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더관리
폴더명
스크랩
월간 환경과조경

월간 환경과조경
[슬기로운 공원 생활] 살기 좋은 도시에서 찾은 여유
  • 환경과조경 2025년 11월호

[크기변환]parkydu 01.JPG

 

영어로는 비엔나(Vienna), 독일어로는 빈(Wien)이라 불린다. 빈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합스부르크 왕가를 빼놓을 수 없다. 그 흔적으로 빈에는 오래된 역사를 가진 정원이 많이 남아 있다. 빈은 전체 면적의 절반이 녹지일 정도로 자연 녹지와 공원, 정원이 어우러진 도시다. 사무실 왼편에는 합스부르크가의 옛 정원들이 있고, 오른편에는 시립 공원이 있다. 정면으로 구시가지를 관통해 걸어가면 다뉴브강의 옛 지류인 도나우 수로를 만날 수 있다. 나에게 가장 일상적인 공간은 구시가지의 정원이다. 원고 청탁을 받고 글감을 고민하며 나는 빈에서 왜 공원이 아니라 정원을 더 자주 찾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의문의 실타래는 글을 쓰면서 천천히 풀렸다. 그 답으로 정원과 공원이라는 이름을 떠나 빈에서 녹지가 삶에 주는 의미를 천천히 이야기하고자 한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흔적

빈의 대표 관광지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 왕궁이었던 쇤브룬 궁전과 겨울 왕궁이었던 호프부르크(Hofburg)다. 쇤브룬은 바로크 양식의 궁전 중 하나로 빈 남서쪽에 있다. 호프부르크는 구시가지 외곽의 요새 자리에 건설되어 현재는 빈 중심부에 있다. 1817년 호프부르크에는 세 개의 정원이 설계됐는데, 그중 실제로 조성된 정원이 구시가지를 둘러싸는 순환로와 맞닿는 38,000㎡ 크기의 왕궁 정원이다.

 

왕궁 정원 맞은편에는 유리 온실이 있다. 정원을 조성할 때 궁정 건축가 루트비히 폰 레미(Ludwig von Remy)가 유리 온실을 건설했다. 이곳에는 아시아와 아메리카 등 다른 대륙에서 가지고 온 식물들을 심었는데, 몇 번의 개보수 이후 1998년에 현재 모습을 가지게 됐다. 현재 왼쪽 건물에는 열대 식물과 나비가 전시되어 있고, 중앙 건물은 카페로, 오른쪽 건물은 식물 보관과 전시를 위해 사용되고 있다.

 

순환로와 유리 온실 사이 북서쪽에는 호프부르크의 일부인 새로운 왕궁(Neue Burg) 건물이 있다. 건물 정문 상단의 비문에 ‘사람들의 조화로운 사랑이 이 건물에 깃들어 있다’라고 적혀 있다. 꼭 그 사랑이 건물 한편과 맞닿아 있는 왕궁 정원까지 깃든 느낌이다. 이 정원은 군주제가 끝나고 1919년에 들어서야 대중에게 공개됐다. 대중이 몰리면서 1951년 잔디에 앉는 것이 금지됐다가 2007년부터 잔디에 앉는 것이 허용되어 현지인과 관광객 모두에게 사랑받는 장소가 됐다.

 

[크기변환]parkydu 02.JPG
구시가지를 감싸는 순환로

 

[크기변환]parkydu 03.JPG
왕궁 정원 입구

 

연구의 중압감에서 탈출하는 법

빈에는 총 23개 구가 있다. 달팽이 껍질 같은 형태로 가장 중심인 1구부터 시계 방향으로 구성되며 23구에서 끝난다. 구시가지이자 현재 빈의 중 심지인 1구를 방문하는 사람 대부분은 관광객이지만, 1구를 감싸는 순환 로 밖으로 나가면 현지인들의 일상 영역이 시작된다. 독일어로 링슈트라세(Ringstrasse), 영어로 링 스트리트(Ring Street)라고 할 수 있는 이 순환로는 원래 구시가지를 감싸는 성벽이 있던 자리로, 이제 빈의 상징적 녹지 띠가 됐다. 내가 근무하는 빈공과대학 중앙 건물은 4구에 위치해 그 순환로를 정면 으로 바라보고 있다. 사무실 창문으로 건물 앞 공원과 저 멀리 빈 1구의 중심인 슈테판 성당까지 한눈에 보인다. 집과 사무실만 오가는 일상을 반복하다 보면 나무 사이에서 햇빛을 받으며 책을 읽고 싶을 때가 문득 찾아온다. 반복되는 논문 작업과 연구실의 압박감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고픈 마음이 간절해질 때다. 학교 정문을 지나 횡단보도를 두 번 건너면, 심은 지 50년 된 피나무부터 올해로 수령이 120년이 된 버즘나무까지 울창한 순환로 가 로수를 만난다. 순환로에 1865년부터 밤나무와 버즘나무가 가로수로 식재 되어 있다. 기후 변화로 식재 수종이 점차 바뀌어 현재는 팽나무, 마로니에, 노르웨이 단풍나무 등 만날 수 있는 수목이 더 다양해졌다. 녹지 띠라는 의 미를 넘어 교통 관점에서는 보행자, 자전거, 마차, 트램, 자동차까지 다양한 교통 수단이 공존하는 상징적 길이다. 

 

학교 앞 카페에서 따뜻한 카푸치노를 한잔 사서 왼쪽으로 갈지 오른쪽으로 갈지 고민하지만, 매번 내 결정은 왼쪽에 있는 오페라 극장이다. 거대한 극장 앞을 지나 3분 정도 걸으면 왕궁 정원 입구가 나를 맞이한다. 검은색 높은 울타리 담장이 있는 정원 입구 앞에서 푸르른 녹음을 바라보며 카푸치노 한 모금을 마시면 갑갑했던 마음이 풀어진다. 

 

parkydu 06.JPG
오스트리아의 상징인 모차르트 동상과 꽃으로 꾸민 높은음자리표

 

 

오감으로 느끼는 정원

머리가 어지러울 때면 벤치에 앉아 잠시 생각을 비워낼 만한 조용한 곳을 찾게 된다. 가장 아늑하고 포근한 공간을 찾아 나서는 내 발길은 매번 왕궁 정원으로 향한다. 왕궁 정원의 높은 철문을 지나 정원으로 발을 들이면 푸 른 녹지 사이 여기저기서 재잘재잘 대화 소리가 들린다. 순환로 쪽 왼쪽 담장을 따라 길게 늘어선 나무 아래에는 사람들이 앉아 있고 정면을 바라보면 저마다 앉거나 눕거나 뛰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잔디를 즐기고 있다. 내가 언제나 향하는 곳은 오른쪽 길목에 있는 중앙 연못이다. 작은 연못 앞에 길게 이어져 있는 초록 벤치 중 햇빛이 가장 잘 들면서 옛 유리 온실이 가장 잘 보이는 벤치에 자리를 잡는다. 

 

가장 좋아하는 자리에 앉으면 따뜻한 햇빛이 등을 감싸고 연못 위로 바 람이 불어와 어느 계절이든 앉아 있기에 딱 적당한 온도가 유지된다. 잔잔한 연못 위를 떠다니는 오리 울음소리를 들으며 맞은편 유리 온실을 바라보면 금세 차분함이 온몸을 감싼다. 모든 오감을 열어 두고 이 순간을 즐기는 것 만으로도 빈에서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감사하게 된다. 

 

가지고 온 책 한 권을 꺼내 읽다가 커피를 다 마시고 나면 자리에서 일어 선다. 들어온 벤치 길의 반대 방향으로 가면 새하얀 옛 궁전 건물이 눈에 들 어온다. 그 궁전 앞 잔디를 따라 오른쪽 입구에 다다르면 오스트리아의 또 다른 상징인 모차르트 동상과 꽃으로 꾸민 높은음자리표를 만나게 된다. 날 이 좋을 때면 이 입구 앞에서 바이올린 연주자를 마주친다. 빈 길거리에서는 피아노, 첼로, 바이올린, 심지어 성악까지 다양한 길거리 공연을 만날 수 있다. 모차르트 동상 앞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들을 때면 음악의 나라에 살고 있음을 여실히 느낀다. 그렇게 동상 앞 벤치에 앉아 연주를 듣다가 손에 있는 동전을 연주자 바이올린 가방에 넣고 나면 감사한 마음을 안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연중무휴

서울광장의 세 배 크기인 왕궁 정원은 어느 계절, 어느 날씨에 오든 각기 다 른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다. 관리를 위해 저녁에는 문을 닫지만 그 덕분 에 깨끗한 정원을 매일 만날 수 있다. 특히 사계절 내내 다른 모습을 즐길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이 정원의 아름다움은 연중무휴라 할 수 있다. 

 

여느 유럽의 겨울과 마찬가지로 어둡고 매서운 추위가 지나면 왕궁 정원에도 봄이 시작된다. 햇살이 길어지기 시작하면 정원 중앙 넓은 잔디밭에 있는 빈에서 가장 큰 흰 목련이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아직 잔디가 보호받 는 시기라 다른 구역에는 울타리가 남아 있지만, 목련 주변은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터놓는다. 그 덕분에 가족들과 커플들은 그 주변에 눕거나 앉아 하얀 봄을 즐긴다. 여름이 와서 100년이 족히 되는 고목들에 나뭇잎이 무성해지고 그 아래로 잔디가 풍성해지면 정원은 비로소 초록의 절 정을 맞이한다. 특히 담장 경계에 장미가 가득차는 6월이 되면 이때다 싶어 나도 돗자리를 챙겨 나온다. 

 

여름에는 햇빛을 쬐기 위해 소풍 나온 현지인 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앉을 곳을 찾기 힘들 정도다. 가을이 되면 따뜻한 햇살과 선선한 바람을 즐기느라 정원에 단풍이 찾아왔다는 것도 놓치게 된 다. 이때는 비가 잦아지는데 비가 그친 뒤 정원에서 풍기는 풀내음의 포근함은 도시가 아닌 곳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마지막으로 겨울은 이 정원의 역사가 가장 잘 드러나는 계절이다. 다른 계절에는 키 작은 식물과 날씨를 즐기느라 바빴다면, 겨울에는 정원의 나무들이 얼마나 높은지 체감하게 된다. 1869년 수에즈 운하 개통을 기념해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에게 선물로 줬던 레바논 삼나무부터 이제 거의 4m에 달하는 아틀라스 삼나무까지. 키가 큰 나무들에 눈이 쌓이면 그만한 절경이 없다. 비록 다양한 시설물은 없는 잔잔한 정원이지만 수목과 사람으로 채워지는 풍성함이 매력이다. 그 잔잔한 즐거움을 놓칠 수 없어서 나는 매번 왼쪽으로 가는 길을 선택하나 보다. 

 

parkydu 10.JPG
정원을 나가기 전 보이는 새로운 왕궁 건물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도 이 건물에 있다.

 


윤다운은 조경, 도시, 교통을 융합하는 시각으로 우리 주변의 환경을 연구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와 독일 라이프니츠대학교 조경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오스트리아 빈공과대학 도시계획학과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동 대학 토목환경공학 교통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민 참여, 보행과 어린이를 동반한 공원 방문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