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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에코스케이프

월간 에코스케이프
소멸하기에 느낄 수 있는 생의 감각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 1. 30. ~ 5. 3.
  • 환경과조경 2026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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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드 라자, ‘흡수’, 지구로 내려오기: 기후 예술 담론 언플러그드(그로피우스 바우, 베를린, 2020) 전시, 2020. Ⓒ작가 및 베를리너 페스트슈필레/이머전 제공, 사진: 아이케 발켄호르스트

 

 

모든 건 언젠가 생을 다한다.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길이가 다를 뿐, 썩지 않음의 대명사인 플라스틱도 언젠가는 소멸한다. 자연의 이치에 따른 당연한 일이지만 인간들은 이 현상에 반발한다. 노화를 두려워하고, 아끼는 물건이 낡지 않기를 바라고, 찰나를 박제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여러 문학 작품과 노랫말의 단골 소재가 ‘영원’인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 아름다울까. 『뱀파이어와의 인터뷰』(1994)의 루이스를 떠올려보자. 불멸의 삶을 사는 뱀파이어인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게는 전혀 변화가 생기지 않았으니까”라고 말한다. 살아 있다는 증거가 변화하는 것이라면, 변화하지 않는 영원이라는 가치는 어떤 것에 매길 수 있는 것일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개최된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이하 소멸의 시학)’ 전은 영원이라는 가치, 사라지지 않는 예술에 대해 묻는다. 통상 뛰어난 작품을 썩지 아니함을 의미하는 ‘불후(不朽)’의 명작이라 불러왔다는 점을 이야기하며, “훌륭한 작품이란 곧 변하지 않을, 혹은 영원히 변해서는 안 될 작품이라는 통념이 과연 동시대에도 유효한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 답을 찾기 위한 과정으로서 ‘소멸의 시학’은 스스로 분해되는 작품을 선보인다. ‘삭는 미술’이라 명명되어 처음부터 사라질 각오를 한 작품들은 인류세와 기후 위기의 시대에 비인간 존재와 공존하는 법에 대해 고찰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전시의 시작점에 놓인 이은재의 ‘이제 근대 모서리를 닦아라-서문’이 템페라 기법으로 만든 작품이다. 그는 45개의 작은 캔버스에 노란 템페라 물감을 덧칠해 작품을 완성했다. 색채의 짙음이 각기 다르고, 그 위에는 은재가 붓질을 하며 혼자 속삭였을 것 같은 말들이 조각조각 새겨져 있다. 그는 고고학자였던 아버지가 유물에 쌓인 흙을 털어내던 조심스럽고 정성어린 손길을 떠올리며 물감을 한 겹 한 겹 쌓아 이 작품을 완성했다. 이로써 겹겹이 쌓인 물감이 만들어낸 질감은 이은재가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보낸 시간의 적층으로 읽히게 된다. 주목할 점은 세심한 붓놀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물감의 표면에는 금이 가고 색이 바램에도 불구하고 이은재는 그리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패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는 태도는 ‘소멸의 시학’이 지향하는 바를 관통한다. 이은재의 작품이 전시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그림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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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재, ‘이제 근대 모서리를 닦아라-서문’, 나무 패널에 달걀노른자, 240×130㎝, 2023. Ⓒ작가 제공, 사진: 이은재

 

 

환경과조경 456(2026년 4월호수록본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