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삶과 기억은 예술이 될 수 있을까. 도시의 기억을 예술가의 사유와 해석을 바탕으로 한 추상화로 재구축하면 어떨까. 나아가 개인의 정체성에서 비롯된 상처와 고통의 기억을 애써 외면하지 않고 그대로 마주하며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 마크 브래드포드(Mark Bradford)는 도시의 삶과 기억을 토대로 사회적 추상화(Social Abstraction)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흑인, 퀴어, 도시 하층민이란 정체성과 공동체 안에서 겪었던 경험을 작업의 핵심으로 삼아 사회적 메시지를 시각화하는 대형 추상 회화를 주로 선보인다. 전단지, 포스터 등 도시 부산물을 재료로 활용해 인종, 계층, 젠더, 도시 공간의 복잡한 문제들을 풀어낸다. 사회적 추상화의 대표 주자로서 동시대 미술계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새로운 장르가 탄생할 수 있었던 건 유년 시절 경험 덕분이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미용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다양한 공동체 삶의 이야기를 접했고, 이러한 환경은 그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었다. 뒤늦게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깨닫고 30대에 캘리포니아 예술대학교 석사 과정을 마쳤다. 이후 2017년 베니스 비엔날레 미국관 전시를 포함해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번 전시는 브래드포드의 국내 첫 개인전으로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2026년 1월 25일까지 열린다. 미용실 재료에서 영감을 얻은 대형 회화, 걸으면서 감상할 수 있는 설치 작업, 영상 등 그가 추구하는 사회적 추상화의 세계를 살펴볼 수 있는 다양한 작품을 선보인다. 지난 20여 년간 회화의 형식적 한계를 확장하고 추상화의 사회적 잠재력을 탐구했던 그의 작업을 통해 예술과 사회의 관계성을 조명한다.
걷는 회화
브래드포드는 실험적 시도를 통해 추상 회화 문법의 새로운 지평을 넓혔다. 작가에게 미술관은 단순히 보는 공간이 아니라 캔버스가 된다. 보는 것에 그치는 회화 관람 방식에서 벗어나 ‘걷기’라는 일상적 행위를 통해 작품을 입체적으로 감각할 수 있는 방식을 제안한다. 특히 전시의 시작을 알리는 ‘떠오르다’는 대형 설치 작품으로 전단지, 광고 포스터, 신문지 등 도시 부산물을 긴 띠 형태로 이어 붙여 약 600㎡에 달하는 전시장 바닥 전체를 덮었다. 관람객은 공간 위를 걸으며 서걱이는 소리와 함께 온몸으로 작품을 감각할 수 있다.
밟고 지나가는 행위로 인해 변화된 표면 자체도 작품의 일부가 된다. 관람객은 회화를 그저 바라보며 감상하는 수동적인 감상자가 아닌 작품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능동적인 참여자가 된다. 이는 회화 감상 방식을 재정의하는 시도로 감각과 공간을 통한 새로운 접근법이다. 이러한 방식은 파편화된 도시 속 일상의 흔적을 있는 그대로 체험하고, 몸의 움직임을 통해 간접적으로 도시의 서사를 느낄 기회를 제공한다.
* 환경과조경 450호(2025년 10월호) 수록본 일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