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1991년부터 2017년까지 국립수목원에는 동물원이 있었다. 백두산 호랑이, 멧돼지, 맹금류 등 11종의 동물이 관람객을 맞이했고, 그중 반달가슴곰 가족이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과 동물 복지 인식의 변화로 동물원은 폐쇄됐고, 곰들은 세종시 베어트리파크로 이주했다. 곰이 떠난 자리는 곧 폐허가 되었다.
회색 담벼락을 뒤덮은 담쟁이덩굴, 갈라진 콘크리트 틈을 비집고 올라온 단풍나무와 가래나무, 빗물이 고인 웅덩이에 자리를 잡은 부들과 사초. 통제를 잃은 공간에는 인간의 의도와 무관하게 생태적 천이가 일어나고 있었다. 텅 빈 사육장 내부로 쏟아지는 한 줄기 빛, 생명의 노동이 남긴 벌집 밀랍은 그 자체로 조용한 예술이었다. 우리는 유기된 곰 사육장 부지에서 ‘이질적인 아름다움’과 감금의 역사가 주는 ‘불편함’을 동시에 마주했다.
기획 의도: 지웠지만 남긴다
광복 80주년 기념 사업이자 산림청 생활정원 조성사업(각주 1)의 일환으로 진행된 본 프로젝트는 역할을 다한 동물 사육장에 생태적 회복과 공공적 가치를 불어넣는 작업이다.
기획의 핵심은 하나였다. 지웠지만 남긴다. 곰을 대상화했던 높은 벽과 깊은 해자는 숲과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결코 닿을 수 없는 단절의 장치이자 인간이 만들어낸 폭력의 형식이었다. 우리는 이 장소가 지닌 슬픔과 무게를 외면하거나 지워버리는 대신, 그것을 기억의 층위로 남긴 채 해방과 회복의 의미를 담아 인간과 식물, 동물이 공존하는 장소로 전환하고자 했다. 이는 단순한 물리적 환경 개선이나 자연화 전략을 넘어, 생태적 숭고를 미학적 토대로 삼은 브라운필드형 정원의 실험이기도 했다.(각주 2)
브라운필드형 동물 사육 시설은 인간 중심적 질서와 생태적 한계가 드러난 장소로 전통적인 아름다운 정원의 언어로는 계획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 프로젝트는 그러한 한계를 인식하고 장소가 지닌 불편한 기억과 감정을 제거하지 않은 채 드러내는 방식(각주 3)을 택했다. 공간 회복의 관점이 결과가 아닌 과정이어야만 하며 생태적 전환의 불완전성을 수용하는 동시대 조경의 태도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이때 설계자의 최소 개입은 오히려 적극적인 계획의 전략이 될 수 있으며, 곰 사육장은 정리해야 할 문제 공간이 아니라 인간-자연의 관계가 재구성될 수 있는 잠재적 장소로서의 전환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 환경과조경 454호(2026년 2월호) 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생활정원 조성사업은 산림청이 추진하는 공공 녹지 조성 사업으로 국민이 일상 속에서 쉽게 정원을 접할 수 있도록 지하철역, 병원, 학교 등 생활권 주변 유휴 공간에 실내외 정원을 조성해 도시 환경 개선, 기후 위기 대응, 녹색 복지 실현, 정원 문화 확산에 기여하는 정책이다.
2.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는 『숭고와 아름다움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1757)에서 아름다움을 질서·조화·명료함에서 비롯되는 감정으로 규정한 반면, 숭고는 무질서하고, 형식이 없으며, 불명료한 대상이 유발하는 강렬한 정서적 반응으로 설명했다. 생태적 숭고는 전통적 숭고 개념을 자연 보호나 생태 윤리의 맥락으로 확장한 개념으로, 완결된 아름다움이나 조화가 아닌, 불확실성과 불안, 회복 과정의 긴장 속에서 발생하는 미적 경험을 의미한다.
3. 엘리자베스 마이어는 산업 폐허가 불러일으키는 낯선 공포, 불안, 압도감이 단순한 부정적 감정이 아니라 현대 경관에서 경험되는 숭고의 한 형태로 해석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이를 통해 조경이 ‘쾌적한 경관’을 넘어서 감정적·윤리적 사유를 촉발하는 장이 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Elizabeth K. Meyer “Sustaining Beauty: The Performance of Appearance”, Journal of Landscape Architecture 3(1), 2008.
글 조혜령 조경하다열음 소장
조경 설계 조경하다열음
전시 기획 조경하다열음
경관 조명 설계 와이엠
조경 시공 공간시공 에이원
발주 국립수목원
위치 경기도 포천시 소홀읍 광릉수목원로 509 국립수목원 내 구 산림동물원 곰 사육사
규모 2,710㎡
완공 2025. 10.
사진 유청오, 안상순, 조경하다열음
조경하다열음은 땅과 사람, 시간이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과 행위로서의 조경을 지향한다. 일상의 풍경을 가꾸어 도시 삶의 질을 높이고, 지역과 이웃에게 열려 있는 공간을 만들어간다. 또한 조경의 경계를 넘나들며 장소에 맞는 해법을 찾고, 그 과정에서 맺히는 작은 결실을 나누는 삶이 천천히 여물어 가는 조경을 이어나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