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풍경에 대하여
엘리자베스 폰 아르님이 햇살 같은 유머와 긍정으로 삶을 끌어안았다면, 이번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오늘의 주인공은 오스트리아 작가 마를렌 하우스호퍼(Marlen Haushofer)(1920~1970). 소설 『벽(Die Wand)』은 마를렌이 남긴 가장 충격적이고도 아름다운 작품이며 오스트리아가 낳은 전후 문학의 최고 명작으로도 꼽힌다. 한국에서도 진작에 번역되어 나왔다. 간결한 문장으로 묘사한 투명한 유리 벽 뒤의 세계는 기존의 창조 신화를 뒤집으며, 인간의 존재와 문명 자체에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나는 이 책을 아주 오래전 괴테 문화원에서 독일어 어학 자격시험을 준비하던 시절 처음 만났고―필독 도서였다―, 이후 여러 번 다시 읽으며 ‘최애 도서’라 부를 만큼 마음 깊이 품게 되었다. 읽을 때마다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어 오스트리아 알프스의 숲을 헤매게 되고 질문은 한층 깊어진다.
마를렌 하우스호퍼의 세계는 어둡고 깊은 우물 같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가 세 살 때 큰 물통에 갇히는 경험을 한다. 그때 물통 안에서 둥근 하늘을 바라보았던 일이 잊지 못할 충격으로 남았던 듯하다. 『벽』 버금가는 대표작, 『하늘의 끝은 어디일까?』(각주 1)라는 자전적 소설은 바로 그 물통에서 시작된다. 세 살짜리 마를렌이 경험한 물통은 깊고 어두웠을 것이다. 사고로 빠진 것이 아니라 추수하는 데 방해된다고 어머니가 그 속에 가두었다. 마를렌과 어머니와의 복잡한 관계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딸에게 평생 퉁명스러웠다. 작가로 등단한 뒤에도 인정하지 않았다. 여자는 당신처럼 희생하며 억척스럽게 살아야 한다는 확고부동한 신념이 있었는데 공상이 심한 천방지축의 마를렌을 인정할 수 없었다. 마를렌은 그런 어머니에 대한 구애를 평생 멈추지 않았다. 물통 사건이 있고 40년 후 『벽』이라는 소설이 탄생한다.
『벽』
이야기는 오스트리아 알프스 골짜기에서 시작된다. 줄거리는 다소 충격적이다. 주인공 여성은 ― 끝까지 이름 없이 그저 “나”로 남는다― 어느 5월 초 사냥을 즐기는 사촌 언니 부부와 알프스의 산장에 며칠 휴가를 보내러 간다. 도착한 날 오후, 언니 부부는 마을에 볼 일이 있어 내려간다. 이튿날 아침 “나”는 산장에서 홀로 깨어난다. 언니 부부는 마을로 내려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알고 보니 밤사이 보이지 않는 투명한 벽이 생겨 마을로 가는 길이 가로막혔다. 벽 너머의 세계는 시간이 멈춘 듯 정지해 있고, 모든 생명이 돌처럼 굳어버렸다. 생명이 있는 것은 오직 내가 있는 벽의 이쪽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벽의 이쪽에도 사람은 아무도 남지 않았다. 원래 인적이 드문 곳이긴 하지만 이웃 산장에도 사람의 흔적이 없고 오로지 나 혼자만 살아남은 듯하다. 돌아갈 길이 완전히 막혀버리자, “나”는 산장에서 고립된 삶을 시작한다. 처음에는 절망과 공포에 사로잡히지만, 차츰 생존의 리듬을 찾는다. 완전히 혼자는 아니어서 충직한 사냥개 룩스가 있고 곧 울부짖는 임신한 젖소를 만나 구해준다. 이 젖소는 생명줄이다. 그리고 어느 비 오는 날 홀딱 젖은 고양이 한 마리가 찾아 든다. 이들 동물이 가족이자 동반자가 된다. 젖소는 송아지를 낳고 고양이도 새끼를 낳아 식구도 늘어난다. 나에게 의지하는 동물들을 살려야 한다는 책임감에 자살 충동도 이겨낸다. 나무를 베어 장작을 패고, 감자와 콩을 심고, 우유를 짜고, 풀밭의 꼴을 베어 소를 먹이고, 개울에서 송어를 잡고 이따금 사냥을 하며 살아간다. 새벽 안개가 골짜기에서 피어오르면 일어나고 저녁 노을이 산봉우리를 붉게 물들일 때까지 일하는 삶. 문명의 편의를 잃은 대신 자연의 질서에 맞춘 절대적 자유를 누리게 된다. 그 절대적 자유의 대가는 인류의 전멸이었기에 이 소설은 종말론적 문학의 범주로 분류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평화는 오래가지 않는다. 2년 뒤, 불현듯 낯선 남자가 나타나 송아지와 반려견 룩스를 무자비하게 죽인다. “나”는 사냥총으로 그를 쏴 죽인다. 이제 벽 안에는 “나”와 늙은 암소와 고양이만 남는다. 하지만 “나”도 암소도 고양이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그 순간 세상에는 인간과 가축이 사라지고 오직 야생 동물과 식물만 남을 것이다. 유리 벽 너머의 세상은 이미 식물이 뒤덮어 문명의 흔적이 사라졌다.
* 환경과조경 450호(2025년 10월호) 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Marlen Haushofer, Himmel, der Nirgendwo Endet , Sigbert Mohn Verlag, 1966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 『신의 정원, 나의 천국』, 『고정희의 바로크 정원 이야기』, 『고정희의 독일 정원 이야기』, 『100장면으로 읽는 조경의 역사』를 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