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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환경과조경

월간 환경과조경
[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살아 있다는 것은 상실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 환경과조경 2026년 5월호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 할 수만 있다면 ‘미술’만 ‘조경’으로 고쳐 특집 제목으로 훔쳐오고 싶었다. 그 내용까지도. 5월호를 무엇으로 채울까 고민하던 차에 보고 온 전시는 단 10여분 만에 특집 기획서를 술술 써내려가게 만들었다. 망설임 없이 키보드를 두드릴 수 있었던 건, 이번 특집 ‘스러지는 것들의 아름다움’의 기획 의도 중 일부분이 나의 오래된 갈증에서 기인했기 때문이다.

 

매 호 다양한 조경 프로젝트를 소개하지만, 지면에 수록되는 사진은 대부분 막 공사를 마쳐 가장 윤이 나는 순간을 담고 있다. 새로운 소식을 빠르게 전달해야 하는 것이 언론의 특성이고, 클라이언트나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시간이 지나면 일부 공간이 변형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백의 미를 위해 일부러 비워 놓은 공간이 화단으로 변한다거나, 공간의 맥락과 전혀 상관없이 뜬금없는 포토존 형식의 조형물이 들어선다거나 하는 식이다. 즉 공사가 막 마무리된 시점의 모습이 조경가와 클라이언트가 합의한 결과물로서 설계 의도를 가장 잘 드러내는 셈이다.

 

순전히 물리적 요소만 생각하면 그렇다. 조경이라는 건 참 복잡하다. 우선 공간과 장소의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리학자 이푸 투안Yi-Fu Tuan은 『공간과 장소』에서 ‘가치’라는 기준으로 공간과 장소를 구분했다. “공간은 장소보다 추상적이다. 처음에는 별 특징이 없던 공간은 우리가 그곳을 더 잘 알게 되고 그곳에 가치를 부여하면서 장소가 된다”고 주장했다. 나는 그의 주장을 공간이 사람과 시간을 포용할 때 장소가 된다고 이해했다. ‘가치’를 부여하는 주체가 우선 있어야 할 것이고, 잘 안다는 개념과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곳에서 보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따진다면, 지금껏 지면에 담은 아직 시간적으로 덜 여문 프로젝트들은 장소라 부르기에 조금 부족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언젠가는 조경가가 자신이 설계한 공간을 되돌아보는 꼭지를 마련하고 싶었다. 완공한 지 10년 정도 지난 공간을 들여다보며, 정말 사람들이 조경가의 의도대로 공간을 사용하고 있는지, 설계와 조금 다르게 시공되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장점으로 작용한 지점은 없는지, 설계하던 당시 돌아간다면 바꾸고 싶은 부분은 없는지, 나무와 식생이 자란 풍경이 정말 상상 속 경관과 일치하는 지. 그런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그 결과가 좋든 나쁘든 이는 비로소 장소가 된 공간을 소개하는 일이 될 거라 믿었고, 이러한 꼭지가 더 좋은 조경 설계를 위한 자양분이 되지 않을까 기대했다. ‘만든 나, 쓰는 너’―사실 『릿터』의 인터뷰 시리즈 ‘쓰는 존재’, ‘읽는 당신’의 기획이 너무 좋아서 따라해 보고 싶었다―라는 이름으로 조경가와 조경가가 만든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이 짝을 이루어 대화를 나누는 꼭지를 기획해보기도 했는데, 구체적인 방식과 필자를 정하는 일이 쉽지 않아 일시 정지된 상태다. 그래도 반드시 더 예쁜 모양으로 마름질해 새 꼭지로 올려보고 싶다.

 

‘소멸의 시학’ 전시에서 가장 좋아했던 건 세실리아 비쿠냐의 ‘발사 나무 십자가’였다. 나는 아주 취약해 보이는, 숨만 내쉬어도 쓰러질 것 같은 그 조각 앞에서 해변 모래사장에 나뭇가지로 새겼던 이름들과 낙서들을 회상했다. 캔버스가 파도에도 지워지지 않을, 서서히 굳을 콘크리트였다면 절대 쉽지 적지 못했을 것들을 떠올렸다. 밀려온 바닷물에 지워지기 전, 친구들과 얼른 모래에 적은 것들을 사진으로 찍던 순간들까지. 나는 기록에 집착하는 면이 있다. 그래서 노트도 많고, 쓸데없는 사진도 많이 찍는다. 어린 시절 추억이 겹겹이 쌓인 동네가 재개발 때문에 통째로 아파트 단지로 바뀐 일을 겪고 난 뒤에 생긴 습관 같은 것이다. 가끔은 일거수일투족을 다 붙잡아두려는 내 모습이 미련하고 징그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잃어버린 것들의 목록』을 펼친다. 유디트 샬란스키는 열두 가지의 사라진 것과 그 상실을 문학적으로 재현해냈다. “뭔가를 보존하고, 과거를 눈앞에 되살리고, 잊힌 것을 불러내고, 침묵하는 것을 말하게 하고, 상실을 애도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시작되었다. 쓰는 행위를 통해 아무것도 되찾을 수는 없다 해도, 모든 것을 경험 가능한 것으로 만들 수는 있다”(각주 1)는 말이 다시 노트와 펜과 카메라를 들어 올리게 한다. 이번 특집과 참 잘 어울리는 “살아 있다는 것은 상실을 경험한다는 것이다”(각주 2)라는 문장을 다시 곱씹는다.


**각주 정리

1. 유디트 샬란스키, 『잃어버린 것들의 목록』, 박경희 역, 뮤진트리, 2022, p.30.

2. 같은 책, p.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