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타임캡슐이 된다면 어떨까. 스코틀랜드 예술가 케이티 패터슨(Katie Paterson)은 ‘미래 도서관(Future Library)’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2014년부터 매년 1명씩 선정해 100명의 작가의 미공개 원고를 도서관에 보관하고, 2114년에 보관된 작품들을 종이책으로 발간한다. 한 세기 동안 키운 독일가문비 나무 1,000그루로 탄생할 책들은 미래 세대를 위한 중요한 문화유산이 될 것이다.
이처럼 한 권의 책을 미래로 보낼 수 있다면 세계문학전집에서 고르고 싶다. 한때 세계문학전집을 열심히 읽었다. 대학교 시절, 왕복 3시간의 등하교 시간이 무료했다. 지금처럼 볼거리가 많은 OTT도 없던 시절이었는데, 궁리 끝에 문학을 잘 아는 친구의 추천을 받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책들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증권사를 그만두고 가족도 버린 채 외딴섬에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 애인을 두고 연하의 젊은 변호사에게 마음을 빼앗긴 여인 등 다양한 캐릭터와 서사가 흥미로웠다. 가끔 연필로 밑줄을 북북 긋고 싶은 문장을 발견했다. “성실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가식이 있으며, 고결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비열함이 있고, 불량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선량함이 있는지를 몰랐다.”(각주 1) 이처럼 통찰이 담긴 문장을 읽으며 삶에 대해 조금 배울 수 있었다. 무엇보다 학교와 집을 오가는 시간 속 권태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게 해준 소소한 낙이었다.
『아무것도 간절하지 않은 날의 기술』의 저자인 최혜진 작가도 나와 비슷했다. 이 책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시리즈 중 열두 권의 책과 표지 그림을 소개한 서평집이다. 에디터 출신인 작가는 호기심을 동력으로 삼아 다양한 책을 써왔다. 하지만 어느 순간 보고 싶은 것도, 쓰고 싶은 말도 떠오르지 않았고, 단 한 줄의 글도 쓰지 못했다. 그렇게 권태로운 일상을 보내던 어느 날, 편집자의 제안으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시리즈 중 열두 권을 골라 각 책의 서사와 표지 그림에 대한 서평을 쓰게 됐다. 이를 통해 작가는 멀리했던 고전 소설을 가까이하며 새로운 위로와 편안함을 얻었다.
이 서평집은 개인의 서사에서 출발해 문학의 서사, 캐릭터, 작가의 문체 등을 살피고, 표지 그림 속 서사로 확장하며 문학과 그림의 세계를 잇고 조명한다. 세계문학전집에 접근하는 방식과 문체가 열렬한 애정을 바탕으로 하는 덕후의 뜨거운 예찬론이 아니라, 매일의 훈련을 통해 목표에 조금씩 도달하는 아마추어의 차분한 노력에 가까워서 더 잘 읽혔다.
소개한 책 중 『모래의 여자』가 흥미로웠다. 이 소설은 모래를 퍼내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마을에 갇힌 남녀의 이야기다. 작가는 권태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남자와 권태를 수용하며 살아가는 여자의 서사, 동일한 대상을 반복적으로 그리는 가운데 색면들의 관계와 리듬으로 차이를 만든 표지 그림의 화가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아가 권태로운 반복 자체를 부정하기보다는 반복 안에서 만들 수 있는 차이에 집중하고, 새로운 의미를 만들려는 의지와 상상력을 발휘할 때 비로소 새로운 여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 호 특집에서는 현시대의 정원박람회를 생각해 볼 여지의 기회를 마련했다. 서울국제정원박람회는 반복된 행사 안에서 차이를 만들고자 했다. 개수와 규모는 점점 늘어났고, 대중의 관심이 집중되며 천만 시민의 행사로 거듭났다. 하지만 공원에 정원을 인위적으로 삽입하는 것이 지속가능한 도시침술이 될 수 있을까. 임한솔의 주장처럼 정원이 테마파크의 어트랙션으로 소비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31쪽).
SLA 커뮤니케이션 디렉터인 크리스토퍼 홀름페데르센(Kristoffer Holm Pedersen)은 ‘랜드진’에 기고한 칼럼에서 조경 설계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현대 도시의 조경 공간에 필요한 것이 일시적 유행과 이미지 소비인지, 삶과 기후, 미래 세대에 대한 장기적 책임감인지 되물었다.(각주 2) 앞으로의 정원박람회도 마찬가지다. 박람회를 단순히 숫자나 홍보를 위한 수단으로 소비할지, 책임감을 바탕으로 미래 세대를 위한 장소로 만들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부디 세심한 접근을 통해 미래를 위한 타입캡슐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각주 정리
1. 서머싯 몸, 『달과 6펜스』, 민음사, 2000.
2. Kristoffer Holm Pedersen, “Seeing the Ground We Stand On”, Landezine, 2026년 2월 19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