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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환경과조경

월간 환경과조경
포도뮤지엄 리노베이션
Podo Museum
  • BEOH
  • 환경과조경 2026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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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경

 

 

한라산의 서쪽 중턱에는 포도라는 이름을 단 현대미술관이 있다. 포도뮤지엄(Podo Museum)은 폐관한 다빈치박물관 실내를 리모델링해 2021년에 개관했다. 이후 환경, 인류의 공생, 소외 계층을 재조명하는 전시를 선보였다. 매년 새로운 기획과 신선한 작품을 선보이지만, 앞서 말한 주제가 모든 지점을 관통한다. 이곳은 권위를 위해 현실을 외면했던 예술을 초대해 화려한 현실 속 그늘을 비춘다. 포도뮤지엄은 작품의 화이트 박스로 존재하는 메신저가 아닌, 메시지 그 자체다. 이를 통해 예술과 미술관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2025년 포도뮤지엄은 전시와 함께 두 번째 리모델링을 기획했다. 첫 번째 리모델링의 주연이 실내였다면, 두 번째는 15년된 건물의 파사드와 외부 공간이다. 홀로 외롭게 인류의 미래를 외치던 포도뮤지엄의 옆자리에서 바깥은 무엇으로 존재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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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언덕을 통해 대상지를 재구축하고자 했다. Ⓒ장혁준

 

 

탈재현과 이야기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시작된 진리를 향한 여정은 위계와 차별을 낳았다. 진리와 닮지 않은 것은 무가치하다고 규정했기 때문이다. 이상은 그렇게 폭력을 은폐한다. 인류는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으며 처절하게 이를 깨달았다. 대체 완벽한 세상이 무엇이기에 인류를 고통으로 몰아가는가. 그래서 들뢰즈는 플라톤을 전복시켰다. 원본 없는 것, 재현되지 않는 가상을 만들어도 된다고 한다. 그것이 오히려 역동적이고 생성적이기 때문에. 이제 우리도 귀족의 정원, 풍경화, 자연, 센트럴파크를 닮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어딘가에서 여전히 유효할지라도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당위는 이제 없다. 이곳에서는 차별과 권위를 숨긴 방식과는 거리를 두고자 했다.

 

그런데 기준이 삭제된 가상은 자칫 유희적 선언문이나 그 아류로 쉽게 전락하곤 한다. 조경은 흰 벽에 걸리지 않으니 우리에게는 공간과 시간, 그리고 사람을 이어줄 작은 연결고리가 필요하다. 불완전하고 울퉁불퉁하며 범용성이 없는 것들. 신화, 지역, 땅, 사람, 장식과 같은 작은 이야기 말이다. 이는 형상의 알리바이가 아닌 조경이란 인터페이스를 생생하게 작동시키는 프로토콜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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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 대신 정원과 언덕, 산책로로 이어지는 입구 광장을 조성했다. Ⓒ조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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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마당 경계의 길에는 식물로 화려하게 수놓은 정원이 방문객을 환영한다. Ⓒ조민경

 

세 개의 언덕과 주름진 구덩이

이곳의 이야기는 제주 오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언덕과 구덩이다. 뮤지엄이 자리 잡은 땅은 본래 남쪽이 낮 은 산자락의 경사지였다. 아마도 평평한 주차장이 필요했고, 추측컨대 건물은 평지에 서야 한다 했을 것이다. 그래서 건물의 전면부를 5m가량 성토하고 석축으로 날카롭게 받아내 만든 평지는 건물의 기단이자 주차장으로 사용됐다. 이를 위해 희생된 아래는 나대지로 남았다. 언덕과 구덩이로 바깥의 이야기를 다시 써내려가 보자. 

 

여기 각진 땅을 반죽처럼 주물러 만든 지극히 인위적 인 외형의 언덕 세 개는 분리됐던 위의 주차장과 아래의 나대지를 다시, 또 완전히 새로운 땅으로 재구축한 다. 땅은 대칭과 기하가 휘두르는 권위와 엄격에 저항하며 부드럽게 펼쳐진다. 언덕은 분리된 땅을 잇는 연결의 언어인 동시에 연결된 땅을 구획하는 분리의 언어다. 파사드 정면의 손톱달, 측면의 장갑 모양 언덕은 펼쳐진 수직성으로 주차장이었던 땅을 감싸 안아 아늑한 안마당으로 탈바꿈한다. 주차장이 안마당으로 바뀌면서 방문객이 마주하는 뮤지엄의 첫 시퀀스는 방풍실이 아닌 안마당이다. 생울타리로 차폐한 바깥과 연결된 입구 광장부터 이어지는 안마당 경계의 길에는 식물로 화려하게 수놓은 정원이 방문객을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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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덩이의 사면을 계단처럼 주름을 잡아 초록 카펫이 깔린 원형극장의 무대와 객석을 조성했다. Ⓒ조민경

 

측면의 장갑 언덕은 안마당을 구분 짓는 경계인 동시에 위와 아래를 완만하게 연결한다. 언덕의 경계에 둘러진 8% 경사의 길을 따라 내려가면 너른 언덕이 야트막하게 펼쳐진다. 너른 언덕은 포도뮤지엄의 두터운 경계이자, 그 너머의 대자연과 뮤지엄을 연결하는 플랫폼이기도 하다. 

 

필자는 일주일의 반을 제주에서 보낸다. 한라산에 눈이 쌓이면 도민은 물론 수많은 관광객들이 가족들과 눈썰매를 타러 적당한 경사의 나대지를 찾아 나선다. 펼쳐진 숲을 바라보며 눈썰매를 탈 수 있는 하얀 언덕 보다 온몸으로 자연을 경험할 수 있는 초자연적 플랫폼이 또 있을까. 

 

뮤지엄의 뒤편으로 가면 주름진 구덩이가 누워 있다. 이 땅은 원래의 산자락 경사가 그대로 남아 있던 나대지였다. 주요 공간과 적극적으로 연결되지 않아 이용률은 낮았지만, 특별한 날에는 야외 공연의 무대로 활용됐다. 땅의 형상이 일상의 피크닉과 공연의 잠재태가 될 수 있을까. 쌓아 언덕을 만들지 않고 파내려가 구덩이를 만드니 추상적인 지형 놀이터가 되었다. 다시 구덩이의 사면을 계단처럼 주름을 잡으니 초록 카펫이 깔린 원형극장의 무대와 객석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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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퍼플렉스의 설치 미술 작품 ‘하나 둘 셋 스윙’ Ⓒ조민경

 

곰솔숲

건물의 남측 언덕과 구덩이 사이 공간은 기존 수목인 곰솔로 가득 차 있었다. 함부로 베지 못하게 규제해서 사실상 방치된 녹지였다. 그 덕분에 역설적으로 곰솔은 건물을 내려다 볼만큼 높게 컸고, 그 아래에선 야생 초본류가 제멋대로 자라나 의도치 않게 수준 높은 풍 경화를 이루고 있었다. 과거 고대 그리스 신상을 조각 하듯, 용의 눈동자를 세밀하게 그려 넣듯 풍경화를 완성해야 할까. 아쉽지만 곰솔을 제외한 모든 식물을 제 거하고 예술 작품을 그려 넣은 투시도를 제안했다. 마침 뮤지엄도 야외 작품 설치를 계획했던 덕분에 수퍼 플렉스(Superflex)의 설치 미술 작품 ‘하나 둘 셋 스윙(swing)’이 곰솔의 수간 사이를 경쾌하게 가로지르며 설치됐다. 이제 숲은 멀리서 바라보는 박제된 풍경화를 넘어 연인에겐 야외 미술관으로, 아이에겐 숲속 놀이터로 일상에 녹아든다. 

 

인류의 미래와 공생을 외치는 포도뮤지엄의 옆자리에서 바깥은 무엇이 되고자 했을까. 바깥을 통해 역사와 자연의 권위에 기대거나 닿지 못할 이상향을 좇지 않으려 했다. 재현이 아닌 생성, 맹목적 믿음이 아닌 능동적 창조, 닫힘이 아닌 열림의 언어로 땅의 교향곡을 쓰고자 했다. 나아가 바깥은 방문객의 행위에 따라 끊임없이 변주될 것이다.

 

담장 없는 정원, 피크닉장, 눈썰매장, 야외 공연장, 놀이터, 대지 예술, 야외 미술관. 그 무엇이든 좋다. 이름이 무엇이든 이곳은 제주의 이야기로 예술과 사람, 인공과 자연을 느슨하지만 긴밀하게 연결한다. 일상을 살아가는 모든 네로와 파트라슈는 삶의 마지막 크리스마스가 아닌 일상에서 예술을 마주할 수 있게 됐다. 포도뮤지엄은 바깥으로서 오늘을 사는 네로에게 루벤스를 선물한다.(각주 1)

 

*각주 정리

1. 네로와 파트라슈는 소설 ‘플랜더스의 개’의 등장인물로 주인공 소년과 그가 키우는 반려견의 이름이다. 성당에 있다는 루벤스의 그림을 보고 싶었지만 네로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네로와 파트라슈는 오해와 차별 속에 고통 받다가 크리스마스 특별 공개로 그림을 보게 되지만, 그림을 보며 삶을 마감한다. 

  

글 장혁준 비오이엔씨 실장


조경 설계·시공 비오이엔씨(BEOH)

건축 설계 SKM 아키텍츠

조명 설계 스튜디오 폼기버(Studio Formgiver)

위치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산록남로 786

규모 13,000㎡

완공 2025. 8.

사진 조민경, 장혁준


비오이엔씨(BEOH)는 감각의 명료한 구축을 추구하는 조경 설계 회사다. 작은 정원에서부터 도시적 규모에 이르는 다양한 공간을 다루고 있다. 설계는 물론 구현을 가치 있게 생각해 설계, 시공, 감리, 관리까지 공간 만들기의 모든 업역을 가로지르며 이상을 실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