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더관리
폴더명
스크랩
월간 환경과조경

월간 환경과조경
라이나 바랑재
LINA Barangjae
  • 오피스박김
  • 환경과조경 2025년 10월호

[크기변환]lina 14(2페이지 풀).jpg

 

라이나생명에서 전화가 왔다. 보험에 관한 전화는 아니었고 조경 설계를 의뢰하기 위해서였다. 공사 예산이 규모에 비해서 터무니없이 작아 응답을 미루다가 결국 만나기로 했다. 클라이언트는 지역의 한옥 호텔을 개조해 복합문화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다. 우리가 쓴 『얼터너티브 네이처』(2016)를 클라이언트가 밑줄을 그어가며 읽었다고 하니, 비현실적인 공사비를 일단 받아들이기로 했다. 조경 설계는 적은 비용으로 큰 효과를 만들어내는 마법이 될 수 있으니까.

 

김정윤 대표와 현장을 방문하는 날 비가 내렸다. 예전에 지역 호텔로 쓰던 한옥 단지에 비가 내리자, 배수 문제가 그대로 드러났다. 물론 한옥 처마 끝에서 내려오는 낙수는 낭만적이었으나, 일반 흙 포장의 특성상 결국 지면과 지반을 훼손시킬 것이고 목구조에 의존하는 한옥에 이롭지 못할 것이다. 현장에서 돌아와 설계의 우선순위를 정했다. 설계는 위계이자 우선순위를 정하는 일이니, 한정된 예산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시급한 것은 바로 배수 설계였다. 이러한 기능에 대한 확인은 오피스박김의 전형적인 설계 과정 중 하나다. 또한 자연의 기능을 점검하고, 이를 조경 설계로 구현하는 것은 ‘당연한’ 아름다움을 유발한다. 단순히 기능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기능이 아름다움 혹은 형태를 지탱하는 지지대가 되는 것이다. 조경 설계의 엔지니어링적 속성과 미학적 자유로움이라는 복합적 관계는 기능과 형태라는 고답적 논리를 무척이나 흥미롭게 만든다.

 

[크기변환]lina 3.jpg
바랑재는 지역의 한옥 호텔을 리모델링한 복합문화공간이다. 배수 체계 개선을 통해 엔지어니링과 미학을 결합한 새로운 공간으로 거듭났다.

 

 

[크기변환]lina 4(업로드용).jpg

 

방화수와 수로

예산이 한정되어 있으니 단 하나의 요소로 승부를 보아야 한다. 몇 번의 논의 끝에 우리는 아름다운 배수로에 필요한 주요 프로그램을 집중시켰다. 배수로이자 물이 흐르는 수로를 단지의 중심으로 안내하는 동선 체계와 일치시켰다. 수로가 모이는 중심부에는 지하 물탱크를 만들어 빗물을 저장하고, 화재 시 용수로 사용할 수 있는 얇은 깊이의 연못 광장을 제안했다. 한옥의 방화수이자 연못 광장은 물이 필요 없는 계절에는 햇빛과 주변 경관을 즐길 수 있는 단지 내 쉼터가 된다.

 

[크기변환]lina 11.jpg
낙차를 그대로 활용한 수로를 통해 물소리가 공간에서 음향처럼 들리게 했다.


lina 10-1(1페이지 풀).jpg
화강암과 스테인리스로 조합한 U자형 모듈을 모든 경사를 드러내는 틈의 재료로 사용했다

 

모듈

수로는 대상지의 경사를 따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고, 낙차가 있는 곳에서는 물소리가 울리는 음향의 공간으로 변모한다. 미묘한 대상지의 경사에 적응하고 공사비를 줄이자면, 수로 형태를 이루는 기본 모듈이 필요했다. 화강암과 스테인리스로 조합된 U자형 모듈을 모든 경사를 드러내는 틈의 재료로 사용했다. 수로의 모듈화로 공사비를 최적화시킨 뒤, 한옥 사이 공간의 사생활을 보장하고 단지와 조화를 이루며 길게 이어지는 경관을 만들 수 있는 식재를 고민했다. 고민 끝에 한옥의 갈색 목재와 어울리며 갈변 과정이 두드러지는 그라스 소재로 선정했다.

 

그림자, 돌, 철

한옥의 마당은 굵은 마사토로 재포장하되, 배수의 기능이 배가되도록 하부에 투수층을 조성했다. 이는 서울공예박물관(2021년 10월호) 설계에서 활용한 방안인데, 이 프로젝트에서는 더 굵은 왕마사토를 포설해 음영으로 인한 마당 위 한옥의 그림자가 더 두드러지도록 했다. 기존의 한옥 단지는 각이 두드러진 강원도형 산벽 쌓기로 단이 구성됐다. 우리는 지역적인 기법으로 축대를 쌓되, 보다 둥근 돌을 선택하여 공간을 구성했다. 직선적이고 큰 돌은 큰 공간을 구획하고, 단이 낮지만 보행이 많은 곳은 둥근 돌을 쌓아 공간의 성격을 달리 했다. 또한 진입 계단 역시 기존 석재를 재활용하여 재정비하되, 쉼과 전환의 공간은 둥근 돌을 배치해 공간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했다. 보행 난간은 돌의 거친 질감과 대비되는 얇은 난간을 반 U자형으로 만들어 수로의 모듈과 일치된 정체성을 지니게 하되, 최대한 가늘게 해 그라스와 거친 돌 그리고 얇은 철재가 서로 대비되도록 했다.


lina 16.jpg
진입 계단의 반 U자형 보행 난간은 수로 모듈의 정체성을 계승하며 주변 그라스와 거친 돌과의 대비를 보여준다.

 

최소한의 개입

물소리와 그라스의 흔들림 그리고 흙 그림자와 얇은 철물의 도입은 최소한의 공간 개입으로 장소의 현상학적 경험을 최대한 이끌려고 하는 시도였다. 물론 넉넉 하지 않은 공사비의 조건이라는 한계가 있었지만, 강원도 숲 빈터의 적막함을 쉼과 여가의 요소로 최대한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감각의 물화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는 최소한의 간섭으로 커다란 사회적 효과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조경 설계의 마법과 같은 수월성이다.  

  

글 박윤진 오피스박김 대표

    김정윤 오피스박김 대표, 하버드 GSD 교수

조경 설계 및 감리 오피스박김

건축 설계 황두진건축사사무소

조경 시공 태극조경

발주 라이나전성기재단

위치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 용산리 649-1 일대

규모 9,797㎡

완공 2024

사진 김종오


오피스박김(PARKKIM)은 2004년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에서 박윤진, 김정윤이 설립한 조경설계사무소다. 2006년 서울로 이전했고, 2018년 김정윤 대표의 하버드GSD 교수 임용을 계기로 보스턴 지사를 개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