아파트 단지들의 연속이었다. 땅에 발 을 딛고 천천히 ―물론 딴에는 재빠르다고 느낄 것이 분명하지만― 걸어 다니는 어린아이에게 아파트는 그저 집의 한 형태에 불과했고, 도시란 바깥의 공간, 즉 오픈스페이스였다. 단지 밖을 나가 중앙 길을 걷다 보면 동그란 소나무 조경 공간이 나오고, 거기서부터 큰 도로를 향해 걷다 보면 올림픽 광장 이 나왔으며, 또 한 번 큰 길을 건너면 올림픽공원에 도착했다. 내가 살던 동호수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데 걸어 다니는 길과 공원은 기억하다니. 랜드마크라는 개념을 배우기 전이기에, 어떤 일상의 경험이 조합되어 공원을 도시의 방점으로 인지했을 것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공원, 어떤 목적을 지닌 땅 그래서일까. ‘자연’은 공원과 동의어였다. 아니, 적어도 그 당신의 나에게는 공원이 자연의 원형 (prototype)에 더 가까웠을지 모른다. 학교에 다니고 지역을 옮기며 점차 공원과 자연의 구분이 생겼 지만, 학교에서 배운 자연은 그림 속에 나오는 산이라는 것에 불과했고 공원의 자연은 내가 살아 가는 공간이었다. 학교에서 백일장을 여는 곳도 공원, 체육대회를 여는 곳도 공원, 교내 마라톤 대 회조차 공원에서 했으니 익숙함의 정도에서 차이를 보이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대자연의 원형 을 실제 자연이 아닌 풍경화(landscape painting)에서 찾았던 18세기 영국의 정원가들처럼, 또는 자연 스러운(nature-like) 공원 형태를 미국의 황야가 아닌 영국 정원에서 찾은 미국의 조경가들처럼, 자 연의 원형을 심상image으로 존재할 수 있다. 오히려 실제가 아닌 심상에 기반했기에 공원은 도시 의 새로운 공간 유형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자연을 닮기를 바라면서도 자연과 완전히 다른, 인간의 손에 길들여진 공간이 정원이라면, 공 원은 그 개념을 도시로 확장하는 동시에 ‘도시의 다른 곳과 구분되는 특정 기능’을 지는 곳으로 세부화 됐다. 공원(park)의 어원은 ‘위요된 일정 규격의 땅’을 의미하는 4세기 이전 옛 서부 게르만 어 ‘파루크(parruk)’로 거슬러 올라간다.1 이후 중세 프랑스어와 중세 영어로 발전하며 보다 주체적 으로 ‘왕의 숲royal forest 등에서 사냥에 쓰이기 위한 짐승을 키우는 곳’으로 의미하게 됐다. 여기서 분화해 군사적 목적을 위해 구획된 자연을 의미하는 곳으로 인식되기도 했는데, 여기서 나온 것 이 ‘주차하다’라는 의미의 ‘파킹parking’이다. 설핏 보면 굉장히 다른 의미 두 가지가 공존한다고 보이지만, 사실은 그 뿌리에 ‘어떤 특정한 목적을 지닌 땅’이라는 공통분모가 남아 있다. 공원 내부만을 본다면, 특정한 목적 없이 여가를 보내는 공간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서너 걸 음 뒤에서 시야를 넓혀 보면, 공원은 그것을 포괄하는 도시와 분명 다른 목적을 지니고 있다는 것 이 드러난다. 여기서 목적이란 ‘현대 도시의 생산적 기능과 다른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즉, 공원 이란 가족과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이고, 강아지와 프리스비를 ‘던질 수 있는’ 공간이며, 돗자 리를 펴고 한강을 바라보며 뜨거운 라면을 ‘먹을 수 있는’ 공간이다. 생산적 효율성과 기능이 켜켜 이 쌓아 올라간 도시 한복판에서 이처럼 자유로움이 넘실거리는 공간이자 내가 하고 싶은 것 혹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음을 매 순간 체험하게 만드는 도시의 고유한 공간이다. 에피소드 2 완성된 작품은 과연 작가의 것일까? 미술관 큐레이터가 되겠다며 한창 미술사 공부에 열을 올리 던 내게 울림처럼 다가온 어느 교수님의 화두였다. 작품을 만들어낸 작가에게 저작권이 있을지언 정, 그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 때문에 작품은 여러 개의 삶(multiple lives of a work of art)을 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작품이 거쳐 가는 여러 삶은 과 연 작가의 것일까? 에피소드 3 1998년 겨울, 매주 토요일 오후는 스미스소니언 자연사 박물관에서 보내는 시간이었다. 워싱턴 DC 몰(The Mall)을 따라 걸으며 당시 내가 가장 좋아하던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신고전주의 특유의 하얗고 높은 계단을 뛰어 올라가면 고풍스러운 갈색 현관이 있었고, 로비에 들어서면 나를 반겨주던 공룡 뼈 전시가 있었다. 워싱턴 DC의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은 특별전을 제외하면 모두 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데, 당시 언어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었던 우리 가족에게 박 물관만큼 시간을 보내기 좋은 곳이 없었다. 박물관을 나와 워싱턴 기념비(Washington Monument)를 향해 천천히 걷곤 했다. 날이 좋으면 멀리 링컨 기념관(Lincoln Memorial)까지도 도전하곤 했다. 특히 날이 풀리기 시작하는 5월이면 잔디밭 광장에 피크닉 돗자리를 펴놓고 따스한 햇빛 아래서 시간을 보내는 인파가 몰렸는데, 햇빛은 무조건 피하라는 조언을 듣고 자란 내게 그렇게 신기한 광경이 없었다. 태양을 피하지 않는 사람들의 존 재란 태양볕을 쐬면 안 되는 사람의 존재만큼이나 놀라웠다. 그러니까, 먹물 뺀 공원 썰 여러 국가의 공원에서 일상을 보내던 것이 대학원에 가서야 어떤 구분할 수 있는 특정한 경험으로 인지됐다. 일상의 놀라움 혹은 무서움이 아닌가 싶다. 그 어떤 놀라운 스펙터클도 그것이 일반화 되어버리는 순간 아무 감흥도 일어나지 않는데, 공원이란 곳은 완전히 반대였다. 물론 그만큼 일 상에서 편하게 향유하던 공원이 더 이상 편안하지 않는 분석과 해석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도 사 실이다. 필자는 공원이 일상의 한 부분이었던 예전의 관점과 공원이 연구의 대상인 현재 사이, 어느 중 간 지점에서 양쪽을 모두 살펴보고자 한다. 일상의 부분들이 모두 깨달음으로 다가오고 그 배경 에 공원이 있었던 개인적 기억과 연구자로서 공원을 살펴보는 층위적 시야가 합쳐지면 무언가 재 미있(을 수 있)는 것이 나오지 않을까. 소위 먹물을 뺀 이야기를 다시금 되새기면서 어떤 그림이 나타 날까. 공원이 일상의 장에서, 관심의 공간에서, 연구의 대상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필자에게 의미 있었던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이 누군가에게는 의미 있는 순간으로 다가가길 바란다. 각주 정리 1."Park”, Merriam-Webster Dictionary. 신명진은 뉴욕대학교에서 미술사를 공부한 뒤 서울대학교 대학원 생태조경학과와 협동과정 조경학전공에서 석사와 박사를 마친 문어발 도시 연구자다. 현재 예술, 경험, 진정성 등 손에 잡히지 않는 도시의 차원에 관심을 두고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의 선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도시경관 매거진 『ULC』의 편집진이기도 하며, 종종 갤러리와 미술관을 오가며 온갖 세상만사에 관심을 두고 있다. @jin.everywhere
ASLA Best Books of 2023
자연, 설계, 그리고 기후 변화까지, 당신에게 새로운 정보와 영감을 주는 이슈를 다룬 올해의 신간 도서를 소개한다. 2023년 미국조경가협회ASLA가 선정한 10권의 최고의 책을 살펴보자. 1. 그린웨이를 넘어서: 도시의 길과 산책로의 다음 단계 Robert Searns, Beyond Greenways: The Next Step for City Trails and Walking Routes , IslandPress, 2023 산책로 및 가로 계획가인 로버트 선스(Robert Searns)는 우리의 도시를 보다 걷기 좋은 곳으로 만들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선스는 도시 외곽의 ‘그랜드 루프(grand loops)’와 더 짧아진 ‘타운 워크(town walks)’에 대한 설계를 제안하는데, 이 개념은 공원과 공공 공간, 근린 생활권을 하나로 묶는 ‘브랜드화된 도시 내 산책로’를 의미한다. 이러한 유형의 산책로를 통해, 보행자가 자연은 물론 도시의 길에도 최우선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좋은 도시 디자인을 제시할 수 있다. 2. 야생 만들기: 뒷마당에서 공원까지, 야생 공간 조성 가이드북 Isabella Tree, The Book of Wilding: A Practical Guide to Rewilding, Big and Small , BloomsburyPublishing, 2023 이사벨라 트리(Isabella Tree)와 찰리 버렐(Charlie Burrell)은 영국 서섹스 지역에 위치한 3,500에이커 규모 목장을 희귀한 나이팅게일과 유럽 멧비둘기, 보라색 제왕나비 등이 서식하는 야생 동식물의 안식처로 완전히 변화시켰다. 이 목장에는 비버와 황새가 살고 있으며, 롱혼 황소와 돼지, 조랑말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조성 과정의 생생한 이야기를 담은 560쪽의 책은 작은 뒷마당에서부터 거대한 공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규모의 경관에서 생물 다양성을 높일 수 있는 야생 공간 조성 매뉴얼을 제공한다. 3. 자연을 포착하다: 자연 판화 150년사 Matthew Zucker, Pia Ostlund, Capturing Nature: 150 Years of Nature Printing , Princeton Architectural Press, 2023 식물 판화 애호가라면, 이 몰입감 넘치는 특대 사이즈 책에 묘사된 수백 가지의 희귀한 자연 이미지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저자 매튜 주커(Matthew Zucker)와 피아 외스틀룬드(Pia Ostlund)는 1700년대에서 1900년대까지 제작된 나뭇잎, 꽃, 양치 식물, 해초는 물론 심지어 뱀의 판화까지 선별하여 수록했다. 책에 수록된 에세이 중 한 편에서, 에른스트 피셔Ernst Fischer는 이렇게 말한다. “이 책에 실린 삽화의 진정한 가치는 꽃과 뿌리로 묘사되는 식물의 모습을 통해, 식물의 자연 서식지는 물론 구부러지고 뒤틀린 모습, 가지와 잔가지, 털, 가시까지 보여줌으로써 어떤 위대한 예술가도 재현해낼 수 없는 자연을 충실히 보여준다는 점에 있다.” *환경과조경429호(2024년 1월호)수록본 일부 손은신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에서 학부 및 대학원을 졸업했고, ‘기억 경관’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건축공간연구원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조경과 건축, 도시의 경계에서 새로운 연구자들을 만나고 외연을 넓히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어느 예술가의 심플한 고백
어린이의 마음과 눈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건 어떤 것일까. 20세기를 대표하는 거장 피카소는 “내가 라파엘로처럼 그림을 그리기까지는 4년이 걸렸지만 어린아이처럼 그리는 데는 평생이 걸렸다. 모든 어린이는 예술가다”라고 말했다. 예술가로서 기술은 흉내 낼 수 있지만, 어린이가 바라보는 순수한 정서를 그림으로 완성하기란 그만큼 어렵다는 뜻일 것이다. 한국의 20세기 화가 중 순수한 동심의 세계를 그림으로 그려낸 이를 하나 꼽자면 바로 장욱진일 것이다. 그는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 등과 함께 한국의 근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2세대 서양화가다. 까치, 나무, 가족 등 소박하고 일상적인 소재를 동심의 눈으로 바라본 그림을 주로 그렸다. 실제로 누군가 나이를 물어보면 일곱 살이라고 답할 정도로 삶 자체도 어린이처럼 순수했다. 그의 예술 세계를 조명하는 ‘가장 진지한 고백: 장욱진 회고전’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2024년 2월 12일까지 열린다. 이번 전시는 1920년대 학창 시절부터 1990년 작고할 때까지 60년간 꾸준하게 펼쳐 온 장욱진의 미술 활동을 총망라하며 유화, 먹그림, 매직펜 그림, 판화, 표지화와 삽화, 도자기 그림 등 270여 점을 한자리에서 조망한다. 시기별 대표작을 엄선해 선보임으로써 그가 진정으로 추구한 예술의 본질과 한국적 조형미의 구축이 한국 미술사 안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살펴본다. 그는 화문집(畵文集) 『강가의 아틀리에』 서문에서 밝혔듯이, 그림을 위해 ‘참된 것을 위해 뼈를 깎는 듯한 소모’ 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자유로운 발상과 방법으로 화가로서의 본분을 지키며 자기 자신을 소모시켰다. 정직하게 살아왔음을 당당하게 외치며 진솔한 자기 고백으로 창작에 전념했다. *환경과조경429호(2024년 1월호)수록본 일부
경계를 넘어
지난 11월 28일 조경시설물 전문기업 예건이 창립 33주년을 맞아 서울 삼성동 소노펠리체 컨벤션에서 특별 초청 강연회 ‘경계를 넘어’를 개최했다. 강연자로 유현준 교수(홍익대학교 건축도시대학)와 김영민 교수(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가 초청됐다. 유현준 교수는 여러 매체와 유튜브를 통해 공간과 건축을 대중들에게 친숙하고 알기 쉬운 분야로 소개하고 있으며, 김영민 교수는 다양한 비평과 조경 이론을 집필하는 이론가이자 이를 실천하는 설계가로 활동하고 있다. 두 교수의 프로젝트 소개와 대담을 통해 건축과 조경의 분야를 넘나드는 이야기가 펼쳐졌다. 유현준 교수는 제주도 돌담과 수평선으로 만든 집 호미Homi, 곡선을 사용해달라는 건축주의 요구에 맞춰 초가집 지붕 같은 느낌을 디자인한 플레이트빌라, 현대 자동차가 진행한 HMG 스마트 시티 등을 소개하며, 전통적이고 자연적인 요소가 어떻게 건축에 녹아들었는지 볼 수 있는 디자인 접근법을 소개했다. 김영민 교수는 모순 개념이 어떻게 설계에 구현되어 있는지 이야기하며 파리공원 리노베이션, 새로운 광화문광장, 서울 신단수, 여의도공원 제2세종문화회관 부유지층, 청주 가드닝 페스티벌 초청작 동문 등의 프로젝트를 설명했다. 강연이 끝난 뒤 박기숙 회장(한국여성건설인협회)의 사회로 두 강연자의 토론이 이어졌다. 특히 건축, 조경의 시각에서 스트리트 퍼니처인 벤치를 바라보고 분석하는 이야기가 오갔다. 유현준 교수는 “스트리트 퍼니처는 공공 공간을 사적 공간으로 바꿔 주는 장치”라고 해석했다. 그는 “이동하는 공간이냐 머무는 공간이냐”, “사적인 공간이냐 공적인 공간이냐”로 공간을 나눠볼 수 있다면서, “도시에는 많은 공공 공간이 있지만 대부분 머무는 곳이 아니라 이동을 위한 공간이다. 공공 공간은 내가 앉아서 머물러야 비로소 내 공간이 된다”고 말했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사용한 장소를 다른 사람이 와서 사용하면 같은 장소에서 공통의 추억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라며, “공통의 추억이 많아지는 사회일수록 사람들끼리의 소통과 융합이 잘 되는, 갈등이 줄어드는 사회가 된다”는 사회적 의미도 덧붙였다. *환경과조경429호(2024년 1월호)수록본 일부
제26회 올해의 조경인· 제6회 젊은 조경가 시상식
지난 12월 15일 그룹한빌딩 그룹한갤러리에서 본지가 주최한 ‘제26회 올해의 조경인·제6회 젊은 조경가 시상식’이 개최됐다. ‘제26회 올해의 조경인’에는 최희숙 단장(한국토지주택공사 도시경관단)이, ‘제6회 젊은 조경가’에는 김영민 교수(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가 선정됐다. 최희숙 단장은 2022년 한국토지주택공사LH 도시경관단으로 부임해 조경설계와 시공 품질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3기 신도시에 지구계획수립단계UCP(Urban Concept Planning) 참여위원으로 조경·환경 전문가들을 포함하고, 지구계획수립단계의 개념이 설계까지 이어지도록 조경총괄계획가LMP(Landscape Architecture Master Planner) 제도를 도입한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한 조경설계 용역비에 ‘조경설계표준품셈’을 적용하고, 준공 시점 때 실제 투입되는 공사비 기준으로 공원 유형별 단위 공사비 산정을 제안해 현실적인 조경설계 용역비와 공사비가 산출되도록 하는데 기여했다. 평택 고덕 공공정원, 나주 빛가람 호수공원, 안성 아양 시그니처 가든 등을 통해 공원과 공동주택 조경의 질적 향상을 꾀하기도 했다. *환경과조경429호(2024년 1월호)수록본 일부
[기웃거리는 편집자] 창밖 도시
대학교 졸업장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던 햇병아리 시절에 출근 루틴이 있었다. 당시 막내라서 가장 먼저 출근해, 환기를 시키고, 간단히 사무실 청소를 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청소가 끝나면 창가와 가까운 내 자리에 앉아서 사무실 창밖 풍경을 온전히 감상했다. 넓은 통창이라 도심의 스카이라인이 한눈에 보였는데, 날씨가 맑을 때는 하늘의 구름이 금방이라도 사무실로 흘러들 것만 같았다. 물론 정수리를 향해 내리쬐는 여름의 직사광선과 뼈를 긁는 겨울의 한기를 피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도심의 아름다운 경관을 보고 있노라면 그런 단점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괘념치 않았다. 첫 사회생활의 고단함을 달래주는 소소한 낙이었다. 창밖 풍경을 즐기는 건 21세기 시민에게 당연한 일이지만, 17세기 영국에서는 창밖 풍경은 누리기 힘든 사치였다. 명예혁명으로 집권한 윌리엄 3세는 세수 부족을 이유로 창문에 세금을 부과했다. 당시 유리 가격이 매우 비쌌는데, 좋은 집일수록 비싼 유리 창문도 많을 것이라는 이유로 창문에 세금을 부과한 것이다. 하지만 피해는 고스란히 시민들에게 돌아갔다.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건물주들이 창문을 합판이나 벽돌로 막아버렸고, 이로 인해 당시 많은 영국인이 우울증을 호소했다. 덕분에 햇빛과 공기에 물리는 세금이란 오명을 얻었다.(각주 1) 이웃 나라인 프랑스도 이 세금을 거두었는데, 프랑스 대혁명을 촉발한 여러 원인 중 하나로 창문세가 지목되기도 했다. 창밖 풍경의 중요성을 이렇게 역사가 증명한 것이다. 건축가 겸 일러스트레이터인 마테오 페리콜리(Matteo Pericoli)도 일상 속 도시의 창밖 풍경에 주목했다. 그는 『창밖 뉴욕』(2013)을 통해 63인의 뉴요커가 바라본 뉴욕의 창밖 풍경을 담아냈다. 소설가, 작곡가, 사진 작가 등 다방면에서 활약 중인 문화 예술인들의 창밖 풍경을 담아낸 이 책은 각자 직접 쓴 글과 마테오가 그려낸 풍경이 하나로 어우러져 뉴욕의 도시 경관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벽사이로 어른거리는 그림자와 오렌지 빛 노을, 암벽처럼 느껴지는 도시의 아파트, 시적 영감이 되는 거리의 풍경, 추억이 깃든 가게 등 다양한 형태의 창문으로 뉴욕을 바라본 그들이 느낀 소회와 다양한 관점을 읽을 수 있다. 물론 매번 아름다운 건 아니다. 가령 쓰레기차에서 올라오는 냄새라든지, 뇌를 녹일 듯한 직사광선 등 창문 때문에 불편함을 겪기도 한다. 이렇게 다양한 일상의 표정을 담고 있는 창밖 풍경을 건축 평론가 폴 골드버거(Paul Goldberger)는 이 책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그게 무엇이든 창밖에 있는 것들을 보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바꿀 수 없으므로 품고 살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반드시 가져야 한다는 측면에서 창밖 풍경은 친구 같기도 하다.” 이처럼 우리는 창밖에서 갑자기 일어나는 대규모 시위를 막을 수 없고, 경관을 가리는 건물을 맘대로 없앨 수 없다. 우산을 안 가지고 왔을 때 예고 없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낙비는 운치가 있지만 퇴근길을 생각하면 마냥 좋아할 수 없다. 창밖 풍경은 뽑기 기계처럼 내가 원하는대로 선택하고 해결할 수 없기에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다만 포기에 가까운 인정이 아니라, 너그러운 아량에서 비롯된 인정이라면 어떨까. 마지못해 끌려가는 패키지 관광이 아니라, 창밖 경관 그 자체를 온전히 즐길 수 있는 감상이 이뤄지면 어떨까. 이러한 태도는 이번 호 특집에서 다룬 김영민 교수가 중요한 지향점으로 삼는 ‘모순지도’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차이를 무작정 해결하려는 것보다 차이 그 자체를 인정하고 공존하는 설계를 추구하는 것처럼 저 창밖 경관이 주는 낭만과 불편 사이에서 무언가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보다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새해 작은 소망이 있다면 일상 속 창밖 풍경을 잘 담아내고 싶다. 그게 글이 될지, 사진이 될지,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다짐에 불과할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연말엔 2024년을 기억할 수 있는 몇 개의 창밖 풍경이 남기를 바라본다. 정확히는 나의 일상 속에 소소한 낙이 다시 한번 깃들 수 있기를 소망한다.
[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나를 둘러싸고 있는 타자에 대한 관심이 비로소 풍경이 된다
일 년을 가늠하는 여러 가지 측정법. 열두 권의 잡지를 눕혀 쌓아본다. 손바닥을 펼쳐 높이를 재어보니 한 뼘 남짓. 일 년간 들인 공을 생각하니 조금 아쉽다. 이번에는 잡지 뭉치 맨 아래에 양손바닥을 끼워 넣어 단번에 들어 올린다. 처음에는 견딜 만한데 조금 있으니 팔뚝이 뻐근하다. 그래, 이 정도 무게는 되어야지. 홀로 뿌듯해진다. 또 다른 방법은 숫자 1을 더하는 것이다. 내 나이가 몇인지는 제쳐두고 (별로 궁금하지도 않다) 올해가 창간 몇 주년인지 헤아린다. 애사심보다는 연간 기획을 앞두고 큼직한 특집을 꾸려야 하진 않은지 점검하는 작업이다. 연말을 장식한 행사 속 ‘제○회’에도 수를 더한다. 그렇게 덧셈을 하다가 보기 좋게 딱 떨어지는 숫자 하나를 발견했다. 잡지의 앞쪽 판권 페이지에 환경과조경 식구들, 편집위원, 해외리포터와 함께 적히는 삼사십 여명의 이름들, 2024년 학생통신원 제도가 탄생한 지 40년을 맞이한다. 학생통신원(이하 통신원)은 『환경과조경』과 세 살 터울이다. 『환경과조경』이 계간지였던 시절, 1985년 10월호에 제1기 통신원 간담회 기사가 실려 있었다. 당시 간담회는 복잡한 서울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경기도 송추 계곡산장에서 열렸다. 13명의 학생통신원 김숙자(경북대, 당시 표기), 김주경(경희대), 김도희(동국대), 이석호(서울대), 홍갑진(성균관대), 김완련(영남대), 이재찬(전남대), 강미순(전북대), 장양화(청주대), 김순주(효성여대), 전병화(경남전문대), 김사훈(상지전문대), 최창식(진주농전)이 모였다. 간담회 내용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편집 과정 설명, 기사 작성 요령, 사진 촬영 기법 등 활동에 필요한 제반 사항을 알려주는 오리엔테이션이 진행됐다. 조금 독특한 건 통신원들이 한국 전통 조경을 주제로 발표를 진행한 뒤 토론을 했다는 점이다. 통신원의 이름은 ‘e-환경과조경’ 뉴스에서 쉽게 만나볼 수 있다. 통신원들은 기자들의 눈과 귀가 미처 닿지 못한 곳의 소식을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한다. 결과물이 기사 형태이기에 기자 역할만 한다고 오해하기 쉽지만, 통신원의 활동 범위는 더 넓다. 마음 맞는 통신원끼리 답사 팀을 꾸리기도 하고, 선배 통신원의 도움을 받아 만나고 싶던 조경가에게 궁금한 점을 물을 수도 있다. 통신원들의 기획에 따라 활동 스펙트럼은 한없이 커진다. 미디어 환경의 변화에 따라 유튜브나 SNS 등을 활용해 활동하는 방법은 없을지 고민하고 있다. 물론, 조경학과 학생이 모여 서로 모르는 정보를 나누고 조경에 대한 애정을 기반으로 학창 시절 즐거운 추억을 만들고만 간다고 해도 좋다. 통신원을 모집할 때 요구하는 서류는 세 가지다. 이력서와 활동 포부를 담은 자기소개서, 환경과조경이 만든 콘텐츠에 대한 리뷰. 합격과 불합격을 결정하는 서류에 불과하다 생각할 수 있지만, 지원서를 검토하는 기자들에게는 꽤 쏠쏠한 재미를 준다. 그러다 가끔 ‘통신원 지원 서류’ 폴더에 담아두기는 아까운 글을 종종 마주친다. 그중 어느 글의 일부를 오늘에서야 옮겨 적는다. “보이는 것에서 보고 싶은 것을 찾는다. 현실의 고민과 꿈꾸는 이상, 두 가지 모두 놓치고 싶지 않다. 그런 나에게 ‘시네마 스케이프’는 그저 보이는 것만 보고 있는 현실 속에서 내가 보고 싶은 것,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게 해주었다. …… 나를 둘러싸고 있는 타자에 대한 관심이 비로소 풍경이 된다. 인물들의 세밀한 감정이 담겨 있는 풍경이 와 닿을 때마다 전공에 대한 애정이 생겨났다. 풍경을 그리는 사람은 무엇보다 타인의 얘기를 깊이 공감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풍경이나 사람에게 공감보다는 동요되는 나에게 시네마 스케이프는 사람 얘기와 풍경 얘기를 조용히 듣는 시간이었다. 늘 드는 생각은 풍경과 사람 사이의 관계, 타자에 대한 변덕스러운 나의 태도에 대한 반성이었다. 가끔 ‘뭐가 주체일까’라는 고민에 갇히기도 했지만 언제나 두 관계는 끊임없이 사이가 좋아야 한다는 것이 물음마다의 답이었다. 영화를 통해 두 관계를 좁혀나가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으면 불안이 슬슬 걷히고, 전공에 대한 확신이 생겨났다.”(“에고 스케이프-보이는 것과 보고 싶은 것”, 33기 통신원 이삭 리뷰) 굳이 제1기 통신원의 이름을 일일이 적은 이유 는 그들의 소식이 궁금해서다. 혹시 이 글을 보고있거나 또는 그들의 소식을 안다면 『환경과조경』의 문을 두드려주기를 부탁드린다.
해적선으로 떠나는 모험, 해적문어 조합 놀이대
놀이터는 어린이들이 놀이를 즐길 수 있으며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장이다. 아이안디자인은 다양한 이야기가 깃든 테마형 놀이 시설물 등을 통해 아이들의 모험심을 키우고 무한한 상상력을 펼칠 수 있게 돕는다. 해적문어 조합 놀이대는 해적선을 모티브로 한 물놀이형 시설물로 해적이 된 문어와 함께 떠나는 모험을 표현했다. 먹물 대신 물줄기를 쏘는 문어, 배의 앞머리에서 발사되는 물대포, 물을 쏟아내는 대형 버킷 등을 통해 시원한 물줄기를 선사한다. 이 물줄기는 여름철 달궈진 놀이 시설과 주변의 여름철 온도를 낮춰 어린이들이 시원한 물놀이를 즐길 수 있게 한다. 입체적으로 물놀이를 즐길 수 있게 미끄럼틀을 중심으로 워터드롭, 워터 게이트 등 다양한 유형의 물놀이 시설을 배치했다. 아이들의 흥미를 자극하기 위해서 물에 잠긴 해적선의 형상을 입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GRC 소재를 활용했다. 공간을 채우는 색과 구조 등은 단순할 수 있으나 안전하고 다양한 테마형 물놀이 시설은 아이들에게 풍성한 이야기와 상상력을 펼치는 장을 제공한다. 이처럼 다양한 놀이 경험은 자라나는 아이들의 오감을 발달시키는 동시에 신체적, 정서적 성장을 돕는다. TEL. 02-2069-2422 WEB. www.aiandesig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