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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환경과조경

월간 환경과조경
[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형태는 무엇을 따르는가?
  • 환경과조경 2025년 10월호

조경학과 신입생에게 주어진 전공필수 과목 목록에는 기초 미술 수업이 있었다. 화통을 메고 등교해 강의실에서 선 긋기, 명암 넣기를 연습할 때면 가끔 “이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엔 미술관 다녀오기, 독후감 쓰기, 그림일기 그리기 같은 과제를 했다. 관찰력을 키우고, 견문을 넓히고, 영감을 얻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었다. 서평이나 보고서는 교수님이 홀로 평가했고, 결과물이 ‘그래픽’으로 완성되는 과제 평가는 공개 발표 형식으로 진행됐다. 그야말로 그림을 잘 그리는 친구들이 주목받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곧 상황은 뒤바뀐다. 보기에만 좋고 논리가 빈약한 도면과 모형은 교수님에게 사정없이 매질을 당하게 된다. “그래서 네 광장은, 공원의 동선은, 바닥의 패턴은, 공간 구획의 모양은, 앉음벽과 분수의 생김새는 왜 그 형태여야 하는데?”

 

자연히 도면의 완성도나 아름다운 조감에 집착하는 일은 줄어들었다. 다들 빈 종이를 앞에 두고 낙서를 하거나 생각에 골몰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선을 그리기 시작하는 건 대부분 일요일 새벽, 월요일 오후의 설계스튜디오 수업을 몇 시간 앞둔 시점이었다. 다들 논리를 짜는 데 정신이 없었다. 역으로 설계안을 이미 그려놓은 뒤, 어떤 설명을 붙여야 하는지 고민하는 사람도 있었다. 밤샘 작업에도 혹독한 비판을 피하지 못한 날에는 구시렁거리기도 했다. 그냥 말만 번지르르하면 통과되는 거 아니냐고.

 

처음에는 ‘조건’을 극복하고 ‘문제점’을 해결해야 하는 설계가 어렵다고 느꼈다. 하지만 3학년 1학기, 단지설계 대상지를 보고 나서는 생각이 달라졌다. 산으로 둘러싸인 백지의 땅이 주어지니 막막해졌다. ‘무엇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야 하는지’를 스스로 설정할 능력이 없었던 것일 테다. 유일한 힌트는 동 간 간격뿐이었다. 판상형과 타워형 건물을 적절한 간격으로 배치하고 길을 내고 소공원 등의 위치를 정하고 나니 더 까마득했다. 돌이켜보니, 그 막연함은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루이스 설리번의 논리에 지배받고 있던 내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어떤 기능을 부여해도 괜찮다는 조건이 주어지니, 어떤 형태도 그릴 수 없었다.

 

동기 중에 조각을 전공하며 복수전공으로 조경을 선택한 언니가 있었다. 손재주가 특히 좋았는데, 하루는 그가 스테인드글라스를 연상시키는 푸른빛의 바닥 패턴이 가득한 도면을 선보였다. 파도처럼 일렁이는 모양이 회화처럼 아름다웠다. 언니는 설계 논리 대신 “한 번 정도는 마음껏 아름다운 모양을 바닥에 흐르게 하고 싶었다”고 이야기했다. 숨김 없는 그 솔직한 속내에 남몰래 침을 꼴깍 삼켰었다. 교수님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학생다운 파격적인 패턴이 인상적이고, 충분히 아름다워 설득력이 있다는 말이었다. 나도 수긍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더 어려워졌다. 조경 설계에서 도대체 형태는 무엇일까.

 

한때 조경설계사무소에 다니고 싶었고, 그래서 설계에 대해 꽤 많이 생각했었다. 나름대로 무엇이든 사람들을 사로잡을 수 있다면 좋은 설계라는 결론에 다다랐지만,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빼앗는 형태가 무엇에서 기인하는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그래서 올해 대한민국 환경조경대전이 던진 “형태는 무엇을 따르는가?”라는 도전적 질문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경의 형태적 가능성을 탐구하라는 지시와 같은 이 질문은 기능뿐만 아니라 조경의 형태를 결정할 수 있는 “다양한 가치”가 무엇인지 묻는 것과 같았으니까.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즐거울 수밖에 없었다.

 

작품집 제작과 시상식, 전시 준비까지 정신없이 휘몰아친 일정을 다 마친 뒤에야 작품의 면면을 뜯어볼 여유가 생겼다. 주제 때문일까 패널의 큰 영역을 차지한 조감도와 마스터플랜만큼이나 설계 과정을 담은 다이어그램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시상식이 끝난 뒤 진행된 작품설명회에서 대상 수상 팀이 전했던 이야기도 떠올렸다. “소일 인 모션(Soil in Motion) 프로젝트의 핵심 과제는 정화의 흐름을 공간의 언어로 전환하는 것”이었으며 “주제에 대한 답으로 형태는 기능뿐 아니라 회복과 기억의 과정을 따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는 그 말. 마감이 끝나고 조금 한가해지면, 지난 3월 한국조경학회가 열었던 주제 설명회 포럼 영상을 다시 한번 시청해야겠다. 내년 환경조경대전의 주제가 궁금해진다.