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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환경과조경

월간 환경과조경
[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시각은 거리를 필요로 하는 감각이다
  • 환경과조경 2026년 1월호

김안나. 친숙하면서도 낯선 이름에 흥미를 느꼈다. 필명일까? 어쩐지 한국인이 아닐 것 같다. 예상이 들어맞았다. “김안나(Kim Anna)는 한국계 오스트리아 작가다. 1977년 한국에서 태어나 만 두 살 때 가족과 함께 독일로 이주, 이후 오스트리아 빈에서 성장했다.”(각주 1) 1999년부터 여러 매체에 소설을 기고했고, 2008년 『얼어붙은 시간(Die gefrorene Zeit)』으로 유럽문학상을 받았다. “유럽이 주목하는 한국계 작가”라는 수식이 지적 허영심을 자극했다.

 

가장 탐났던 건 『어느 밤의 해부』였으나 번역본이 없었다. 정확히는 한국어로 출간된 김안나의 책이 『어느 아이 이야기』뿐이었다. 『어느 밤의 해부』에 끌렸던 건 순전히 표지 때문이었다. 새까만 바탕 위로 희미하게 떠오른 빙산을 보며 묵직한 침묵을 떠올렸다. 찬 공기와 이따금씩 들려오는 얼음 갈라지는 소리가 전부인 어둠 말이다. 김안나에게 겨울 풍경은 어떤 의미일까. 『어느 아이 이야기』를 읽으며 궁금해졌다. 소설 도입부, 주인공인 프란치스카는 “들리는 소리라곤 하늘 위를 떠다니며 미끄러지고 재잘거리며 내려앉는 눈송이 소리와 내발소리와 숨소리가 전부”인 눈에 파묻힌 조앤의 집으로 향한다. 책 속 대사를 머릿속에서 소리 내 읽기도 하는데 이번엔 그럴 수 없었다. 김안나가 계속 침묵을 묘사했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카는 “적막이 이 집을 구성하는 기조”라는 것을 느끼고 “청각의 불모지 상태”라고 명명한다. 녹색과 갈색, 베이지 색이 가득한 집안 풍경은 고요하기 그지없다. 소리에 대한 언급이 없는데도 그랬다.

 

예찬에 가까운 묘사가 아름다워서 거듭 읽었다. “나는 적막이 소음과 소리, 음향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이 멜로디로 합해지고, 다시 그 멜로디가 리듬의 바탕이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무엇인가를 예견할 수 있다면 적막이 생길 수 있고, 무에 가까운 것도 귀 기울여 들을 수 있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적막이란 스쳐 지나가는 것들이 잠시 멈춰 고정되는 장소였으며 그 멈춤은 한순간보다는 길었다.”(각주 2) 처음엔 적막을 즐기던 프란치스카는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침묵이 자신을 짓누르는 감각에 답답함을 호소한다. 결국 본격적인 이야기는 침묵의 바깥, 눈 쌓인 벤치에 앉은 프란치스카와 조앤이 고요를 깨고 대화를 나누며 시작된다.

 

읽기가 너무 괴로워 멈추기를 반복했다. ‘어느 아이’의 이름은 대니얼, 조앤의 남편이다. 대니얼은 백인 미혼모 아래에서 태어났는데, 어머니는 아이의 아버지에 대해 함구한다. 대니얼의 입양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아이의 외모를 뜯어보며 그에게 “깜둥이”의 피가 섞였음을 짐작한다. 피부색, 눈 색깔, 머리카락 색깔, 입술의 형태, 주름의 유무까지 낱낱이 뜯어보는 대목에서는 구역질이 인다. 과학적으로, 태생적으로, 인종적으로에서 시작된 황당한 말들이 보고서에 빼곡하다. 아이러니하게도 협박에 가까운 면담과 추적들은 대니얼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에서 일어난다. 아이가 겪을 난관이 입양에서 끝나지 않음을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자주 도망쳤다. 내용을 삼키기 버거우면 다시 첫 페이지로 돌아가 고요한 눈 속의 집에 틀어 박혔다. 눈이 모든 시각적 요소를 덮어버리는 거대한 모포이자 모든 소리를 집어 삼키는 흡음재 같았다. “시각은 거리를 필요로 하는 감각이다. 대상을 아주 가까이에서 본다고 하더라도 주체와 객체는 무조건 서로에게서 거리를 두어야 한다”(각주 3)는 프란치스카의 말을 떠올리며 집이 왜 어두웠는지도 이해하게 됐다. 그 캄캄한 적막 속에서 예쁜 문장만을 취하며 책갈피 뒤쪽의 책장을 넘기고 싶지 않았다.

 

프란치스카는 오스트리아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마 김안나의 분신일 것이다. 그래서 프란치스카와 조앤이 설전을 벌일 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책장 끄트머리를 부여잡았다. 프란치스카와 김안나가 겹쳐질 때, 대니얼과 겹쳐지고 싶지만 결코 겹쳐지지 않는 조앤을 발견할 때마다 마음이 처참해졌다. 고정희가 경고했던 것처럼 김안나는 독자들에게 아수라를 함께 겪기를 강요한다. 포기하고 싶지만 “쓰는 사람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면 고통스러워도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다.”(각주 4) 아직 책을 다 읽지 못했다. 90여 장이 남았다. 겨울이 끝나려면 멀었으니 조급하지 않게 책장을 넘길 수 있다. 마지막 쪽을 읽는 날 눈이 펑펑 내리는 행운을 얻을 수 있다면 좋겠다.


**각주 정리

1. 고정희, “우먼스케이프: 김안나의 극한 풍경”, 『환경과조경』 2025년 11월호, p.102. 

2. 김안나, 『어느 아이 이야기』, 을유문화사, 2025, p.16.

3. 앞의 책, pp.101~102.

4. 1번 글, p.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