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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정원, 천천히 준비하고 기다려야 찾아올 문화 3인 3색 정원 단상
    중세 이탈리아의 작가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1313~1375)의 소설 『데카메론』은 흑사병이 돌던 중세 이탈리아의 피렌체가 배경이다. 이야기는 열 명의 젊은 남녀가 흑사병이 퍼진 도시, 피렌체를 떠나 가까운 시골 마을인 피에솔레의 한 저택에서 보름의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들은 매일 밤 저택의 정원에서 하나의 주제를 놓고 열 사람이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날의 최고의 이야기꾼을 선정하는 놀이를 했다. 보름이긴 하지만 일주일 중 하루는 합창의 시간으로, 또 다른 하루는 신의 날로 정해 쉬었기 때문에 딱 열흘간, 열 사람의 총 백 개의 이야기가 담겨있어 책의 제목이 ‘열흘’이라는 뜻의 데카메론이다. 여기서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을 언급하는 이유는 물론 소설 자체를 분석하기 위함은 아니다. 정원 이야기를 하고 싶다. 보카치오는 이 소설을 실제로 흑사병이 돌던 1348년부터 구상했고 병이 잠잠해진 1353년에서야 원고를 탈고했다. 그러니 흑사병을 피해 시골의 주택으로 피난을 떠났다는 소설의 설정은 단순한 이야기 전개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어찌해볼 수 없는 재앙 속 에서 보카치오가 상상해낸 혹은 실제로 해보았을 현장상황이라고 보는 편이 나을 듯싶다. 당시의 상황을 좀 더 사실적으로 풀어보면 이렇다. 검은 쥐가 옮기는 전염병인 흑사병으로 인해 유럽은 인구의 30~60%를 잃게 된다. 통계상으로만 짐작해도 두 사람 중 하나, 4인가족이라면 그중 반이 병으로 죽은 상황이다. 나 자신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 속에 사람들은 병에 걸린가족을 돌보는 대신 이들을 피해 도망을 쳤다.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 그 두려움이 얼마나 컸을까? 보카치오가 이런 상황 속에서 시골 저택의 정원을 떠올렸다는 것이 놀랍고 신선하고 그리고 참 당연했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만약 그때의 내가 보카치오의 입장이었다면 나 역시도 전염병이 들끓는 도시를 떠나 시골집에서 큰 안식과 위로를 받지 않을까 충분히 상상되기 때문이다. 내 개인적 예를 들 수도 있다. 나의 어머니는 지병인 당뇨 합병증으로 1년간 투병을 하시다 결국 생을 마감하셨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 더 이상 가망 없다는 진단을 받고 어머니께서 가족에게 한 부탁은 자신을 병원에서 꺼내 어머니의 친정인 충남논산의 시골집으로 내려갈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건 생의 마지막을 병원에서 보내고 싶지 않다는 간절함이 담긴 마지막 소망이었다. 오경아는 방송작가 출신의 가든 디자이너로 다양한 영역과의 협업을 통해 독창적이면서도 상호 조화로운 정원의 세계를 꿈꾸는 중이다. 16년간의 방송작가 활동을 접고 2005년 영국으로 떠나 The University of Essex에서 조경학을 공부했고, 이후 2012년 귀국해 정원 전문회사 오가든스를 설립해 활동하고 있다. 네이버캐스트에서 연재한 정원 콘텐츠를 엮은 『정원의 발견』을 비롯해 『소박한 정원』, 『영국 정원 산책』 등 다수의 정원 관련 서적을 저술했다.
  • 1. 나는 살구나무 아저씨였다 3인 3색 정원 단상
    창이 없는 집은 무덤이다. 그래서 죽음은 미니멀한 풍경이다. 종묘가 그렇다. 왕의 죽음들이 늘어 서 있는 풍경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집과 달리 극단적이다. 처음 지하철을 설계한 사람들은 지하에 풍경이 있을 리 없으므로 창을 만들지 않았다. 그들은 지하철이 풍경이 없는 땅 밑을 다니는 교통수단이라는 것만 생각했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생활하는 공간이라는 걸 놓쳤다. 아무 볼 것도 없는 밖이지만 사람들은 창을 원했다. 지하철에 창이 생기자 사람들은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창은 바깥을 보기 위한 통로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우리의 내면이 가 닿는 깊이가 있다. 그 깊이는 바로 자기의 깊이다. 창을 자주 보지 않는 사람은 자기의 내면을 자주 들여다 볼 용기가 없거나, 여유가 없는사람이다.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란 말이 있다. 시계는 우리의 삶이 아니라 남들의 삶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창은 우리의 시선이 어디에 가 닿는 지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창을 통해서 바깥을 보는 게 아니라 우리의 내면을 본다. 창을 보고 있는 시선은 그래서 깊다. 창이 건물의 높이에서 안과 바깥의 드나듦과 넘나듦을 통해 우리의 시선을 자신의 내면과 연결한다면, 정원은 건물의 바깥에서 우리를 자신의 내면에 있게 한다. 자신의 정원에 서 있다는 것은, 자신의 내면에 들어 와있다는 말과 같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조선 정원이 다른 정원들과 구별되는 특징이다. 조선 정원은 조성자의 안을 바깥으로 드러낸다. 일본 정원처럼 자연을 모사하는 것도 아니고, 중국 정원처럼 대상을 도드라지게 표현하지 않는다. 조선 정원은 자신의 내면을 표현한다. 그래서 조선 정원은 건축에 포함되지 않는다. 정원 자체로 독립적인 경우가 많다. 그럴 땐 건축이 정원의 한 요소로 작용한다. 아니, 많은 경우 조선 건축은 정원의 한 대상이다. 조선의 건축은 정원에 포함되고, 정원은 원림에 포함되고, 원림은 산수에 포함된다. 그래서 이루어지는 큰 그림이 산수지리山水地理다.1 조선의 건축은 산수지리-원림-정원-집의 순으로 접근해 간다. 이렇게 큰 그림을 그려서 집의 자리를 잡고, 거기에서 다시 집안에서 바깥으로의 시선을 창을 통해 구현하고, 그 바깥에 내면을 표현한다. 그것이 조선의 정원이다. 당연히 여기에는 조성자의 삶의 통찰, 철학적 배경이 없을 수 없다. 또 그것을 드러내는 데에 있어 상징이 빠질 수 없다. 그래서 조선의 정원은 간단하다. 연못, 나무 한 그루, 돌 하나가 상징이 되고 이야기가 된다. 이것이 산수와 만나면 더 큰 이야기가 된다. 그 옛날 한양과 같이 인구가 밀집된 도시에서도 인간의 삶과 자연이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산수지리의 원리가 지켜졌기 때문이다. 정원이 없어도 도시 자체가 산수지리의 맥락에 있었고, 그 큰 흐름 속에서 집들이 자리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함성호는 1990년 『문학과 사회』 여름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1991년 『공간』에서 건축평론신인상을 받으며 건축평론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시집으로 『56억 7천만 년의 고독』, 『성타즈마할』, 『너무 아름다운 병』, 『키르티무카』가 있으며, 티베트 기행산문집 『허무의 기록』, 만화비평집 『만화당 인생』, 건축평론집 『건축의 스트레스』, 『당신을 위해 지은 집』, 『철학으로 읽는 옛집』, 『텃밭정원 도시미학』(공저), 『반하는 건축』을 썼다. 현재 건축실험집단 EON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 다시, 되새겨야 할 정원의 정체성 다시, 정원을 말하다
    정체성 혼돈의 시대 삶을 살아가면서 인간이 풀어야 할 가장 근본적 질문중 하나는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아닐까 싶다. 유사 이래 수많은 종교와 철학 또는 예술 분야에서 이에 대한 적절한 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여전히 이 질문은 우리 앞에 정답 없는 물음표로 남아 있다. 어쩌면 수학 공식 풀이와 달리, 명쾌하게 답을 찾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불가능한 질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시대가 변할 때마다 우리는 새로운 가치관으로 사회를 정의하고, 그 사회에 속해있는 인간을 정의해왔다. 18세기 이전에는 사회의 변화 속도가 빠르지 않았고, 사회적 콘텐츠 또한 상대적으로 미미했다. 가치관에 대한 정의 역시 다양성보다는 깊이 있는 사고를 토대로 내려졌다. 하지만 18세기 이후 사회를 둘러싼 모든 속도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고, 시대를 앞서가는 새로운 콘텐츠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우리 사회를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물리적·정신적 공간으로 만들었다. 이런 급격한 변화는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정체성의 혼란(때로는 이러한 혼란을 미적인 가치로 표현하기도 하지만)을 야기하기도 했다. 덕분에 다양한 가치가 공존할 수 있게 되었지만 깊이 있는 가치를 상당 부분 놓쳐버리는, 그래서 이제는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조차 하지 않는 가벼운 시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어쩌면 21세기 들어 발생하고 있는 많은 사회적 문제들은 이러한 정체성의 부재, 또는 혼란에서부터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역사를 찬찬히 살펴보면 ‘빠른 성장’이 만들어 놓은 성과물들은 관심의 대상이 되지만, 그 성장에 따르는 혼란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18세기 이후, 정원garden은 시민 사회의 성장과 함께 조경landscape architecture이라는 결과물을 내놓으며 빠르게 발전하는 듯 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둘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져 서로의 정체성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정원의 정체성, 통제의 그늘 지금의 한국 사회를 휩쓸고 있는 ‘정원 열풍’을 바라보면, 바람은 불고 있으나 방향성을 잃은 채 지독한 편가르기 양상마저 보이고 있어, 시대적 요구에 빠르게 대응하지 못하고 혼란 속에 빠져 있는 듯하다. 마치 엄마와 아들이 싸우고 있는 모습이다. 시대가 요구하는 정원 문화를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우선 정원의 정체성에 대한 심도 있는 고민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정원은 가장 순수한 인간의 즐거움”이라고 말한 바 있다. 순수한 즐거움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해석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자연과의 공존 또는 소통을 통해 얻을 수 있다. 인간은 이러한 즐거움을 얻기 위해 울타리를 두르고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자연을 통제하며 정원을 만들어 왔다. 과거 자연의 어마어마한 위력 앞에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었던 인간이 자연과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은 울타리 안에서 자신들을 해치지 않는 자연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러나 자연과의 공존을 위해 정원을 만들었지만 그 안에는 통제라는 권력의 단편이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다. 자연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막강한 사회적·경제적 힘이 필요했기 때문에 정원은 자연스럽게 힘 있는 계층의 전유물이 되었다. 18세기 영국에 불기시작한 풍경화식 정원 열풍은 프랑스의 인위적인 정원이 자연과의 공존을 방해한다는 반성에서 출발해 자연을 닮은 정원을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거대한 정원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막대한 자금과 인력은 노예들의 노동력으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었다. 자연과의 공존은 이루었을지 몰라도 사람들 간의 공존은 오히려 극한 대립으로 치닫게 되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자연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힘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이준규는 성균관대학교에서 조경학 석사를 마친 후, 삼성에버랜드에서 10년간 조경 디자이너로 근무하며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2011년 좀 더 깊이 있는 정원 공부에 뜻을 두고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University of Essex, Writtle School of Design에서 정원 디자인 석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 ‘Intangible Garden Heritage’를 주제로 박사 과정 중이다. 기회가 될 때마다 한국 정원을 영국에 소개하고 있으며, 푸르네정원문화센터 이사와 월간 『가드닝』 편집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 정원의 귀환을 바라보는 몇 가지 시선 다시, 정원을 말하다
    정원을 공부하겠다고 십여 년 전 정원사의 한 부분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쓰겠다고 나섰을 때, 지도 교수님과 연구실 선배들은 다소 의아해했다(그게 미술사학과 논문이 될 수 있을까?). 회화와 조각, 사진과 건축, 양식사 연구와 작가론이 주를 이루던 학과의 교과 과정 상, 아무리 풍경화를 토대로 한다 하더라도 정원은 생경했기 때문이리라.우여곡절 끝에 졸업을 하고 공부를 계속하려 하자 이번에는 학부부터 조경학과에서 공부한 분이 말문을 흐렸다(재미는 있겠는데… 그게 요새 조경학과에서 다룰영역인가?). 모두의 것은 누구의 것도 아니라는 격언이 정원의 역사 공부에서도 반복되었다. 이게 소위 ‘한국적 현실’인가 싶어 외국에서는 어떻게 하나 찾아보아도 정답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원사를 연구한다고 한 뒤 가장 많이 듣게 된, 그리고 마음속에 품고 있던 은밀한 걱정은 ‘너무 마이너하지 않아’였다. 가뜩이나 공부해서 먹고 사는 장래도 불확실한데, 기왕이면 좀 잘 팔릴 것 같은 게 낫지 않나. 미술사학에서도 조경학에서도 지극히 마이너한 분과로 보이는 정원, 게다가 서양의 정원을 한국에서 공부한다는 것에 대한 염려는 당연했다. 그런데 요 근래에 들어서 이런 걱정이 기우였나 싶을 정도로 정원이 인기를 끌고 있다. 여기저기에서 정원을 만들고, 이야기한다. 공원을 만들자고 외치던 정부와 지자체에서는 이제 정원을 조성하자고 하고, 시민가드너 양성 프로그램도 활발하다. 정원박람회가 큰 구경거리가 되고, 2013년 조경대전의 공모 주제도 ‘열린 정원’이었으며, 정원문화협회도 발족되었다. 정원잡지만 한 해에 세 개가 창간되었고, 영향력이 큰 포털사이트에도 정원을 주제로 삼은 글이 연재된다. 여기저기 기업에서도 가드닝이 새로운 마케팅 수단으로 논의된다. 해외 가든 쇼에서 수상한 작가가 중앙 매체에서 국가 대표 대접을 받는다. 서점에 가서 ‘정원’으로 키워드 검색을 하면 수십여 권의 책이 화려하게 쏟아져 나와 훑어보기도 버겁다. 그야말로 정원이 ‘핫’한시기이다. 정원 예술과 가드닝 사이에서 이렇게 정원이 ‘핫’하고 많은 사람들이 정원을 만들고 이야기하고 활동의 대상으로 삼는다. 하지만 이런 뜨거운 열기를 좀 더 찬찬히 살펴보면 이는 정원 열풍이라기보다는 가드닝, 즉 원예적인 정원 가꾸기의 세련된 형태의 유행에 더 가깝게 보인다. 휴식과 힐링을 위한 정원 가꾸기, 안전하고 경제적인 먹거리 마련을 위한 텃밭 정원, 미니 가든, 학교 정원… 우리는 이러한 다양한 것들을 모두 정원이라고 부른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를 예술로서의 정원으로 볼 수 있을지는 앞으로 좀 더 오래 생각해볼 일이다. 물론 정원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형태인 채원, 즉 키친 가든의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다. 일차적으로는 식량의 자급자족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오늘날에는 무엇인가를 심고 키우며 가꾼다는 것에 더 큰 가치가 부여된다. 이는 커뮤니티 정원 운동에서 더욱 부각된다. 실질적인 목적이 있으면 사람들을 많이 끌어들일 수 있고, 머무는 시간을 연장하고, 나아가 가꾸는 기쁨도 알게 하는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도시 내 공지나 옥상에 텃밭을 만들고 (자원이 순환되면 금상첨화이다), 여기에서 수확한 먹거리를 나누는 ‘착한’ 정원은 도시경관뿐 아니라 지역 공동체까지 건강하고 아름답게 조성하니 한 평 공원보다 더 착하고 발전된 형태로 보인다. 여기에서도 강조되는 것은 정원이라는 대상보다는 가드닝이라는 행위와 그 과정이다. 정원이 있다는 점, 도시 속에서 몸소 정원을 가꾼다는 자체만으로도 감격스럽다. 하지만 도시 농업적 가드닝의 유행과 조경의 중심 영역으로의 정원의 귀환을 동일시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정원 문화의 확대는 양적 성장에서 질적 성숙으로의 이행을 반증하고, 정원이 조경의 기본 영역임을 강조한다”1고 하지만, 현상에서 담론을 찾는 것은 시기상조일까. 행위 혹은 현상으로서의 가드닝과, 이론적 체계를 갖춘 하나의 예술 장르로서의 정원이 혼용되고 있다. 물론 이를 엄격하게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자칫 무의미한 공론으로 빠질 수 있다. 하지만 이론이라는 토대 위에 뿌리 내리지 못한 정원 실천은 지속되지 못하고, 또 다른 공허한 외침에 그칠 것이다. 게다가 정원열풍이 표방하는 정원의 대중화를 통한 저변 확대라는 것이 정원 문화의 확산인지, 아니면 새로운 시장으로서의 정원 산업의 팽창인지, 그 목적을 짚어보아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경계는 모호하지만, 무엇이 추구하는 본질이고, 무엇이 부수된 것인가는 한 번쯤 곰곰이 생각해볼 일이다. 더 나아가 최근의 정원 열기, 조경의 토대로서의 정원을 부각하는 것 또한 인접 분야에서의 산업·제도적 측면에서의 침습에 대한 방어적 반응이 아닐지도 반추해보아야 한다. 황주영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불문학과 영문학을 공부하고, 미술사학과에서 풍경화와 정원에 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서울대학교 대학원 협동과정 조경학전공에서 19세기 후반 도시 공원의 모더니티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술과 조경의 경계 사이를 넘나들며 문화사적 관점에서 정원과 공원을 보는 일에 관심이 많고, 관련된 책 몇 권을 함께 쓰고 옮겼다.
  • 다시, 정원을 말하다
    가히 정원 열풍이다. 심지어 정부와 여러 지자체까지 나서서 시민을 위한 다양한 정원 교육 프로그램과 제도적 장치를 만들고 있다. 특히 지난 해 개최된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는 대중적 호응을 얻으며 이러한 열풍을 거세게 증폭시켰다. 여러 매체에서 정원 관련 콘텐츠를 앞다투어 쏟아냈고, 2013년도에만 3개의 정원 잡지가 연달아 창간되기도 했다. 새롭게 조성되는 공간에 ‘정원’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경우도 늘어나, 이제 정원은 사적인 공간을 넘어 공공의 환경을 가꾸는 새로운 키워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러한 들썩임은 정원 문화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런데 우리에게 서양에서 태동한 ‘정원’ 문화라는 것이 있기는 했던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버전의 ‘자연’ 상품화일까? 지금 정원이 유행처럼 소비되고 있다 해도, 에덴을 원형으로 하는 정원의 역사는 문명의 역사나 다름없었다. 정원은 조경이라는 전문 분야를 탄생시킨 모태이자, 공공적 도시 공간의 상징인 공원의 전신이다. 긴 시간 동안 정원에는 다양한 가치가 누적되어 왔다. 정원은 가장 근본적으로는 자연과 문화의 중간지대였고, 탄생과 죽음의 공간이었으며, 일상적인 생산과 노동의 장이었다. 또 정원은 감각적 경험과 미학적 쾌락이 충만한 환경이자 여러 예술이 연합하는 극장이기도 했다. 트렌드라는 미명 하에 별다른 반성 없이 소비되기 시작하고 있는 동시대의 정원과 그 문화를 다시 독해할 필요가 있다. 정원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가치는 무엇인가? 우리가 정원을 요청하고 있는 현상의 이면은 무엇인가? 4월호 특집은 ‘다시, 정원을 말함으로써’ 정원의 가치를 재발견하기 위한 자리다. 그것은 잃어버린 정원을 다시 찾는 일에 다름 아니다. 1. 정원의 귀환을 바라보는 몇 가지 시선 _황주영 2. 다시, 되새겨야 할 정원의 정체성 _이준규 3. 3인 3색 정원 단상 1 나는 살구나무 아저씨였다 _함성호 2 정원, 천천히 준비하고 기다려야 찾아올 문화 _오경아 3 불가능한 정원의 꿈, 콘크리트 공원과 텃밭 _반이정 4. 정원, 책으로 말하다 _남기준 5. 어느 정원의 8경 _정욱주
    • 편집부
  • 공원 도시 서울
    세계 도시의 공공 아젠다, 공원 오늘날 세계 주요 도시의 공원과 녹지에 대한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공원 정책 컨설턴트인 피터 하닉Peter Harnik은 “공원이 주요한 공공 아젠다가 되었다”고 지적하였다. 많은 도시들이 보다 더 좋은 공원 체계를 갖추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세계 여러 도시들은 새로운 공원을 만들고 녹지를 보존함으로써 도시 이미지를 제고하고 도시 경쟁력을 증진시키고 있다. 싱가포르가 그 대표적인 예다. 1960년대 초부터 리콴유 수상의 리더십에 따라 ‘정원 도시Garden City’를 표방하며 도시 녹화에 힘써왔으며, 그 결과 많은 외국인 투자를 유치할 수 있었다. 최근에는 ‘정원 속 도시A City in a Garden’로 비전을 재설정하면서 녹색 공간 확충을 위한 공원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전략적 개발 부지인 마리나 베이Marina Bay 매립 공간을 상업 공간으로 개발하지 않고, 식물원형 공원인 ‘가든스 바이 더 베이Gardens by the Bay’로 조성한 것도 도시개발 패러다임의 큰 변화다. 또한 산지형 공원을 보행교로 연결하거나 건축물에 수직 정원vertical garden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추진하고 있다. 이외에도 뉴욕, 밴쿠버, 취리히 등 전 세계의 도시들은 공원녹지 수준 향상에 도시 정책의 핵심역량을 기울이고 있다. 서울은 어떠한가? 지난 30여 년 동안 도시 공원은 양적인 확대뿐만 아니라 질적인 수준도 현격하게 높아졌다. 이러한 변화를 가져온 중요한 원인은 1995년 부터 도입된 지방자치제도에서 찾을 수 있다. 시민들이 직접 선출하는 시장들은 생활 공간의 변화에 주목하였고, 이는 공원과 공공 공간의 관심으로 이어졌다. 『경향신문』 2013년 9월 2일자 논설은 서울 시장의 공원 정책에 대한 관심을 다루고 있다. “서울 시장의 공원 사랑은 유별나다. 역대 5명의 민선 시장은 모두 자기 이름표를 단 공원을 하나 이상씩 갖고 있다. (중략) 큰돈 들이지 않고 자기 이름표를 새길 수 있는 사업 중 공원만한 것도 없다.” 이제 서울의 공원녹지는 세계 도시와 비교하여도 손색없는 수준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서울의 공원녹지 정책의 변화 과정과 현재 정책의 지향점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나아가 공원녹지 관점을 투영한 도시 비전인 ‘공원 도시, 서울’의 가능성과 과제를 점검하고자 한다. 서울시 도시 공원 정책의 변화 민선 1기 조순 시장은 취임 후 ‘공원녹지 확충 5개년 계획’을 수립한다. 서울시 공원녹지 최초의 전략 계획인 셈이었다. 소극적인 공해 방지 차원을 넘어서 환경친화적 도시를 만드는 수단으로 공원녹지를 확보해야한다는 취지에서 수립된 계획이다. 산업 시설 이전지를 공원화하는 시도도 이루어져 OB 공장 부지, 파이로트 공장 부지가 공원화되었으며, 양재천에서 자연형 하천복원과 길동생태공원에서 생태 공원의 개념이 구현되었다. 무엇보다도 회색의 여의도광장을 녹색의 여의도공원으로 변화시킨 것은 상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민선 2기 고건 시장은 ‘생명의 나무 1,000만 그루 심기’를 정책 목표로 삼는다. 도시녹화 사업에서 성과 목표를 설정하고 접근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 계획은 광범위한 나무 심기 사업을 통하여 실질적인 녹지량을 증진시켰다는 평가를 할 수 있고, 공공 기관 담장 철거, 학교 공원화, 옥상 녹화 등 다양한 방식의 녹지 확보를 시도했다는 것이 주목할 점이다. 이 시기에는 쓰레기 매립지인 난지도를 월드컵공원화하였고, 정수장으로 활용하였던 선유도를 공원화하면서 공원 설계의 질적인 수준도 향상시켰다. 민선 1기와 2기에는 공원녹지의 양적 확충이 주를 이루었고 도시 산업 재편에 따른 이전적지를 효과적으로 활용한 것이 특징이다. 민선 3기 이명박 시장의 경우 ‘생활권 녹지 100만평늘리기’ 사업을 추진하면서도 공공 공간과 공원녹지를 도시 공간 재편의 전략으로 활용하였다. 서울광장과 청계천 복원은 새로운 유형의 공공 공간이라는 점과 도시마케팅 측면에서 활용하였다는 점이 새로운 시도였다. 문화관광 타운으로 구상한 부지를 서울숲으로 공원화한 것도 개발보다는 환경 가치를 중시하는 시대변화를 잘 반영한 사례다. 민선 4기 오세훈 시장은 ‘생활권 녹지 100만평 확충’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으며, 지역적 형평성의 관점에서 강북에 북서울꿈의숲과 강서에 서서울호수공원을 조성하였다. 또한 신규 공원녹지 확보가 어려운 상황에서 기존 공원을 리모델링하는 방식으로 추진되었다. 남산 르네상스 사업을 통한 남산공원의 접근성 개선과 한강 르네상스 사업을 통한 여의도한강공원 등 7곳의 한강공원 리모델링이 그러한 예다. 민선 5기 박원순 시장 역시 이전 민선 시장처럼 도시공원과 공공 공간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 시장으로 취임하기 이전에 희망제작소를 운영하면서 세계공원연구소를 창립하여 운영하기도 하였다. 민선 5기의 변화는 거버넌스 방식으로, 공원 계획과 운영을 위하여 여러 전문가들로 구성된 공공조경가 그룹을 출범시켜 정책 개발에 참여하게 한 것이다. 2013년부터는 ‘서울 꽃으로 피다’라는 캠페인을 통하여 시민들이 주도적으로 생활 곳곳을 녹화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민선 3기인 2003년 설립된 서울그린트러스트는 시민 주도의 도시 공원 및 도시숲 운동으로 시민참여 공원 조성 및 운영이 활착하는 데 기여하였다. 최근 도시 녹화 및 공원 조성 과정에서 시민이나 기업 등 다양한 주체의 참여가 확산되는 추세다. 조경진은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 교수이며, 2014년 설립된 한국조경학회 정원학연구센터 센터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3년부터 서울시 공원녹지 총감독 및 마곡중앙공원 총괄계획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서울시 공공조경가 그룹 공원혁신분과 위원장으로 ‘푸른도시 선언 및 전략계획’ 수립을 위한 실무위원장으로 일하였다.
  • 걷고 싶은 도시 서울?
    ‘걷고 싶은 거리’로 대변되는 불편함 불행하게도, 또 역설적으로 서울의 ‘걷고 싶은 거리’는 이 도시가 걷고 싶지 않거나 걷기에 불편하다는 인식을 드러낸다. 더구나 이를 행정의 치적으로 광고하는 것은 도시에 대한 오해이거나 걷는다는 행위의 도시적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증표다. 걷기에 불편하다는 것은 도시로서는 치명적인 단점이며, 유행하는 표현으로는 도시의 글로벌 경쟁력에 커다란 상처를 준다. 1998년 7월 서울시는 시의 전반적인 가로 환경이 보행불안, 보행불편, 보행불리 등 보행삼불이라며 시민의 보행권과 삶의 질이 보장되는 ‘걷고 싶은 도시만들기’ 사업을 추진하였다. 시에서 직접 추진한 걷고 싶은 거리가 열 군데이고 자치구별로 추진한 것도 상당수여서 서울시 전체로는 백여 군데의 ‘걷고 싶은 거리’가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행삼불의 불명예는 가시지 않고 있으며, 보행권 확보라는 기본 취지는 사라지고 보도 폭만 두세 배 늘려 불법 주차 공간만 제공했다는 시민의 비난이 일고 있다. 게다가 보도 위를 질주하는 오토바이는 아찔하기까지 하다.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의 기사는 서울의 인도에서 걷기가 얼마나 불안한지를 냉소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서울은 기본적으로 육백 년 전의 도시 구조에서 출발했다. 일제강점기의 식민 도시로 근대를 만났고 전쟁을 거치며 파괴되고 다시 급격하게 현대화되면서 자동차 중심으로 개발되었다. 오래된 도시에 자동차가 드나들다보니 인도를 만들기도 어려워서 서울 도로의 삼분의 이 가량은 인도가 없는 도로가 되었다. 그러나 50년이 채 되지 않은 신도시인 강남 거리의 보행 환경도 크게 나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보면, 구조적 한계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거리를 걷고 싶게 만들겠다는 행정의 포부와 15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서울의 인도에서 걷는 일은 개선이 되지 않는 것일까? 도시에서 ‘걷기’의 의미 ‘걷고 싶은 거리’는 최초로 걷기의 의미를 일깨웠다는 것 자체로 의미가 있었다. 자동차의 통과에 역점을 두었던 개발 시대의 자동차 중심의 도시 교통 체계에 대한 반성과 도시 공간의 질에 대한 고민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평가할 만하다. 걷기란 두 팔과 두 다리를 번갈아서 휘젓는 것으로 인간이 신체를 이동하는 행위다. 가장 원초적이자 근본적인 이동의 수단이다. 걷기는 운동의 효과를 가지고 있으며 이 때문에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헬스클럽에서 쳇바퀴를 굴리고 있다. 교토와 하이델베르그Heidelberg에있는 ‘철학자의 길’을 보면 걷는다는 것은 단순한 이동과 운동을 넘어서 사색을 위한 물리적인 전희이기도 하다. 게다가 ‘걷기의 기적’ 같은 TV프로그램에서 볼 수 있듯 명상을 넘어서 일종의 정신요법의 효과까지도 있다.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서 걷는다는 산티아고의 순례길에 이르면 걷기는 일종의 만병통치약임에 틀림없다. 이런 걷기에 적합하고 보기에 쾌적한 ‘걷고 싶은 거리’를 만들겠다는 데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도시를 거부하는 ‘걷고 싶은 거리’ 도시와 자동차에 관한 오래된 편견이 이러한 오해의 출발이다. 이에 관해 두 가지 유의미한 사례를 참조할 수 있다. 첫째는 미국 뉴저지의 래드번Radburn이다. 자동차로 30분이면 맨해튼으로 출퇴근이 가능한 위치에 자리잡은 래드번은 미국의 대공황 시절에 만들어졌다. 사회적으로 주택 투기의 광풍이 한풀 꺾이고 자동차가 본격적으로 보급되던 시기였다. 래드번은 삼천 명 남짓의 인구가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다. 하워드의 전원 도시와 페리의 근린주구 개념에 자동차가 결합된 미국식 교외suburban의 완성판이라고 할만하다. 래드번을 설계한 것은 자동차였다. 그러나 보다 엄격하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자동차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다. 래드번의 보행로와 자동차로는 철저하게 구분되어 있다. 하루에 채 수십 대의 차도 왕래하지 않는 한산한 도로이지만 고가도로나 지하도로 분리되어 있다. 전체단지를 순환 도로로 두르고 각 주택으로는 쿨데삭Cul-De-Sac으로 끝나는 진입 도로로 이어진다. 이른바 수퍼블록이 완성된 것이다. 그러나 신경증적인 보차분리를 통해 아이들이 안전하고 공원 같은 주거 환경을 만든다는 유토피아적 이상은 래드번을 평범하고 지나치게 차분한 전형적인 미국의 교외 마을로 만들었다. 아이들이 자라나며 생기는 인구 변화는 공원과 놀이터를 텅 비게 만들었으며 보차분리 때문에 고립된 단지는 오히려 자동차를 필수로 만드는 역설을 만들기도 했다. 도시의 전통적인 거리보다는 산책로가 이어진 주거 단지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경훈은 1963년 경기도 백령도의 섬마을에서 태어났다. 스물넷에 뉴욕으로 건너가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에서 건축을 공부했고,졸업 후 서울과 뉴욕을 오가며 신탄진 고속도로 휴게소, 헤이리 랜드마크하우스 등의 건축 작업을 했다. 2003년부터 국민대학교 건축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 외에도 여러 하위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건축 작업과 글쓰기를 해왔다. 저서로 『서울은 도시가 아니다』가 있으며, 『세컨드 모더니티의 건축』, 『통섭지도: 한국건축을 위한 아홉 개의 탐침』등의 책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 위압적 랜드마크에서 수평적 랜드마크로
    1960년대, 실패한 랜드마크 1960년대, 즉 ‘돌격의 시대’에 지어진 서울의 높은 건물들은 대부분 실패한 랜드마크가 되었다. 이상적인 근대 건축의 모습을 한 이러한 건물들은 현재 원형대로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당시 건축미를 자랑한 건물 중에 비교적 훼손되지 않고 남아 있는 건물은 남산의 교육연구정보원(구 어린이회관) 정도다. 호텔, 오피스, 공공 기관 등은 비교적 본래의 모습대로 남은 경우가 많이 있지만, 주상복합이나 아파트 등은 도시의 흉물로 남게 된 경우가 많다. 건축가 김수근이 한국기술개발공사에서 급작스럽게 설계한 세운상가는 근대 건축의 이상적 요소인 공중가로와 필로티 등의 구조를 지니고 있었지만, 1980년대 개발된 용산과 강남으로 건물의 상업 기능이 빠져나감에 따라 슬럼화되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항상 새로운 것으로 옮겨가는 쇼퍼shopper들의 속성이 쇼핑타운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그래서 전자상가는 용산으로, 새로운 백화점은 강남으로, 소위 핫스팟의 이전 현상이 발생했다. 88올림픽 즈음부터 자가용 이용이 급증함에 따라 강북의 거주 인구는 줄어들고 주차장은 부족해졌다. 새로운 상업을 받아들이지 못한 세운상가는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똑같은 현상은 현재도 일어나고 있다. 만약 용산 개발이 원안대로 이루어져 17개의 타워가 지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기존의 용산 민자 역사에 있는 쇼핑몰들과 새롭게 들어오는 대형 쇼핑몰 간의 생존경쟁이 불가피해지면서 지금과 같은 수준을 유지하기는 어려워질 것이다. 예를 들어 신도림역에 디큐브시티가 지어지자 근처의 테크노마트와 같은 쇼핑몰들은 상대적으로 화려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 1960년대의 교훈은 랜드마크 건물에서 기능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즉 상업 건물이나 주상복합 건물은 랜드마크가 되기 어렵다. 그나마 현재 남아있는 호텔과 오피스들은 기업의 성장 덕택에 잘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정도의 건축미를 구가하며 지은 건물은 오너의 기호가 바뀌지 않는 한 원형의 모습을 유지하며 도시에서 근대 건축의 추상성만을 더했을 뿐이다. 도시를 위한 더도 덜도 없다. 1970~80년대, 도시의 발전과 랜드마크 1970~80년대에는 서울의 발전에 따라 새로운 랜드마크가 필요하였다. 63빌딩과 N서울타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서울의 상징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랜드마크이며, 외국인에게 서울을 소개할 때 빠지지 않는 관광 명소다. 두 랜드마크는 주변 건물들에 비해 압도적인 높이로 상징성을 확보한다. N서울타워는 한국에 텔레비전 방송이 실용화되기 시작하면서 건립된 타워다. 63빌딩은 250m의 높이로 1985년 5월 완공되었는데,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었다. 현재도 계획 중인 것을 제외한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세 번째로 높은 건물이다. 금색의 거대한 형태의 63빌딩은, 88서울올림픽 당시 우리나라의 국력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랜드마크의 역할을 수행했다. N서울타워는 진화하는 과학 기술력을, 63빌딩은 국력을 세계에 보여주려는 노력이었다. 각각의 건물이 지어진 배경과 목표는 다르지만 두 건물 모두 시대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랜드마크다. 1990년대 이후, 지역 개발의 다른 이름 1990년대 이후 서울에서는 경제성장과 더불어 ‘랜드마크’라 칭하는 다양한 지역 개발과 고층아파트 건설이 활발하였다. 지금까지도 랜드마크는 각종 일간지와 분양 광고 문구에 등장하는 단골 메뉴다. 이명박 시장이 재임하기 이전에도 민간에서부터 나름의 국제화(?)는 진행되어 해외 건축가들에게 호텔과 오피스 디자인을 맡기는 현상이 일어났다. 종로의 화신백화점 자리에는 라파엘 비뇰리Rafael Vinoly가 디자인한 종로타워가 지어졌고, 한국은행 앞에는 역시 부담스러운 모습의 포스트타워(중앙우체국)가 지어졌다. 자유롭고 현대적인 모양으로 위압감을 형성하는 공공 건물의 사례다. 강남 삼성동에 다니엘 리베스킨트Daniel Libeskind가 설계한 현대산업개발 건물도 알 수 없는 문양이 유리 커튼월에 붙어 있다. 이 세 건물 모두 택시기사님들에게는 뚜렷한 인상을 남겨 인지성을 확보하며 보행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개개의 건물이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을 경우는 그래도 다행이다. 곤혹스러울 때는 폭이 넓은 건물이 큰 길 앞에 떡 버티고 서 산을 가리거나, 요즘 재개발된 아파트처럼 군집되어 단지 내부로의 시선을 차단하는 경우다. 아파트 단지의 철옹성 같은 모습은 주변의 작은 건물들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명박 시장이 2006년 허가를 내 준 여의도의 서울국제금융센터IFC 몰는 외국 기업에게 99년간 장기 임대하는 형식으로 개발이 추진되었다. 서울을 두바이와 같은 국제 금융 지구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계획의 일환에서, 현재는 좌초된 용산 개발 사업의 오피스들과 시너지 효과를 내도록 계획된 것이다. 하지만 지금 IFC몰의 세 동 중 한 동은 텅텅 비어있는 실정이다. 개발의 바통을 이어받은 오세훈 시장은 ‘디자인 서울’ 사업을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에 ‘디자인 서울’에 관해 전면 광고를 하는 등) 열성적으로 추진하며, ‘한강 르네상스’ 사업과 노들섬 오페라 하우스 건립계획을 밀어붙였다. 그리고 그 정점은 DDP 건립으로 구현하였다. DDP는 언론과 시민들로부터 그 정당성에 대해 뭇매를 맞으면서 지어졌고, 운영에 대해서 기대감 보다는 걱정이 많이 앞서고 있다. 송하엽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건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중앙대학교 건축학부에서 디자인과 건축 역사, 건축 이론을 가르치고있으며, 대안건축연구소를 운영하며 디자인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작품으로는 ‘Reinventio’와 ‘바람같은 돌’이 있으며, 저서로는 『랜드마크,도시들 경쟁하다』, 역서로는 『표면으로 읽는 건축』이 있다.
  • 기억이 사라진 도시
    기억의 감각을 잃은 피맛길 불현듯 대학 때 먹던 빈대떡 생각이 나 종로 피맛길을 찾아 나섰다. 특히 광화문 교보문고 근처에 있던 ‘열차 집’ 빈대떡은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게 정말 환상적인 맛이었다. 원래 나무판을 기차처럼 늘어놓고 빈대떡을 팔아서 ‘기찻집’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다가, 1960년대에 피맛길 초입으로 이사 오면서 정식으로 ‘열차집’이라는 간판을 걸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 운종가로 불리던 종로를 지나는 고관이나 사대부들의 말을 피해 서민들이 다닌 뒷길이라 하여 피맛길로 이름 붙여진 이 골목길에는 빈대떡 집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선술집과 국밥집 등 저렴한 먹거리가 줄줄이 늘어서 주머니가 가벼운 서민들을 반갑게 맞아주곤 했다. 골목길을 걸으며 그 맛과 향과 소리를 온 몸으로 느끼고 있으면, 노릇노릇한 생선전들을 맛깔나게 구워주시던 시골 할머니,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순대국밥을 시장에서 뚝배기 채로 사오신 어머니, 지글지글 구워지는 빈대떡 소리를 친구삼아 함께 떠들었던 대학 친구들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하지만 그곳에 열차집은 더 이상 없다. 피맛길이 있어야 할 그곳에는 거대한 주상복합 건물이 떡하니 버티고 서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소중한 추억, 그 감각의기억이 차곡차곡 쌓여있던 공간에는 맛도 향도 없는 거대한 유리 건물이 서있다. 정겨운 골목길이 있던 자리에는 번쩍거리는 상가가 대신 늘어서 있고, 입구에는 홍살문에 ‘피맛골’이라는 간판이 어색하게 서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상가 안으로 들어가 보니, 청진옥, 미진, 청일집 등 익숙한 옛 이름들이 있다. 반가운 마음에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 음식을 먹어보지만, 왠지 내 기억 속의 맛과 향이 아니다. 깨끗한 실내 공간에 옛날 대문처럼 가게 앞을 꾸며놓은 청진옥의 선짓국은 옛날의 향이 아니고, 새로운 가구와 깨끗한 벽으로 바뀐 청일집의 빈대떡은 무엇인가 빠진 것 같다. 미진은 그냥 동네 국수집과 다르지 않다. 같은 주인, 같은 재료, 같은 요리인데, 왜 다르게 느껴지는 것일까? 나에게 피맛길의 선짓국과 빈대떡은 단지 맛난 음식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소중한 기억이자 내 감각이며 내 몸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 장소가 간직한 시간의 맛과 향이 사라진 공간에서 그 음식들은 더 이상 같은 음식이 아니다. 나는 단지 추억의 공간을 잃은 것이 아니라, 내 기억의 원천을 잃은 것이며, 그와 함께 내 몸속 감각의 기억 역시 조금씩 조금씩 희미해지며 어느새 나 자신을 잃어가고 있다. 기억을 넘나드는 감각의 문, 선유도공원 어느 따뜻한 봄날 선유도공원을 찾았다. 버스에서 내려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늘어선 공원으로 들어서니 양화대교를 지나는 차 소리가 어느새 폭포 소리처럼 들린다. 봄을 맞아 여기저기서 물채우는 소리로 요란하다. 콸콸콸, 졸졸졸, 보글보글… 물 솟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으니, 어느 대중목욕탕의 기억과 함께 온 몸이 느슨해진다. 붉은 벽돌의 ‘서울이야기’관을 돌아가니 마치 고대 신전의 폐허가 막 발굴된 것 같은 공간이 눈앞에 펼쳐진다. ‘녹색 기둥의 정원’이다. 이곳은 원래 정수 과정을 모두 거친 물을 송수하기 전에 담아두던 지하 정수 공간이었는데, 테니스장으로 사용되던 지붕 슬래브를 걷어내고 기둥을 그대로 살려 정원으로 만든 것이다. 뒤쪽의 ‘서울이야기’관은 정화된 물을 영등포 지역으로 보내는 송수펌프실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경사로를 타고 ‘녹색 기둥의 정원’으로 천천히 걸어 내려가니, 마치 인간 군상처럼 줄 맞춰 서있는 기둥들이 나를 맞이한다. 각각의 기둥은 마치 사람처럼 옷을 입고 있다. 어떤 기둥은 벌거벗고 있고, 어떤 기둥은 레슬링 선수처럼 한껏 부풀어 오른 덩굴 코트를 입고 있다. 어떤 기둥은 아랫도리만 가린 채 헐벗은 콘크리트를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 상부 콘크리트 슬래브를 잘라낸 흔적은 사람의 얼굴처럼 각각의 기둥에 다른 표정으로 남아 있다. 원래 지하 정수 공간을 반으로 나누던 벽이 있던 자리에는 긴 의자가 놓여있다. 의자에 앉아 기둥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고, 기둥을 감싼 담쟁이의 잎사귀 하나하나가 손짓하는 듯 살랑거린다. 오랜 시간 쌓여있던 선유봉과 채석장, 정수장의 기억 하나하나가 다시살아나는 것 같다. 선유도는 옛날에는 신선이 내려와 놀다 간 봉우리라하여 선유봉仙遊峯으로 불렸다. 뱃길로 연결된 양화나루 쪽 잠두봉蠶頭峯, 지금의 절두산과 함께 한강의 절경으로 유명하여, 많은 풍류객들이 선유봉을 배경으로시와 그림을 남겼다. 특히 조선 시대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謙齋 정선鄭歚(1676~1759)의 ‘선유봉’ 그림을 보면, 가운데 우뚝 솟은 선유봉 자락에 소박한 초가집과 웅장한 기와집이 함께 마을을 이루고 있고, 황금빛 모래사장에는 배에서 갓 내린 선비 일행이 걸어가고 있고, 저 멀리 한강에는 양화나루 쪽으로 큰 배들이 오가고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이르자 서서히 존재감을 잃어갔다. 1925년 대홍수로 한강이 범람하자 일본은 제방을 쌓기 위해 선유봉의 암석을 캐내더니, 1929년에는 여의도에 비행장을 건설하기 위해 아예 도로를 만들고 파내기 시작했고, 1936년에는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키고 본격적으로 한강 치수사업을 위한 채석장으로 활용했다. 광복 후에도 미군은 인천으로 가는 길을 만들기 위해 골재를 채굴해갔고, 1962년 제 2 한강교(양화대교)를 선유도 위에 지으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선유봉의 흔적마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조한은 1969년 서울 생으로 홍익대학교 건축학과, 예일대학교 건축대학원을 졸업한 뒤 지금은 홍익대학교 건축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한디자인(HAHN Design) 및 ‘생성/생태’ 건축철학연구소 대표이기도한 그는 건축, 철학, 영화, 종교에 관한 다양한 작품과 글을 통해 건축과 여러 분야의 접목을 꾀하고 있다. 2009년 ‘젊은 건축가상’, 2010년‘서울특별시 건축상’을 수상한 그의 대표 작품으로는 M+, P-House,LUMA, White Chapel 등이 있다. 지은 책으로 『서울, 공간의 기억 기억의 공간』이 있다.
  • 시장의 교체와 시정의 변화 : 민선 20년의 흐름을 읽다
    크게 보고 흐름을 읽자 “시장市長보다 시정市政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시정보다 시민市民이 더, 더 중요하다.” 지난 해 출간한 책 『나는 튀는 도시보다 참한 도시가 좋다』의 마무리 부분에 “좋은 시장 < 좋은 시정 < 좋은시민”이란 제목의 글을 넣어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참한 도시든 아름다운 도시든 정말 좋은 도시를 원하고 그런 도시에서 살고 싶다면 우선은 좋은 시장을 뽑아야겠지만 거기에 멈추지 말라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였다. 시장이 욕심꾸러기 시장市場에 잡아먹히지 않고 오로지 시민을 위해 일하기 위해서는 바른 시정市政을 확정하고 실천에 옮겨야 한다. 시장이 얼굴이라면 시정은 몸통이다. 시장이 이미지라면 시정은 우리 삶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현실이다. 시장 선거 때부터 후보의 됨됨이뿐만 아니라 그와 그를 지지하는 세력의 바람이 담긴 정책, 즉 ‘시정’을 면밀히 살펴야 하고, 시장을 뽑은 뒤에도 계속 지켜봐야 한다. 그가 약속한 대로 시정을 실천하고 있는지를 눈을 부릅뜨고 감시해야 한다. 시장으로 하여금 좋은 시정을 펼치도록 하는 일을 누가 할까? 바로 시민이다. 시민뿐이다. 좋은 도시는 오직 좋은 시민만이 누릴 수 있다. 아름다운 도시는 먼 곳에 있지 않다. 아름다운 시민들이 살고 있는 곳이 바로 아름다운 도시다. 그래서 시장보다, 시정보다, 시민이 더 중요한 것이다. 지방자치제도의 부활에 따라 1995년 6·27 지방 선거로 민선 1기 서울 시정이 출범한 이래 민선 5기까지 20여년을 보냈고, 이제 눈앞에 닥친 6·4 지방 선거를 통해 조만간 민선 6기를 열어갈 것이다. 지난 20년 동안 서울 시민들은 조순, 고건, 이명박, 오세훈, 박원순 시장까지 다섯 명을 서울 시장으로 뽑았다. 다섯 명의 서울 시장들이 지난 20년 서울 시정을 이끌어 왔다.시장이 바뀔 때마다 시정 또한 바뀌었다. 미세한 변화도 있었고 아주 큰 변화도 있었다. 연속된 흐름도 있었고, 정반대의 역류도 있었다. 서울 시정을 조금 크게 보았으면 한다. 지난 20년은 꽤 긴 시간이었고 우리의 현대사 격동기의 한 매듭을 지은 아주 중요한 역사이기도 하다. 시장의 교체와 그에 따른 시정의 변화를 크게 보고 흐름을 읽어보고자 한다. 과거와 현재, 그 흐름을 읽으면서 서울의 미래를 가늠하고 꿈꾸기 위해서다. 민선 1기와 민선 2기 1990년대의 한가운데를 지나던 1995년 7월 1일 민선 1기 ‘조순 시정’이 시작되었다. 부활한 지방자치제도에 따라 시행된 첫 번째 선거로 선출되었다는 점에서 조순 시장과 그의 시정을 살펴보는 일은 매우 흥미롭고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왜 서울 시민은 조순 후보를 시장으로 선출했고, 시장이 된 그는 어떤 시정을 펼쳤을까? 조순 시장의 ‘개발은 이제 그만’ 초대 민선 시장으로 당선된 조순 시장은 취임식 하루전날 있었던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취임식을 무기연기한 채 사고 수습에 전념했다. 두 달 후인 9월 1일 남산 백범광장에서 취임식을 가진 뒤 각 부서 업무 보고를 들었다. 도시계획국의 업무 보고 때 용산, 뚝섬, 마곡, 문정 등 서울시 대규모 미개발부지 전략 개발 구상 보고를 듣다가, 아직도 서울에서 이런 식의 개발을 지속할 것이냐며 보고를 중단시켰다. 미래를 대비한 전략적 구상을 당장의 개발 계획으로 오해한 탓도 있었겠지만 서울 시정에 대한 조순 시장의 생각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조순 시정은 무엇보다 안전과 방재를 중시하였다. 시정 과제의 첫 번째 꼭지가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서울’이었다. 40여년 지속되어온 개발 시대의 관성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100여명의 전문가들로 ‘녹색서울시민위원회’를 구성하고 녹색서울계획 수립 작업에 착수하였다. 환경을 중시하는 환경 정책이 본격화되었고, 문화와 예술과 복지 정책이 강화되었다. 시민단체들의시정 참여 사업을 유도하였고, 교통행정과에 ‘녹색교통계’를 신설하여 보행과 자전거와 대중교통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교통 정책을 바꾸려 노력했다. 정석은 1962년 전북 전주 출생으로 서울대학교에서 학사(도시공학) 및석·박사(도시설계) 학위를 받았다. 서울연구원(1994~2006)과 경원대학교(2007~2013)를 거쳐 현재 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공학과에 재직 중이다. 북촌, 인사동, 걷고 싶은 도시, 마을 만들기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했고, 저서로는 『나는 튀는 도시보다 참한 도시가 좋다』, 『저성장시대의 도시정책』(공저) 등이 있다. 블로그(blog.naver.com/jeromeud)와 페이스북(facebook.com/jerome363)으로 시민 대중과 열혈 소통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