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스를 만나다
오랫동안 도시의 외부 공간을 만들어왔다. 많은 프로젝트에서 식재 계획은 언제나 조경 본연의 설계 과정 중 하나였지만, 주로 법적 기준과 녹지율을 충족하는 틀 안에서 운영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안에서 식물은 공간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면서도, 설계 구조를 주도하는 역할까지는 충분히 부여받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 인식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10여 년 전, 해외 설계 팀과 협업한 한 프로젝트에서 그라스와 숙근초를 중심으로 한 식재 설계를 마주하면서부터다. 익숙하지 않은 재료를 이해하기 위해 자료를 찾는 과정에서 자연주의 정원의 이론과 사례를 접했고, 그때 처음으로 식물을 형태가 아니라 성장과 계절, 변화를 통해 공간을 형성하는 ‘시간적 매체’로 바라보게 됐다.
이러한 관점은 그 뒤로 설계의 중요한 기준으로 남게 됐다. 식물이 ‘공간’을 ‘장소’로 만들 수 있다면, 공공 정원의 모습은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 태화강 그라스 정원은 바로 이 질문을 공공 정원의 스케일에서 실험한 결과다.
왜 그라스인가
2022년, 산림청이 주관한 실외 정원 조성 대상지가 남구 태화강변으로 결정됐다. 가장 먼저 검토해야 할 조건은 하천이라는 입지에서 발생하는 침수와 범람, 토사 유실이었다. 태화강은 과거 대규모 침수를 겪은 이력이 있으며, 다른 지역에서도 천변 정원 조성 직후 토사와 정원 자체가 유실된 사례가 반복되어 왔다. 따라서 이 부지에서의 정원 조성은 미적 완성도보다 식재의 지속가능성과 회복력을 우선적으로 검증하는 문제에서 출발했다.
대상지에는 이미 중요한 선례가 존재했다. 태화강 하구에 형성된 물억새 군락이다. 2006년 이후 장기간 유지되어 온 이 군락은, 반복되는 침수와 토사 이동 속에서도 안정적으로 존속하며 하천 환경에서 그라스류 식생이 구조적으로 작동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새로운 식생 유형을 도입하기보다 이 장소에서 이미 검증된 식생 구조를 확장하는 것이 합리적 전략이라고 판단했다.
그라스류는 사계절에 걸친 형태 변화가 뚜렷하고, 개화 이후의 잔상까지도 경관 요소로 작동한다. 또한 뿌리와 지상부의 구조가 토양을 안정화시키는 역할을 해 하천과 같은 동적 환경에서도 비교적 높은 회복력을 보인다.
무엇보다 그라스는 특정 시점의 ‘완성형 경관’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초기 정착기, 성장기, 쇠퇴기까지를 포함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공간의 밀도와 인상이 점진적으로 형성된다. 이러한 시간 기반의 식재 구조가 수위와 지형이 끊임없이 변하는 태화강의 환경 조건에 가장 적합한 식재 방식이라고 판단했다.
* 환경과조경 454호(2026년 2월호) 수록본 일부
글 정홍가 쌈지조경 소장
설계 및 식재 설계 쌈지조경
시공 쌈지조경 외
식재 참여 남구시민정원사
발주 산림청,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 울산시 남구청
위치 울산광역시 남구 삼산동 1331번지 일원(번영교~명촌교)
규모 99,500㎡
사업 기간 2022 ~ 2027
1구간 풀꽃강 정원: 2022~2023
2구간 별빛혜윰 정원: 2023~2025
3구간 달빛윤슬 정원: 2023~2025
4구간 가을꽃내음 정원: 2024~2025
5구간 하늬바람 정원: 2026~
완공 2025. 12.
사진 쌈지조경, 울산시 남구청
정홍가는 경북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부산대학교에서 조경학 석사를 마쳤다. 현재 부산대학교에서 설계 스튜디오 강의를 진행하며, 쌈지조경 소장으로 실무를 병행하고 있다. 도시의 다양한 공간을 설계하는 한편, 식재 디자인과 식물 적용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고 이를 프로젝트에 반영하는 실천적 조경가다. 정원 관련 공공 프로젝트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며 지역 사회의 조경 문화 정착에 기여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