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의 서쪽 중턱에는 포도라는 이름을 단 현대미술관이 있다. 포도뮤지엄(Podo Museum)은 폐관한 다빈치박물관 실내를 리모델링해 2021년에 개관했다. 이후 환경, 인류의 공생, 소외 계층을 재조명하는 전시를 선보였다. 매년 새로운 기획과 신선한 작품을 선보이지만, 앞서 말한 주제가 모든 지점을 관통한다. 이곳은 권위를 위해 현실을 외면했던 예술을 초대해 화려한 현실 속 그늘을 비춘다. 포도뮤지엄은 작품의 화이트 박스로 존재하는 메신저가 아닌, 메시지 그 자체다. 이를 통해 예술과 미술관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2025년 포도뮤지엄은 전시와 함께 두 번째 리모델링을 기획했다. 첫 번째 리모델링의 주연이 실내였다면, 두 번째는 15년된 건물의 파사드와 외부 공간이다. 홀로 외롭게 인류의 미래를 외치던 포도뮤지엄의 옆자리에서 바깥은 무엇으로 존재해야 할까.
탈재현과 이야기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시작된 진리를 향한 여정은 위계와 차별을 낳았다. 진리와 닮지 않은 것은 무가치하다고 규정했기 때문이다. 이상은 그렇게 폭력을 은폐한다. 인류는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으며 처절하게 이를 깨달았다. 대체 완벽한 세상이 무엇이기에 인류를 고통으로 몰아가는가. 그래서 들뢰즈는 플라톤을 전복시켰다. 원본 없는 것, 재현되지 않는 가상을 만들어도 된다고 한다. 그것이 오히려 역동적이고 생성적이기 때문에. 이제 우리도 귀족의 정원, 풍경화, 자연, 센트럴파크를 닮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어딘가에서 여전히 유효할지라도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당위는 이제 없다. 이곳에서는 차별과 권위를 숨긴 방식과는 거리를 두고자 했다.
그런데 기준이 삭제된 가상은 자칫 유희적 선언문이나 그 아류로 쉽게 전락하곤 한다. 조경은 흰 벽에 걸리지 않으니 우리에게는 공간과 시간, 그리고 사람을 이어줄 작은 연결고리가 필요하다. 불완전하고 울퉁불퉁하며 범용성이 없는 것들. 신화, 지역, 땅, 사람, 장식과 같은 작은 이야기 말이다. 이는 형상의 알리바이가 아닌 조경이란 인터페이스를 생생하게 작동시키는 프로토콜일것이다.
* 환경과조경459호(2026년 7월호)수록본 일부
글 장혁준 비오이엔씨 실장
조경 설계·시공 비오이엔씨(BEOH)
건축 설계 SKM 아키텍츠
조명 설계 스튜디오 폼기버(Studio Formgiver)
위치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산록남로 786
규모 13,000㎡
완공 2025. 8.
사진 조민경, 장혁준
비오이엔씨(BEOH)는 감각의 명료한 구축을 추구하는 조경 설계 회사다. 작은 정원에서부터 도시적 규모에 이르는 다양한 공간을 다루고 있다. 설계는 물론 구현을 가치 있게 생각해 설계, 시공, 감리, 관리까지 공간 만들기의 모든 업역을 가로지르며 이상을 실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